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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11/14 17:48:42
Name 눈시BBbr
Subject [일반]  불굴 - 8. 현리 패배 분석, 용문산 전투

이전 글에 올렸어야 했는데 깜빡한 지도, 785고지가 보이시죠? 이 곳을 맡기로 한 1대대가 정반대인 방대산으로 가 있었습니다.

"간부들의 교육훈련 수준이 저조했고 전투지휘능력이 미숙했기 때문에 현리전투에서 참패했다. 즉 리더쉽 부족이다." - 30연대장 손희선

현리 전투에서 볼 수 있는 두 가지 문제점은 역시 위의 간부들의 수준미달과 합동작전의 부재입니다. 위아래간에 서로 소통이 안 됐고, 인접부대와의 연합작전은 완전히 실패했으며, 이건 사병들의 사기를 더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죠. 3, 9사단은 서로 따로 놀았고, 7사단 역시 인접부대와 상급부대에 후퇴 소식을 알리지 않고 후퇴했습니다. 패잔병들이 섞이면서 사단장들이 7사단의 상황을 알기 전에 병사들이 먼저 알아버렸죠.

당시 사단장들의 문제도 있었습니다. 최석은 9사단을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원래 행정 쪽으로 전투에는 문외한이었으며, 참모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역전의 명장이었던 김종오도 3사단을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었죠. 흥미롭게도 원래 최석이 3, 김종오가 9사단장이었다가 직전에 교체했네요 (...)

적에게 공격을 받아서 무너졌다는 부분이 많이 보이는데 그냥 도망갔다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 정도로 혼란상태였다는 거겠죠. 하지만 공격받은 것 역시 대규모 공격을 받아 무너진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사방을 포위한 채 총 쏘는 정도였다는 것이죠. 직접 피해가 아닌 공포에 의한 도주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군단장 유재흥의 문제가 나옵니다. 그의 문제가 얼마나 큰가죠. 그가 비행기를 타고 도주해서 군단이 무너졌고 모두 그의 무능 때문이라고 합니다만... 이건 완전히 틀렸습니다. 애초에 하진부리에 있던 그가 작전을 지시하기 위해 왔다가 다시 간 것이거든요. 그런 소문이 돌았다는 증거는 되겠습니다만.

그가 돌아가지 않고 직접 오마치 돌파를 지휘해야 했을까요? 그건 아니라고 봅니다. 이미 별이 둘이나 있던 상황이었고, 군단장이 할 일은 그게 아니었으니까요. 장진호 전투에서 알몬드도 미 1해병사단 지휘소를 방문했지만 곧 돌아갔습니다. 군단장이 해야 할 일은 이들에게 목표를 정해주고 지시하는 것, 그리고 이들을 지원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돌아가자마자 보급품을 투하해 줬고, 남은 병력을 뽑아내 마지막 철수를 엄호해 줬습니다. 이 정도 상황에서 철수가 도주가 된 것은 일선 사단장들의 문제로 봐야지 군단장에게까지 책임을 돌리기는 어렵습니다. 그렇게 따진다면 장진호의 공은 모두 알몬드가 가져가야겠죠.

거기다 그는 군단장으로 너무 많은 제약을 받았습니다. 7사단을 뺏겼고, 오마치에 대한 방어를 거부당했죠. 차라리 그가 지시한 오마치 돌파작전이 실행되고 이게 실패했다면 그의 책임을 더 물을 수 있겠습니다만, 그게 아니었죠.

그의 문제는 예하 사단장들을 더 잘 장악할 수 없었다는 것, 미 10군단의 압박을 이겨내고 미 8군사령관과도 맞서면서까지 오마치에 병력을 뒀어야 했다는 것, 미 10군단에서 별 일 없다 하고 예하부대에서도 별 말이 없는 상황에서 7사단의 완전붕괴를 알아챘어야 했다는 점, 중공군이 하루만에 30km를 달려서 오마치 고개에 병력을 배치했다는 걸 제대로 받아들여야 됐다는 점, 혹은 이 상황에서 아예 다른 방식의 공세도 구상했어야 했다는 점, 하진부리에서 거의 모든 장비를 잃고 공포에 빠진 병사들을 하루도 안 되는 시간에 더 잘 수습했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 한마디로 뭘 못 한 게 아니라 단순한 군단장의 역할에서 벗어나 더 적극적으로 더 잘 했어야 했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걸 못 했구요.

그가 했어야 될 방책으로 나오는 것은 방대산에서의 방어, 적의 공세가 끝날때까지 이 곳에서 버티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예 인제-홍천 방면으로의 역습이죠. 적의 허를 찌르는 것입니다.

이런 게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역시 오마치로의 돌파를 별 문제 없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즉 상황을 그리 심각하지 않게 봤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당시 3, 9사단의 상황에서 이런 명령을 내려봐야 제대로 실행할 수 있었을지는 의문입니다.

