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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07/06 17:20:02
Name 눈시BBver.2
Subject [일반] 폭풍 - 6. 누구를 위해 싸웠는데

지하철로 하니 실제 지도와 혼동될 것 같네요. 서울 지리 잘 모르신데 더 자세히 알고 싶으시면 이걸 참조하세요 '-')/

의정부의 함락으로 창동으로 철수하던 병력 중 그나마 온전한 것은 25연대였습니다. 이형근을 채찍으로 때리면서 해임했던 채병덕은 연대장 김병휘 중령에게 직접 백석천(의정부 남쪽 1km)에서 방어하라는 명령을 받고 부대를 배치했죠. 대충 진지공사가 됐을 때인 17:00, 의정부에서 서울로 가는 3번 도로를 따라 남진하던 적의 전차에 집중사격을 가합니다. 뭐... 결과는 아시겠죠? -_-;

이 전차들이 백석교로 다가오자 매복해 있던 로켓포병이 타격을 가했지만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4대의 전차가 백석교를 그냥 넘어갑니다. 이 때 분노한 화기소대 분대장이 사수의 포를 뺏고는 다섯 번째 전차를 공격, 그 전차는 궤도에 맞아 퍼져 버렸죠. 환호도 잠시, 여섯 번째 전차가 다가와 그들 모두를 공격합니다. 이들이 흘린 피로 뒤를 따르던 10여대의 전차들은 다리를 건너지 못 하고 의정부로 돌아갔죠.

+) 차라리 이 다리를 그냥 파괴해 버리지 하는 생각도 드는군요. 이제껏 다리 파괴가 제대로 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이후에는 제대로 되긴 하는데 그 다리가........................

이미 다리를 건넌 4대는 방어를 뚫고 계속 남진, 이들은 16연대 혼성 2대대와 마주치게 됩니다. 이 부대의 지휘관은 보병학교 교육 중에 있던 김헌 중령, 그는 창동에 도착 후 "16연대 집결지"라는 표지판을 세우고 300여명의 병력을 수습하던 중이었습니다. 상관도 부하도 서로를 몰랐던 상황, 그는 급히 3개 중대를 편성한 후 맞서 싸웁니다. 중화기가 얼마나 있었을진 모르겠지만 이런 상황을 보면 있었을 것 같지 않고 있더라도 수량이나 훈련이 극히 부족했을 겁니다. 맨몸으로 싸웠다고 해야겠죠. 박격포 정도는 있었던 모양입니다만.

불과 30분, 대대장 김헌부터 5, 6중대장이 부상당하고 부대대장 김영철 소령과 7중대장 노병렬 중위는 전사합니다. 이쯤 되면 휘하 병력들의 피해가 어땠을지는 짐작할 필요도 없겠죠. 그리고 이들의 강력한 방어에 전차 4대는 후퇴하게 됩니다. 후속 전차도 없는 상황에서 무리하려지 않으려 한 것이겠죠. 그리고 이들이 벌어준 시간 하나하나가 후방에 급히 방어를 준비하고 있던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됐습니다.

... 뭐 의미는 없었지만요. 이후 이들은 27일 새벽 북한군의 주력이 몰려오자 지연전을 펼치며 철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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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이 의정부에 들어오기 전, 국군의 주력은 포천과 동두천 방면에 있었기에 의정부 동쪽은 완전히 공백 상태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 곳으로 적이 우회하면 의정부의 후방을 끊을 수 있고 서울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었죠. 채병덕은 여기에 급히 경찰 1개 대대를 국군에 편입하고 육사 생도대대를 보냅니다.


