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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09/13 23:05:16
Name 눈시BBver.2
Subject [일반] 낙동강 - 10. 9월 15일까지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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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계획과 충고를 다 들을 필요가 없다. 우리는 우리식대로 싸우면 된다." - 9월 8일

9월, 모택동은 김일성에게 낙동강의 교착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후퇴하여 반격해 오는 아군을 각개격파하라고 조언합니다. 이외에 참 자세한 조언이 있었지만 나중에 다루기로 하고, 김일성은 이 모든 것을 무시합니다. 그는 8월 23일 소련에서 도착한 전차 41대를 모두 낙동강 전선에 쏟아부었고, 서울 방어를 위해 만든 9사단을 연대 하나만 남기고 모두 낙동강으로 보냅니다. 그 자신부터가 남으로 내려와 각 사단을 독려했고, 김책은 대구 근방까지 내려와 작전을 지휘하다가 반격 과정에서 아군에 잡힐 뻔 하기도 했죠.

하지만 북에서도 남에서도 인적 자원은 고갈되고 있었습니다. 설령 징발해도 사기는 낮을대로 낮은 상태, 이들에게 제대로 된 보급을 해 줄 수도 없었습니다.

9월 1일, 아군은 국군 6개 사단 9만 명이 넘는 병력을 보유했고 미군은 4개 사단 8만 7천에 달하는 병력을 보유합니다. 전차는 무려 500대에 달했습니다.

이런 아군을 뚫으려 했던 북한군은 13개 사단에 전차사단 하나, 기갑여단 두 개를 보유했지만 병력은 9만 8천에 불과했고 전차 역시 100여대 정도였다고 합니다.

병력과 장비, 화력으로 본다면 질래야 질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진 겁니다.

김일성은 이런 가운데서도 가진 모든 것을 낙동강에 쏟아부었고, 이는 아군이 오히려 북한군을 계속 두려워하는 상황을 만들어 버립니다. 김일성은 이런 상황에 더 현혹돼 버립니다. 조금만 더 밀면 이길 수 있다구요. 북한군 입장에선 미군이 투입된 것이 위기고 그럼에도 미군을 밀고 낙동강까지 간 게 절정이었을 겁니다. 이제 부산만 점령하면 결말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겠죠. 마지막의 마지막의 공격, 김일성은 그렇게 믿었습니다. 아군 역시 이런 공세에 북한군이 여전히 강하고 여유가 있다고 느꼈죠.

아군을 밀어붙인 건 결국 이런 "의지"였습니다. 하지만 8월 공세에서 막을 수는 있다는 걸 알게 됐죠. 병력도 화력도 아군이 월등했습니다. 북한군에 뒤지지 않는 의지만 있다면 막을 수 있는 상황이었고, 그들은 그렇게 했습니다.

미군으로서는 세계대전에 이어 자신들의 힘을 뽐낼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들이 믿는 "자유"의 힘, 처음에는 독일에 밀리고 일본군에 밀렸지만 그들은 마침내 승리했으며, 그 다음 상대인 공산 세력과도 처음에는 밀렸지만 우리가 마침내 이길 것이다는 생각이 감돌았을 겁니다. 15일까지만 버티면, 그 때까지 이 낙동강 전선에서 버틸 수만 있다면 말이죠. 슬슬 한반도에 도착한 UN군 역시 별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국군은 이 9월 공세에서 최고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영천 전투의 의의는 단지 마지막 위기를 막아냈다는 것이 아닙니다. 미군의 별다른 도움 없이 북한군과 군단급 전투를 벌여 이겼다는 것이죠. 여기서 욕할 만한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 나라를 위해 싸웠고, 그냥 죽을~때까지 막는 것이 아닌 현대전에 어울리는 작전을 짰으며, 이겼습니다. 이 때의 모습만 본다면 국군이 슬슬 현대전을 치룰 정도의 군대가 돼 간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낙동강 방어선이 최악의 위기면 인천상륙작전 및 반격이 절정, 북진 통일이 결말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 뒤에 나타난 것은 정말 최악, 막장의 모습이었죠. 미군이 한국인은 유전자 레벨에서 중국인에게 공포를 느낀다고 평할 정도로요. 전투 뿐만 아니라 모든 것에서 참 최악이었습니다. 6.25를 얘기함에 있어 낙동강-북진까지를 강조한 후 중공군 개입 이후를 별 설명 없이 넘기는  이유가 이거겠죠. 강조하자니 국군의, 한국의 나쁜 모습만 보이니까요.


... 모택동이라네요.

