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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10/29 00:27:51
Name 눈시BBbr
Subject [일반]  새로운 전쟁 - 4. 다시 38선으로


적진아퇴 적피아타 적주아교 적퇴아추
敵進我退 敵波我打 敵駐我擾 敵退我追

적이 전진하면 우리는 후퇴한다. 적이 피로할 때 우리는 공격한다. 적이 퇴각할 때 우리는 추격한다. 적이 멈추면 우리는 괴롭힌다.

이른바 16자전법입니다. 사실 게릴라전의 기본을 다 담은 것이죠.

중공군의 크게 이 16자 전법과 구대(口袋 주머니) 전법을 구사했습니다. 적을 유인해 포위하는 것이었죠. 국군은 八자 전법이라 불렀고 미군은 V자 전법이라 불렀습니다.

이 2차 공세 때 이들의 전법은 아군을 공포에 빠뜨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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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의 우익은 국군 2군단, 이들은 희천-영원-덕천선에서 강계, 만포로 진격합니다.
중앙은 미 9군단, 이들은 운산-온정을 통해 초산, 벽동으로 향했죠.
좌익은 미 1군단, 이들은 태천-안주에서 신의주로 향합니다.

미 1기병사단과 터키여단은 예비였죠.

이에 맞선 중공군은 13병단 예하 6개 군 18개 사단이었습니다. 이 중 50군과 66군은 각기 정주와 태천에서 미 1군단, 24사단과 국군 1사단을 막았고 39군은 미 25사단을 막았으며, 40군은 미 2사단을 공격하는 동시에 개천-군우리로 진출, 한미군을 분리하기로 합니다.

주공은 38군과 42군, 이들은 각기 덕천의 국군 7사단과 영원의 국군 8사단을 격파한 후 개천과 순천으로 진출, 퇴로를 막으려 했습니다. 이중포위작전이었죠.

목표는 평양이었습니다.

24일에 아군의 크리스마스 공세가 시작됐고, 첫 날은 무난하게 최소 8km에서 최고 15km까지 진출에 성공합니다.

하지만 이 진격은 중공군의 올가미 속에 들어가는 것 뿐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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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천에서 출발한 7사단은 첫 날에 이미 적의 대규모 병력을 발견합니다. 다음 날에도 공격이 계속됐지만 묘향산을 방어하고 있던 적은 계속 맞섰고, 오히려 적의 야간 공격이 우려되는 상황이었죠. 신상철 사단장은 급히 방어에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그 날 밤 들어온 적은 상상 이상이었죠. 중공군 한 개 군은 세 개 사단이었고 각 사단은 최소 1만명이었습니다.

이들이 정면으로 다가온 것이 아니었죠. 이미 후방에 투입된 적은 끝없이 아군을 공격했고, 뚫린 틈으로 더 많은 적이 들어왔습니다. 사방에서 꽹가리 소리가 울려퍼집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적이 사방에 있는 것 같았고, 실제로 그랬습니다.

인해전술, 그건 단지 물량으로 밀어붙이는 게 아니었습니다. 물량은 기본일 뿐이었죠. 아군이 눈치채기 전에 많은 병력이 아군을 포위한 후 한꺼번에 밀고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기본적인 수에서도 앞서긴 했지만, 중요한 건 전투가 벌어지는 지역에서 아군보다 훨씬 많은 병력을 투입한 후 효율적으로 밀고 들어오는 것이었죠.

급히 예비대였던 6사단 2연대를 불렀지만, 이들 역시 적의 포위에 당합니다. 아군이 후퇴하면 거기서도 포위공격을 당하게 됐죠. 부대 하나가 후퇴하면 인접부대는 더 많은 수를 상대해야 했습니다.

전투는 단 하루만에 끝납니다. 26일, 신상철 사단장은 덕천으로의 후퇴를 명령합니다. 하지만 후퇴 중이던 5, 8연대는 계속 포위당한 상태였고, 결국 분산된 채 개천과 북창으로 탈출합니다. 그 동안 방어진지를 고수하고 있던 3연대는 퇴로가 차단돼 미 2사단이 있는 구장으로 향해 합류했죠.

