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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07/13 06:14:23
Name 눈시BBver.2
Subject [일반] 폭풍 - 9. 적의 날개를 꺾다
다다익선이라는 말이 있죠. 아무리 유리한 상황이라 하더라도 자기가 이끄는 병력이 줄어드는 걸 좋아할 지휘관은 없습니다. 물론 이 경우 7연대장 임부택이 19연대까지 지휘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19연대가 빠진 타격은 꽤 컸죠. 2개 대대가 빠졌으니 수적으로 1/3, 7연대는 초기에 큰 피해를 입은 상태였으니 최소 절반은 빠졌다고 봐도 될 테니까요.

하지만 임부택은 별 항명 없이 19연대에서 배속받은 2개 중대와 연대본부의 행정요원들까지 긁어모아서 방어선을 짭니다. 그 동안 19연대는 연대장 민병권 중령의 명령 하에 질서정연하게 홍천초등학교에 집합합니다.

27일 아침부터 시작된 북한군의 총공격, 이제 7연대가 할 일은 최대한 시간을 버는 것이었습니다.

북한군은 인해전술로 정말 물밀듯이 밀려왔습니다. 이를 계속 격퇴했지만 중과부적이었고, 적이 소양강을 건넌 것은 10:00, 소양강으로 방어선을 줄였다 해도 적은 너무나도 많았고, 아직 19연대가 빠진 공백을 메꿀 정도의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연대의 전멸을 각오하고 끝까지 막아내느냐, 춘천을 포기하고 후퇴하느냐, 대답은 다른 곳에서 들려 왔습니다.

"서부전선은 완전히 무너졌다. 육군본부는 시흥으로 철수한다. 제 6사단장은 판단에 따라 중앙성을 중심으로 한 중부전선에서 지연전을 전개하라"

참모부장 김백일의 명령이었습니다. 이후 또 다시 육본과의 연락은 끊깁니다.

+) 이런 걸 보면 서울 함락은 육본에서도 기정사실로 본 것 같은데, 최소한 이 때라도 서울을 확실히 포기한다고 결정을 했다면 28일 새벽부터 있었던 참극은 최소한으로 막을 수 있었을 텐데요.

7연대의 방어선이 뚫리는 것과 사단장의 후퇴 명령이 내려진 것은 큰 차이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어차피 더 버티기는 힘들었습니다. 북한군은 춘천 동북쪽을 뚫고 진격해오고 있었고 (2사단과 연락이 안 돼 하룻동안 쉬었던 그 병력입니다) 그대로 있으면 측면에서 포위될 뿐이었죠. 여기에 큰 피해를 입고 후방 지원만 하던 자주포도 소양교에 널려 있던 적의 시체를 밟고 이미 소양강 남쪽으로 들어온 상황이었습니다. 여기에 따로 도하한 적 보병이 춘천 시가지에 들어온 상황이었죠.

그래도 임부택 연대장은 끝까지 싸우고 싶었던 모양입니다만, 17시까지 시가지도 계속 점령됩니다. 이런 가운데서 임부택은 김종오 사단장에게 산으로 후퇴해 반격을 노려야 된다고 주장했지만, 김종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어차피 산으로 후퇴한들 게릴라전 정도밖에 할 수 없는 것이었고, 지금 중요한 건 편제를 지켜 후방으로 후퇴하는 것이었습니다. 반격을 위해서, 김종오가 늘 강조하던 것이었습니다. 임부택은 명령에 따릅니다.

+) 군대의 힘은 조직력이거든요 -_-a 1:1로 아무리 잘 싸운들 군인이라는 것은 단체 대 단체로 싸우는 거니까요.

27일 18시, 춘천은 이렇게 적에게 떨어집니다.