육사 교장 이준식 준장은 착잡했지만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이건 잘 했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차라리 전방의 국군을 조금 빼더라도 생도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아껴야 되는 존재니까요. 채병덕은 이걸 잘 했다고 판단한 것 같고 (어쨌든 병력을 더 쥐어짰으니) 그 휘하도 불만이 있었을진 몰라도 반대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반대했다고 증언한 이가 있는데 알고보니 자기가 출근하기도 전의 일이었죠. -_-;

1기생 263명과 2기생 334명, 총 597명이 여기 동원됩니다. 나름대로 부대를 편성했고, 1기생은 소대장부터 사수를, 2기생은 소총수 및 탄약수로 편성됩니다. 이들이 출발한 건 25일 16:00, 이들은 계속 나아가다 포천이 떨어지고 국군도 후퇴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서 방어하기로 합니다. 아직 경찰대대도 오지 않았던 상황이었죠. 다음 날 06:00에 전투경찰대 300여명이 도착합니다. 이들 역시 급히 출동해서 실탄은 많아야 15발, 중화기는 없었죠. 거기다 이들이 총을 들었다 한들 군사 지식은 없는 거나 다름없었습니다. 거기다 작업 도구가 부실하다고 진지 구축까지 제대로 안 하고 있었죠. 반면 생도대대는 FM으로 교육받은 만큼 주진지, 예비진지, 보조진지까지 구축하고 사계 청소와 위장도 철저히 했으며, 지뢰도 매설합니다. 이 차이는 컸죠.

북한군이 이 지역에 신경쓰게 된 건 의정부를 점령한 후였습니다. 이후 한 개 연대 병력을 우회시켰고 16:00에 경찰대대와 먼저 만나게 됐죠. 경찰대대는 10분도 버티지 못 하고 후퇴, 그대로 밀고 내려옵니다만, 그래도 고지에 진지를 잘 짠 생도대대는 이를 잘 막아냅니다. 하지만 곧 122mm야포부터 온갖 대포를 끌고 와 공격한데다 양쪽으로 포위를 좁혀 왔죠.

18:00부터 곳곳에서 육박전까지 벌어집니다. 곳곳에서 총검으로 찌르고 찔리는 격전 끝에 겨우 막아낼 수 있었죠. 다행히 곧바로 철수 명령이 내려집니다. 19:00부였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잘 싸웠다 해도 훈련이 부족했고, 후퇴는 그 어느때보다 더 큰 피해가 나오며 북한군은 계속 공격했습니다. 생도대대는 큰 피해를 입었고, 후퇴 과정에서 분산됐다가 겨우 태릉의 육사로 돌아올 수 있었죠. 이것이 내촌, 혹은 부평리 전투입니다.


노선도로 하니 서울에서 먼 쪽은 지형을 설명할 수 없네요. 서울 동쪽 47번 도로로 내려왔다가 퇴계원에서 경춘선 타고...가 아니라 태릉이 그냥 서쪽입니다.

이렇게 의정부가 뚫린 후에도 전면, 측면으로 들어오는 공격을 부족한 병력과 화력으로 막고 있었습니다. 단 1분 1초라도 더 벌기 위해 목숨을 내던지는 상황이었죠. 문제는 이들이 무엇을 위해 시간을 버는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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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함락 후인 17:00, 급히 "의정부지구전투사령부"가 만들어지고 유재흥은 2, 7사단의 패잔병을 재편해 창동에서 북한군을 맞이합니다. 그에게 증원된 건 5사단, 원래 이들은 1사단에 증원될 예정이었지만 의정부로 돌려집니다. 15대대 2대대와 20연대 1대대는 미아리로, 가평에 출동했다가 복귀한 8연대 중 1개 대대를 뽑아 청량리 북쪽을 점령해 창동 방어선의 후방을 보강합니다. 도로 등 적이 들어올 만한 곳에 방어선을 몇 겹으로 까는 종심 방어였습니다.