군단장 유재흥은 7사단에게 순천에서 부대를 재편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는 우측을 맡은 8사단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첫 날은 적의 가벼운 저항을 꺾고 전진에 성공했지만, 25일부터 적의 포위공격에 휘말렸죠. 사단장 이성가는 급히 상황을 알고 철수를 명했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포위된 부대는 분산돼서, 포위되지 않은 부대도 곳곳에서 기습을 당하면서 철수해야 했습니다.

후퇴하는 7, 8사단을 엄호하기 위해 급히 6사단이 북창에 투입됩니다. 이 덕분에 중공군의 공세를 어느 정도는 막을 수 있었습니다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죠.

미 8군 전체의 우익에 거대한 구멍이 뚫린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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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날 순조롭게 진출했던 미 2사단은 25일 09시에 진격이 멈춥니다. 그 지역의 감제고지(이른바 중공군의 모자고지) 점령에 실패했고, 전차까지 동원해 뚫으려 했지만 이마저도 막혔죠. 오히려 적의 특공으로 피해를 입어 갔습니다.

진격이 부진한 가운데 밤이 왔고, 적의 파상공격이 시작됩니다. 모든 부대가 공격받았고, 특히 9연대는 완전히 조각나 버립니다. 포병대가 증강돼 5개나 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런 손을 쓸 수 없었죠. 급히 구장과 영변 남부에서 진지를 다시 짜려 했을 때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옵니다. 우익의 국군 2군단이 무너지면서 후방인 개천, 군우리 일대에 적이 진출하기 시작한 것이었죠.

미 2사단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최악의 경우 좌측에 있던 25사단과 24사단, 국군 1사단까지 한꺼번에 포위될 상황이었죠.

이 때 나선 것이 터키여단이었습니다.

10월 17일 도착한 터키여단은 이 때 최초로 전선에 투입됩니다. 3개 보병대대와 1개 포병대 등으로 구성됐고, 병력은 5천 정도였죠. 이들은 포병대만 미 25사단에 보내고 예비로 대기하게 됩니다.

국군 2군단이 와해되던 26일 14:40, 터키여단장 야치시 준장은 군단사령부에 급히 도착합니다. 그에게 국군을 대신해 덕천을 맡으라는 명령이 떨어졌죠. 하지만 가는 길에 국군이 완전히 무너지면서 덕천 진출을 포기하고 대신 덕천-개천간을 방어하라는 새로운 명령을 듣게 됩니다. 이 지역이 와원이었죠.

"지휘관의 명령이 없이는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는다."

그로부터 3일, 29일까지 터키여단은 와원에서 신림리로, 신림리에서 봉명리로 지연전을 펼치면서 중공군을 막아냅니다. 그들 자신도 중공군에게 계속 포위됐지만 수류탄전과 백병전을 반복하며 막아냈고, 절체절명의 순간에 공군의 지원이 있어서 겨우 후퇴할 수 있었습니다. 피해는 컸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벌어준 3일은 컸습니다. 그 시간만큼 많은 중공군의 진출이 지연됐고, 많은 아군이 탈출할 수 있었죠.

그리고 이들 역시 군우리에서 벌어진 비극에 합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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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새로운 전쟁에 직면했다."

... -_-;

11월 28일, 맥아더는 정식으로 퇴각을 명합니다. 평양-원산에 방어선을 만든다는 것이었죠. 워커는 그에 따라 군우리에 모인 미 2사단과 터키여단, 국군 7사단 3연대에게 서부의 아군이 후퇴하는 동안 지연전을 명령합니다. 한편으로 미 1기병사단과 영연방 27여단을 순천과 성천에 투입해 철수를 엄호하게 했죠.

별 피해 없었던 미 1군단과 25사단은 순조롭게 청천강을 도하하는데 성공했고, 이제 남은 건 2사단의 철수였죠.

하지만 퇴로는 모두 중공군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단지 장악하는 정도가 아니었죠. 정찰을 통해 안전하다 생각했던 곳에서 기습을 받았고, 순조롭게 후퇴한다 싶었을 때 적이 대규모로 나타났습니다. 나름대로 작전을 짰지만 혼란도 컸습니다. 서로 차에 타려고 하다가 부대가 흩어졌고, 조직적인 철수를 못 했으며, 때문에 피해도 커졌죠.