아직까지는 북한군의 우세로만 보였던 낙동강 전선이 만들어질 무렵부터 한-만 국경에는 이미 대규모 중공군이 배치됩니다. 아직 이 전쟁에 끼어들 거라고 결정이 난 건 아니었지만, 이미 개전 전부터 발을 깊게 들인 그들이 북한을 포기할 순 없었을 겁니다. 아군은 모르고 있었지만 말이죠.


스탈린은 그런 상황을 참 흥미롭게 보고 있었고 말이죠 (...) 미국과 중국 둘이 싸우면 자기에게만 좋다구요. 하지만 그 혹은 소련이 이 전쟁에서 많은 걸 얻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제 일본은 살았다!"

이 전쟁에서 가장 많은 걸 얻은 건 역시 일본이겠죠 -_- 에휴

자... 그럼 남쪽부터 다시 가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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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an TF가 망한 후 마산 방면은 다시 25사단에게 맡겨집니다. 미 25사단장 킨 소장은 주요 방어선에 24연대와 35연대를 남북으로 배치합니다. 여기 동원된 건 북한군 6, 7사단이었습니다. 6사단은 진주에, 7사단은 의령에 집결해 공격을 준비했죠. 이들의 최종 목표는 부산으로 진출, 삼량진과 구포(여기 우리 집 있는데 ㅠㅠ) 선상에서 아군의 보급로를 완전히 끊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마지막의 마지막 목표는 부산 완전 점령이겠죠.

북쪽의 미 24사단과 연결되는 35연대의 경우 비교적 수월히 막아냈습니다. 문제는 남쪽의 24연대였죠.


주요 전장이 되었던 곳은 서북산과 전투산(여항산) 일대, 특히 서부산은 바위와 절벽이 많아 정상까지 가는데만 6~8시간이 소요됐다고 합니다. 북한군은 일찌감치 이 곳을 점령했고, 미군이 자랑하는 공군도 여기에 큰 타격을 주지 못 합니다. 네이팜탄까지 쏟아부었지만 별 피해를 주지 못 했다고 하죠.

북한군의 총공세는 8월 18일에 시작됐고, 전투산까지 밀렸지만 공군의 계속되는 도움으로 탈환하는데 성공합니다. 여기에 5연대의 증원으로 서북산까지 탈환하는데 성공했죠. 이 서북산은 8월이 끝날 때까지 주인이 무려 19차례나 바뀌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진지가 둟렸음에도 홀로 남아 포격을 지원한 핸드리치 상사의 이야기가 남아 있죠.

8월이 끝나가면서 미군은 북한군을 몰아내게 됩니다. 이 때 국군 1사단에 지원 갔던 (그 전부터 고생 많이 했던) 27연대가 복귀했고 25사단에 배속된 5연대가 24사단으로 배속됐죠. 킨 소장은 27연대를 사단 예비로 둡니다.

한편, 8월 17일에 김성은 부대라 불리던 해병대가 통영 상륙 작전을 벌입니다. 이들은 겨우 1개 중대로 북한군 대대 병력을 격파하고 통영을 탈환하면서 그 유명한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죠.  


"그들은 귀신도 잡을 수 있을 정도로 용감했다."

이 말의 시작이 된 것은 미국 종군 기자 마거릿 하긴스였습니다. 이후 한국전쟁에 대한 책을 쓰기도 했죠.

... 찾아보면 더 예쁜 사진 많아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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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31일, 북한군의 9월 공세가 시작됩니다.

35연대 지역, 미군은 곧 VT신관을 장착한 포병과 공군을 등에 업고 이를 막아냅니다. 그 사이 북한군은 늘 그랬던 것처럼 미군의 후방을 포위했지만 공군과 미 전차로 비교적 수월하게 막아냅니다. 여기에는 북한군의 재공세를 예측하고 철조망부터 지뢰, 부비트랩까지 아낌없이 깔아놓은 것이 컸죠. 3차례나 되는 격전 끝에 북한군은 수많은 시체를 남기고 후퇴했는데 이 중에는 북한군 연대장도 있었습니다.

워커 중장은 이 공격을 보고 25사단 사령부를 방문했고, 킨 소장은 증원을 요청합니다. 고생 많이 했던 27연대였죠. 워커는 이를 거부하지만 후방까지 침투한 적이 많아지자 킨 소장은 독단으로 27연대를 동원합니다. 애초에 자기 사단 휘하기는 했으니까요 -_-a

투입된 27연대 2대대는 2일에 적을 격퇴하고 3일에는 빼앗긴 진지에 도달, 탈환하는 데 성공합니다. 근데 그 사이에 북한군은 27연대 지휘소와 포 진지까지 침투해 왔죠. 27연대 3대대가 증원됐고, 다시 막아내는데 성공했죠.


