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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08/19 17:44:21
Name 눈시BBver.2
Subject [일반]  낙동강 - 2. 포항에서
흔히 공격을 위해선 방어측보다 3배의 병력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방어측이 유리하다는 것이죠. 하지만 전사를 보면 꼭 그런 건 아닙니다. 특히 지역이 넓을수록 더 그렇죠.

방어하는 쪽에서는 적이 어디로 얼마나 올 지 모르기에 전체적으로 병력을 고루 분배해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공격 측이 한 곳에 병력을 집중시켜 돌파에 성공한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지죠. 특히 그게 방어측이 생각 못 한 곳일수록 더 그렇습니다. 그대로 두는 건 당연히 안 되지만 따로 병력을 빼기도 힘듭니다. 쉽게 병력을 빼면 그 곳에서 또 공격이 시작되고 피해만 커질 뿐이죠. 거기다 한 쪽이 뚫렸다는 게 퍼지면 공포감 역시 커지고, 멀쩡히 버티던 부대도 무너지기 쉽습니다.

그걸 위해서는 최대한 좁은 거점, 성이나 요새 등에 틀어박히게 되죠. 하지만 이렇게 되도 손해입니다. 작으면 작을수록 논밭 등 생활공간은 바깥에 위치하게 되니까요. 이걸 지역 단위로 봐도 마찬가집니다. 견고한 낙동강 방어선을 만들기 위해 무려 90%나 되는 국토를 포기해야 했죠.

8월, 병력은 대등했고 미군의 증원 아래 서서히 앞서나가고 있었지만 아직 아군은 북한군의 공격에 수동적으로 행동해야 했습니다. 뚫린 곳을 만회하려고 대병력을 이동시키면 그 쪽이 뚫립니다. 이건 심지어 병력이 두 배 가까이 차이가 나게 된 9월에도 마찬가지였죠.

이런 낙동강 전선의 흐름은 전쟁의 주도권을 쥐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 해 줍니다. 그리고 지금, 북한군은 그렇게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공격의 주도권을 쥐고 아군을 들었다 놨다 하고 있었습니다.


무정의 본명은 김무정, 대장정에도 참가하며 팔로군 내 조선의용군 사령관도 맡았던 이입니다. 그는 북한군 2군단장으로 동해안에서 국군 방어선의 구멍을 파악하고 거기에 병력을 쏟아부었습니다. 이 때문에 국군의 방어선은 무려 40km나 후퇴해야 했죠.

문제는 지금부터였습니다. 이 후퇴가 전 전선의 완전붕괴로 이어질 지, 오히려 들어온 적의 포위섬멸로 이어질지였습니다. 북한군에도 약점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아무리 아군이 생각 못 한 산악지대로 들어와서 큰 성과를 올렸다 한들 보급 면에서 불리한 건 마찬가지였으니까요.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정말 가슴 아픈 전투가 벌어집니다.

"저승에 가서도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가장 가슴 아픈 죽음과 접촉했다." - 김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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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사단은 영덕과 포항 사이의 장사동에 주력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는 기존의 이준식 사단장과 교대하면서 포항에 적이 들어올 가능성을 물었지만, 아직까지 포항은 안전지대로 여겨졌죠. 이에 따라 그는 3사단 주력을 이동시키지 않고 늘 그랬듯 반격을 꿈 꾸었습니다. 그 동안 그는 포항 시내에 후방사령부를 두고 자기들이 뚫릴 때를 대비했죠.

그 때 그에게 참 반가운 손님들이 옵니다.


학도의용군, 학도병들은 개전 당시 여러 곳에서 만들어집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보급 등 비전투에 동원됐지만, 전쟁이 계속되면서 전투병력으로 흡수돼 갔죠. 이렇게 미리 준비된 이들 외에도 후방 곳곳에서 나라를 지키자는 구호가 울려퍼졌고, 많은 이들이 여기에 지원합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이 때 수도사단에서 3사단으로 갔던 이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대구에서 71명의 대원을 모집, 김석원의 휘하로 갑니다. 하지만 김석원이 수도사단에서 3사단으로 이동했고, 새로이 수도사단장이 된 백인엽은 이들에게 선택지를 줍니다. 정식으로 수도사단의 병사로 편입되든가 해산하고 후방으로 물러나라는 것이었죠.

