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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07/16 01:22:24
Name 눈시BBver.2
Subject [일반] 폭풍 - 완. 가장 뜨거웠던 3일
한국전쟁의 시작은 참 드라마틱합니다. 아니 50년 전체가 참으로 드라마틱하죠. 이왕이면 좀 덜 했으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_-;

서울이 함락되기까지의 3일, 철저히 준비가 잘 된 북한이 아무 준비가 없었던 남한을 공격해서 쉽게 쉽게 서울을 먹었고, 그 기세로 낙동강까지 간 것으로 얘기합니다만... 꼭 그런 것은 아니었죠. 서울을 점령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이미 이 때부터 북한의 계획은 완전히 엇나간 상태였습니다. 자기들끼리야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대로 밀어붙혔지만, 그 하나하나가 크게 작용하면서 적화 통일의 가능성은 사라지게 되었죠.


너는_혼자가_아니야.jpg

가장 컸던 것은 역시 미국은 물론 UN군의 참전, 그것도 아주 빨랐습니다.

미 대사 무초의 보고가 들어온 것은 25일 11시 26분, 이어 26일 자정(미국 시간 25일 오전 10시) 백악관 참모회의에 이어 오전 4시에는 유엔 안보리 긴급회의가 열립니다. 여기에 도움을 준 건 유엔 한위, 호주-엘살바도르-프랑스-필리핀-터키-대만 대표로 구성된 이들은 25일 18시까지 긴급회의를 마친 후 유엔 안보리 회의가 열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여기서 "북한의 남침을 유엔 헌장에서 규정하고 있는 평화의 파괴로 규정하고, 전투 행위를 즉시 중지하고 38도선 북쪽으로 병력을 철수할 것을 촉구"하는 결의안이 나옵니다.

한편 미군은 26일 01시부터 한국 거주 미국인들의 안전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해공군을 지원, 이 때 이미 북한의 야크기를 격추하면서 실질적인 교전이 시작됩니다. 27일 11시에는 백악관에서 2차 안보회의가 열렸고 해공군의 정식 참전이 결정됩니다. 마지막으로 지상군 투입을 할 것인가에 대한 결정은 한 사나이에게 맡겨집니다.


더글러스 맥아더, 그는 29일에 한국에 옵니다.


"북한을 침범자로 규정하고 그 격퇴에 응분의 혐조를 한다는 결의안을 7대 1로 채택해 트루먼 대통령의 출병 성명과 아울러 적군이 침범한 지 불과 2일만에 응징의 철퇴는 벽력같이 내려졌다." - 장면

그 동안에도 북한군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고, 28일 오전 5시, 현지 시각 27일 오후 3시, UN은 다시 결의안을 냅니다.

"북한의 무력 공격을 격퇴하고 이 지역에서의 국제평화와 안전을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지원을 한국에 제공할 것을 유엔 회원국에 권고"

이렇게 전쟁은 김일성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곳으로 흘러가 버렸죠.

소련이 이 회의에 불참한 것은 참 의미심장합니다. 여기에 최근에 발견된 스탈린이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에게 보내는 극비 전문 때문에 "소련의 미국 참전 유도설"이 나왔죠. 두 가지 부분에서 이걸 반박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중공의 UN 승인 문제 때문에 소련은 계속 불참하고 있었다는 것이죠. 애초에 소련은 자기 흔적을 최대한 남기지 않으려 했고, 이 역시 그 일부일 뿐입니다. 여기에 그들은 미국이 참전 안 할 거라 생각하고 있었구요. 마찬가지로 미국이 참전하지 않으니 UN에서도 그렇게 심각하게 대응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죠.

둘째로 실제 발견된 문서도 개전 후 두 달이나 지난 상황, 공산권에서도 괜히 남침해서 이게 뭐냐고 하던 상황이었습니다. 스탈린의 말은 다 계획대로라고 하면서 달래는 거라고 봐야죠. 미국이 동아시아에 힘을 쓰고 중국이 직접 나서는 동안 소련은 동유럽에 집중한다, 스탈린이 예언자도 아니고 이런 걸 예상을 넘어서 계획했다고 보기는 무리입니다.

