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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09/02 14:08:37
Name 눈시BBver.2
Subject [일반]  낙동강 - 9. 다음 전장으로


"부하들은 기적적인 승리를 만들어냈다. 나를 주저앉히던 억세고 강한 손길의 부하들은 마침내 고지를 탈환했다. 죽음을 무릅쓰고 돌격한 부하들은 산을 넘어오던 적들을 모두 그 너머로 쫓아냈다."

이 위험한 돌격의 끝은 참 싱겁습니다. 뒤따라 온 부하들은 백선엽을 붙잡은 후 돌격했고, 전투는 단 30분만에 끝났죠. 백선엽은 이를 아군의 증원군이 나타난 것으로 오해해서 물러난 것이라고 분석합니다. 아주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멀리 도망갔던 국군이 알아듣지도 못 할 고함을 지르며 뛰어오니 무서울 만도 했습니다.

진지를 정리하고 돌아온 후 마이켈리스 대령이 직접 찾아옵니다. 시작은 미안하다였죠. 미군은 한국군은 신병(神兵)이라느니 하는 칭찬부터 사단장이 소대장 짓 하는 건 처음 봤다는 좋다는 건지 나쁘다는 건지 모를 말까지 하며 신기해 했다고 합니다. 아니 지금 우리 눈으로 봐도 신기하긴 하니까요.

이렇게 1사단은 미군의 신뢰를 얻습니다. 그 대가는 아주 컸죠.

정말 큰 위험이 지나가면서 전황은 호전됩니다. 이미 북한군 15사단이 빠진 상태였으니까요. 이후에도 혈전은 계속됐지만 대구가 뚫린다는 걱정은 사라집니다.

... 미군과 교대할 때까지는 말이죠. 얘네가 3일 만에 뚫려버려서 -_-;;;; 이 덕분에 1사단의 가치는 더 올라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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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27연대 앞에는 갑자기 백기가 나타납니다. 뭔가 싶어 정찰대를 보냈지만 딱히 투항한 병력은 없었죠. 적의 기만책으로 밝혀집니다. 마이켈리스는 적이 아군을 안심시킨 후 야간 공격을 할 거라 판단, 전방에 지뢰를 잔뜩 뿌려놓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적이 나타났죠. 결전이라 생각될 정도의 대규모 공격이었습니다.

이 날 개전 후 최초의 전차전이 벌어집니다. 5시간이나 시작된 전차전은 미군의 승리로 끝났죠. 미군은 불덩어리들이 교차하는 걸 보고 볼링을 떠올렸고, 이 전투의 이름은 "볼링장의 전투"라 불리게 됩니다. 백선엽은 이런 미군의 여유를 부러워 했구요. 날이 밝은 후 미 정찰대는 파괴된 적 전차 9대와 자주포 4문, 1300여구의 적 시체를 확인합니다.

+) 이걸 당구장의 전투라 적어놓은 걸 봤습니다. (...)

다음날 아침에는 참 기쁜 손님이 옵니다. 13사단 포병연대장이 항복해 온 것이었죠. 13사단장이 포격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그를 욕 했는데 공군의 폭격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한 상황이 돼 버려 처지를 비관해 투항한 것이었죠. 그대로 있었으면 책임을 물어 처형됐을지도 모르니까요. 덕분에 적 포병이 숨겨진 곳을 알게 됩니다.

22일 밤에도 야습이 있었지만 쉽게 막아냈고, 23일을 기해 다시 공격이 시작됩니다. 이 과정에서 증원 온 10연대 2대대가 후퇴하긴 했지만 곧 11연대 2대대가 투입돼 막아냈고 25일이 되면서 가산산성의 적을 일소해 측면의 위험을 없애는 데 성공했죠. 11연대 주력과 미 27연대 역시 전차를 앞세워 진격, 신주막까지 진출합니다.

