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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08/12 21:37:56
Name 눈시BBver.2
Subject [일반]  희망과 절망 - 완. 낙동강으로


20일부터 시작된 6사단의 진격, 국군은 급히 호남지역을 방어할 부대를 만들려 했습니다.


일단 전남북으로 나눠 각기 이응준과 신태영 소장에게 맡겨 호남의 장정들을 모병하게 했죠. 헌데 충청도의 상황이 급변하면서 신태영 중심의 서부지역 전투사령부로 바뀝니다. 하지만 이 휘하의 병력이 참 처절할 정도로 없었습니다. 애초에 전라도가 전장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 했던 상황이었으니까요.

민기식의 경우 7사단을 재건하는 임무를 띄었지만 병력은 600으로 도저히 사단이라고 부를 수 없어서 민부대(TF)라고 불렀습니다. 다른 부대 역시 지휘관의 이름을 딴 수백명 정도의 병력밖에 없었고, 급변하는 상황에서 서로간의 연계를 기대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제 막 모병하거나 학도의용군으로 지원한 이들이라서 전투력을 기대할 수도 없었구요. 모병이라고 하지만 기차역에 있는 장정들을 현지입대 시킨 것이었습니다. 이들 중에도 나라 지키겠다고 자원한 이들이 있었겠지만 강압적으로 넣은 이들 역시 많겠죠. 이에 대한 얘기는 차차 하겠지만, 이런 상황에서 전투력을 기대하기는 무리였습니다.

가령 5사단장으로 임명된 이형석 대령은 병력은 있는데 총이 없어서 전체를 3열로 나눈 후 1열이 총 쏘고 2열에게 총을 넘기고 또 총 쏘고 3열에게 넘기는 작전을 구상합니다. 나름 머리를 짜낸 결과였겠지만 전장에서 총은 뭡니까. 1열의 병사들은 적이 오자 총을 애인처럼 소중히 들고 도주합니다. -_-; 이 이형석 장군은 후에 임진왜란에 있어 현재까지도 깨뜨리기 힘든 명작 임진전란사를 씁니다.

각 병력들은 북한군이 오기 전에 알아서 무너지거나 북한군과 대충 싸운 후 무너지거나를 반복합니다. 그나마 소수라도 편제를 갖춘 이들은 급히 낙동강 전선으로 후퇴하거나 전라도에 남아서 게릴라전을 폈죠. 이 과정에서 국군에 적대적인 지역 주민들을 학살하거나 아예 인민군인 것처럼 낚시를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더 얘기하면 또 길어질테니 나중으로 미루겠습니다.

워커 중장은 여기에 깜놀, 증원되는 병력을 급히 "던져버립니다."


"동무들, 적은 와해되었다. 우리에게 부여된 과업은 진주와 마산의 해방과 잔존 적부대의 섬멸이다. (중략) 진주와 마산의 해방은 적의 숨통을 끊어 버리는 마지막 전투를 의미한다!"

만약 지금 쳐들어 왔으면 야구 경기 있는 날에 오면 "마!"라는 고함과 함께 야구 못 보게 된 시민들이 알아서 격퇴해 주지 않을까 하는 개드립이 생각나지만 얘기하진 않겠습니다.

여기 투입된 건 후퇴해 휴식 중이던 24사단 19, 21연대였습니다.


한편 국군 역시 참모총장에서 잘린 후 백수나 다름 없던 채병덕을 영남지구전투사령관으로 임명해 후퇴 중인 민부대를 지휘하게 합니다. 민부대의 상황을 생각하면 미군과의 연락장교로 쓰는 거나 다름 없는 굴욕이었죠.

이 때 미군도 국군도 전라도에 투입된 적 병력이 얼마나 되는지 제대로 파악 못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아수라장 속에서 6사단을 맞이한 미군은 처참한 패배를 당합니다. 26일 밤부터 시작된 하동 전투였습니다.

