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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08/26 15:30:10
Name 눈시BBver.2
Subject [일반] 낙동강 - 5. 낙동강 돌출부
미 24사단은 25사단이 오면서 마산 방면을 넘기고 창녕, 영산 방면에 집중하게 됩니다. 이 때 24사단의 병력은 8천도 안 됐죠. 처음 투입된 이후 큰 피해를 입으면서 전투력은 40% 정도였고 사단장마저 실종되면서 장병들은 패배주의에 붙잡혀 있었습니다.


"후퇴는 용납할 수 없다. 각자가 부여된 준비를 하고 있으면 후퇴할 필요가 없는 것이고, 그 자리에서 싸우게 된다. 각자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화기와 탄약, 삽과 곡괭이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없다면 자기를 지킬 수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시간이 있어도 개인호를 파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손실을 입었다." - 훈시

하지만 그런 걸 그냥 봐 줄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미군의 목표는 절대 물러나지 않는다는 것, 어떻게든 사기를 끌어올려야 했습니다. 일단 새로 사단장이 된 처치 소장은 이런 병사들을 다독이며 방어를 준비합니다. 증원된 병력은 전부 마산으로 쏠린 상황이니 이 곳을 막을 수 있는 건 자신의 24사단 뿐이었죠.

흥미로운 건, 나중에 알고보니 이 때 이들을 공격한 북한군 4사단의 병력은 7천명 정도, 미군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적었습니다.

북한군 1군단장 김웅은 역시 팔로군 출신으로 역시 나중에 다 숙청됩니다. -_-; 이 때 창녕 방면을 맡은 4사단이 큰 피해를 입고 낙동강 도하를 위해 준비가 필요한 시점이었지만 그는 8월 공세에 맞춰 4사단 역시 진군시킵니다. 사실 다른 사단들도 사정이 비슷하기도 했지만요. 4사단장 이권무 역시 팔로군 출신이었습니다. 그 동안 많은 피해를 입은 4사단이었지만 대전까지 점령한 사단으로 사기는 높았을 겁니다. 거기다 눈 앞의 미군은 대전에서 그들이 물리친 적 있었구요.

북한군 스스로도 제대로 준비가 안 된 공격이었고, 미군 역시 북한군의 사정을 대충 파악해 8월 중순은 돼야 공세가 시작될 거라 파악했습니다. 거기다 도로망이 엉망이라서 미군에 불리한 북쪽에서 공격해 올 줄 알았는데 정작 북한군의 공격은 남쪽이었습니다. 방어력이 약한 부분이었죠.

결과적으로 보면 허를 찔린 거죠.

http://www.army.mil.kr/history/낙동강방어선작전/주요전투/돌출부/5만지도.htm

주요 전장이 된 곳은 낙동강이 북한군 쪽으로 굽은 곳의 나루터와 그 후방의 고지를 중심으로 진행됩니다. 이 곳의 지형이 마치 여자의 유방과 닮았다 하여 낙동강 돌출부( - -)a라 이름 붙이게 되구요.

위에서 적었듯 미군은 전투력이 많이 남은 21연대를 창녕 방면에 배치하고 병력을 밀집합니다. 반면 34연대는 적이 오지 않을 거라 판단 비교적 영산 방면의 넓은 지역을 맡게 되었죠. 거기다 시간 부족으로 장애물을 제대로 설치하지 못 했고 적의 도하 가능한 지점 역시 제대로 파악하지 못 했습니다. 덤으로 수많은 피난민들이 몰려오면서 어려움을 겪게 되었죠. 북한군이 오기 전에 30만에 달하는 피난민들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나머지는 강을 건너지 못 하게 하고 일정한 지역을 정해 유도합니다. 이 수만 10만이었다고 합니다.

8월 5일 자정, 북한군이 강을 건너면서 전투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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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지역에서 적이 도하를 하고 있습니다. 아직 날이 어두워서 상황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낡이 밝으면 1대대를 투입시켜 상황을 확인하겠습니다." - 34연대장이 사단장에게

북한군은 부곡과 오항 나루터를 이용해 도하를 시작합니다. 대부분은 옷을 벗은 채 장비를 머리에 이고 어깨까지 미치는 강물을 건넜고, 일부는 뗏목을 이용해 장비를 옮겼죠. 미군은 오항 나루터 쪽에 경비병을 배치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부곡을 도하한 북한군은 곧 21연대에게 격퇴됐지만 오항을 도하한 적은 34연대의 빈 틈을 찌릅니다. 박격포진지가 무력화되고 이 방면의 3대대본부까지 위험해져 철수, 후방의 포병진지에까지 적이 이르게 됐죠.

