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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07/12 05:38:08
Name 눈시BBver.2
Subject [일반] 폭풍 - 8. 춘천-홍천 전투
+) 병력 규모라든가 작전이라든가 인물 소개라든가 다르게 말 하는 경우가 있을 건데, 그럴 경우 새로 나온 쪽으로 봐 주세요. -.-a 이 정도의 퇴고는 힘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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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의 전략은 기동전으로 국군을 포위 섬멸하는 것, 이런 포위 전술이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늘 쓰던 것이었지만, 자동차가 등장한 현대전에는 더욱 중요한 것이었죠. 북한군은 일개 중대부터 연대, 사단을 넘어 초기의 폭풍 작전에서 대규모 포위를 노립니다.

그 중 가장 크고 강력한 포위 전술이 바로 춘천-홍천 일대에서 시행됩니다. 이 포위는 연대, 사단 정도의 비교적 전술적인 포위가 아니라 국군 전체를 쌈싸먹는 전략적인 포위였죠.

여기에 투입된 북한군은 2사단과 12사단, 여기에 12사단에는 독립전차연대가 증원됐고 기동전을 위해 모터사이클(오토바이요 -.-) 연대가 포함됐습니다. 이 모터사이클 연대는 모터사이클 4개 대대(대대당 3개 중대, 각 중대는 오토바이 45대와 병력 135명으로 구성)와 장갑차 1개 대대, 대전차포 1개 대대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서부전선에서도 투입되긴 했어요 '-'); 그 뒤를 이어 15사단이 예비대로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병력만으로 1제대가 2만 3천 가량 됐고, 증원될 병력을 합하면 3만 8천 가량 됐습니다.

이들의 목표는 서울의 후방을 끊는 것이었습니다.

조건이 그리 좋은 건 아니었습니다. 동고서저의 지형에서 서울을 우회한다 해도 산과 강들이 막혀 있었죠. 그나마 춘천에서 가평, 이천, 수원으로 향하는 도로가 있었지만 서울로 직접 향하는 도로에 비해서는 지형적인 장애물이 많았습니다. 이를 위해서 북한군 최고 정예로 꼽혔던 2사단이 투입됩니다. 이들은 전쟁 직전 검열에서 최고의 사단으로 꼽혔죠. 폭풍에 어울리는 숫자는 역시 2인가 봅니다.

2사단은 하루만에 춘천을 점령한 후 도로를 타고 가평, 이천, 수원으로 이동하는 것이 목표였고 여기에 모터사이클 연대로 무조건 달릴 수 있게 합니다. 12사단은 그 동안 홍천, 원주까지 진격해 국군을 양분, 2사단의 진격을 엄호하는 것이었고 최종 목표는 소백산맥까지 달려 경상도로 후퇴하는 길도 막아버리는 것이었습니다.

+) 여기서 애매하고 말도 참 다른 게 5사단과 15사단인데 15사단은 예비대인데 5사단은 확실치가 않네요. 일부만 8사단 쪽으로 보내고 나머지는 대기하고 있었던 건지 다 8사단으로 보내고 이후 다시 서쪽으로 온 건지... 확실해지는대로 다시 쓰죠 뭐.

뭐 그렇게 쉬운 퀘스트는 아니었지만 전쟁이란 게 원래 그렇죠. 어차피 그들의 앞을 막는 건 한 개 사단 뿐, 이들이 아무리 어려워도 국군은 서울에 더 신경을 쓸 것이었습니다. 실제 이들에게 증원됐던 건 한 개 연대 뿐이었던데다 가는 길에 돌아와서 이들을 도울 이는 아무도 없었고, 아예 육본과 연락 자체가 끊겨서 장창국이 직접 와서 이들에게 철수 명령을 내려야 했습니다. 이들이 뚫렸다면 정말 육본에서는 상상도 못 한 채 후방이 끊겼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최악의 경우 기차 타고 도망가던 이승만이 기차 째로 붙잡힐 수도 있는 상황이었죠.