"김석원장군이 제3사단장으로 전임되자 우리 학도병들은 그분을 따르기로 작정을 하고 8월 8일에 포항에 도착했습니다. 포항여중에 있는 3사단 사령부로 찾아갔는데, 거기에는 김대의 대위가 연락장교로 사병 몇 명을 데리고 와있었고, 그밖에 20여명의 군악대원 밖에 없었어요. 이날로 M1을 지급받고 이튿날 대원을 데리고 시내를 구보로 달리다가 안강전방 CP로 가는 김석원사단장을 만났어요. 반가와하시면서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라고 합디다." - 참전용사 김용섭

이들은 모든 것을 거부하고 김석원을 다시 찾아갑니다. 그들은 자신의 의지로 일어났고 자신들의 자랑스러운 학도의용군 깃발을 버리기 싫었던 것이죠. 김석원은 당연히 이들을 반겨주었고, 미군에게서 M1 소총을 받아 이들에게 지급했습니다.

이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포항의 후방사령부를 호위하는 것, 낮에는 나름대로 훈련을 하긴 했지만 아직 부족했기 때문이었죠. 그의 입장에서는 최대한 안전한 임무를 맡긴 것이었습니다.

"몹시 고된 행군 끝에 8월8일 새벽 포항에 도착하여 포항여중에 있는 사단CP를 찾아갔죠. 거기서 M-1 소총을 지급받고 행군으로 지쳤지만 자체로 집총훈련을 하고 저녁에는 총기수입을 한다음 12시가 넘어서야 교실바닥에서 취침을 했습니다." - 참전용사 김환규

학생 출신이라 하나 그들은 군인이었습니다. 이들은 투표로 중대장, 소대장을 뽑고 낮에는 훈련을, 밤에는 총기수입과 경계를 했습니다. 하지만, 악화된 전황은 그 누구보다 이들에게 크게 다가왔죠.

"천신만고 끝에 포항에 도착. 교복은 누더기가 되고 신발은 신은 것인지, 벗고 다니기에 체면이 안 서기 때문에 그저 발에 걸치고 있다고 할까. 총도 총이지만 우선 옷과 신발을 보급해 주었으면. 김용섭 형에게 건의했더니 사람은 빨가벗고 태어났다고 뜻있는 농담을 했다. 그래, 빨가벗고 싸워보자. 우선 총이라도 받았으면 마음 든든할 것 같다.

오랜만에 콩나물국을 먹었다. 된장을 푼 국 냄새가 그렇게 향수를 불러 일으킬 줄이야. 기분이 상쾌하다. 팬티와 런닝을 빨아 입었다. 땟국물이 많이도 나왔다. 팬티가 마를 동안 알바지만 입고 뒹굴었다. 어릴 적 생각이 났다. 두 개의 호두알이 까칠까칠한 바지의 감촉으로 어린 시절을 생각나게 하다니 나도 참 쎈치하구나, 병사답지 않게 말이다.

내복을 청결하게 빨아 입었으니 이제 언제 죽더라도 수의는 마련된 셈이 된다.

아! 어머니! 나는 서울을 향해 큰 절을 두 번 했다. 윤재정이란 놈이 날 놀려댔다. 뭣하는 것이냐고. 나는 “네 놈은 몰라! 뜻이 있는 자의 행동은 뜻이 있는 자만이 안다”고 한마디 해줬다. 재정이란 놈이 더욱 의아해 했다. 제법 건방진 소리를 해지만 사실은 어머님과 아버님께 포항 안착을 알린 것이다.

나비가 춤을 추고 있다. 학교 화단에 활짝 핀 백일홍이 눈부시다. 꽃을 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가라앉고 평화가 가슴에 자리 잡는다. 이렇게 평화스러운데 왜 전쟁이 터졌을까, 그리고 전쟁은 어떻게 될 것일까......