그 동안 사단의 좌측에서 공격당한 7연대 3대대는 중대 하나를 잃고 가평 쪽으로 밀리고 있었습니다. 이들을 위해 수경사의 8연대가 증원됐지만, 참 죽어라 버티다가 8연대와 합류하려고 할 때 8연대가 서울로 돌아가 버립니다. (...); 그래도 그들을 공격한 적이 많진 않았지만 춘천이 함락된 이후에는 달랐죠. 적의 증원에 따라 이들은 밀려났고, 28일 14시에 가평이 점령됩니다. 육본에서는 이들에게 철수를 지시, 이들은 한강 남쪽으로 돌아서 6사단 본대와 합류했죠. 적은 29일 20시에는 한강 북안에 도착해 도하를 시도합니다.

가평으로 우회해 서울을 노리는 것까진 성공했지만, 보시다시피 이미 서울이 점령된 뒤였죠. -_-; 거기다 한강을 우회해야 되는 상황에서 가평으로의 진출은 서울을 포위한다는 효과는 있지만 국군 전체를 쌈싸먹는 것까지 바랄 수는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6사단을 뚫고 홍천을 점령하는 것, 그 길로 횡성-원주-이천-수원에 이르는 대장정을 해야 했습니다. 이미 늦을대로 늦어버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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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army.mil.kr/history/참고/그림/춘9.html

7연대가 후퇴한 곳은 원창고개 일대, 적은 근처까지 와서 진지를 편 후 28일부터 공격을 계속합니다. 이 때 딱히 정찰 없이 종대로 진격했다고 합니다 -_-; 이들은 전면과 우회 공격으로 7연대를 포위하려고 했으며 10시부터 3시간에 걸쳐 4~5차례의 공격을 막아냈지만, 여기까지가 한계였죠. 연대장 임부택은 적의 공격이 멈춘 틈을 타 병력을 후방으로 돌려 원창고개로 후퇴합니다.

딱 이 무렵 육본에서 장창국이 파견됐고, 6사단과 8사단의 후퇴 및 지연전으로 방침이 정해지게 됩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병력을 최대한 살리면서 적의 진격을 최대한 저지하는,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참 어려운 퀘스트였죠. 그래도 이렇게 또 하루가 지나갑니다.

29일에는 좀 웃긴 일이 벌어지는데 11시에 1개 대대규모의 적이 백기를 들고 온 것이었죠. 국군은 이게 진짜 투항인 줄 알고 환영했는데 온 것은 쏟아지는 총알 뿐, 적이 너무 가까이 와서 백병전으로 겨우 몰아내야 했습니다. -_-;

이게 좀 커서 다시 후퇴를 해야 했죠. 목표는 홍천 남쪽에 흐르는 화양강, 이 곳이 7연대의 다음 방어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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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army.mil.kr/history/참고/그림/춘10.html

한편, 2연대가 후퇴한 한계리에서도 북한군의 공격이 재개됩니다. 이들도 한시가 급한 상태였죠.

28일 새벽, 마침 날도 어두운 상황에서 짙은 안개가 낍니다. 이를 본 2연대장 함부택은 역습을 준비하죠. 때는 05:30이었습니다. 이들은 앞서 출발한 수색대의 유도를 받아 적이 모여 있던 복골을 몰래 포위, 기습합니다. 갑작스런 공격에 북한군은 많은 피해를 입었고, 반격하려고 하니 국군은 이미 철수한 상황이었죠.

오죽 열을 받았는지 북한군은 쏠 수 있는 모든 대포를 쏘면서 융단폭격을 해 옵니다. 이후 사이드카로 정찰을 쑥 한 후 바로 자주포를 들이밀었죠.


SU-76 자주포

때는 09:20, 연대장은 다가오는 자주포에 맞서 대전차포를 운용하려고 했는데 박자가 어긋나서 이게 좀 늦어 버립니다. 소중한 기회가 날아갈 뻔한 상황이었고, 자주포는 그러거나 말거나 유유히 들어오고 있었죠. 이 때 그들은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는 국군의 시체를 보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국군이 수습하지 못 하고 있는 상황으로 보였죠. 그냥 지나쳐 갑니다.

아군의 대전차포가 불을 뿜었지만 자주포는 파괴되지 않았고, 오히려 반격을 받아 1번포가 파괴됩니다. 다행히 2번포가 계속 쏴서 선두의 자주포가 잠깐 멈췄죠.