+) 전쟁의 양상이 기동전이 되면서 전 병력을 얇고 길게 펴는 것보다는 이렇게 적이 들어올 곳들에 몇 중의 방어선을 쌓는 종심 방어가 중요해졌고, 공격의 방법 역시 이 종심을 어떻게 뚫느냐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제까지의 전투도 그렇고 이 점 잘 기억해야 되요 '-'

유재흥에겐 나름 많은 병력이 주어졌지만 그가 이들을 파악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유선통신망은 마비, 무선도 제대로 되지 않아서 전령을 이용해야 했죠. 그는 다른 연대와 연락되는대로 연대장을 부르게 했지만 27일 04:00까지 모인 지휘관은 1, 5연대장 뿐이었습니다. 그나마 08:00에 5개의 연대가 파악됐지만 말만 연대일 뿐 이들을 다 합쳐도 실 병력은 1개 연대(2600명 가량)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동안 재편성된 9연대와 생도대대는 태릉 근처에서 진지를 만들어 퇴계원 쪽에서 오는 적을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중화기는 없었고, 다행히 포병학교장 대리 김계원 중령이 105mm 곡사포 6문을 들고 와 주었죠.

백석천 저지선은 04:00에 무너지고 30분 후 적 전차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를 어떻게 할까 고심하고 있던 차에 05:00에 채병덕이 옵니다. 그는 이렇게 명령했죠.

"창동선에서 적을 저지, 격파하고 공세로 이전하라"

말은 잘 합니다. -_-; 유재흥은 위치가 파악된 각 부대에 명령을 내리고 방어를 준비합니다. 또한 창동-미아리에 이르는 다리들을 폭파할 준비를 하게 했죠. 그가 방어에 주력한 주요 도로는 의정부에서 창동과 우이동으로 내려오는 도로였습니다. 여기가 뚫리고 미아리가 뚫리면 바로 서울 시내였죠.

문제는 서로 다른 부대들을 마구 묶었기에 따를 수밖에 없는 지휘의 혼선, 이건 안 그래도 제대로 안 된 연락 때문에 더 큰 효과를 낳게 됩니다. 그리고 일선부대가 필요로 하는 탄약 보급과 급식 문제였죠. 채병덕 등 육본에서 이걸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했지만, 이건 마지막까지 해결되지 않습니다.

일선의 부대가 이런 상황이었습니다. 이건 여기에 증원됐던 부대도 마찬가지였죠. 북한이 한 일주일쯤 기다려주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었어요. 채병덕은 이런 상황에서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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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흥은 27일 새벽 25연대 낙오병을 주축으로 만든 정찰대를 보냅니다. 하지만 날도 어둡고 비도 조금씩 내리던 상황에서 정찰대는 적이 집결하고 있던 성황당초등학교로 들어갔고, 공격을 받고 분산됩니다 (...) 그리고 이들이 복귀하기도 전에 백석천 저지선이 돌파됐죠. 이 때 병사들이 판 참호는 하반신이 겨우 들어갈 정도였고 대전차포는 5문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리 총을 쏴 봐도 전차에 손상이 갈 리가 없었고 공포 속에서 병사들은 얼마 있지도 않은 실탄을 다 써 버립니다. 포탄도 한 시간이 안 돼서 바닥나 버렸구요. 남은 건 분산 철수 뿐이었습니다.

11:00, 유재흥 사령관은 미아리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문제는 혼란 속에 연락장교들이 이를 각 부대에 전파하지 못 했고, 낙오자를 통제하던 헌병들마저 흩어지면서 전 부대가 그냥 쪼개져 버렸다는 것이죠.



다음 목표는 미아리, 지금은 미아동이죠. 현 돈암동과 길음동 사이에 있는 미아리고개가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다행히도 여기에는 국군 5사단 20연대 2개 대대와 수경사 8연대 1개 대대가 배치돼 있었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다행이었던 것은 북한군이 시간을 계속 끌고 있었다는 점이었구요. 이들은 창동 방어선을 공격할 때 각 부대가 길을 헤매면서 공세 시간이 늦어진 상태였고, 미아리로 갈 때도 길을 잘못 드는 등 문제가 많았습니다. 각 사단의 포병들이 길 하나에 모여 가다 서다를 반복했고, 본대와의 연락도 끊어지게 되었죠. 이게 정말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결국 본격적인 공세는 한참 후에 시작됩니다.