채병덕은 이 다음날 아군 복장을 한 적과 조우해 피아를 확인하려다 기습을 받아 전사합니다. 아쉽게도 그에게 많은 말을 할애할 순 없을 것 같네요. 전후에 그가 들었던 간첩설은 확실히 큰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그가 그 위치에 오른 것은 국내의 독립운동가들과 이승만의 지지 때문이었고, 어쨌든 참 죽어라 일 하긴 했습니다. 그의 잘못을 만회하려 제대로 된 병력도 없이 이 곳에 투입되는 것도 감내하긴 했구요. 국군의 초반 패전에서 그보다 더 잘 지휘할 사람이 많진 않았다는 의견이 대다수고, 거기에 공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승만 딸랑이에만 집중했던 것, 국군의 초반 붕괴를 주도했던 것 등 그의 문제는 너무도 큽니다. 그의 능력 밖이라 하더라도 그는 그 이상의 제대로 된 능력을 발휘해야 될 위치에 있던 사람입니다. 정말 전형적인, 있으면 안 되는 곳에 있었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후 유재흥이 이런 케이스에 해당되긴 하지만, 채병덕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어쨌든... 그는 이 곳에서 전사합니다.

이후 반격작전 때 하동을 재탈퇀 했을 때 미군의 시체가 313구나 찾을 수 있었고, 미군 포로 역시 100여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병력이 부족했을 뿐 국군의 상황 역시 그리 다르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투입된 신병은 오히려 적에게 겁을 먹어 방해만 됐을 뿐이었죠. 그나마 계속 병력을 "던지면서" 버티고는 있었지만, 그럴수록 아군의 피해만 커질 뿐이었습니다.

그 동안 대전을 점령한 4사단은 호남 북쪽 함양-거창선으로 진격합니다. 여기에 투입된 건 이제 막 한국에 온 29연대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일본에서 최소 6주간의 훈련을 요구했지만 기각되고, 부산에 온 후 10일간, 다시 3일간의 여유를 준다는 건 허락됐지만 결국 이것도 무시되고 전장에 던져지고 맙니다. 이들에게 역시 제대로 된 전투력을 기대할 수 없었죠.

"이때 누군가가 "목숨이 아깝거든 달아나라"고 외치는 바람에 포병은 물론, 경계를 하고 있던 보병 2개 분대도 도망치고 말았다. 그 후 부대대장이 점검을 해보니 별로 습격당한 흔적도 없었고, 북한군의 사격도 경미하였다. 부대대장은 주변의 병력을 모아 모든 장비를 회수하여 철수했지만, 이 공포의 계기를 만든 "목숨이 아깝거든 달아나라"고 외친 말을 나중에 생각해 보니 한국어투의 강한 어조였다고 한다. 이 소동의 원인은 게릴라 6~7명의 소행인 것으로 추정되었다. 전장에서의 음향효과는 심리를 마비시킬 수 있다"

30일 거창이 점령됐고, 이 충격은 특히 미군에게 강하게 다가왔습니다. 이대로 낙동강 방어선의 서쪽이 뚫리면 방어도 뭐고 없는 상황이었죠. 이 때문에 미군은 서쪽에 예비대를 모두 투입하는 초강수를 두었고, 낙동강 방어선은 북쪽은 국군이, 서쪽은 미군이 맡는 상황이 만들어집니다. 그 때 국군에 남는 병력이 있을 리가 없으니까요 -.-a 이 때 화령에서 승리를 거둔 17연대가 미군과 함께 싸웠는데 이들 역시 원할한 지휘를 위해 동부전선으로 이동됩니다.

이런 6사단의 호남 기동은 아군에게 물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큰 피해를 줍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아쉬운 부분은 목포, 여수 등을 점령하기 위해 이틀을 쉬었다는 것이죠. 만약 호남 구석구석을 공격하는 대신 곧바로 진주로 들어갔으면 또 어떻게 됐을지 모릅니다. 아니 이들이 그 전투력으로 왔다면 부산까지 뚫리는 게 기우만은 아니죠. 하지만 이틀을 낭비하면서 그나마 이 정도로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이들이 항구를 점령한 이유는 혹시 모를 아군의 상륙에 대비하면서 바다를 통해 보급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를 보면 이들이 곧바로 경상도로 온다면 오히려 제대로 된 전투력을 낼 수 없었을 거라는 추측도 가능하죠. "어쩔 수 없었던" 면이 얼마나 있을지 몰라도 정말 하루 하루 차이의 의미가 컸습니다.