그 외에 미국, UN 뭐 이런 문제는 앞으로 천천히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이것만 얘기하죠. 북한군의 남침은 통일 전쟁이었고 미국이 참전해서 그걸 방해한 것이다는 것이요. 틀린 말은 아닙니다. 미국이 참전하지 않았으면 통일은 됐겠죠. 하지만 그건 "태평양 전쟁이 없었으면 내선 일체가 잘 돼서 한국인들도 잘 살았을 것인데 미국이 그것을 방해했다"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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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대원들을 점검해 보니 병력은 어느덧 5000명 수준으로 늘어 있었다. 전선에서 밀려 흩어지면서도 끝까지 제 부대를 찾아와 합류한 병사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 백선엽

두 번째는 국군이 참 죽어라 싸워준 것이었죠. 반공 교육 때문에 정말 지겹도록 들어온 말이겠지만, 이건 절대 틀린 말이 아닙니다. 병력은 물론 무기가 부족해도, 탄약이 부족해도 언제나 전의만은 최고였습니다. 그렇게 혼란스러운 상황임에도 북한에 투항한 단위부대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물론 전쟁 전의 좌익 숙청, 특히 숙군이 큰 역할을 하긴 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와 비교할 만한 두 사례를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전쟁 전 중국의 국공 내전, 그리고 전후의 베트남 전쟁이죠. 미국은 이들에게 많은 지원을 해 줬지만 이 두 나라는 결국 패배했습니다. 이들이라고 내부의 적들을 무시하고 뒀을까요? 최소한 한국만큼은 두드려 잡았겠죠. 하지만 이들은 패배했습니다.

아무리 막장이었던 나라라도 이들과 비교하는 건 무리라는 것이죠. 월남한 이들처럼 확실히 대한민국을 자기 조국이라 생각했든 그냥 우연히 38선 남쪽에 살아서 한국인이 됐든 다들 정말 열심히 싸웠습니다. 그들의 출신이 어땠든, 그들은 대한민국을 위해 싸웠습니다.

남베트남이 망한 후 지금까지도 우익에서는 이 사례를 잘 써먹고 있습니다. 내부의 적을 경계하자고요. 어쨌든 참고할 만한 사례이긴 합니다만, 아쉽게도 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그 시작부터 이들과 비교를 불허했습니다.

"원래의 작전계획에 따르면 인민군은 내리밀기만 하면 국군이 정신없이 도망가리라고 믿었는데 일대 차질이 생기고 말았다." - 주영복

북한이 한국을 너무 만만하게 보긴 했지만 북한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준 국군, 이것 역시 북한의 계획에서 결정적으로 틀린 부분입니다.

아, 그 때 빨치산 같이 북한을 조국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분명 적지 않았고 남북 신경쓰지 않고 현실에 순응했던 사람들도 많았죠. 후자의 경우 수로 본다면 대다수겠죠. 그런데 그거 가지고 한국 위주로 다루지 말라고 한다면... 어쨌든 독립운동가보다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던 친일파와 일제의 지배에 순응했던 이들 때문에 독립운동가는 그냥 없는 것처럼 취급해도 된다는 거겠죠? 제가 아무리 식근론을 옹호해도 이렇게는 못 하겠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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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북한군 자신의 삽질이 있죠. 일단 기동전이라는데... 진격 속도가 너무 느렸어요. -_-; 간단히 말 해서 임진왜란 때의 일본군보다 느렸습니다. (...)

소련군의 교리를 받아들이기엔 그들 역시 전쟁 경험이 제대로 없는 신생국에 불과했습니다. 소련부터가 독일과 죽어라 싸워 가면서 겨우 얻은 교리였고, 그걸 한국이라는 맵에 적용하는 것도 애초에 어려운 일이었죠.