이렇게 11연대는 Y선 탈환에 성공했고, 미 27연대는 26일부로 1사단 증원임무에서 해제돼 자신의 25사단으로 향합니다. 북한군 13사단은 26~27일동안 다시 공격하지만 막아냈고, 오히려 12연대 수색대가 13사단 사령부를 습격하면서 사기가 더 떨어졌죠. 북한군도 11연대 지휘소를 공격했지만 근처에 있던 미군의 도움으로 수월히 막아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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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산-수암산을 공격하던 12연대는 20일에 가했던 공격도 실패하면서 방법을 바꿉니다. 야습이었죠. 23일 03시에 특공대를 짜서 침투한 것이었습니다. 공군와 포병의 지원이 없는 야간에 공격해 올까 하며 방심했던 북한군은 한순간에 밀립니다. 무려 8번의 공격 끝에 성공한 것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애초에 패턴을 바꿨어야 했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너무 주간에 똑같은 방식으로 공격해서 많은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죠. 다만 그 동안의 공격으로 북한군의 피해도 컸고 13사단이 여기까지 맡게 되면서 적이 더 약화됐다는 점도 감안해야겠죠.


왼쪽의 839고지를 중심으로 한 바위산이 12연대의 구역입니다. 대체 여기서 어떻게 싸워야 됐을까요... 오른쪽은 674고지부터 도로가 11연대와 미 27연대가 싸웠던 곳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많은 피가 흘렀던 유학산 전투는 이렇게 끝이 납니다.

한편 수암산은 결국 탈환하지 못 합니다. 적이 수암산만은 내놓을 수 없다고 강력히 맞서서였죠. 오히려 미군에 진지를 인계할 때를 대비해 너무 무리하게 작전을 짠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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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연대 방면의 적은 20일부터 공격을 재개합니다. 이 때 국군은 밤에 적의 포격 섬광을 확인한 후 낮에 대포병 사격 및 공중 공격을 의뢰하는 방식을 썼고 이게 잘 먹혔죠.

15연대는 154고지 탈환을 준비하면서 우선 적을 계속 기다립니다. 적은 야간에 공격하면 포병의 지원이 별로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이 때는 미군에서 포병관측반과 전방항공통제반을 파견해 충분한 화력 지원을 할 준비가 된 상태였죠. 적은 계속 쏟아져 들어왔지만 아군의 십자포화에 걸려서 큰 피해를 입을 뿐이었습니다. 이 가운데서도 아군의 피해도 누적돼 미군 관측장교가 전사할 정도였죠.

적이 지쳤다는 걸 확인한 연대는 미군의 지원포격과 함께 진격, 154고지를 탈환합니다. 23일이었습니다. 이렇게 15연대 지역의 전투는 끝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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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에는 워커 중장과 함께 콜린스 미 육군참모총장이 옵니다. 트루먼 대통령이 맥아더의 손을 거치지 않고 직접 현지 상황을 보기 위해 보낸 것이었죠.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 그가 비관적으로 말 하면 맥아더가 아무리 나서더라도 막을 수 없을 테니까요. 다행히 그는 흡족해 하며 사진을 찍고 갑니다. 아찔했던 부분은 그가 떠난 후 그 곳에 적 포탄이 떨어졌다는 것이죠. 콜린스부터 워커, 8군 작전참모, 정일권, 백선엽까지 13개의 별이 한꺼번에 떨어질 뻔한 일이었습니다.


20일부터 30일까지 낙동강 전선에는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미 2사단의 주력이 도착해서 미군이 여유가 생긴 것이었죠. 미군은 1사단을 조금이라도 쉬게 해줄 겸 해서 미 1 기병사단을 다부동으로 보냅니다. 대신 영국군 27여단이 남쪽을 맡았고, 낙동강 돌출부에서 혈전을 벌였던 24연대는 미 2사단과 교대하죠. 개전 초에 가장 먼저 투입돼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24사단은 이제 좀 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1사단은 6사단 지역으로 이동, 적 1사단 주력과 맞붙게 되었으며 국군이 맡는 영역이 축소되면서 북쪽의 적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됩니다. 미군에 인계하기로 한 날짜는 29일, 하지만 이 과정에서 잡음이 생깁니다. 참... 얼척 없는, 그리고 슬픈 잡음이었습니다.