아무튼 아군이 낙동강으로 후퇴하면서 북한군은 아군의 가장 약한 곳에, 국군과 미군의 경계로 주공을  밀어넣게 되죠. 부자가 많은 동네, 다부동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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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그 북쪽에서는 지연전이 제대로 이뤄지고 있었습니다. 미 1 기병사단과 25사단 27연대가 도착했기 때문이었죠. 특히 27연대는 안동에서 황간까지 180km 거리를 하루만에 기동하면서 북한군을 놀라게 했습니다. 이 때 북한군은 피난민을 앞세워 지뢰지대를 개척했고, 곳곳에서 나타나는 게릴라로 인해 미군은 혼란에 빠집니다. 그래도 28일까지 지연전을 계속하며 적에게 3000 가량의 피해를 준 것으로 평가됩니다. 이들은 이렇게 지연전을 펼치며 김천에서 왜관으로 후퇴합니다.

그 북쪽 상주에서는 17연대의 화령장 전투를 통해 북한군의 진격이 늦어졌고, 북한군이 다시 오자 1사단이 방어를 맡아 적을 막아냅니다. 이들은 다부동으로 후퇴, 앞으로 있을 전투를 대비하게 됩니다.

상주 북쪽에서는 6사단이 계속 피해를 입어가면서 북한군을 악착같이 막아내고 있었고, 후퇴하면서 1사단과 만나 같이 싸웁니다. 이들 역시 상주까지 계속 지연전을 펼치다가 낙동강으로 후퇴하죠.

그리고... 문제는 안동에서 터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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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북한군은 순천-거창-상주-영덕 선까지 진출해 있었습니다. 당시 미군이 이를 어느 정도까지 파악하고 있었을진 몰라도 적이 코 앞에 들이닥치고 있고 특히 서쪽에서 적이 정말 무섭게 오고 있다는 건 파악하고 있었죠. 그 날 밤 계속 고민하던 워커 중장은 결단을 내립니다. 이미 낙동강은 다음 방어선으로 정해져 있었고 진지구축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군은 준비된 진지로 이동하여 재정비하고 공격작전에 필요한 지역을 확보한다. 이동시기는 후술하겠지만 이동중에도 적과의 접촉을 유지하여 지연시키면서 철수하도록 노력하라"

낙동강 방어선으로의 후퇴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이 때 워커는 대구까지 적에게 넘어갈 것을 대비해 미 8군 사령부를 부산으로 옮길 것을 고민하고 있었고, 이 소식을 들은 맥아더는 27일 한국으로 건너옵니다. 여기서 그는 이렇게 말 했죠.

"제8군이 현진지를 고수해야 하며 한국판 던케르크는 있을 수 없다"

2차대전 초반에 있었던 던케르크 철수 작전을 말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다 맥아더는 물론 미군이 강조하던 철수가 또 있었습니다. 필리핀에서 맥아더가 철수했던 바탄이었죠. 맥아더의 전용기 이름도 바탄이었습니다. 이는 작전상 후퇴일 뿐, 아군을 포기하고 바다를 건너는 일은 다시 있으면 안 된다는 의지였습니다. 이런 의지는 낙동강 방어전에서 계속 강조되었죠.

이 때 내려진 예비철수 명령에 이어 29일에 그 유명한 "Stand or Die" 훈령이 미군에게 떨어지고 미국 본토에서는 이걸 가지고 난리가 났으며, 맥아더는 역시 나름 유명한 "군대에서는 민주주의가 없다"는 말을 합니다. 이런 과정은 나중에 설명하기로 하죠. 29일에 어려운 상황에서도 사수 명령을 내린 워커는 8월 1일 정식으로 모든 전선에 낙동강 방어선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문제는 이에 대한 국군 지휘부의 반응이었습니다. 아니 지휘부라 할 것도 없죠. 1군단으로 국군의 주력을 이끌고 있던 김홍일의 반대였죠.