쉴 새 없이 오가는 비행기 소리에 마음 든든하다.

황기태는 애인 자랑을 곧잘 하지만 나도 아끼는 소녀가 있다. 음악을 좋아하는 그 눈매 고운 소녀가 생각난다. 언제나 잘 손질한 세일러복이 멋있었고 고개를 숙이고 치켜뜨던 그 눈매가 명멸하여 나를 사로잡았다. 전쟁이 끝나고 학교로 돌아가면 그 때 그 소녀에게 말하리라. 전쟁에서 공훈을 세우고 돌아온 영웅처럼 그녀에게 나의 무용담을 들려주겠다면 싫어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후 3시 포항여중 강당으로 옮겼다. 초등학교 교실보다는 역시 여자 중학교의 강당이 마음에 든다. 뭇 소녀가 여기서 노래하고 춤추었을 것이다. 희고 예쁜 얼굴을 가진 여학생들이 웃고 떠들고 노래 부르는 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다.

반가운 소식이 전달되었다. 무기를 지급 받으러 가자는 것이다. 몹시들 좋아한다. 총은 생명이며 애인이다. 병사에게는 총보다 더 미더운 것이 또 있을 수 없고 총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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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초부터 시작된 북한군의 우회 침투는 포항 근처에 주둔한 아군 3사단을 둘로 갈라놓았습니다. 12사단과 766부대였죠. 3사단의 주력은 포위됐고, 포항에 주둔 중이었던 병력은 뜻밖의 기습을 당하게 됩니다.

당시 포항에 있던 아군은 경찰 정도였고, 이들이 어떻게 됐는지는 찾아봐도 나오지 않습니다. 후퇴했겠죠. 어떻게 후퇴했는지도 제대로 안 나오는 걸 보면 혼란에 빠진 상태로 도주한 것일 겁니다. 그나마 3사단 후방사령부는 전투병력이 없어서 전투는 포기하고 최대한 형산강 남쪽과 항구로 물자를 옮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에게 전투병력은 있었습니다. 그게 71명의 학도병들이었죠.

"8월11일 새벽에 요란한 총성으로 퍼뜩 잠이 깼어요. 사실 처음에는 적의 총성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어요. 벌써 포항시로 적이 들어올 리가 없을줄 알았으니까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김용섭중대장의 명령으로 여중교 정면은 우리 소대가, 그리고 우측은 김일호군의 제2소대가 맡아서 전투를 시작했지요." - 참전용사 류명도

처음에 나타난 것은 적의 정찰대, 포항여중의 후방사령부를 노린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학도병들은 나름대로 적을 끌어들인 후 공격, 격퇴합니다. 그리고 이 작은 전투는 한 학도병의 감수성을 깊게 찌릅니다.

"어머님!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10여명은 될 것입니다.  저는 2명의 특공대원과 함께 수류탄이라는 무서운 폭발무기를 던져 일순간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수류탄의 폭음은 저의 고막을 찢어 놓았습니다.

지금 이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제 귓속은 무서운 굉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머님. 괴뢰군의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너무나 가혹한 죽음이었습니다. 아무리 적이지만 그들도 사람이라고 생각 하니, 더욱이 같은 언어와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

어머님!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이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을 어머니께 알려드려야 내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습니다. 저는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지금 내 옆에서는 수많은 학우들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듯, 적이 덤벼들 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볕 아래 엎디어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엎디어 이 글을 씁니다.  

괴뢰군은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언제 다시 덤벼들지 모릅니다. 저희들 앞에 도사리고 있는 괴뢰군 수는 너무나 많습니다. 저희들은 겨우 71명뿐입니다.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 무섭습니다. 어머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까 조금은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습니다.  

어머님! 어서 전쟁이 끝나고 “어머니이!”하고 부르며 어머니 품에 덜썩 안기고 싶습니다. 어제, 저는 내복을 제 손으로 빨아 입었습니다. 비눗내 나는 청결한 내복을 입으면서 저는 한 가지를 생각했던 것입니다. 어머님이 빨아 주시던 백옥 같은 내복과 내가 빨아 입은 그다지 청결하지 못한 내복의 의미를 말입니다."