"우리 대대와 미 기병연대가 교대할 때 미군들이 전장 청소 (시체 정리)를 해 달라고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진지를 인수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교대시간에 철수하였다. 때마침 적이 공격해 와 고지를 점령하자 미군은 우리보고 뺏아 줘야 진지를 인수하겠다고 옥신각신하였다. 결국 우리가 공격해서 탈환한 다음 진지를 인계하고 이동하였다." - 15연대 1대대 작전장교 이종현 중위

이건 곳곳에서 벌어집니다. 참... 뭐라고 해야 될까요.

어느 곳이든 피아의 시체가 쌓여 있었습니다. 전과가 얼마나 되는지 확인도 못 하고 다음 전투를 준비하며 그 시체를 치워야 했고, 이름도 확인 못 한 채 전우의 시체를 묻어야 했습니다. 매일의 경과를 보고하는 "일보"를 제출하지 못 해 육본에서 사람을 보냈는데 직접 확인하라고 보내니 산을 오르지도 못 했다고 합니다. 시체 썩는 냄새 때문에요. 이후에는 그런 요구를 하지 못 했다고 하죠.

이렇게 국군의 다부동 전투는 끝납니다. 하지만 주저앉아 울 시간도, 마음 놓고 쉴 시간도 없었습니다. 다음 방어선인 팔공산에서도 전투는 계속됐으니까요. 한편 미군의 다부동 전투는 이제 시작이었습니다. 미국 위키백과의 다부동 전투도 국군 얘긴 없이 이것만 다루고 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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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부동 전적기념관 구국용사충혼비, 1995

"대한민국의 최후의 승리를 빈다. 내가 죽더라도 내 뒤를 따를 용사들은 많으니" - 15연대 3중대장 신현상 대위, 전사

"야간 전투시에는 호 속에서 머리를 만져 보고 육박전을 하였다. 왜냐하면 피아를 구별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는 북한군은 머리를 박박 깎아 있었고 아군은 머리를 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 15연대 3중대장 이신국 중위

"1일간에 보충병력을 5~600명을 받고 한번 전투를 치르고 나면 반 정도밖에 남지를 않았다. 시체를 땅 파고 묻을 시간이 없이 그대로 두고 싸웠고 낙동강 물이 적의 시체로 붉게 물들었다." - 15연대 3대대장 최병형 소령

"그때 나는 파편을 맞고 정신을 잃고 있었다. 깨어보니 앰브랜스안에서 주사를 맞고 있었다. 적의 희생도 많았는데 대부분이 의용군출신들이었다." - 12연대 3대대본부 정영조 상사

"유학산 전투시 대구훈련소에서 보충병이 많이 왔는데 훈련이 부족하여 분대원들을 지휘하는데 애로가 많았다. 그러나 야간싸움의 육박전때에는 다들 용감하게 싸웠는데 서로 머리를 만져보고 대검으로 찌르고 하였다. 이때에 나도 4명을 칙살하였다." - 12연대 분대장 정규영 일등병


2165명의 전우 명각비

"우리 2대대가 8월 14일에  천평에 있는 355고지에 배치되어 있었는데 적이 산을 타고 들어오는 탓으로 2일간이나 고립되어 보급을 받지 못하였다. 그래서 솔잎을 뜯어서 먹기도 하였다." - 11연대 2대대장 차갑준 소령

"또 한가지는 미 제27연대가 다부동 골짜기에 들어와서 싸울때인데 어느 미군 대대장이 자기 병력들이 후퇴하는 것을 막느라고 지휘하다가 적의 포탄에 전사하였는데 그 대대장은 참으로 용감하였다. (중략) 여하간 2대대 중대장 가운데 다부동전투에서 살아나온 사람은 나 혼자였던 겁니다." - 15연대 6중대장 김국주 대위


백선엽장군 호국구민비 - 1951. 3 칠곡군 주민

"지금도 내 가슴 속에 남아 있는 장면이 있다. 재일동포 부대원이었다. 공격을 시도하고 있던 순간에 그가 총에 맞았다. 그는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있었는데, 나를 보면서 “중대장님, 먼저 갑니다”면서 쓰러졌다. 웃는 얼굴이었다. 조국을 지키기 위해 대한해협을 넘어온 재일동포 청년의 마지막 웃음은 내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모습으로 남아 있다." - 12연대 1대대 3중대장 전자열