+) ... 뭔가 감정적으로는 그게 낫다는 마음도 들지만 안 됩니다 ㅠ

이에 맞서는 건 단 한 개 사단, 그것도 서울 쪽에서의 지원은 꿈도 못 꾸는 상황이었고 옆의 8사단처럼 후퇴할 경우 서울로 가는 길을 열어주는 상황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야 이런 자세한 건 몰랐겠지만, 이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전쟁의 방향이, 현재에 이어지는 역사가 바뀌는 것이었지요. 그들은 나름대로 싸웠고 그 결과는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입니다. 이들이 어땠을까요?

북한군의 예상과는 급이 달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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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전선의 전황이 매우 불리하다. 당신은 강원도지구 계엄사령관으로 인적 및 물적에 관한 모든 동원권한이 있으니 최선을 다하라" - 김백일이 김종오에게



6사단은 적의 주공이 될 화천-춘천 축선에 7연대를, 조공으로 예상되는 양구-홍천 축선에 2연대를 두고 후방인 원주에 19연대를 예비대로 둡니다. 이들이 맡은 범위는 84km, 역시 한 개 사단이 담당하기엔 너무 넓은 범위를 맡았지만 이들은 뭔가 달랐습니다. 우선 각종 산과 소양강 등으로 이루어진 지형을 가지고 있었고 두번째는 이들의 훈련도 및 준비태세였죠.


뭐 그렇다고 이들이 넘사벽으로 차이났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사단장 김종오 대령부터가 6월 10일에야 사단에 온 상태였으니까요. 거기다 2연대의 경우 6월 20일이 사단에 예속돼 홍천에 배치됐고 19연대도 5월 1일에야 원주로 와서 교육 훈련 중이었습니다. 3개 연대 중 2개가 준비가 부족했죠.


7연대장 임부택 중령

반면 7연대의 경우 13개월이나 이 지역에 있으면서 지형에 익숙했고, 군관민 관계도 좋았습니다. 이걸 발판으로 임부택은 학도호국단과 춘천 시민들의 지원 아래 5월 말까지 강력한 방어 진지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다만 적의 주공이 의정부라는 것을 생각해 이 지역까지 강하게 들어오지는 않을 거라고 판단 (혹은 그럴 여유까지는 없었을지도요) 몇 겹의 종심방어진을 만들진 않았습니다. 그래도 50cm에 달하는 콘크리트 진지와 기타 통나무로 만들어진 유개호, 철조망부터 대인지뢰까지 정말 방어선을 잘 만들어 놓았죠. 이에 비하면 2연대는 통나무로 만든 유개호를 보수하는 정도였습니다.

사단의 병력은 대략 9300명 가량, 하지만 흔히 알려진 것처럼 전쟁을 대비해 이들 모두가 대기하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어쨌든 명령은 명령이니 1/3 가량이 휴가 및 외출 외박 중이었죠. 여기까지는 다른 사단들과 그리 다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세부적으로 가면 정말 달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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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병은 현대전의 신이다." - 스탈린

당시 6사단 소속의 16포병대대 대대장 김성 소령은 정말 악독했습니다. 그는 주야간 가리지 않고 훈련을 계속했고 심지어 대대 군의관까지 이 훈련을 시켰습니다. 여기에 지형을 확실히 숙지해서 적의 주력이 올 만한 곳에 포병을 배치했고, 개전 후 집중 사격으로 큰 피해를 입혔죠. 이 영향은 어마어마했습니다. 당시 대대의 3개 포대장이 모두 교육에 파견돼 자리에 없었음에도 포병대는 전투를 훌륭히 치렀죠. 여기에 기존에 군민간에 사이가 좋았기에 전쟁 후 주민들의 도움으로 무려 5000여발이나 되는 각종 포탄과 기타 탄약들을 옮길 수 있었습니다. 서울 방어선 당시 포탄, 탄약 부족 현상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생각하면 이건 엄청난 것이고, 승전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입니다.

이건 7연대도 마찬가지여서 연대의 장교들은 이미 교육을 마친 상태였습니다. 또한 2연대는 이런 점에서도 많이 부족했지만, 이들 역시 북한군의 공격을 잘 막으면서 교육 갔던 장교들이 복귀, 무사히 전투를 치를 수 있었죠.