바로 이 때였습니다.

시체가 일어났죠.

땅에 쓰러져 있던 국군은 19연대 3대대의 육탄 특공대원 11명, 이들은 은폐할 곳이 없어 시체로 위장하고 있었습니다. 적의 자주포는 이들을 그냥 지나쳐 갔고, 적이 아군의 포격에 신경 쓰고 있을 때 행동을 개시합니다.

19연대장 민병권 중령은 대전차 특공에 대해 이렇게 교육했습니다.

- 해치가 열려 있을 경우 : 수류탄과 화염병을 그 속에 투입
- 해치가 닫혀 있을 경우 : 81mm 박격포탄을 궤도 밑에 밀어 넣어 파괴
- 박격포탄이 불발일 경우 : 연막으로 시계를 차장하여 해치의 개방을 강요
- 전부 실패했을 경우: 화염병을 엔진실 상판 덮개 위에 투척


이게 제대로 통한 것이죠. 아군의 포격에 당황한 적은 해치를 열고 상황을 파악하려 했고, 바로 그 때 조달진 일병이 수류탄 2발을 던집니다. 선두 전차가 무력화 됐고 그 틈을 타 연막탄을 뿌렸죠. 해치를 열면 특공대의 공격을 당할 것이고, 닫고 도망치자니 지형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 이 때 박격포탄은 신관을 작동시키는 법을 몰라 못 썼다고 합니다 (...)

결국 적은 모두 해치를 열고 급히 도망갔죠. 특공대는 이들이 나오는대로 쏘았고, 40여명의 적을 사살합니다. 그리고 자주포 10대 중 4대를 파괴, 6대를 노획하게 됐구요. 특공대는 전원 무사히 귀환합니다.


노획한 자주포 앞에서 인증샷

이것이 바로 말고개 전투의 육탄 11용사입니다.

자주포를 10대나 잃은 상황에서 적은 갑작스런 상황 변화를 이기지 못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적이 들어온 것은 22:30, 꽤나 늦은 시점이었죠. 하지만 열 받은만큼 공격도 강력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전방을 맡던 2대대장이 왼팔에 관통상을 입고 후송되는 상황까지 이르렀죠. 여기에 우회한 적도 나타나면서 전투는 절정으로 치닫습니다. 그러고도 결국 적을 다시 몰아내니 이렇게 또 하루를 버틴 것이죠.

29일, 어제 한 번 큰 효과를 본 국군은 다시 새벽을 이용한 역습을 하려 했지만 적의 공격은 더욱 강력해져 있었습니다. 이 아침의 공격도 겨우 막아내기는 했지만 여기까지였죠. 여기다 적이 또 우회 포위를 노리고 있엇고, 그들의 규모와 공격 시기를 가늠할 수 없었습니다.

7연대와 비슷한 시각, 2연대와 19연대 역시 홍천 남쪽으로 철수하게 됩니다. 이 때 철수하면서도 적이 계속 따라붙어서 큰 피해를 입게 됐죠.

이렇게 6사단이 홍천까지 포기하게 되면서 춘천-홍천 전투는 모두 끝이 납니다. 적이 홍천을 점령한 것은 6월 30일 18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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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춘천에는 "춘천대첩 기념 평화 공원"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중공군으로 참전한 조선족 분이 여기 방문한 사진이 있는데 참 애잔하더군요.

국군에 있어서 이 때의 상황은 다른 전선처럼 병력과 화력에 밀려 쭉 후퇴하는 양상이었지만, 북한군에 있어서는 경악 그 자체였습니다. 이것으로 북한군의 모든 계획에 차질이 생겨 버렸거든요. 북한군은 맨 위부터 군단사령부까지 진격을 독촉했고, 일선에서는 어떻게든 밀어붙이려 했지만 안 됐죠.

가장 컸던 것은 역시 지형과 준비의 힘이었습니다. 아군의 포병은 북한군에 비해 보잘 것 없었지만 지형을 미리 숙지했고 적이 공격해 올 만한 곳에 화력을 집중합니다. 후방에서 논 게 아니라 보병과 같이 활동하면서 싸우고 후퇴한 것이었죠. 여기에 포탄도 충분했고, 군의관까지 훈련을 시킬 정도라서 숙련도도 좋았습니다. 이것이 참 컸죠.