"미 제 5공군의 근접항공지원이 사단을 구했다"


"미 제 5 공군의 헌신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우리는 한국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전장은 아주 복잡하게 돌아갔습니다. 어디가 전방이고 어디가 후방인지 모를 지경이었죠. 이런 상황에서 미군을 구한 것은 역시 공군이었습니다. 현재에도 제대로 될까 장담하기 힘든 근접항공지원, 팀킬이 얼마나 이뤄질 지 모르는 이 상황을 공군이 잘 해 준 것이죠. 이렇게 후방으로 침투한 적을 공군의 지원을 받아 잘 걷어냈습니다.

이렇게 적을 한 차례 막아낸 9월 4일부터 미군에게는 참 최악의 상황이 벌어집니다. 날씨가 계속 안 좋았던 것이죠. 만약 후방까지 들어온 적들이 계속 남아 있었다면 이 이후에는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전에 물리치는 데 성공했기에 이 악천후는 더 좋게 다가왔습니다. 적이 도하를 할 수 없었으니까요. 뭐 그런 상황에서도 적의 게릴라가 나타나고 이들에게 정보를 전하던 남로당 마산지부를 붙잡는 등 후방의 적과는 계속 싸움을 해야 했습니다. 이 때문에 마산 시민 만이천명이 부산으로 피난을 가기도 했죠. 이 때 방어 전면이 아닌 후방에서 발견된 적의 시체만 해도 이천여구에 달했다고 합니다.

한편 24연대 쪽은 여전히 어려웠습니다. 31일부터 시작된 적의 공격에 함안을 포기하고 물러서야 했고 27연대 1대대가 여기 동원됐죠. 킨 사단장은 많은 피해를 입은 24연대를 다른 부대랑 교체하자는 건의까지 했습니다만 워커는 이것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격전이 계속되면서 24연대장 챔페티 대령까지 적의 공격을 받고 부상, 후송당하는 상황에 처했죠.

여기에 다시 5연대가 투입되면서 전투산의 주인은계속 바뀝니다. 결국 치고 올라가는데 실패하자 산 아래에 지뢰와 철조망을 설치하고 화력을 집중해 적이 스스로 물러나게 했죠. 이 때가 9월 10일, 하지만 14일에 적의 야습을 당해 다시 물러나야 했습니다. 한편 서북산 역시 타로한에 실패했죠.

북한군은 이렇게 가장 남쪽에서는 자기들의 목표를 어느 정도 성공합니다. 하지만 여기까지였죠. 이미 고지 한두개 얻어내는 정도로는 승리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반면 미군은 주요 고지는 빼앗기더라도 15일까지 방어선의 붕괴만 없으면 이기는 상황이었죠.

미군이 가장 예의주시했던 마산 방면,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북한군 6사단은 결국 부산으로 오지 못 합니다. 이제 우리 차례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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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영산 방면에서는 많은 피해를 입은 24사단이 겨우 휴식을 취하게 됩니다. 미 2사단이 도착한 것이죠. 사단장 카이저 소장은 이전의 주요 전투지역이었던 부곡-남지 방면을 9연대에게, 가운데를 국군 1사단을 지원하고 돌아온 23연대에게, 북쪽을 38연대에게 맡깁니다.

한편 북한군은 2, 9, 10사단을 동원했죠. 8월 31일 22시를 기해 9월 공세가 시작됩니다.

공격 다음날인 9월 1일에 대대 하나가 붕괴되고 23연대 전체가 포위당합니다. 23연대장 프리먼은 급히 연대본부를 후방으로 옮겼지만 적의 공격은 거세지기만 했죠. 10km에 달하는 돌파구가 생겼고, 2사단은 삽시간에 두동강 납니다.

카이저 소장은 이에 맞서 북쪽의 10사단과 맞서던 38연대에서 병력을 빼고 특수임무부대를 만들어 돌파구를 틀어막으려 합니다. 이 때 10사단이 공격을 가해왔으면 어찌 됐을지 모르겠지만 다행히 10사단은 견제 수준에 머물렀죠. 나중에 발견된 적의 문서와 포로 심문에 따르면 대구를 점령할 때까지 10사단은 대기하라는 명령이 있었다고 합니다.

38연대의 지원이 계속됐지만 23연대는 사방에서 나타나는 적에 큰 피해를 입습니다. 연대본부까지 공격을 받으면서 지휘소 주변의 병력까지 동원해 막아내야 될 지경이었죠. 북한군의 진격이 끝난 것은 9월 9일, 창녕을 5km 남겨둔 상황이었습니다. 8월 동안 예비로 있으면서 전력을 회복한 것 같지만 역시 북한군 최강이라는 명성을 되찾기는 힘들었던 것 같네요.