여기에 북한군에겐 전차가 너무나도 소중했습니다. 비싼 자원 주고 사 온 것이었으니까요. 이런 문제들 때문에 전차들도 진격 속도가 참 느렸고, 한 대 깨지면 도망가기를 반복했습니다. 속도부터가 보병들이 걷는 수준이었으니 말 다 했죠. -_-; 문제는 속도는 이런데 보병들이랑 같이 안 놀고 (보전 협동이라고 하죠) 따로 놀았다는 것, 덕분에 특공에 깨지고 도망가기를 반복했죠. 속도로만 따지면 서울은 길어야 이틀만에 점령돼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어요. 그 외에도 상하 부대간은 물론 각 부대간의 연계도 제대로 되지 않았고 무선은 심심하면 끊겼으며, 길도 제대로 못 찾아서 헤매고 좁은 길에 몰려서 가다 서다를 반복하기 일쑤였습니다.

어찌 보면 전차가 필요없다는 미군의 판단은 옳은 것이었습니다. 길도 부족하고 논 때문에 전차가 움직일 길이 참 좁았으니까요. 대전차포로 전차를 격파한 사례가 없는 것도 아니고, 미 해병대는 실제 57mm로 북한군 전차를 (후면이지만) 깨뜨리기도 했습니다. 이 때문에 훈련만 잘 돼 있었다면 북한군 전차를 막을 수 있었고, 전쟁이 그렇게 커지지 않았다는 주장이 있고, 맞는 말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군수뇌부를 생각하면 또 아닌 것 같기도 하고 -_-;

소련의 교리를 무작정 집어넣다 보니 이에 관련된 문제도 생깁니다. 양쪽의 화합이 잘 안 된 것이죠. 가령 소련군은 한국의 지형을 잘 생각하지 않았고 북한군은 여기에 그대로 따릅니다. 공산국가 특유의 문제인지 그냥 북한군 특유의 문제일지 모르겠습니다만 -_-a 북한군은 전혀 생각도 못 했던 강에 발이 묶이기도 했고, 한 번 막히면 딴 데로 돌아가기라도 해야 되는데 괜히 닥돌만 계속해서 큰 피해를 입기도 했죠. 공격은 그냥 밀집 대형으로 우라~ 뿐이었구요. 미군은 50년 말은 돼야 훈련 및 팔로군 출신들간의 연계가 잘 될 거라고 예상했는데, 그렇게 틀린 건 아니었던 거죠. 북한이 이 허를 찌른 것일 뿐.

그 외에 앞으로 정치적인 문제에 너무 목을 멘 것들도 나옵니다만 그건 그 때 얘기하도록 하죠. 이걸 가장 강조한 것이 바로 김일성, 나름대로 빨치산 출신이긴 하지만 아예 군 경험과 지식이 없는 이승만과 비교해도 그리 나은 모습을 볼 수가 없네요.

이런 북한군의 문제를 보면 서울 방어전에서 국군이 조금만 더 잘 했으면, 그리고 그 이후의 지연전에서 국군과 미군이 좀 더 잘 했으면 일이 더 커지진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뭐 덕분에 아주 드라마틱하게 낙동강까지 밀렸다가 압록강까지 가긴 했고 거기서 또 참 드라마틱한 일이 벌어지죠. 재미는 없어도 되니까 안 그랬으면 참 좋았을텐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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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은 28일 아침 6.25의 첫 학살 사건을 벌입니다. 대표적으로 서울대병원 학살 사건이 있죠. 여기 있던 부상병들과 구분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의료진과 부상병들의 가족, 기타 환자와 그 가족들을 학살한 것이었습니다. 그 정확한 수는 파악되지 않고 일단 서울대병원 사건에서 100명이라고 하고 추모비에는 1000명으로 나와 있죠.