34연대장 뷰챔프 대령은 이 때까지 상황을 낙관적으로 보면서 침투한 북한군을 역습하게 합니다. 목표는 적이 도하했다고 판단되는 박진 나루터까지 적을 몰아내는 것이었죠. 하지만 오히려 여기 투입된 병력과 1대대 지휘부까지 공격당하면서 34연대 전체가 무너질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해버렸죠.

http://www.army.mil.kr/history/낙동강방어선작전/주요전투/돌출부/clover.html
이 전투가 벌어진 곳을 클로버 고지라고 합니다. 지형을 보니 비슷하게 생겨서 그랬다는군요.

다행히 판단은 늦지 않았습니다. 처치 사단장은 적의 주공이 영산 방면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곧 사단 예비로 둔 19연대를 투입합니다. 이들에게는 오항까지 역습하라는 명이 떨어집니다. 이 때 300여명의 적을 포위 섬멸하는데 성공하면서 잠시 여유를 찾았지만 나루터를 점령하는 건 북한군의 방어로 실패합니다. 여기에 북쪽 부곡을 공격한 역습 병력 역시 실패했죠. 클로버 고지는 서서히 북한군의 손에 넘어가게 됩니다.

7일, 다시 미군은 19연대와 34연대를 동원해 역습을 시도합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실패합니다. 더위와 함께 식량과 식수가 부족했고 UN 공군의 오폭까지 당했기 때문이었죠.

당시는 킨 특수임무부대의 공격이 막 시작된 상황, 대구 방면의 적을 조금이라도 줄이려는 목적이 있었지만 오히려 북한군은 미군의 주력이 집중된 틈을 타 약한 곳을 찌른 상황이 돼 버린 것이죠. 여기에 동해안 쪽의 상황이 악화돼 가면서 여기 투입돼 있던 국군 17연대도 그 쪽으로 보내야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워커는 이에 맞서 마지막 예비대인 2사단 9연대를 투입합니다.

하지만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북한군은 이미 클로버 고지를 넘어 오봉리 능선까지 진출해 영산을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9연대는 여기에 급히 투입됐다가 대패했죠. 그나마 10일에 다시 총공격을 개시해 클로버고지 일부를 탈환하는 데는 성공합니다.


처치 소장은 다시 병력을 모아 역습을 계획합니다. 몇 번째일까요 -_-; 9연대와 34연대, 19연대에 21연대에도 1개 대대를 빼서 나름 병력이 갖춰졌고, 9연대장 힐이 지휘를 맡게 됩니다. 힐 특수임무부대였죠.

그런데...

이 때 북한군은 오항과 박진 나루터에 수중교를 만드는 데 성공합니다. 이렇게 11일 새벽까지 대규모 병력이 도하하는 데 성공했죠. 그들은 미군의 공격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11일 아침, 공격개시선에서 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힐 특수임무부대는 북한군에 기습을 당해 와해됩니다.

북한군의 진격은 계속돼 낮이 되면서 24사단과 25사단의 경계인 남지교을 뺏기고 영산에 북한군의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했죠. 처치 소장은 투입할 병력이 없어 공병대대를 투입해야 했고, 워커 중장은 정말 예비 중의 예비인 27연대 2대대를 투입합니다. 이들은 피난민에 뒤섞인 적의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어가면서 겨우 적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죠. 그 동안 적의 게릴라가 영산 동쪽까지 침투해 주보급로가 끊기고 이걸 격퇴하려고 보낸 부대 역시 북한군에 전멸합니다. 나중에 가면 행정병과 취사병, 헌병까지 동원해야 했죠. 여기다 21연대가 맡고 있던 현풍 일대에도 적이 도하하는 게 발견됩니다. 북한군 10사단이었습니다. 다행히 이들은 견제 역할만 맡은 건지 더 진격해 오진 않았습니다.