여기서 국군은 두 개로 나뉩니다. 의정부사의 유재흥은 미아리고개 오른쪽을, 5사단장 겸 미아리지구전투사령관에 임명된 이응준 소장은 왼쪽을 방어하기로 한 것이었죠.



당시 국군에서 제일 나이가 많았던 이응준, 사위의 삽질을 좀 책임져줬으면 좋겠네요. 북한군이 시간을 끈 덕에 16:00가 되면서 방어선을 제대로 짤 수 있게 됐지만 여전히 병력은 3000여 정도였습니다. 거기에 전차공포증에 빠지고 탄약도 부족한데다 먹지도 쉬지도 못 한 병사들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건 적었죠.

17:00에 적의 선봉이 방어선에 다가옵니다. 하지만 20연대 1대대가 집중사격을 가하자 전차 1대를 버리고 도주했죠. 이들은 밤에 다시 들어오는데 (이제까지 야간에 공격 안 와서 대비가 허술해졌다 합니다 ㅡ.ㅡ) 나타난 전차만 40대, 안 되겠다 싶어 미리 심어둔 폭탄으로 다리를 파괴하려고 했지만 구멍만 났다고 합니다. 다행히 3번째 전차가 다리를 지나자 무너져 내렸고, 이 틈을 타 집중 공격합니다. 이 때 국군은 진상을 알게 되죠.


할루씨네이션이었습니다. (...)

40대의 전차 중 진짜는 단 5대, 나머지는 트럭을 전차로 위장한 것이었죠.

이 20연대가 5사단 휘하인 걸 생각하면 그래도 이응준의 경험의 힘이 아닌가 싶긴 한데... 곧 방심해 버립니다. 쏟아지는 비 속에서 이들이 모르는 사이에 북한군 전차가 후속 보병 및 기마병과 함께 강을 건너 버렸거든요. 딱 이 때 미군 참전 소식으로 마음을 푹 놓아버렸고, 시민들도 그랬는지 기뻐하면서 이들에게 음식을 가져다 주기도 했습니다. 결국 다음 날 아침에야 북한군이 서울에 진입한 것을 알게 됐죠. 미리 서울에 잠입해 있던 간첩들은 곳곳에서 예광탄을 쏘며 이들을 서울 시내로 유도합니다.

한편 이들을 통과한 북한군 전차는 1연대의 방어진지를 통과, 길음교로 향합니다. 이 때 1연대와 15연대 2대대가 육탄공격을 감행했지만 역시 단 한 대의 전차도 파괴되지 않았고, 전차들은 유유히 미아리고개를 넘어 돈암동으로 진입하니 28일 01:00였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후퇴, 아니 도주 뿐이었죠. 모든 부대는 분산돼 한강 이남으로 향합니다. 그나마 편제를 유지한 이들도 있긴 했고, 끝까지 남아 시가전을 펼치기도 했죠. 유명한 것으로 16연대 3대대 부대대장 최민섭 대위가 있습니다. 그는 낙오병으로 구성된 1개 소대로 북한군 1개 소대를 격파하고 이후 봉일천 등에서 게릴라전을 펴다가 서울 수복 후 복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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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회기동(제가 살아요~) 143고지(경희대 뒷산)에 있던 8연대는 아직 적을 만나지 못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철수 중인 피난민을 보호하면서 북한군의 편의대(간첩)을 색출해 내기도 했죠. 이 때는 이미 서울 곳곳에 적이 들어오고 있었던 상황, 이들에게 탄약을 보급해 줄 병력도 청량리에서 편의대에게 습결당해 1명만 살아서 이를 보고했습니다. 이들은 그런 상황에서도 적을 세 차례나 막아내는데 성공했고 03:00에는 중랑교도 파괴하면서 버텨냈지만 더 이상 방어할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이후 큰 피해 없이 수원으로 갑니다.