"내가 맡았던 다부동 전선 서부의 328고지 위에서는 한참 싸움이 벌어질 때 온전한 시체가 남아 있질 않았다. 모두 찢기고 해진 시신 조각들이 나무나 바위 등에 걸쳐 있는 상태였다. ‘시체를 쌓는다’고 하지만 그런 말은 틀렸다. 부패한 시신은 절대 쌓이지 않는다. 미끄러져 흘러내리기 때문이다. 건빵 먹는 것을 보고 고참병인지 신병인지 판단할 정도다. 병사들은 건빵 두 봉지를 배급 받았는데, 고참병은 한 알 두 알씩 꺼내서 천천히 먹는다. 신병은 배가 고파 마구 먹는다. 고참병들은 건빵을 먹는 대로 갈증이 몰려 올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천천히 먹으면서 갈증을 피한다. 신참은 허겁지겁 먹고 목이 메어 물을 마시려고 산에서 내려가다가 총격으로 목숨을 잃는 일이 잦았다.

당시 국군 1사단은 태반이 전라도 출신 병력이었다. 사단의 첫 출발지가 호남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병으로 충원되던 병력의 대부분은 대구를 비롯한 경상도 병력이었다. 말하자면 다부동 전투는 영·호남이 한데 뭉쳐 적을 막아낸 싸움이다. 그때는 영·호남의 지역 감정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지금까지 16년 동안 다부동 전선을 파서 유해를 발굴하고 있는데, 지금도 끝이 없을 정도로 전사자 유골이 나온다. 요즘도 발굴 작업을 하다 보면 유해들이 발견되는데, 온전하게 나오는 법이 없다. 여기저기 널려진 상태로, 토막으로만 나온다. 심한 곳은 땅 밑에서 20㎝만 파도 유해 일부가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유해 발굴 작업은 전체 전사자의 10% 정도를 찾아낸 것에 불과하다." - 15연대 1대대 3중대 황대형 중사


유학산 전사자 유해발굴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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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농성 끝에 나와 보는 다부원은 얇은 가을 구름이 산마루에 뿌려져 있다.
피아 공방의 포화가 한 달을 내려 울부짖던 곳
아 아 다부원은 이렇게도 대구에서 가까운 자리에 있었고나.
조그만 마을 하나를 자유의 국토 안에 살리기 위해서는
한 해살이 푸나무도 온전히 제 목숨을 다 마치지 못했거니
  
사람들아 묻지를 말아라 이 황폐한 풍경이 무엇 때문에 희생인가를....
고개 들어 하늘에 외치던 그 자세대로 머리만 남아 있는 군마의 시체.
스스로의 뉘우침에 흐느껴 우는 듯 길 옆에 쓰러진 괴뢰군 전사.
일찍이 한 하늘 아래 목숨 받아 움직이던 생령(生靈)들이 이제
싸늘한 가을 바람에 오히려 간 고등어 냄새로 썩고 있는 다부원
진실로 운명의 말미암음이 없고 그것을 또한 믿을 수가 없다면
이 가련한 주검에 무슨 안식이 있느냐.

살아서 다시 보는 다부원은 죽은 자도 산 자도 다 함께
안주(安住)의 집이 없고 바람만 분다.

- 조지훈, 다부원에서 -

"괴뢰군" "뉘우침"에서 은근히 보이는 반공 의식이 훼이크로 보일 정도로 전쟁의 참상과 피아를 가리지 않고 죽음 그 자체를 추모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을 기억합시다. 스스로 왔든 끌려왔든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 바쳤던 분들을요. 북한군이라도 기억합시다. 그들의 사상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들의 선택이 틀렸더라도 그들의 죽음 역시 슬픈 거니까요. 끌려온 이들도 많았구요. 이제 그럴 정도의 마음의 여유는 있으니까요. 그리고... 같이 싸워 줬던 미군 역시 마찬가지구요.

더 이상 긴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자... 다부동 전투를 마무리 짓겠습니다.