마지막으로 북한군의 남침을 확신하다시피 한 게 컸습니다. 여기에서는 운도 따라줬는데, 19일에 7연대로 투항한 북한군 병사가 남침의 징후를 말 해 줬고, 이에 따라 정찰 결과 대규모 공격 징후를 확인했으며 연대장 임부택이 직접 이를 확인하기도 했죠. 때문에 6사단은 외박을 보내더라도 가능한 한 춘천 이상 벗어나지 못 하게 했습니다. 복귀하는 병력들이야 욕 하며 했겠지만 이 덕분에 개전 후 5시간 안에 모든 외출 장병들이 모일 수 있었죠.

기타 개전 후에도 다른 사단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뭐, 시작해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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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악 지형에서 기동을 위해 택해야 할 곳은 당연히 도로였죠. 7연대는 화천과 양구에서 춘천으로 이어지는 도로에 2, 3대대를 배치하고 1대대를 예비로 둡니다. 북한군의 계획대로라면 첫 날에 춘천을 점령해야 했고, 국군은 이걸 어떻게든 막아야 했습니다. 때는 25일 04:00, 1시간에 걸쳐 포격이 시작됐고 아군의 피해가 속출합니다. 이 때 3대대 9중대장이 전사하기도 했죠. 이 소식을 들은 연대장 임부택이 고수 명령을 내렸지만 그대로 버티기는 힘들었습니다. 병력은 무질서하게 철수했고, 그 사이 1대대는 주저항선을 점령합니다. 이 때 병력들의 외출을 허가하긴 했지만 영외 거주 장교들을 부대에 붙잡아 놓아서 지휘가 수월했죠. 한편 맨 왼쪽에 있던 3대대는 따로 후퇴했는데 이건 나중에 서술하겠습니다. 3대대 중 맨 오른쪽에 있던 9대대는 본대와 같이 움직였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됐던 것은 피아 사이에 있던 모진교였습니다. 북한강을 도하할 수 있는 유일한 다리였고 북한에서는 당연히 국군이 폭파할 줄 알고 전차부대를 여기에 투입하지 않았던 것이죠. 반면 국군은 이 다리를 적이 감제하고 있기에 폭파할 수가 없었습니다. 거기다 다리 남쪽 600m 지점에 도하가 가능한 곳이 있어서 폭파해봤자라고 생각했죠. 근데 북한군은 이 사실을 몰랐구요.

이래저래 엉킨 상황은 전황 전체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우선 여기에는 이 다리를 폭파하지 못 했기에 적이 오는 걸 그대로 볼 수밖에 없었고 패전의 원인이 됐습니다. 적은 전차 대신 SU-76 자주포를 앞세우고 모진교를 건넜는데 북한 2군단사령부는 이 소식을 듣고 "파괴되지 않았는가?"라고 반문했다고 합니다. 이 영향은 나중에 다시 적죠.

http://www.army.mil.kr/history/참고/그림/춘3.html

국군은 이렇게 춘천 코 앞까지 쭉 밀립니다. 이제 믿을 것은 소양강 방어선 뿐, 자주포라 하지만 이것도 대전차포가 먹히지 않았습니다. -_-; 적은 이렇게 국군의 방어진지부터 춘천 시내에까지 포격을 하면서 물밀듯이 들어왔죠. 국군은 소양강 북쪽에서 막기 위해서 동쪽의 고지에 급히 병력을 재편하지만 상황은 어려워져 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때, 대전차포중대 2소대장 심일 중위가 육탄 돌격을 시도합니다. 근처의 민가에 숨어 있다가 자주포가 다가오자 공격했고, 2대가 격파됐죠. 여기에 자주포에서 나와 도망가려던 적도 생포, 나머지 자주포 8대는 도주합니다. 이 때가 14시, 적은 저녁이 될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고 그 사이 국군은 재편할 수 있었죠. 거기에 자주포인 걸 몰랐기에 진짜 전차가 격파된 줄 알았고, 덕분에 전차공포증이 사라졌습니다. (...);

적은 야간을 이용해 다시 소양강을 도하하려 합니다. 하지만 이 때 국군은 준비를 완료한 상태였고, 적의 목표인 가래모기는 아군이 설정한 살상지대였습니다. 쉽게 내려다보이는 개활지에서 이들은 어떤 준비도 없이 밀집해서 밀고 내려온 것이었죠. 이 때 포병은 보병과 함께 움직이면서 이들을 공격했습니다. 이렇게 북한군은 다시 물러납니다. 벌판에 남은 것은 수많은 시체 뿐이었고 북한강을 건너려다 빠져 죽은 이들도 많았습니다.