여기서 또 봐야 될 떡밥은 당시 오마치에 얼마나 많은 중공군이 있었을 지, 다시 말 해 오마치를 돌파할 수 있었을지입니다. 시간대로 계속 달라지는 상황인 게 문제죠. 유재흥의 경우 이걸 중공군 본대가 아닌 게릴라로 파악했고 뚫었으면 됐다는 쪽으로 증언합니다만...

현재 육군의 연구에서는 이미 늦었다는 쪽으로 의견을 잡고 있습니다. 이 쪽의 권위자인 최용호 중령은 17일 아침에는 1개 중대(60사단 178연대 2대대 6중대), 오전 중으로 대대 규모, 오후에는 연대, 야간에는 60사단 전 병력이 배치됐다고 분석했죠. 이미 중대부터 빨치산이 아니라 중공군 정규부대였습니다. 또한 오마치 후방 5km 지점의 침교에도 중공군 81사단이 17일 오후까지 점령을 완료했다고 분석하구요.

오전 중이라면 모를까 오후에는 이미 모든 게 늦었다는 것이죠. 그리고 오전 중에는 병력이 제대로 모이지 않았구요. 중공군은 어쩌다 이 곳으로 온 게 아니라 애초의 작전대로 움직였고, 2중 포위망을 만들어버린 것이었습니다.

이 상태에서 오마치를 돌파했을 경우, 그물에 스스로 몸을 던지는 거나 다름 없었죠.

"동부전선 지역의 소식이 전해졌다. 그저께 접수한 전문에는 ‘적 5개 사단을 포위했으며 완전히 섬멸할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됨’이라고 씌어 있었다. 그런데 어제 저녁에 보내온 전문에는 ‘4개 사단을 포위했는데 2개 사단은 이미 도주하고 나머지 2개 사단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러나 오늘 아침 전화로 확인한 결과는 전혀 상상 밖이었다. '적은 이미 모두 도주했습니다. 이번 싸움에서 도합 적 5천명을 섬멸하는 전과를 올렸는데 사상자가 3천명이고 나머지 2천 명이 포로입니다'" - 아 압록강 흑우 - 엽우몽

중국의 항미원조전사에서는 각 공세 때 포로 획득 현황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자체는 믿기 어렵습니다. 가령 6차 공세에서 국군 및 UN군의 사살, 포로 획득수를 2만 2천으로 잡거든요. 3군단 병력 전체가 다 죽거나 잡히지 않은 이상 나오지 않은 수치입니다. -_-; 그래도 이전 공세와 비교해볼 수 있죠.

+) 이 항미원조전사를 통해 중공군이 이미 포위망을 갖췄다는 게 나왔고, 오마치 돌파하면 됐다 -> 하면 더 망했어요로 대세가 바뀌게 됐죠.

여기서 중공군이 잡은 국군 포로는 5233명으로 나오는데, 이게 1차 공세 이후 가장 적은 수치입니다. 거기다 5차 공세의 사창리의 6사단까지 합쳐서 나온 수치죠. 4차 공세 당시 8사단에서 잡은 포로를 7769명이라고 적고 있는데 이와 비교하면 너무 적은 수입니다. (이것도 8사단의 2/3를 포로로 잡았다는 것이니 과장으로 보이구요 -_-;)

중공군의 작전에 비해 전과가 너무 작았던 것이죠. 다시 말 해 도망가서 오히려 잘 된 전투입니다. (...) 3군단 장병들은 포위하기 어려운, 1000m가 넘는 산길로 도망쳤고, 부분적인 기습은 가능했지만 완전포위는 할 수 없었습니다. 애초에 동쪽을 맡았던 북한군의 속도가 느렸던 탓도 있지만, 도로로 올 줄 알았던 국군이 산길로 간 게 컸죠.

... 이래저래 참 어이없는 전투입니다.


3사단장 김종오는 이렇게 6사단 때에 이어 최대의 굴욕을 겪게 됩니다. 당시 턱에 입은 부상을 회복하고 돌아왔습니다만. 그가 사단장이 된 직후에 벌어진 일이라 부대를 제대로 장악하지 못 했다는 점은 있고, 그 휘하의 병력들은 그래도 나은 모습을 보여주긴 했습니다. 마지막 철수 때 23연대를 보내 주력의 철수를 엄호하게 하기도 했죠. 하지만 그 이후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특히 하진부리에서의 철수 때 병사들과 같이 도망치다 한참 남쪽에서 발견됐죠. 그 전까지는 전사 혹은 실종된 줄 알았습니다.

이 일로 그는 3사단장에서 해임됩니다. 이후 와신상담을 하던 그에게 기회가 다시 온 건 제법 나중의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이 때 겪은 굴욕을 딛고 재기하는데 성공하죠.