당시 안동은 8사단이 계속 막아내면서 수도사단도 증원돼 방어를 강화하고 있었습니다. 김석원은 여기에 오면서 안동 시민들에게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말을 했지만, 적의 공격은 생각보다 더 거셌으며, 아군의 피해도 커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7월 말부터 시작된 후퇴 명령에 김홍일과 김석원은 계속 반대합니다. 특히 그 나이에 아직도 피가 끓는 김석원의 반대가 컸습니다. 반면 정일권부터 시작해 김백일 등은 이 명령을 따르고 있었죠. 아군이 후퇴할수록 이 간격은 커지고 있었습니다.

8월 1일 후퇴 명령이 떨어질 때, 수도사단과 8사단은 아직 후퇴 준비가 제대로 돼 있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이 상황을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편차가 심합니다. 김홍일의 평전에는 아군에게 제대로 후퇴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고, 김석원을 까는 입장에서는 그냥 김석원이 안동 철수를 계속 반대하고 싸워서 일이 커진 것으로 적고 있습니다. 육군 공식 전사의 경우 그냥 상황이 급박해서 급히 후퇴하느라 이렇게 됐다고 하고 있죠.

전체적인 정보를 재구성해 보면 후퇴와 사수를 외치는 양측간의 대결에 따른 결과로 보입니다. 김석원만 똑 떼서 다루는 경우가 있지만 이 때 김홍일, 김석원의 생각은 그리 다르지 않은 것 같거든요. 그렇다고 미군의 판단이 그리 틀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미군으로서는 제대로 싸우려면 후퇴해야 되는데 이 노장들이 자기 말 안 들은 거니까요. 미군이 이 둘을 몰아냈다고 마냥 까기도 그런 게 이들을 자르길 요구했던 것은 다름 아닌 워커 중장이었죠.

아예 이것과 이 철수의 상황을 별개로 볼 수도 있습니다. 미군과 국군이 쓰던 지도는 달랐고 언어도 달랐으니 명령이 오면 전부 재해석한 다음에 해야 했습니다. 이 때문에 시간만 계속 끌었고, 수도사단과 8사단은 비가 내리는 와중에 시간이 촉박한 상황에서 후퇴하느라 큰 피해를 입습니다. 괜히 김석원 믿다가 제대로 후퇴 못 한 안동 시민들의 피해도 컸구요.

이 불화는 결국 둘 중 하나가 물러나야 되는 상황에까지 이릅니다.


김홍일과 김석원, 이 두 노장은 이 때 이미 잘렸다고 봐도 될 것입니다. 김홍일 평전의 경우 이 때 자기가 스스로 물러날 떄가 돼서 사표를 냈다고 돼 있긴 합니다만... 국군의 수뇌부였던, 특히 신성모나 김백일의 경우 이들이 물러나는 걸 참 좋아했을 겁니다. 이승만이 여기에 얼마나 관련돼 있을지에 대해서는 나름 중요한 떡밥이구요.

김석원의 경우 이 전후에 보여준 모습을 보면 아깝긴 하지만 물러나는 게 맞는 것 같긴 한데 김홍일 장군의 경우... 정말 안타깝죠.

원래 지연전 파트, 희망과 절망은 이 두 노장이 물러나는 부분까지를 다루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너무 늦더군요. 이들에 대한 평가는 낙동강 방어전 중에 따로 한 편을 내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해방 후부터 국군 장교들은 기본적으로 미군과 소통이 쉽고 미군의 전술을 받아들이기 쉬운 젊은 층이 주력이 돼 갔습니다. 전에 다뤘듯 이것 자체가 그리 틀렸다고 보진 않습니다. 특히 전쟁 중에 그건 정말 크게 다가왔습니다. 한미연합은 그냥 해병 중에 공성전차 한두개 갖다 놓듯 대충 둘이 합친다고 전투력이 강해지는 게 아닙니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서로 소통이 맞지 않고 따로 놀면서 입을 필요 없는 피해를 계속 입어가는 게 한두개가 아니었고, 그 치욕의 현리 전투 역시 이 둘 사이의 갈등이 시작이었죠. 노장들의 퇴장이 안타깝다 해도 이건 꼭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때문에 능력보다는 단지 미군과 친한 쪽이 더 잘 기용됐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경험과 능력이 중요시되는 전쟁 때 은퇴하는 노장들보다 젊은 장군들이 더 잘 싸우기를 기대하기도 힘든 것이었구요. 충분히 잘 싸운 명장들도 있었지만 제대로 싸우지 못 하고 미군바라기였던 이들도 충분히 많았습니다. 거기다 일찌감치 부산에 배를 준비해서 언제든지 도망갈 준비를 했던 이 역시 군 장교들 중에서도 정말 많았구요. 이런 상황은 미군도 싫어했습니다. 자기 말도 잘 들으면서 싸우기도 잘 싸우는 이를 원했죠.