이 때부터 시작되는 인민재판은 역시 참혹했고, 스탈린조차도 뭘 하는 짓이냐고 욕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다만 이게 박헌영 회고록이라서 신빙성은 잘 모르겠군요. 이런 인민 재판 외에도 북한군이 저지른 학살은 결코 적은 편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 이유야 있겠지만, 여기서 꼽을 건 역시 김일성이예요. 늘 말 하는 거지만, 많은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는 단지 악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특히 전쟁에서는요. 그걸 행하기 위한 시간과 능력, 적군과 싸우는데도 부족할 시간에 그런 시간과 능력을 민간인 학살로 돌리는 건 상부죠.


뭐 결국 김일성이죠 뭐

만약 김일성이 모택동 같은 지도자였다면, 나중에 문화대혁명 같은 일을 벌였을진 몰라도 6.25 당시에는 북한군이 한 학살이 많이, 그것도 아주 많이 줄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당장 위의 서울대병원 학살 사건만 해도 북한 출신인 3, 4사단이 아니라 중공군 출신인 6사단이 서울에 들어갔다면 없었을지도 모르죠.

한편, 보도연맹원을 체포하는 것은 25일 당일에 시작됐고, 이들의 학살이 시작된 것은 28~29일입니다. 이유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인천에서는 북한군이 몰려온다는 소식에 경찰이 도망간 틈을 타 보도연맹원이 포함된 좌익이 인천의 행정기관을 접수하고 인공기를 게양했죠. 그 외에도 전국에서 편의대, 말 그대로 편한 옷을 입고 다니는 -.- 간첩들이 대거 등장합니다. 오죽하면 군 수뇌부가 서로를 북한 간첩이라고 욕 할 정도로 혼란 상태였죠. 북한군이 점령된 지역에서는 보도연맹원들이 우선 차출돼 북한군에 들어갔고, 술 한 잔 먹고 수류탄 하나 받고 선봉에서 총알받이로 개돌하는 상황이 쭉 벌어집니다.

이렇게 내부의 적은 분명 존재했고, 곳곳에서 이들로 구성된 패잔병 사냥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런 내부의 적들이 없었던 건 아니라는 거죠. 이에 맞선 국군이나 경찰 패잔병들의 반격도 곳곳에서 있었고, 지금 국군이나 우익에 대한 학살 사건에서 이것이 그냥 피해자로 둔갑한 것도 적지 않을 겁니다. 증언을 무조건 믿을 수는 없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이것이 보도연맹 학살 사건을 비롯한 많은 학살 사건을 정당화 시켜주진 못 합니다. 미리 감옥에 갇혀 있지 않은 이상 주 타겟이 된 것은 국가의 명령에 순응해 체포된 사람들이었습니다. 특히 서울 수복 후 부역자 처벌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은 명령에 따라 서울에 끝까지 남았던 보도연맹원들이었습니다. 진짜 북한에 제대로 협조한 이들이 서울을 수복했을 때까지 남아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이런 "무고한" 사람들을 떠나서 아무리 적이 확실하다 해도 비무장에 북한군이 들어오기 전까지 적대행위를 하지 않은 이들을 "미리" 처형한 것은 명백한 문제입니다. 이게 정당하다면 북한군의 서울대병원 학살 사건은 이보다야 훨씬 정당한 "사살"일 뿐이예요.

자세한 건 상황이 어느 정도 안정된 후 자세히 적겠습니다. 아마 휴전 얘기가 나올 즈음일 것 같네요. 그 전에 학살 사건을 대강이라도 적겠다고 했는데, 그 때 그 때 딱딱 맞춰서 적지는 못 할 것 같네요. 그래도 최대한 얘기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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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바로 지원하고 UN군이 참전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잘 싸운다 한들 이길 수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바로 와 줬습니다.

국군이 정말 열심히 싸우지 않았다면, 한국의 대다수가 김일성의 통치를 받아들였다면 외국에서 아무리 도와준다 한들 중국이나 베트남과 같은 결과가 나왔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일도 없었죠.