이 쯤 되면 낙동강이라는 방어선의 의미가 완전히 사라집니다. 적은 영산을 점령했고, 미군은 곳곳에서 끊기고 있었습니다. 킨 특수임무부대의 반격이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혔음에도 실패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이들이 진격해 진주부터 사천까지를 점령했다 해도 영산이 뚫리고 적이 밀양에까지 이르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게 되는 거니까요. 밀양은 방어를 위한 곳이 아니라 한국을 버리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 곳이었습니다. 따지고보면 누가 먼저 병력을 빼느냐는 치킨 게임이었고 미군은 이 싸움에서 졌죠.

워커 중장은 또 예비인 27연대 주력을 여기에 투입합니다. 이들은 13일에 도착해 공병대대와 함께 영산 주변의 북한군을 몰아내는데 성공했죠.

이런 부분에서 예비대의 중요성이 나타납니다. 미군은 아군의 방어가 약한 곳에 예비대를 아낌 없이 투입했고, 그나마 여유가 있는 곳에서 병력을 뽑아 다시 예비대를 두었죠. 그 수가 적더라도 유사시 투입할 수 있는 부대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큽니다. 잘못됐으면 밀양까지 뚫릴 뻔했던 상황은 이렇게 겨우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14일 다시 힐 특수임무부대에 총공격을 명령했고 클로버 고지에 도달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북한군의 반격에 다시 물러나야 했습니다. 특히 21연대 1대대는 적에게 포위돼 전멸당했죠. 날씨가 안 좋아서 100여기를 투입하기로 한 폭격 계획이 취소된 것도 컸습니다. 이것으로 힐 특수임무부대는 전투력을 거의 상실합니다.

15일, 이런 상황까지 이르면서 처치 소장은 공격 중단을 건의합니다. 상황이 좀 안정되긴 했지만 더 이상 뭐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였죠. 하지만 워커 중장은 직접 사령부를 방문, 계속 공격할 것을 명령합니다. 이를 위해 준비된 것이 진주를 향해 진격 중이던 해병대였습니다. 킨 특수임무부대의 반격 작전을 완전히 포기한다는 것이었죠.

아직 해병대가 도착하지 않았지만 여기에 힘을 얻은 힐 특수임무부대는 다시 공격을 시작, 하지만 역시 실패합니다. -_-;

그나마 희망은 있었으니, 4사단의 공격력도 거의 떨어진 것이었죠. 이후 생포된 북한군 포로는 14일에 탄약보급이 두절됐고 점령지역에서 동원한 의용군들도 도주했다고 진술했습니다. 이 시기 해병대가 도착한 것이죠. 여기에 2차대전 때 큰 충격을 주었던 VT 신관을 장착한 포탄이 도착합니다. 이제 반격할 때였죠.

17일, 해병대와 9연대를 중심으로 한 공격이 시작됩니다. 이 때 북한군은 전차까지 동원해 가며 맹공을 펼쳤지만 M-26 퍼싱 전차와 공군, 포병의 활약으로 무난히 격파합니다. 이어 시작된 반격에서 북한군은 끝까지 버티며 미군에 큰 피해를 안겼지만 그럼에도 계속 진격해 가면서 낙동강을 회복하는 데 성공했죠. 18일까지 소탕전이 계속됐고, 19일에는 임무를 마친 해병대가 창원으로 이동해 예비대가 되면서 작전은 끝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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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북한군 4사단의 피해를 전사 1300으로 잡고 있습니다. 여기에 점령지에서 징병한 의용군들의 도망으로 병력은 극히 떨어졌죠. 북한은 이 곳의 진격이 성공하자 12개 대대를 추가로 투입하면서 밀어붙였지만 이 싸움에서 미군은 결국 승리하는데 성공합니다. 이후 예비로 뒀던 2사단과 신편한 9사단이 도착했지만 이미 상황은 정리된 뒤였죠.

이후 4사단은 그 피해를 복구하지 못 하고 낙동강 전선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한편 이긴 미군 역시 피해가 너무 컸습니다. 문제는 병력을 채워야 되는데 그게 힘들었죠. 증원군은 계속 오고 있었지만 전투력이 많이 떨어진 부대에 아무렇게나 집어넣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구요. 이를 위해 이승만과 맥아더 사이에 구두 협약이 성사됩니다.


카투사였죠.

덩치가 크고 영어를 할 줄 아는 이들을 뽑아 미군에 지원하기 시작한 것이죠. 미군에 있으면 일단 주는 게 많았기에 지원하는 이도 많았다고 합니다. 9월 초에 이미 그 수가 1만명에 이르렀죠.