1사단은 다부동을 떠납니다. 수많은 전우와, 함께 싸워 준 노무자들의 시체를 남긴 채로요. 그리고 다부동 전과 후, 1사단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1사단이 정말 잘 한 것은 역시 무너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병력이 많아도 장교들이 제대로 못 하면 그 부대는 무너집니다. 하지만 세 배나 되는 적을 두고 그렇게 큰 피해를 입었으면서도 끝내 무너지지 않았죠. 이 부분은 참전 용사부터 1사단을 거쳐간 많은 분들이, 그리고 전쟁 속의 국군에서 자랑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실책 역시 많습니다. 그리고 그 실책 하나하나로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백선엽을 비롯한 1사단 지휘부는 그런 희생으로, 그들의 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1사단은 반격 작전을 처음으로 성공했고, 중공군의 첫 공세 때 7사단과 함께 적의 맹공을 견뎌낸 부대가 됐으며, 이후 계속된 공세에서 중공군을 물리친 첫 국군 부대가 됐습니다. 국군 중 가장 공격력이 강했던 건 역시 6사단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1사단은 어떤 상태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안정성을 자랑했죠.

다부동 전투에서 얻은 최고의 소득은 미군의 인정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북진 과정에서 1사단은 미군 부대를 "배속" 받습니다. 이 의미는 큽니다. 애초에 미군이 자기 부대를 다른 나라 부대에 맡기는 것 자체가 일어나기 힘든 일이죠. 그것도 영국, 프랑스 같은 강대국이 아닌 자기들이 키워주는 신생국 부대에게 맡긴다는 것은요. 이 정도로 미군이 1사단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딱히 신기한 일은 아닙니다. 유사시 지금의 주한미군부터 한국에 증원되는 모든 미 육군은 국군 장성이 지휘하니까요.

북한군의 공세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아군은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지금처럼만 싸우면 절대 밀리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지금처럼 끝도 없이 막는 것이 아닌 확실한 목표가 생겼다는 것이죠.

9월 15일, 이 때까지 방어선을 지킬 수만 있다면 우리의 승리였습니다. 그리고 15일부터는 총반격이 계획돼 있었습니다.

북한군 최후의 공세, 9월 공세에서 김일성은 경인 지역을 방어하는 병력까지 달달 긁어 낙동강 전선에 투입합니다. 맥아더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았지만, 위기는 아직 끝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위기는 인천상륙작전의 취소까지 고려할 정도의 큰 위기였죠.

다음 편부터 다시 남쪽으로 가 다른 전선들을 살펴본 후 영천으로 가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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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시26분
12/09/02 14:34
수정 아이콘
잘 읽고갑니다.

지금도 내 가슴 속에 남아 있는 장면이 있다. 재일동포 부대원이었다. 공격을 시도하고 있던 순간에 그가 총에 맞았다. 그는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있었는데, 나를 보면서 “중대장님, 먼저 갑니다”면서 쓰러졌다. 웃는 얼굴이었다. 조국을 지키기 위해 대한해협을 넘어온 재일동포 청년의 마지막 웃음은 내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모습으로 남아 있다

글로만 막연히 접하던 전쟁 이야기에
이런 경험담이 들어가니 가슴에 확 와닿는군요. ㅜㅜ
12/09/02 14:57
수정 아이콘
확실히 현대사라 그런지 이런저런 자료들이 많네요
풀빵군
12/09/02 15:57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슬픈 이야기들이어요.......
참, 그런데 중간에 나오는 전술지도에서는 고령-대구를 잇는 도로상에 포진한 영국군 부대의 전술기호가 여단인데, 그 아래 본문 글에는 영국군 27연대로 쓰여져 있네요. 영국군 27 여단이 맞지 않을까요?
Je ne sais quoi
12/09/02 23:05
수정 아이콘
에고 잘 읽었습니다. 참 마음이 아프고 감사하네요.
blue wave
12/09/04 11:34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영천 전투를 끝내고 나면 이제는 대반격이군요!!!
12/09/04 20:36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 다부동 전적 기념관 같은 곳에 갔었던 기억이 있는데, 그 때 좀 까불지 말고 자세히, 하나하나 눈에 담아둘 걸 하는 후회가 드네요.

한가지 의문은 유학산 839 고지가 지도 좌상단의 팔각정 939 고지로 되어 있는 부분 맞나요?

읽는 데 839 고지가 없더라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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