적의 도하 시도는 밤에도 계속됐는데, 이 때 2대대장 김종수 소령은 30명의 특공대를 뽑아 몰래 역도하하여 기습, 수류탄과 총알을 뿌린 후 돌아왔죠. 특공대 중 돌아오지 못 한 이는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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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army.mil.kr/history/참고/그림/춘4.html
클릭하셔요

날이 밝으면서 19연대가 중원됩니다. 이들은 원주에서 기차 타고 청량리를 경유해서 춘천에 도착했는데 이 과정에서 참모학교에 훈련중이던 연대장 민병권 중령을 만났죠. 이들은 7연대에 합류, 방어선은 더욱 튼튼해집니다.

이 때 사단장 김종오 대령의 선택은 역습이었습니다. 그 선봉은 7연대 1대대, 옥산포에 집결했던 적은 아군의 반격에 산산이 흩어집니다. 이후 적이 다시 자주포로 밀고 들어오자 1시간 가량 교전한 후 원래의 진지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적은 여기에도 굴하지 않고 자주포를 앞세워 몇 차례나 계속 공격해 옵니다.

이를 본 김종오는 결단을 내리게 됩니다. 적의 공격은 국지전 수준이 아니었고, 잘 막아내고 있긴 했지만 아군은 너무도 부족했습니다. 적이 공격해오지 않은 곳에 배치된 병력을 따로 빼야 될 것 같긴 한데 뺀 다음에 거기가 뚫리면 또 문제였죠. 여기에 적이 동쪽에도 나타나면서 우두산 등의 고지에 있는 아군이 협공당할 위기에 처합니다. 방어선을 줄여서 병력을 집중할 필요가 생긴 것이죠.

26일 15시를 시작으로 소양강 북쪽에 배치된 병력이 철수합니다. 춘천을 지킨다는 점에 있어서 최후방어선이었죠. 한편 춘천 동북쪽 6km까지 접근한 12사단 병력이 있었는데 이들은 본대와는 물론 춘천 쪽을 맡은 2사단과의 연락도 제대로 되지 않으면서 하루 동안 놀게 됩니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죠.

이 때 적의 공격지 집중되는 소양교를 파괴할 것인가의 문제가 대두됐는데, 이 때 김종오 사단장의 결정이 참 걸작입니다.

"사단의 역습 및 38선 회복을 위하여 아군이 사용해야 하므로 폭파하지 말고 대신 장애물을 증가하여 북한군이 도하하지 못하도록 하라"

패기 봐요 _-)b

뭐 그렇다고 이게 좋은 결정은 아니었습니다. 다리를 끊으면 그만큼 적의 진격이 더 느려질 수 있었으니까요. 문제는 겨우 연락이 됐던 육본에서 17연대가 해주에 갔니 7사단이 동두천을 탈환했니 했던 게 문제였죠. 적의 공세가 강하긴 하지만 전황 자체는 나쁘지 않다고 판단했던 게 문제였습니다. -_-; 그는 6사단이 다른 사단에 뒤져서야 되겠냐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자신의 6사단이 제일 잘 하고 있었습니다.

아무튼 소양교는 폭파 대신 파괴된 프럭 4대를 장애물로 올려놓게 됐죠.

북한군의 다음 공격은 27일 05시, 북한군은 정말 악착같이 포격을 해댑니다. 이미 그들의 계획에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상황, 6사단을 어떻게든 뚫고 가지 않으면 안 됐으니까요.