이 때 필요한 것은 친미적이면서도 한국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고, 미군에 협조하면서도 한국에 도움이 될 것을 충분히 얻어낼 수 있는 그런 이였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짧으면서도 잘 싸우는, 미군이 능력을 인정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8월 1일, 아군은 낙동강을 넘었고 북한군은 최종 공세를 준비합니다. 원래 목표는 8월 15일까지 부산 점령, 그게 안 된다 하더라도 최소한 대구를 점령하라는 것이었죠.

낙동강 방어전의 시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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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8월은 북에는 절호의 기회를 앞두고 있는 것처럼 인공체제는 무엇 하나 낮은 목소리가 없었어. 입에서 나오는 소리마다 큰 소리였어. 당시 김일성은 8월15일을 통일의 날, 승전의 날로 정하고 부산 점령을 인민군 각 전선에 지상명령으로 고취하고 있었지. 그 독전으로 각 전선에 시체가 쌓여갔지." - 고은


"더 이상의 던케르크도, 바탄도 없다. 미 8군 사령부는 반드시 육지에 있어야 한다."


"우리는 절대 물러설 수 없다. 물러설 곳도 없고 물러서서도 안 된다. 낙동강 방어선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후퇴란 있을 수 없다.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한국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


부산 유엔군 묘지

"몇몇 장교들이 전투경험을 얘기했다. 그들의 얘기는 그다지 실감은 없었으나 공포감을 주기엔 충분했다. 우리는 북한군 병사가 신장이 3m가 넘는 괴물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 미 해병


아래 증언과 딱히 관련 없는 미군

"우리 중대는「윌리 톰」이란 신병이 있었다. 그는 우리가 한국에 파견된다는 것을 듣고 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었다. 제일 먼저 탈영할 것이라고도 말했었다. 그는 형이 하나 있었는데 2차 대전때 전사했다는 것이다.『틀림없이 나도 형처럼 죽을 거에요.』그는 지옥같은 고지 탈환작전에서 가장 먼저 전사한 상병중의 하나였다." - 미 해병


"적에게 잡히어 수치와 불명예을 당하느니 자결로 명예를 지키겠다" - 장철부


"어머님! 제가 어쩌면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저 많은 적들이 저희들을 살려두고 그냥 물러날 것 같진 않으니까 말입니다. 어머님, 죽음이 무서운 것은 결코 아닙니다.  어머니랑 형제들도 다시 한 번 못 만나고 죽을 생각을 하니 죽음이 약간 두렵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 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돌아 가겠습니다. 왜 제가 죽습니까. 제가 아니고 제 좌우에 엎디어 있는 학우가 제 대신 죽고 저만 살아가겠다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 학도병 이우근의 일기

"지금도 내 가슴 속에 남아 있는 장면이 있다. 재일동포 부대원이었다. 공격을 시도하고 있던 순간에 그가 총에 맞았다. 그는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있었는데, 나를 보면서 “중대장님, 먼저 갑니다”면서 쓰러졌다. 웃는 얼굴이었다. 조국을 지키기 위해 대한해협을 넘어온 재일동포 청년의 마지막 웃음은 내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모습으로 남아 있다. (중략) 나는 2년 전인가에 그곳을 다시 찾아갔다. 전투 당시 연대장과 대대장을 각각 지냈던 선배들을 모시고 갔다. 내가 싸웠던 격전지에 올랐더니 거대한 아름드리 나무들만 무성했다. 1개 중대가 12차례나 돌격해 부대원의 절반이 죽었던 곳이다. 낙엽을 모아놓고 가지고 간 소주를 그 위에 뿌린 뒤 묵념을 하면서 제사를 올렸다. 쉽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다." - 참전용사 전자열