세부적으로, 6사단이 북한군에 맞서 그대로 쭉 밀려 버렸다면 늦어도 7월 초에는 수원까지 점령이 완료됐을 겁니다. 이렇게 되면 UN군이 미쳐 오기도 전에 국군은 완전히 소멸했을 것이고 준비도 제대로 안 된 UN군으로 뭘 할 수 없었겠죠. 하지만 그런 일 역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북한군을 막긴 막았다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정말 큰 피해를 입었다면 중부전선은 그대로 뚫릴 것이고, 위와 결과가 그렇게 달라지진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북한군은 서울에서 무려 3일을 머물러야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도하 장비가 없었던 것이죠. 소련에게 도하 장비 5세트를 주문했지만 소련이 준 것은 1세트, 이걸로는 뭘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2군단이 국군의 후방을 잡으면 편하게 국군을 잡으며 천천히 도하해도 될 거라 여겼던 것이죠. 서울 함락 직후부터 도하 노력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대규모 도하는 불가능했죠. 나름 죽어라 재편했지만 북한군이 도하하자마자 밀린 걸 생각하면 이 3일은 정말 결정적이었죠. 모두 6사단의 힘이었습니다.

국군의 훈련과 장비 부족, 정부와 군 수뇌부의 무능 및 부패, 미군의 삽질-_-; 등 상황은 최악 중의 최악으로 흘렀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일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전쟁은 이제 시작이었고, 상황은 북한군과 UN군 중 누가 먼저 부산에 도착할 지로 바뀝니다. 그리고 그 상황 하에서 국군과 바로 투입된 미군이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가 되었죠. 1분 1초, 전투 하나하나가 그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2부는 낙동강 전선까지 가는 길을 쓰겠습니다. 아무래도 거의 알려지지 않은 편이지만, 여기서도 할 얘기가 제법 되죠. 나름 멋진 제목을 짓고 싶은데 적당한 게 없네요. 어느 전투에 더 비중을 둬야 될 지 몰라서 예고를 하진 않겠습니다. 어차피 1부도 6편 계획했는데 10편 됐잖아요 -.-;


"북한의 판단 실수도 있었지만, 아군 입장에서 보면 6·25 전쟁 중 지연전의 개념을 확실하게 세운 기간이었다. 그 주인공은 김홍일 소장이었다. (중략) 김 장군은 국부군에서 별을 두 개까지 달았다. 외국인으로서 그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은 드물다. 그만큼 전쟁 국면을 크게 아우르는 능력을 갖춘 분이었던 것이다. (중략) 그는 덕망과 리더십이 빼어나 따르는 군대 후배들이 많았다. (중략) 김 장군은 중국에서 국부군으로 활동할 때 대륙을 침략한 일본군과 싸운 경험이 풍부했다. 그때는 일본군이 우세한 전력으로 중국 군대를 크게 압도하고 있었다. 국부군은 그에 밀려 후퇴하면서도 시간을 끄는 지연전을 벌였다. 시흥지구 사령관을 맡은 김 장군은 그때의 경험을 발휘했다. 적에게 밀려 뿔뿔이 흩어져 내려오는 병력을 수습하고 이를 재편성해서 전선에 내보내는 일에 총력을 기울였다." - 백선엽

시작은 김홍일 소장의 시흥지구전투사령부입니다. 이제 부서질대로 부서진 국군의 운명은 이 노장에게 맡겨집니다.