"그런데 어머님, 저는 그 내복을 갈아입으면서 왜 수의(壽衣)를 문득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죽은 자에게 갈아입히는 수의말입니다."

이 날 그의 일기는 어느 때보다도 길고 자세합니다. 그리고 전투 중에 휘갈겨 쓴 어머니께 쓰는 글에서, 마치 무언가를 짐작한 듯한 걸 볼 수 있습니다.

그의 마음이 어떠했든, 전투는 계속됩니다. 이미 후방사령부는 후퇴한 상태였습니다. 그들에게 제대로 알리지도 않고 말이죠. 애초에 사령부의 병력은 50명 정도, 다 비전투병력이었고 전투가 벌어지면 후퇴하는 게 맞긴 합니다. 학도병들 역시 아무 연락이 없었다고 했지만 후퇴하는 사실을 알았을 겁니다. 군악대 몇 명은 후퇴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싸웠으니까요. 애초에 그들의 임무는 사령부의 호위이기도 했구요.

하지만 그럴려면 제대로 "우리는 후퇴한다, 엄호를 부탁한다"고 제대로 말을 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 때의 상황은 아무리 봐도 혼란 속에 제대로 말도 하지 않은 채 후퇴한 것에 가깝습니다. 이는 포항에 있던 다른 부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나름 싸우면서 후퇴한 이들도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후퇴하지 않고 끝까지 싸운 건 이들 학도병들 뿐입니다.

"우리는 인민군 5사단 2연대인데 국방군 동무들을 해방시켜주겠다. 30분 여유를 줄테니 잘 생각해보라"

적은 다시 왔습니다. 이번에는 본대였고, 항복을 요구했죠. 그들은 이렇게 답합니다.

"동무들이나 항복해라. 그래 포항에는 어떻게 들어왔나?"

어떻게 들어왔다느니 하는 소소한 대화 후 북한군은 다시 항복하라고 합니다.

"한명만 나와보라. 환영의 모범을 보여주겠다"

이 때 한 명이 어떻게 나오나 볼까 해서 손을 들고 나갔다고 합니다. 그 대답은 총알이었습니다. 북한군은 그들을 살려줄 생각이 없었습니다.

"어머님! 제가 어쩌면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저 많은 적들이 저희들을 살려두고 그냥 물러날 것 같진 않으니까 말입니다.""

이어진 공격, 학도병들은 날이 밝을 때까지 버팁니다.

"어머님, 죽음이 무서운 것은 결코 아닙니다.  어머니랑 형제들도 다시 한 번 못 만나고 죽을 생각을 하니 죽음이 약간 두렵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 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돌아 가겠습니다. 왜 제가 죽습니까."

이 때쯤 되면 항복은 아니더라도 후퇴하면 되지 않나... 싶은데 그런 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물러난다고 생각한 건 낮 1시, 총알과 수류탄이 다 떨어질 때쯤이었죠.

"제가 아니고 제 좌우에 엎디어 있는 학우가 제 대신 죽고 저만 살아가겠다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천주님은 저희 어린 학도들을 불쌍히 여기실 것입니다. 어머님, 이제 겨우 마음이 안정되는군요."

결국 장갑차가 동원됩니다. 이들은 본부와 무전하기 위해 무전기가 있는 뒷산으로 갔지만 이미 거기도 북한군이 점령한 뒤였습니다.

"어머님, 저는 꼭 살아서 어머니 곁으로 달려가겠습니다. 웬일인지 문득 상추쌈을 게걸스럽게 먹고 싶습니다. 그리고 옹달샘의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한없이 들이키고 싶습니다."

"이때 나도 모르게 '엄마! 엄마!'를 연발했어요. 운동장 앞으로 뛰어오다 그만 적탄에 맞아 부상을 했습니다." - 참전용사 김환규

이 때 동원된 장갑차가 5대, 총알이든 수류탄이든 막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죠.