특히 피해가 컸던 곳은 "태형의 계곡"이었습니다. 중공군은 계곡 양쪽을 장악했고 끝없이 공격해 왔죠. 공군이 폭격하면 그 틈을 타 2~3km 전진하는 게 전부였습니다. 이들의 구출을 위해 영연방군이 출동했지만 포위망을 뚫지 못 했죠.

마침내 이들이 모두 탈출한 때가 30일, 최종 피해는 전사와 부상자를 합해 4037명이었습니다. 장교의 피해도 커서 38연대 2대대는 모든 중대장이 전사, 3대대는 대대장이 중상을 입었죠. 사단장부터가 차를 버리고 도보로 탈출한 상황이었습니다. 차량과 야포 역시 1/3에서 절반 가까이를 포기하고 와야 했구요.

동쪽의 해병대처럼 미 2사단도 사실상 전멸합니다. 이 때문에 2사단의 해체까지 거론됐지만 다행히 재편이 결정됐고, 중공군 3차 공세에서 북한군에 맞서 활약하게 됩니다. 흥미로운 건 이 때 2사단의 해체를 반대한 것이 밴플리트라는 거죠.

미군은 이 전투를 가리켜 "인디언의 태형"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죄인을 두 줄로 늘어선 형 집행인 사이를 통과하게 하여 때리는 방식에서 따 온 것이었죠.

흥미로운 것은 가장 후위에 있던 23연대가 별 피해 없이 철수했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본대를 따라가지 않고 안주 쪽으로 우회해서 철수했죠. 본대에 이를 건의하긴 했지만 통신이 되지 않아 단독으로 철수한 것인데 덕분에 본대는 더 많은 공격을 당하게 됐습니다. 이런 단독 후퇴에 대한 논란이 있죠.

한편으로 17포병대대는 조직적으로 철수하는 데 성공했고 같이 사지를 빠져나왔음에도 전사 없이 부상 8명으로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거기다 그들이 보유한 8인치 곡사포 12문 중 11문까지 같이 끌고 오는 데 성공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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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의 승리요소는 역시 아군의 틈을 철저히 비집고 들어왔다는 것이었습니다. 단지 수로 밀어붙인 게 아니라 그 많은 수를 제대로 활용했다는 것이죠. 여기서는 북한이 자랑하는 -_-; 2 전선부대, 빨치산의 역할도 컸습니다. 이들을 상대하느라 아군은 전방에 제대로 병력을 집중할 수 없었죠. 그렇다 하더라도 아군이 충분한 시간을 들여 병력을 집중했다면 또 모를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최대한 빨리 전쟁을 끝내는 데에 집중했고, 그 결과가 톡톡히 드러난 것이죠.

그렇다 하더라도 중공군 입장에서 그렇게 좋은 결과는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포위 포위 했는데도 의외로 많은 병력이 탈출했죠. 전멸했다는 2사단만 해도 사단으로서는 전멸이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포위된 상황에서도 의외로 많은 병력이 돌아왔습니다.

이 역시 중공군의 약점이 드러나는 부분이었죠. 그들은 직접 아군의 퇴로를 막는 대신 화력으로만 상대했습니다. 위에서 공격할 수는 있었지만 앞에서 직접 상대하지는 않았죠. 덕분에 총에 맞지 않고 어떻게든 빠져나갈 수 있었던 것이구요. 거기다 이들은 더 이상 공격을 계속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아군은 이걸 몰랐죠. 아래에서 자세하게 다루겠습니다.

맥아더는 11월 28일 평양-원산선에 방어선을 짤 것을 명령합니다. 워커는 일단 이를 따르려 했지만... 그가 받은 충격은 맥아더의 예상보다 훨씬 컸습니다.