"북한군 T-34 탱크와 싸웠다. 나는 중화기 소대장으로서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적의 탱크를 공격하는 일을 맡았다. 50m 앞까지 진격해 적의 전차를 노려야 했다. 그 뒤를 따라오는 북한군과 백병전까지 치른 뒤 우리는 탱크에 기어올랐다. 적 탱크에 성공적으로 올라선 뒤에는 뚜껑 격인 해치를 뜯어가면서 파괴했다. 치열한 격전 끝에 적 포로도 많이 잡았다." - 참전용사 이덕빈


"알았다. 먼저, 모두 여기 앉아라"


"지금까지 정말 잘 싸웠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물러설 곳이 없다. 여기서 밀린다면 우리는 바다에 빠져야 한다."


"저 아래에 미군들이 있다. 우리가 밀리면 저들도 철수한다. 그러면 대한민국은 끝이다."

"내가 앞장서겠다. 내가 두려움에 밀려 후퇴하면 너희가 나를 쏴라."


"나를 믿고 앞으로 나가서 싸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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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군이
12/08/12 21:46
수정 아이콘
중간에 이대호!
글 잘보고있어요 감사합니다.
자이체프
12/08/12 21:51
수정 아이콘
누가 더 버티느냐로 승패가 결정된 처절하다고 할 수 밖에 없는 전투였죠. 진짜 한 번만 제대로 밀렸어도 끝장날 뻔 했던 아슬아슬한 순간이었습니다.
12/08/12 22:07
수정 아이콘
총을 넘겨주는 전술은 연습의 의미도 포함하고 있었던 걸까요? 그냥 1열이 총쏘고 뒤에서 나뭇가지라도 흔드는 게(....) 더 나아보이는데.
원래 6.25에 대해 동부전선에서 버텼지만 서울이 떨어졌고, 그 다음은 그냥 낙동강까지 죽 밀렸다-_-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그 퇴각을 위해 이렇게 많은 노력과 희생이 필요했군요.
뚫훓쀓꿿삟낅
12/08/12 22:38
수정 아이콘
과연 현대에 와서 이런 상황이 온다면 우리가 버틸수가 있을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참...-_-;저기서 죽을 힘을 다 해 막아준거에 대해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Je ne sais quoi
12/08/12 22:47
수정 아이콘
3열 전술은 정말 극악한 실상을 보여주는군요. 얼마전 여행 다니면서 미국의 작은 마을에도 기념비가 있는 것을 봤는데, 꼭 한국전쟁 부분이 있더군요. 이런 건 정말 고마워해야 할 일이라고 봅니다. 물론 뭐 안 좋은 짓도 많이 하지만..
12/08/13 01:31
수정 아이콘
응? 완결? 2부도 해주세요. 현긴증난단 말이에요;;
blue wave
12/08/13 09:28
수정 아이콘
목숨을 걸고 싸운 분들이 있기 때문에 결국 오늘날의 우리나라가 있는거군요.
다부동과 영천 전투가 다음 이야기의 중심이 되겠군요. 글 감사히 보고 있습니다~
blue wave
12/08/13 09:31
수정 아이콘
북한 6사단의 기동은 조선의용군 출신의 정예부대여서 가능하지 않았나 싶네요. 바로 부산으로 진격하기에는 자신들도 피로가 극에 달하고 보급 문제도 있고 해서 지휘관이 확신할 수 없었던 것 같네요. 당시 북한군이 차량이 충분하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리메
12/08/13 10:22
수정 아이콘
저분들과 워커 장군 + 유엔군의 숭고한 희생 덕에 지금 우리가 있는거죠.
미국한테 퍼줄 이유야 없지만 기실 남한은 미국 덕분에 남한을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미국을 아무리 욕해도 미국이 패권국가가 아닌 러시아나 중국이 현재 패권국가라면 우리나라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상상하기도 싫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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