한편 차가 가기 힘든 고지들에 보급품을 수송하기 위해 노무자들이 동원됐는데, 지게의 모양이 A처럼 생겼다고 해서 미군은 A 부대라 불렀습니다. 우리야 뭐 그냥 지게부대라 불렀구요. 북한군의 공격이 곳곳에서 있었기에 이들 역시 많은 희생을 당했죠.

아무튼 이렇게... 미군은 많은 피를 흘리며 낙동강 돌출부를 지켜냅니다. 그저 국가의 명령에 따랐던 이들, 돈이라도 좀 벌까 하면서 왔던 이들, 가기 싫었는데 어쩔 수 없이 왔던 이들, 한국을 꼭 지켜야 낼 우방이라 여겼든 동양의 작은 나라라 여기며 무시했든 많은 이들이 여기서 목숨을 던진 것이죠. 아무래도 국군 위주로 서술하기에 잘 알려지지 않지만, 이들의 피로 이 나라가 살 수 있었습니다. 이후 24사단은 마침내 도착한 2사단과 교대하게 됩니다. 북한 역시 4사단 대신 2사단과 9사단이 전투에 투입되면서 8월 31일부터 전투가 다시 시작됐죠. 이 때도 영산이 다시 위협받긴 했지만 이전보다는 잘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한편으로 미군도 슬슬 미쳐가기 시작합니다. 피난민 곳곳에 침투한 적이 무방비 상태일 때 공격하면서 안 그래도 더운 날씨에 긴장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죠. 심지어 자주 놀러와서 초콜렛 등을 주던 아이들이 사라질 때마다 적의 포격이 아주 정확하게 왔고, 나중에 알고보니 그 애들이 무전기를 가지고 있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말이 잘 통하지 않던 나라에서 계속 당하는 게릴라 공격에 시달린 것이었죠. 그 결과는 곳곳에서 나타납니다. 증오는 이미 전염되고 있었습니다.

현장에서 직접 싸우던 장병들은 물론 장군들에게도 북한군에 대한 공포가 계속됩니다. 일단 막는 건 어느 정도로 할 수 있는데 반격을 어떻게 하느냐였죠. 이 때 미군은 반격작전 때 38선까지 가는 데만도 아군의 피해가 최대 15만은 날 거라고 예측했습니다. 이 때문에 상륙작전은 더욱 탄력을 받게 됩니다. 맥아더는 인천 상륙을 주장하며 이 작전이 10만의 장병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주장합니다. 인천을 반대하던 이들도 이대로 간다면 미군의 피해가 그만큼 클 것이라는 것에는 이의를 달지 못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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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이제...

다부동으로 가 보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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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아빠윌셔
12/08/26 15:52
수정 아이콘
다...

다음편은 멘붕 대비가 필수인겁니까;;
하이zin
12/08/26 16:20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슬러거
12/08/26 18:27
수정 아이콘
아.. 드디어 다부동으로....
Je ne sais quoi
12/08/27 09:37
수정 아이콘
카투사의 역사가 이 때 시작된 것이었군요. 그나저나 다음 편은 정말...
12/08/27 09:54
수정 아이콘
일어야 못하는 사람이 더 적었겠지만 1950년에 영어 할 줄 아는 청년이 1만명이나 되었다니 놀랍네요.
지금 초등학생들 수준의 영어를 구사했을까요? 아니면 의외로 하나같이 다들 유창했을리.... 가-_-;;;
blue wave
12/08/27 12:54
수정 아이콘
이제 왔군요.. 다부동... 근데 다부동에는 우리 방어 병력이 더 적었던 건가요? 백선엽 회고록을 보면 북한군이 더 많은 것처럼 보이더라구요.
12/08/27 13:41
수정 아이콘
Unofficial agreement between General MacArthur and President Lee Seungman

지금까지 60년 동안 지속되고 있는 비공식 프로그램이 KATUSA죠...
아마도 당시에 카투사는 극소수를 제외하면 ABCD , How are you ? 정도 아는 수준이 대부분이었을거라고 추측합니다.
눈시BBver.2
12/08/27 15:16
수정 아이콘
그런 수준도 필요할 정도로 미군이 급했다는 거겠죠
근데 하고 보니 양 쪽 다 얻는 게 많아서 지금까지 이어졌을 거구요. 미군은 자국인 한 명이라도 덜 보내도 되니까, 한국은 이러면서 미국 방식 등 얻을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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