한편 여전히 태릉 방면을 맡고 있던 9연대와 생도대대 역시 28일까지 적을 만나지 못 했다가 서울 시내에 적이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후퇴합니다. 명령은 없었지만 이준식은 더 이상 버틸 이유가 없다고 여겼죠. 문제는 이것의 전달 속도도 늦어서 많은 추가 피해가 났습니다. 이렇게 전투에 투입된 1기생 262명 중 70명이, 2기생 227명 중 82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돼 버렸죠.

이들 중에는 길을 잘못 들어 청량리로 갔다가 전사한 이도 있고 나라가 망했다 생각해 집에 간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 이후 한강 남쪽에 집결한 이들에게 다시 전투 명령이 내려지지만 김홍일은 철수명령을 내려 후방으로 가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후퇴하지 않고 육사를 사수하겠다고 나선 이들도 있었는데, 이런 생도 10여명과 기타 사병 20여명이 호랑이부대를 편성해 불암산에서 유격전을 벌입니다. 하지만 서울 수복 때까지 버티지 못 하고 전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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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사단은 서울 서쪽에서 맞서는 중이었고 3사단 22연대는 여기에 증원됐습니다 (나머지 23연대는 울진으로 갔구요). 7사단은 전멸하고 다시 병력 모아도 계속 전멸했고 -_-; 2사단은 채병덕+이형근의 콤비플레이로 역시 무너졌죠. 그나마 멀쩡했던 5사단과 기타 병력들도 상황은 비교적 나았지만 역시 패배했거나 고립된 상태였습니다.

적이 서울로 들어가면서 이들은 어떻게든 후방으로 철수하려고 했습니다. 이들의 철수를 받아주고 이들을 재편성해서 다시 북한과 맞서야 했죠. 하지만 이들이 돌아갈 길은 없었습니다.


한강교가 폭파됐으니까요.

서울에서의 이야기, 다음 편에서 끝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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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에서 해야겠지만 참을 수가 없네요.

지금까지 전 글이나 댓글에서 정부(+ 옛 독재정권)를 옹호하는 말도 많이 해 왔습니다. 그러면서 일단 정부가 하는 일을 무조건 나쁘게만 보지 말라는 얘기를 많이 했죠. 근데 이건 어쩔 수 없다고 봐요.

이 나라의 시작 부분에, 이 나라가 가장 위험했을 때 정부는 국민에게 아주 큰 거짓말을 했으니까요.

시작부터 이런 상황에서 정부를 "믿으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전투 얘기 많이 했으니 다음 편에서는 정부와 대통령이라는 양반이 대체 뭘 어떻게 했는지를 좀 밀도 깊게 써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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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Yellow
12/07/06 17:35
수정 아이콘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12/07/06 17:52
수정 아이콘
7월 29일까지 백선엽 장군 자서전 읽고 서평 내야 하는데 눈시님 글과 함께 보니까 참 이해가 잘 되네요 헤헤
감사합니다 :)
눈시BBver.2
12/07/06 20:22
수정 아이콘
외전으로 백선엽 장군 총평 계획하고 있는데 29일이라... 일주일 전까진 써 볼게요 :)
아마 "군과 나" 쪽을 읽으실 것 같은데 92년에 나와서 구하기 어렵긴 하지만 "실록 지리산"도 읽어보세요 '-')
lupin188
12/07/06 17:54
수정 아이콘
정말 잘 보았습니다.
12/07/06 19:03
수정 아이콘
메카닉 내려오는데 자꾸 마린을 돌격시키네요 -_-;;;
Je ne sais quoi
12/07/06 19:45
수정 아이콘
이승만의 가장 큰 죄악중 하나가 나오는군요.
rechtmacht
12/07/06 20:17
수정 아이콘
다음편은 진짜 읽다가 혈압 올라서 기절할듯;
스타나라
12/07/06 22:05
수정 아이콘
이번편 내용이 예정보다 늘어났군요 흐흐 글보고 이명.....아니 이승만 욕을 한바가지 해줄라 했더니...그건 다음글로 패스합니다^^;
5방향견제
12/07/07 01:01
수정 아이콘
다음편에 진정한 멘붕이 오겠군요. 항상 잘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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