"어머님! 놈들이 다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다시 또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뿔사, 안녕이 아닙니다. 다시 쓸테니까요. 그럼, 이따가 또......"

그는 이 전투의 전사자 명단에 들어갔고, 다시 어머니를 보지 못 합니다. 포항을 탈환한 후에야 그의 수첩이 발견되었죠.

전사 48명, 부상 13명, 포로 10명, 이렇게 포항여중 전투는 끝납니다. 이후 이들은 미군의 폭격을 틈타 탈출했고, 아군을 만나게 돼 겨우 살아나게 됩니다.

이 48명이 누구였는지는 학도병 출신 참전용사들의 기억 속에서도, 여러 기록 속에서도 계속 혼동됩니다. 그 때가 얼마나 큰 혼란이었는지를 말 해 주죠. 그래도 살아남은 분들이 있어서 그 때의 참상을 말 해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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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학도병들을 얘기할 때 불편한 부분이 있습니다. 이들을 그저 국가 권력의 희생자로 보는 것이죠. "아무것도 모르면서 괜히 끌려가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까지 보여드렸던 이우근의 일기에서나 참전용사들의 증언에서 보듯 이들은 자신의 의지로 군인이 됐습니다. 또한 그냥 신병으로 편입하든가 아예 민간인으로 돌아가든가 하는 선택지가 있었지만 이들은 학도의용군이라는 깃발을 그대로 지키려고 했구요. 이는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집니다.

애초에 학도의용군이 전면에 나선 일도 많지 않습니다. 이들은 자기들끼리 후방의 경비에 동원되든가 각기 쪼개져서 신병으로 입대했죠. 이 경우에도 가장 안전한 곳이라 여겼던 사단의 후방사령부에 투입된 경우였구요. 학도병들의 피해가 컸다는 것은 곧 국군의 피해 자체가 컸고, 그들조차도 전투에 직접 투입될 정도로 상황이 어려웠다는 것의 반증일 뿐입니다.

물론 억지로 끌려간 경우도 있었지만 그건 학생이나 어른이나 상관 없이 나왔고, 아예 다른 측면에서 접근할 부분입니다. 이들은 강제로 끌려온 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나라 지키기 위해 나선 것이었으니까요. 마치 부마에서, 광주에서 민주화를 외치며 일어났던 학생들을 김영삼과 김대중에게 낚여서 억울하게 희생됐다고 하는 것과 다름 없는 것이죠.

하지만 이 경우에서 또 볼 것은 위에서 다뤘듯 후방사령부가 혼란에 빠져 학도병들에게 제대로 말도 하지 않고 후퇴했다는 것입니다. 그들도 바쁘긴 했을 겁니다. 그 중요한 물자 등을 가지고 철수해야 했으니까요. 하지만 그들 머리에 학도병들에 대한 생각은 없었던 모양입니다.

학도병들은 11시간을 버텼고, 그 동안 이 후방사령부는 물론 다른 군경 병력들과 피난민들 역시 비교적 무사히 빠져나갑니다.

어른들은 학생들을 버렸지만, 학생들은 자신의 목숨으로 어른들을 지킨 것이죠.

자발적으로 갔든 강제로 끌려갔든, 학도병들은 전쟁 동안 모든 지역에서 자기들끼리 따로 나오든 군대에 정식으로 편입돼서든 계속 싸웁니다. 그 정확한 수는 물론 얼마나 큰 피해를 입었는지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고, 밝혀지지도 않을 겁니다.

그렇게 수많은 학생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웠고, 죽어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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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3사단의 주력은 포항 북쪽에서 밀리고 또 밀리면서 독석동에 이릅니다. 그는 북한군에 포항이 점령당했다는 사실을 들었지만 이에 대한 대처를 할 수 없었죠. 사단의 예비대는 없었고, 2개 중대라도 빼서 지원하려고 했지만 미 고문관과의 30분이나 되는 설전 끝에 포기하게 됩니다.