일단 병력 자체가 부족하긴 했습니다. 미 2사단과 국군 1군단은 붕괴됐고 미 1 기병사단 역시 이전의 피해를 복구 못 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는 국군 1사단 역시 마찬가지였고, 24, 25사단은 이를 대신해 평양 방어선을 지켜야 했죠. 이런 상황에서 동부전선에서는 해병대가 장진호 전투를 치르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12월 3일, 대규모의 중공군이 성천을 향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립니다. 이에 대해서는 얘기가 엇갈리더군요. 워커가 이를 확인도 하지 않고 총퇴각을 명했다는 말도 있고 확인해본 결과 적의 대규모 병력이 끝없이 내려온 것이 확인됐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성천이 점령당했다는 것도 있네요. 그 때가 얼마나 혼란상태인지 말해주네요. -_-; 참고로 확인도 안 하고 철수했다는 게 공식 전사 쪽입니다 (...);;;


"현 단계에서 8군을 구하는 유일한 방법은 중공군과 접촉을 단절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철수 자체가 12월 1일에 이미 결정된 상태였습니다. 3일의 중공군은 명분일 뿐이었죠. 미 8군은 보급품을 폭파하고 남포항의 선박을 총동원해 부상병과 포로, 3만여명의 피난민을 수송합니다. 나머지 부대는 38도선으로 미친듯이 달려갔죠. 무려 200km가 넘는 길을 달려 23일에 38선에 도착, 중공군을 놀라게 합니다. 후퇴 후 최소 2주간 이 일대는 공백지대가 되었죠.


이에 따라 북한 내의 피난민들이 끝없이 내려옵니다. 피난민들을 생각 안 한 건 아니었지만 대부분은 그냥 맨몸으로 후퇴하는 아군을 따라가야 했죠. 역시 유명한 것은 대동강 철교의 피난민들입니다. 가족과 함께 무사히 내려온 이들은 그나마 나았죠. 잠깐이면 되겠지 하고 내려갔던 이들은 이산가족이 됐습니다.

+) 오히려 김일성은 좋아했겠죠. 자기 반대파들이 다 내려간 것이었으니까요. 이후 남은 가족들이나 피난에 실패한 이들의 운명이야 뭐 더 말할 게 있겠어요.

맥아더가 받은 충격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완전히 멘붕해버린 그는 만주 폭격부터(이건 어느정도 이해되지만) 핵 사용까지 건의하면서 제대로 된 작전을 구상하지 못 합니다. 문제는 워커가 받은 충격이었죠. 그가 받은 충격은 상상 이상이었고, 이건 미국 내부에 그대로 전달됩니다. 이는 트루먼이 핵을 언급한 것에서도 볼 수 있죠. 그 자신은 후퇴하는 아군을 위해 협박용으로 쓴 것이었지만 중소는 물론 유럽 등의 동맹국도 놀라게 하기 충분했습니다. 이후 트루먼은 한반도에서 핵은 절대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맥아더는 이걸 놓치지 않았죠.

이 때의 후퇴는 전략적으로 반격하기 위한 후퇴가 아니었습니다. 워커의 말에서 볼 수 있듯 도주였죠. 김일성이 UN군이 38선을 넘지 않기를 바랐듯이 그 역시 중공군은 38선을 넘지 않을 거라는 마지막 희망을 가졌습니다. 패배주의는 아래로는 전 장병들부터 위로는 미국 수뇌부에 전달됐고, 다시 적이 공격해 올 경우 역시 후퇴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여겼습니다. 미 8군 사령부가 서울에서 대구로 옮겨갔고, 워커는 이승만에게 부산으로 가라는 건의를 하게 됩니다.

이승만은 당연히 분노하고 이를 거부했죠. 이때만큼은 그의 심정이 이해 갑니다. 그는 UN군이 철수한다는 공포에 빠졌고 그에 맞서 한국인들의 의지를 보여주려 했습니다. 문제는... 이게 최악의 참사를 낳았다는 것이죠.

중공군에 대한 공포는 계속됐습니다. 이 전쟁의 향방을 결정짓는 건 아군의 능력이 아닌 중공군의 자비가 될 정도였죠. 한국에서 철수하는 논의가 다시, 아주 진지하게 시작됐습니다.

하지만 중공군의 상황은 조금 달랐죠.