이후 춘천을 점령한 북한군은 포병대대장 김성 소령의 하숙집 주인을 반동 혐의로 체포합니다. 그 이유는 김성이 그 집에서 살았다는 것이었죠. -_-; 겨우 도망갔는데 북한군이 "그 놈 때문에 1개 연대가 전멸당했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합니다.

북한군 2사단은 이 전투로 전 병력의 40%를 잃었습니다. 이후 이들은 가평-서울 동쪽으로 이동했지만 원래의 계획과는 달리 서울을 점령한 주력 병력과 함께 한강을 건너야 했죠. 12사단 역시 피해가 적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남한 내에서 병력을 다시 뽑아서 가야 했고, 그러고도 큰 피해를 입었죠. 중부전선에서의 작전은 이들의 예비대였던 5사단과 15사단이 맡게 됐는데, 어차피 이들이 만난 상대는 또 6사단이었습니다. (...)

북한군은 이 전투 과정에서 자신들의 단점을 제대로 보여줍니다. 지형이 안 좋은데도 밀어붙이기만 반복했죠. 근데 이게 또 제대로 밀어붙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대체 얘네한테 왔다는 독립전차연대는 어디서 뭘 했는지 모르겠어요. -_-; 당시 국군이 전차와 자주포를 잘 구분하지 못 해서 격파한 것이 무엇인지는 혼동이 많이 됩니다. 일단은 국방부의 한국전쟁사를 따라 자주포라 했지만 저기에 전차가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네요.

"당시 2사단은 소양강 도하에 대한 준비도 능력도 없는 상태였다. (중략) 38도선 이남에 위치한 소양강에 대해서는 그러한 큰 강이 있는지도 몰라 도상연습조차 제대로 하지 않을 정도로 고문관들의 계획에 따를 뿐이었다." - 7연대장 임부택

국군을 얕봐도 너무 얕봤고, 한 번 막혔으면 다른 길을 찾아봐야 되는데 그냥 닥돌만 계속했죠. 그러고도 그 소중한 전차와 자주포가 아야 할 때마다 돌아갔구요. 피해는 피해대로 봤고 작전은 작전대로 못 했죠. 애초에 이 축선을 초스피드로 뚫어서 국군의 후방을 막는다는 게 말도 안 되는 게 드러났죠. 이런 북한군의 삽질에 대해서는 다음편에 총정리하겠습니다.

"그들은 이미 사단 전투훈련까지 마쳤다고 하는데, 버존포 협동이 엉망이었다. 유리를 얕보고 침입하였지만 애당초 그들은 지형지물을 도외시했고, 전술 따위는 없었다. 우리가 1개 연대로 적의 1개 사단을 막은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으며, 우리는 이길 수 있는 전투를 하였다." - 작전주임 이남호 소령

반면 국군은 충분히 준비가 된 상황이었습니다. 위에서 말 한 포격뿐만이 아니었죠. 다른 부대와 6사단의 특공을 비교해보면 큰 차이가 납니다. 다른 부대의 경우 특공은 말 그대로 자살 공격이었지만 6사단의 경우 육탄 11용사에서 볼 수 있듯 다 무사히 살아 돌아왔죠. 아무리 특공이라도 충분히 준비를 하고 훈련을 한다면 그건 자폭이 아니라 작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를 교육시킨 민병권은 학도지원병 출신, 배웠다면 일본식으로 배웠을 건데 폭탄 들고 뛰어들라고 한 게 아니라 저렇게 치밀한 특공을 계획했다는 게 참 대단한 부분입니다.

이것으로 북한군이 계획한 가장 큰 날개는 꺾였습니다. 이 때문에 2군단장 김광협부터 2사단장 이청송, 12사단장 전우까지 모두 잘립니다. 김일성이 이 전투를 어떻게 여겼는지 잘 알 수 있는 부분이죠. 그래서 이 춘천-홍천 전투는 초기 육군의 유일한 승리, 그것도 "대첩"으로 평가됩니다.