다행히 북한군은 UN 해공군의 공격을 피해 산악지대를 이용해 국군을 공격합니다. 포항을 점령한 병력 역시 마찬가지였죠. 덕분에 3사단에는 약간의 여유가 생깁니다. 이어 그들에게 해상 탈출 명령이 떨어졌죠. 약 일주일 동안 버티면서 해상 철수 준비가 계속됩니다.


"전투를 잘 하는 것보다 기도비닉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이번 철수작전의 성패가 달렸다"

여기서 김석원은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15일, 16일에 LST 4척이 독석동 해안에 접안할 것이라는 정보가 들어옵니다. 문제는 어디에 있을지 모르는 북한군의 편의대였죠. 때문에 그는 모든 것을 극비로 한 채 오히려 미군이 상륙할 것처럼 행동합니다. 남은 차들을 모두 도로를 따라 기동하게 해서 많은 병력이 움직이는 것처럼 했고, 북한군은 거기에 넘어갔죠.

이어 철수 당일, 사단장이 연설을 할 테니 주민들을 모두 해안으로 불러모읍니다. 그리고 그대로 배에 태워버렸죠. 이 때 미군은 3사단만 철수하게 하려고 했지만 그 동안 많은 도움을 준 주민들을 버릴 수 없다는 김석원의 고집 덕분에 주민들도 같이 태울 수 있었습니다. 이 때 이미 눈치를 챈 주민들이 집에 있는 소까지 끌고 왔고 미군은 당연히 어이 없어 했는데, 이렇게 말 했다고 하죠.

"우리는 송아지가 있어야 농사가 되오"

이 때 일본에서도 배를 끌고 왔는데, 포화가 빗발치는 것을 보고 돌아가려는 걸 헌병대장 김홍걸 소령이 부하들과 헤엄쳐 가서 죽이겠다고 협박해서 겨우 데리고 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군경을 포함한 1만여명과 역시 일만에 이르는 피난민들이 무사히 철수하는 데 성공합니다.

"우리 인민군 5사단은 영덕 장사동에서 결정적 승기를 놓쳤습니다. 우리가 국방군 3사단을 3방에서 포위 공격하여 바다에 밀어 넣고 섬멸하려는데 함포사격과 지상포격으로 우박처럼 쏟아지는 포탄, 그 작렬하는 굉음과 파괴력은 정말 생지옥이었어요. 일선에서 독전하던 마상철 사단장이 “야! 이 종간나 새끼들, 살겠으면 앞으로 나가고 죽겠으면 뒤로 돌아라!” 실성한 맹수처럼 포효하는데 국방군은 야음을 이용하여 군함을 타고 유유히 빠져나갔지요. 포위당하여 일주일간이나 악전고투하면서도 우리가 확성기로 집요하게 항복을 권유했지만 국방군은 투항하지 않았어요. 피난민과 송아지까지 몽땅 싣고 떠나버린 텅 빈 해변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약이 오르고 허탈했으나 다시 남진을 계속하였습니다....... 포항부근의 산과 마을을 다 점령하고 시가에 돌입했으나 함포사격과 공중폭격에 지상포화만 작렬할 뿐 사람도 먹을 것도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 박남식

이 포항 철수 작전의 성공을 들은 맥아더는 직접 부하들을 보내 김석원을 칭찬합니다. 그를 참 싫어했던 미군인 걸 생각하면 의례적인 일이었죠. 나중의 흥남 철수 작전과 함께 포항 철수 작전은 성공적인 철수 작전의 선례로 남았구요.

이렇게 김석원은 자기만 믿고 싸웠던 학도병들을 버리고 후퇴했다는 슬픔과 그래도 많은 민간인들과 같이 철수했다는 기쁨 아래 포항을 떠납니다. 하지만 전쟁은 계속됐고 그가 군에 몸 담을 날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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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티레브
12/08/19 20:13
수정 아이콘
음... 어렵네요
다시 읽어봐야할듯
Je ne sais quoi
12/08/19 22:48
수정 아이콘
전쟁이 다 그렇지만 정말 가슴아픈 부분이군요...
12/08/19 23:49
수정 아이콘
영화 포화속으로 에서 나온 내용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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