이에 맞선 23연대의 피해도 컸습니다. 북한군의 공격이 끝났을 무렵, 23연대의 병력은 38%로 줄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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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army.mil.kr/history/낙동강방어선작전/주요전투/돌출부/clover.html

북한군 9사단이 공격한 것은 미 9연대, 이번에도 미군은 기습 도하를 허용합니다. 미군이 손을 쓰기 전에 클로버고지가 점령당했고 위에서 적었듯 미군은 두동강이 나 버렸죠. 이 전에 2사단이 준비한 정찰대가 있었는데 이름이 "만주"특수임무부대입니다. (...) 이들은 정찰에 투입되기도 전에 적에게 포위돼 버렸죠. 이들은 공중보급을 받으며 적과 싸우다가 겨우 철수하는데, 그 수가 22명밖에 안 됐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여러 진지에 투입된 중대들이 고립된 상태였죠.

북한군은 영산을 다시 점령하고 계속 진격해 옵니다. 어디까지가 적인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수백명의 흰 옷을 입은 피난민들이 왔는데 그들이 모두 적이었던 적도 있구요. 여기서도 공병대대까지 동원해 겨우 상황을 안정시킵니다.

워커는 9월 1일에 이 곳을 방문, 예비대를 투입할까 고민하다 생각보다 빠른 2일에 해병대를 투입합니다. 이들은 9연대와 힘을 합쳐 5일까지 클로버고지를 탈환하는데 성공했죠.


박진 나루 전투비

지형에 의해 적 쪽으로 툭 튀어나오게 되는 돌출부는 언제나 격전지가 됩니다. 뺏기면 안 되는 곳이니 아군은 방어에 집중하고 그만큼 적이 이 곳을 포위 공격해서 먹으면 아군의 피해는 크게 되니까요. 반면 이걸 막으면 아군에게도 기회가 되는 곳이죠.

미군은 8월부터 9월까지 두 번이나 영산을 뺏기면서도 결국 지키는 데 성공합니다. 피해는 결코 적지 않았고 이 때문에 카투사가 생기게 되었죠. 8월의 24사단도 그랬지만 2사단의 경우도 23연대가 병력이 1/3이나 줄 정도였습니다. 이 23연대는 이후에도 나라 구하는 전투를 하게 되죠. 그나마 다행인 건 적 10사단이 움직이지 않았다는 거겠습니다만.

그래도 생각보다 이른 9월 5일부터 전선은 소강상태에 빠집니다. 2사단에 증원된 해병대는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빠졌고, 2사단은 15일까지 전선을 지키게 되었죠. 더 이상의 큰 전투는 없었던 모양입니다.

15일까지 전선을 지켜라, 그리고 15일을 기점으로 총반격을 개시하라.

서부전선에서 그 계획은 성공합니다. 하지만 다른 전선들도 안정되지 않는다면 여기서의 성공은 별 의미 없는 것이었죠. X선과 Y선이 만나는 대구 방면은 최악의 상황에 빠졌고, 국군이 맡고 있던 동부전선은 인천상륙작전을 취소하고 데이비드슨선으로 철수하는, 다시 말 하면 한국을 포기하느냐를 가늠하는 상황에 빠지게 됩니다.

... 빨리 영천 전투로 가 보고 싶지만 일단 미 1 기병사단이 맡은 다부동 방면으로 다시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면서 1사단이 9월에는 뭐 했는지, 왠만하면 6사단 얘기까지 하고 영천 전투로 넘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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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뿌니사과
12/09/13 23:16
수정 아이콘
상콤한 첫 리플! ^^ 감사합니다
Brave질럿
12/09/13 23:34
수정 아이콘
상콤한 두번째 리플! 잘봤습니다.
12/09/13 23:44
수정 아이콘
일단 선리플 후감상해야될 거 같은 분위기네요!
Je ne sais quoi
12/09/14 00:29
수정 아이콘
바쁘신데 글 감사합니다 후후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중공군에 미군이 같이 밀린 게 아니었나요? 미군의 평가를 보니 우리만 못해서 밀린거였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뭐 앞으로 잘 설명해주시리라 믿습니다~
HealingRain
12/09/14 00:29
수정 아이콘
인천상륙작전이란 카운터 직전의 최후의 웅크림인가요. 곳곳에서 정신없는 혈투가 있었네요. 어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지...
그리고 눈시님 요새 힘드실텐데도 이렇게 양질의 글을 올려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blue wave
12/09/14 09:27
수정 아이콘
우와.... 좋은 글 잘 봤습니다. 이렇게 정리를 잘 해주시기도 쉽지 않을텐데.... 대단합니다...
눈시BBver.2
12/09/14 09:39
수정 아이콘
에 아뇨 ㅠㅠ; 이건 저도 잘 몰라서 그냥 전사 요약 수준이여요
감사합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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