참고로 이 때 38선에 배치됐던 병력은 25만명이었습니다. 의외로 병력은 크게 밀리지 않았고 훈련중인 병력(... 이라고는 하지만 -_-;)이나 비전투병력까지 합치면 오히려 더 많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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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초에 중공군의 2차 공세는 끝납니다. 장진호 전투는 계속되고 있었지만 이전에 다뤘다시피 공격력이 크게 약화된 상태였죠. 이는 당시 중공군의 상황과 연결됩니다.

당시 중공군은 차량이 부족했고, 그나마도 공군의 폭격에 대부분을 잃습니다. 이를 위해 말부터 낙타까지 동원됐지만 그 추운 상황에서 전선에 보내기는 어려웠죠. 때문에 중공군의 보급은 개인이 준비한 것에 크게 의지해야 했습니다.

각 부대는 10일에서 20일까지의 보급품을 준비해야 했고 탄약은 5~10일에 보충해주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게 제대로 되기는 어려웠죠. 유류는 더 심해서 한 달에 한 번 보충하는 것이었지만 역시 전달될 수 없었습니다.

특히 문제는 식량이었습니다. 그 겨울에 식량을 얻기는 힘들었고, 북한에서 이를 지원하기로 했지만 수십만을 먹일 정도는 되지 못 했습니다. 이들의 작전권 문제도 걸렸고, 12월 초에 중공군 중심으로 짜이면서 해결됐죠. 이런 상황에서 만주에서 미숫가루를 대량으로 보냈지만 이걸로는 부작용이 너무 컸습니다.

다시 말 해 중공군은 처음 받은 보급만으로 전투를 치러야 했고, 제대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간은 일주일 정도 뿐이었습니다. 그 이후에는 오랜 기간을 들여 전투력을 보충받아야 했죠.

여기에 그 동안 받은 피해도 컸습니다. 중국의 주장으로도 1차 공세에서 전사, 부상당한 수가 1만이 넘었고 2차에서는 동상만으로도 1만이 넘는 병력을 잃었다고 하죠. 이 두 공세로 중공군이 입은 피해는 6만에서 최고 10만까지 집계합니다.

+) 근데 10만은 아무리봐도 뻥튀기인 거 같아요 -_-a 문제는 중국에서도 정확한 피해를 모를 거라는 거 (...)

이 때문에 사기도 극히 떨어져 있었습니다. 항명부터 도주도 많았죠. 장진호 전투를 치른 27군의 경우 소대장급 이상 간부가 처벌받은 것이 188명일 정도였죠.

그 외에 통신의 문제가 곳곳에서 대두됩니다. 무전기를 가진 건 연대 수준은 돼야 했고 덕분에 인접부대와 제대로 연결할 수 없었죠. 이건 전쟁 내내 중공군을 괴롭혔죠. 그런 상황에서도 포위망을 짤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경험과 능력을 말해주긴 합니다만.

보급의 부족, 떨어진 사기, 하지만 이 모든 걸 뒤엎을 수 있는 요소가 있었습니다. 그게 아군의 총퇴각이었죠.

모택동은 아군이 평양-원산 선에서 강력히 저항할 거라 여겼고, 우선 선천-숙천 선에서 정지 후 휴식을 취하며 부대정비와 재보급을 명령했습니다. 이 때가 12월 2일, 하지만 상황은 단 이틀만에 바뀌었죠.

+) 이런 면에서 철수의 이유가 됐던 적의 성천 공격을 다시 생각해 봐야 될 겁니다. 기도비닉을 유지했던 중공군이 오히려 당당하게 내려오고 있었던 점 말이죠. 허장성세가 아닐까요?

4일, 모택동은 새로운 명령을 내립니다.

"만약 평양의 적이 이미 후퇴했다면, 곧 38선을 향해 공격해 들어가라."

팽덕회는 이를 반대합니다. 아군이 철수하면서 평양을 점령하긴 했지만 차기 공세는 18일쯤으로 생각하고 있었죠. 중공군의 상황이 최악이라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여기서 모택동과 팽덕회의 주장이 갈립니다. 하지만 김일성은 당연했고, 소련에서도 공격을 종용했죠. 특히 스탈린은 김일성 편을 들던 스티코프를 자르고 중공군이 공산군 전체를 지휘하게 하면서 작전권의 문제도 해결해 줬습니다. 쇠는 달궈졌을 때 두드려야 되는 법, 팽덕회가 이를 막을 방법은 없었죠.