+) 원래 7사단이었는데 이 전투에 대한 문책으로 12사단으로 바뀌었다는 것이 통설인데 많은 이견이 있더군요. 딱히 확정짓진 않겠습니다.

그렇게 빠르게 뚫리지 않았다 하더라도 6사단이 큰 피해를 입었으면 중부지역에서 북한군의 진격은 더 빨라졌을 겁니다. 하지만 6사단은 건재했고, 그 뒤의 공격까지 잘 막아내면서 지연전을 펼칩니다. 그 덕분에 8사단도 무사히 후퇴할 수 있었죠. 이들은 이렇게 북한군에 큰 피해를 주고, 아군의 피해는 최소화 했으며, 가장 많은 시간을 벌었습니다. 이렇게 6사단은 전쟁의 흐름을 결정짓게 됐고, 말 그대로 나라를 구하게 된 것이죠.



이후 6사단은 가장 많은 전공을 세운 부대로 남게 됩니다. 김일성은 한국에는 6사단밖에 없다는 수준으로 평가했고, 특히 7연대에게는 "춘천 바우"라는 참 명예로운-.- 이름을 주었죠.



이상, 나라 구한 전투 춘천-홍천 지구 전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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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은 이제까지 다룬 모든 내용들을 정리하며 국군과 북한군에 대한 평가를 하겠습니다.

아직 전쟁 시작한 지 일주일도 안 됐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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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이없어요
12/07/13 08:47
수정 아이콘
그저 낙동강에서 버티다가 UN군읜 도움으로 역공을 했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애초에 처절하게 버텨준 6사단이 있었기에 모든것이 가능했군요.

아침부터 눈시님 글 보니 기분이 좋습니당 :)
blue wave
12/07/13 09:07
수정 아이콘
동부 전선에서 선전했다는 것만 알았는데, 6사단의 활약이 대단했군요. 다부동 전투의 1사단이 되게 기억에 남았는데 6사단의 활약도 새겨놓겠습니다!
사티레브
12/07/13 09:19
수정 아이콘
와 전국을 바꾼 영웅사단이네요
군인동거인
12/07/13 10:27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12/07/13 11:22
수정 아이콘
개전 초기 6사단이 없었으면 서울포기는 훨씬 빨랐을거고 낙동강 방어선도 없었을거라는 얘기가 많습니다.
서울포기 후에도 낙동강 전선까지 금방 밀린거 생각해보면 6사단의 동부전선 지연전은 신의 한수였죠.
덕분에 후방부대 전열 재정비하고 낙동강 방어선 만드는데도 큰 도움이 됐다는 평가가 많이 나옵니다.
당시 6사단장이었던 김종오는 후일 9사단장으로 부임해 백마고지 전투까지 이끌게 됩니다.
시간 되시면 장진호전투나 현리지구전투도 써주세요. 중공군 에너지업 파워 핫식스~
사악군
12/07/13 13:21
수정 아이콘
눈물나네요.. 나라를 구한 분들께 이런 표현이 적절한지 모르겠습니다만.. 쩝니다!
Replicant
12/07/13 14:42
수정 아이콘
가을독백
12/07/13 17:47
수정 아이콘
6사단 대단했네요. 특히 김종오 사단장의 결단 타이밍이(습격과 후퇴 타이밍이 정말)..
잘 읽었습니다.
드라고나
12/07/13 20:09
수정 아이콘
가장 많은 전공을 가진 6사단, 이라지만 사창리 전투 나오고 금성돌출부 나오면 그냥 흔한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 사단이 되어버리고 말죠.
서린언니
12/07/13 21:15
수정 아이콘
6사단이 딱 3일을 버텼습니다. 이 3일이 나중에 어떻게 바뀔지 기대하면서 ...
Je ne sais quoi
12/07/13 21:49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12/07/14 06:38
수정 아이콘
간만에 댓글 남깁니다. 대단한 6사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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