==========================

아 그리고... 저 일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글 올리는 게 더 많이 늦어질 것 같네요. 그래도 ^_^)/ 천천히라도 올릴 테니 계속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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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까지
12/07/16 03:05
수정 아이콘
취업 축하드립니다.
정말 천천히 하셔도 좋으니 완결만 지어 주세요.(굽신굽신)
12/07/16 03:08
수정 아이콘
취업 축하드립니다. 글 잘 보았어요.
Callisto
12/07/16 03:23
수정 아이콘
와 축하드림닷
Je ne sais quoi
12/07/16 03:54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축하드려요!
장성백
12/07/16 06:54
수정 아이콘
축하드립니다. 글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다음 글도 기대할게요
강가딘
12/07/16 08:12
수정 아이콘
취업 축하드리고요. 향상 잘 읽고 있습니다.
근데 한편에선 북한군이 서울 점령 후 3일을 머문 이유 중 박헌영이 서울만 점령하면 전국에 있는 지하에서 활동하는 남로당원들이 봉기할 것이다라는 말을 김일성이 믿고 기다려준 것도 한가지 이유였다고 하는데요.
그리고 김일성은 이걸 정전후에 박헌영 등 남로당계 숙청에 잘 써먹기도 합니다만...
하지만 계속된 남한내의 좌익숙청으로 남로당 조직은 당시 거의 와해된 상태였는데
물론 몸은 북한에 있다해도 박헌영이 이러한 남로당 상황을 몰랐을까요?.
눈시BBver.2
12/07/16 08:28
수정 아이콘
^^ 감사합니다
남로당 봉기설 같은 경우 김일성은 (소련 문서에 따르면) 그리 믿지 않은 걸로 보입니다. 뭐 박헌영한테 막 때렸댔나 윽박질렀댔나 하면서 최소한 부산에서라도 일어났으면 일이 수월했을 거니 했다고는 합니다만... 박헌영의 경우 진짜 믿었다기보단 정치적인 것 때문이겠죠. 자기가 믿을 건 그것 뿐이었으니까요. 제발 돼라 제발 돼라 수준? 근데 남한 내의 호응은 김일성이 약간 믿은 것보다 덜한 것 같아요. 주민들이 알려줘서 북한군이 크게 당한 전투도 있고, (북한에 협조 안 해도 최소한 이런 건 없어야 했을 테니까요. 그렇다고 이거 알려준 주민이 피난 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한이 쌓였는지 패배 후 인근 주민들을 학살한 사건도 있으니까요.
아무튼 이거랑 서울이라는 수도를 함락한 것에 대한 기념 이런 것들도 이유로 볼 순 있겠지만 결정적으로 볼 순 없다고 봅니다. 자세한 건 다음 편에서 @_@)//~
blue wave
12/07/16 09:17
수정 아이콘
멋진 글이네요. 6.25 전쟁은 어떤 전쟁보다도 드라마틱하네요. 잘 읽고 있습니다.^^
눈시BBver.2
12/07/16 12:14
수정 아이콘
전개를 보면 참 드라마틱 했다가 51년이 중반쯤 가면 뭔가 지루해지더니 휴전까지 가면 허무해지죠.
드라마틱한 건 그만큼 결정적인 부분이 많고 그만큼 희생이 컸을테니 싫고, 지루하면 사람들이 너무 많은 사람들이 허무하게 가니까 또 싫고.....
전쟁은 짧고 양쪽 다 별 피해 없이 끝나는 게 그나마 최고인 것 같아요 ㅠ 그래도 드라마틱한 부분에서 환호하고 슬퍼하니 기분이 또 미묘합니다
사티레브
12/07/16 09:30
수정 아이콘
오올!!!! 드디어 시작하시네요 :)
그래도
글은
후다닥
올려주시길 ;)

낙동강전선에 이르기까지가 2부라
허허 몇부가 되려나요
12/07/16 09:47
수정 아이콘
취업 축하드립니다. 연재주기가 확 늘어나겠네요....흐흐
담배피는씨
12/07/16 09:53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취업 축하드려요~
드라고나
12/07/16 11:41
수정 아이콘
사진까지 넣어주면서 강조해야 할 사람은 맥아더가 아니라 트루먼 아닐까요.
Tristana
12/07/16 12:46
수정 아이콘
취업 축하드립니다.
잘보고 있습니다~
12/07/16 13:13
수정 아이콘
취업 축하드립니다.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
12/07/16 14:14
수정 아이콘
취업축하드립니다!!
불곰드랍
12/07/17 01:37
수정 아이콘
취업 축하드립니다~~!! 정말 잘 보고 있습니다. 군대에서 단편적으로 백선엽 장군 일대기 같은 만화로만 6.25전쟁사를 접하다가 이 글을 읽으니 눈이 번쩍 뜨이는 느낌이네요 ^^ 앞으로도 좋은글 많이 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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