이 때 김종오는 춘천을 포기한다는 결정을 내립니다. 이미 춘천 시민들의 피난도 어느 정도 이루어진 상황, 행정 쪽에서도 안정적으로 철수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남은 것은 조금이라도 더 버틴 다음에 피해를 최대한 줄이면서 후퇴하는 것이었죠. 그는 동쪽 2연대의 상황을 본 후 이곳이 뚫리면 홍천이 위험하다고 판단, 19연대의 2개 대대를 빼서 후방에 방어선을 만들라고 지시합니다. 춘천 전방의 방어선은 더 약화되게 되겠지만, 그대로 홍천까지 쭉 밀리는 것보단 미리 후방의 방어선을 만들어 두는 게 나았죠. 이것이 지연전이구요.

그렇다면 당시 인제-홍천 지구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가 보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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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연대장 함병선 대령

2연대는 20일에야 이 지역으로 편입된 부대로 7연대와는 달리 준비가 너무 부족했습니다. 그나마 원래 이 지역을 담당한 8연대의 대전차포중대와 헌병대를 남겨서 다행인 수준이었죠. 이걸 생각하면 정말 다행이었던 것이 이 지역에 있던 공비들이 북한군의 총공격 계획을 떠들고 다녔다는 점입니다. (...) 이들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아군의 배치가 자세하게 나온 상황도를 얻어서 더 경계할 수 있었죠. 일단 연대장 함병선 대령은 휴가 외박은 보내지만 만약을 대비해 진지보강작업을 하면서 직할부대를 대기시킵니다.

북한군은 이 지역에 1제대로 12사단, 2제대로 5사단과 모터사이클 연대와 독립전차연대를 투입합니다. 오히려 더 먼 곳에 주공을 투입한 우회의 우회 공격이었죠. 그 이유는 간단한데, 춘천 방면보다 이 쪽으로 도로를 타고 홍천까지 간 다음에 수원으로 가는 게 더 쉬웠거든요.

개전 후, 전방을 맡던 1, 3사단은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무너집니다. 안 그래도 개전 직전에 온데다 방어선 준비도 7연대보다 미흡했는데 사단장의 관심도 7연대에 밀렸죠.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6사단이었습니다. 예비대인 2대대가 급히 출동해 방어선을 급히 만들었고 1대대의 후퇴 병력을 받아들이면서 지원받은 포병으로 맞서기 시작했죠. 여기서도 자주포들로 마구 밀고 들어오다가 매복한 포병에 깨지고 후퇴하는 일이 반복됐습니다. 특공대가 조직돼 전차를 격파하고 전원 귀환하기도 했구요. 한편 3대대는 8사단을 공격한 1 경비여단의 공격을 받고 현리로 철수 중이었죠.

http://www.army.mil.kr/history/참고/그림/춘5.html

하지만 급편한 진지로 막을 수 있는 적이 아니었고, 2연대는 지연전을 펼치며 자은리까지 후퇴합니다. 그나마 밤이 되니 공격해 오지 않았고, 21시에 교육 갔던 장교들이 복귀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죠. 이 때 7연대의 반격에 맞춰서인지 2연대도 역습 계획을 세웁니다. 우측에서 계속 후퇴중이던 3대대는 예비로 남기고 1, 2대대가 역습을 하게 됐죠. 하지만 사정은 그들의 생각과 달랐으니... 26일 아침의 역습으로 조금 올라가긴 했지만 곧 남하하는 적을 맞게 됩니다. 갑작스레 방어로 전환해 백병전으로 겨우 막아내야 했죠. 이 과정에서 후방으로 우회 침투한 적이 대대관측소까지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11:30부터 포격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그 사이로 자주포들이 들어옵니다. 연대장 함병선은 큰 피해를 입은 병력을 급히 주저항선으로 돌려야 했죠.

이 때 연대 및 각 대대에 후퇴 명령이 떨어집니다. 1대대장은 거부했지만 명령은 명령이었고, 의지가 아무리 강한들 중과부적이었죠. 급히 자은리의 연대본부로 들어간 그는 한계리선을 점령해야 된다는 의견을 폅니다. 연대 작전주임도 뜻을 같이 했죠. 함병선은 이를 받아들여 북창-한계리선으로 철수한다는 결정을 내립니다. 현재 있는 자은리까지 감제가 가능해 적이 오는 걸 볼 수 있으며 작은말고개부터 한계리까지 S자로 도로가 형성돼 차량의 통행이 어려웠기 때문이었죠. 이 곳이 뚫리면 홍천이었습니다.