거기다 UN군이 38선 이남으로 내려간 이상 38선 돌파 문제가 걸렸습니다. 차기 공세는 38선 이남, 즉 서울이 될 것이었고 그를 위해선 최대한 빨리 38선으로 내려가야 했죠. 이 38선 돌파에도 둘의 주장이 갈립니다. 모택동은 북진 때의 미군이 그랬듯 한반도 전체에서 UN군의 축출을 원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시간을 더 끌수록 UN군만 더 좋아진다는 것이었죠. 이 때 모택동은 승리 소식을 듣고 참 충격적인 말을 합니다. "가장 못 싸운 국부군보다 못 하다"는 것이었죠. 그 정도로 승리가 기뻤다는 것도 있지만, 미국에 대한 공포를 이겨냈다는 면이 큽니다. 이건 중공군 전체로 퍼졌죠.

이렇게 중공군 3차 공세가 결정됩니다. 목표는 서울이었죠. 비록 서울을 포기하긴 했지만 덕분에 아군은 최악의 상황을 면하게 됐습니다. 적의 준비가 제대로 안 된만큼 공격력은 더 약화됐으니까요.

... 이게 밝혀진 건 제법 나중의 일입니다만 -_-a

자... 여기까지 보면 참 허탈하실 겁니다.

분명 중공군의 공세가 강력했지만, 38선은 물론 한반도에서의 철수를 거론할 정도까지는 아니었습니다. 방심한만큼, 더 큰 공포를 느낀 것이죠.

차라리 중공군의 원래 계획대로 평양 이북에 방어선을 만들어서 대치했으면 아군이 더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게 안 됐죠. 그리고 그 이후에도 평양-원산에서 방어할 생각을 했다면 결과는 또 달라졌을 겁니다. 최소한 싸워는 보고 후퇴했겠죠.

북한의 허리, 방어에 좋았던 평양-원산선은 결국 방어선으로 쓰이지 못 합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참 안타까운 부분이죠.

50년 내에 끝날 것 같았던 전쟁은 커질대로 커져버립니다. 이 이상 커지면 정말 세계대전이었죠. 중공군은 38선에 도달했고, 다시 서울을 노립니다.

이 무렵, 아군에게는 큰 사고가 일어났고, 미 8군의 사령관이 교체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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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 ne sais quoi
12/10/29 00:36
수정 아이콘
와 이거야말로 정말 멘붕이군요 -_ㅜ
서린언니
12/10/29 00:41
수정 아이콘
군우리 전투에서 터키군이 엄청나게 피해를 입어서 그런지
터키방송에서 다큐멘터리까지 만들었더군요. 북한에서 직접 취재도 하구요.
눈시BBbr
12/10/29 01:24
수정 아이콘
그들로서는 정말 최선을 다한 자랑스런 기억이니까요. 거기다 공산주의가 종교를 탄압하니 그들 입장에선 성전이기도 했구요. 우리는 고마워해야죠 '-'a
갓영호
12/10/29 00:46
수정 아이콘
여태껏 6.25때 중공군은 그저 압도적인 병력으로 무식하게 인해전술로만 밀어붙여서 38선까지 밀렸다고 알고 있었는데 꼭 그런것만도 아니었군요.
12/10/29 12:37
수정 아이콘
중공군의 2차 공세를 기점으로 맥아더는 그동안 쌓은 명성을 모조리 잃어버렸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맥아더가 명장 취급이라도 받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아마 유일할 겁니다.)

미국 전사학계나 정치학계에서 평가하는 맥아더는,

전술적 관점밖에 없는 우물 안 개구리 총사령관, 참모들의 말을 듣지 않는 독불장군, 현장에 가보지도 않는 탁상공론 장군, 제 잘난것만 아는 지휘부의 황제,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군의 민군관계를 파탄 직전으로 몰아넣은 이질분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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