3일째인 27일 07시, 사단장 김종오는 이 곳을 방문했고, 19연대와 포병 주력을 이 곳으로 옮기겠다는 결심을 굳힙니다.

전체적인 상황을 보면 맞는 결정입니다. 7연대는 소양강을 방패로 잘 막고 있었지만 2연대는 이미 큰 피해를 입었으며 적이 대규모로 들어오면 또 뚫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죠. 2연대가 뚫리면 춘천의 후방이 막히는 것이었구요. 어차피 전황은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고 춘천을 포기할 생각도 한 상황이었습니다. 상황이 어려운 것에 병력을 증원하는 것과 동시에 후퇴 과정에서 배후가 차단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죠.

하지만 이건 정말 묘한 결과를 낳았으니, 북한군이 12사단에서 2개 연대를 빼서 2사단에 증원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전차 1개 중대도 포함돼 있었죠. 이들은 왔던 길을 돌아가서 다시 춘천으로 내려갑니다. (...); 다른 병력도 많긴 했지만 이 쪽의 주력이 빠진 것이었죠. 반면 국군은 춘천 쪽의 병력 중 1/3을 빼서 이 쪽으로 돌린 것이었구요. =_=; 잘 공격하던 쪽에서 병력을 빼서 안 되는 쪽으로 밀어넣을 거라는 생각을 하긴 어려웠겠지만; 뭔가 참 묘합니다.

이런 가운데서 27일부터 북한군의 총공격이 시작됩니다. 이미 이들은 늦을대로 늦은 상황이었고, 어떤 피해를 입더라도 뚫으려는 시도였죠.

지금까지도 충분히 장난이 아니었지만, 앞으로 다가올 공격도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적의 공격이 가장 거세졌던 무렵, 김종오는 서부전선이 무너지고 육본도 시흥으로 옮긴다는 말을 듣게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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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만으로 10편 나오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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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 ne sais quoi
12/07/12 06:25
수정 아이콘
왠지 오랜만에 올리신 느낌이... 요즘 x명 하신다는 댓글을 어디서 본 거 같기도 하고... ^^;
농담이구요, 잘 읽었습니다~
soleil79
12/07/12 06:38
수정 아이콘
느므느므느므 기둘렸습니다...

문X 좀 고만하시고...^^ 농담입니다.

항상 잘보고 있습니다.

그래도 무작정 밀린게 아니였군요.
사티레브
12/07/12 09:49
수정 아이콘
눈시비비 xx 좀 자제하면 벌써 6.25 완결!
(서지훈박태민 패러디..)

오늘도 잘읽었어요
솔직히 이정도로 자세히는 6.25를 몰랐던듯 '-')
군인동거인
12/07/12 10:42
수정 아이콘
잘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12/07/12 12:27
수정 아이콘
잘 읽고 있습니다 ~ !!
그런데 중간 중간 링크가 들어가지질 않네요.
아마 육군 홈페이지 같은데..
그리메
12/07/12 13:35
수정 아이콘
나름 국지전에서도 승리 전적이 있었군요. 서울이 3일만에 함락되는걸 보고 낙동강 버티기 전까진 제대로 저항조차 못한 줄 알았거든요. 그나저나 저 장대한 전쟁이 모두 개전 후 2~3일 이내라니...1차대전 당시 3키로 가기위해 50만명씩 죽어나가던 서부전선하고 대조적이군요.
12/07/12 14:11
수정 아이콘
하아.. 이 글을 계속 보려면 시드마이어를 암살해야 하나......
잘 보고 있습니다. ^^
blue wave
12/07/12 15:00
수정 아이콘
회사 생활의 낙입니다. 정말 잘 보고 있습니다. 왠지 100편도 넘을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만, 어떤 전쟁책보다 자세하군요.
12/07/12 15:06
수정 아이콘
닥치고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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