9사단장 최석은 현리 철수의 시작으로 평가됩니다. 애초에 전투를 겪지 못했던 이로 참모들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고 부대 장악을 제대로 못 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문제는 역시 30연대 1대대가 전혀 다른 곳에 있었느냐와 왜 전방 부대보다 먼저 철수했냐는 것입니다. 그가 이걸 주도했을 거라는 추측이 나올수밖에 없죠. 거기다 하진부리에서의 방어 당시 연대장들을 다 모아놓고 부사단장을 전방에 보내 지휘하게 하는 이해 못 할 명령을 내립니다. 정작 그 부사단장이 제대로 지휘 못 한다고 구금하기도 했죠. 거기다 일선 대대에 직접 명령을 내려 물의를 빚기도 했습니다. 이것과 위의 30연대 1대대의 상황에 비춰보면 의혹을 제기할 수 있죠.

이후에도 그는 사단장 직을 유지합니다. 그 이유를 그가 함경도 파벌이라는 데서 찾구요. 이랬던 그는 5.16에서 쿠데타를 반대하다 강제 전역당하는 굴욕을 당합니다. 뭔가 어? 하는 상황입니다. (...) 전쟁을 잘 하는 것과 이것과는 다른 것인지... 뭐 그냥 밥그릇 싸움으로 볼 수도 있지만요.

이 때문에 그가 불리한 쪽으로 몰린 건 아닐까 생각해봤는데,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는 유재흥에게 돌파작전을 받지 않았다고 증언했고, 이 자체가 뒤바뀌지 않는 이상 거짓말을 한 건 그가 되니까요.


그리고 유재흥은 이것으로 군단장에서 잘리고 육본으로 돌아갑니다.
그가 도주했다는 것은 그런 소문이 돌 수는 있어도 틀린 것이었고, 그 때문에 작전권이 미군에 넘어갔다는 것 역시 틀렸습니다. 간접적으로 했던 걸 직접적으로 바꾼 수준일 뿐이고, 이건 전에도 미 10군단에 넣었다 뺏다 하며 계속했던 것이었습니다. 임팩트가 너무 크긴 합니다만. 작전권은 개전 직후 이미 넘긴 상황이었구요.

오히려 그가 작전권 환수를 반대했다는 것 때문에 그에 대한 악평이 퍼진 것이죠. 그런 말이 퍼졌던 시기도 딱 맞구요.

+) 작전권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은데, 6차 공세 끝난 이후로 해야겠네요.

그는 창군 당시 젊은 장군들 중 미군이 가장 높게 봤던 이였습니다. 때문에 7사단부터 2군단까지 가장 힘든 역할을 맡았죠. 이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군단은 동해안에서 언제나 적의 주공에서 벗어나 있었습니다. 반면 유재흥이 이끈 군단은 언제나 중공군의 표적이 돼 왔고, 대규모 병력에 공격당하면서 참패를 당했죠. 아직 젊었던만큼 군단장을 맡을 능력이 없었고, 미군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녀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외의 대안 역시 없었습니다. 이래저래 불행했죠.

이렇기에 저는 그가 능력은 부족했지만 나이를 생각해야 되고, 아예 무능하거나 고의로 전쟁을 망친 건 아니라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이 전투에 대한 패전은 할말 없을지 몰라도 그 역시 나라 지키기 위해 힘썼던 것으로요.

이후 그는 전역해서 외교관으로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다 박정희에 의해 국방장관이 됩니다. 이 역시 깔 수 없다고 봐요. 이승만에 의해, 혹은 5.16으로 군부를 잡았던 평안도, 함경도 파벌은 몰락했고 그는 이들에 비해 덜 정치적이고 더 깨끗했습니다. 그에 대한 평가가 최악인 인터넷 여론에서도 그의 구체적인 비리를 얘기하진 않죠. 군 경험과 나이로 봐도 군부를 아예 떠나기에는 아깝구요. 이렇게 박정희에 의해 다시 빛을 본 케이스가 김종오입니다. 박정희가 아무 생각 없이 무능하고 더러운 이들을 다시 끌어들였다고 볼 순 없습니다.

이래저래 태평양 전쟁의 나구모와 비슷한 인물입니다. 딱히 잘 한 건 없는데 그렇다고 못 싸운 것도 아니고, 영천 전투부터 해서 좀 나은 상황일 때는 잘 싸우기도 했지만 늘 어려운 전투만 치렀던 인물, 때문에 참 많은 비난을 받지만 그렇다고 마냥 잘 했다 옹호해줄 수도 없는 인물이죠. 어쨌든 패전의 중심엔 그가 있었으니까요. 특히 이 패전을 되새기며 유사시 이런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도 그가 한 것들은 계속 연구해야 됩니다. 혼자 모든 죄를 뒤집어쓰는 건 아니라고 보지만, 그는 앞으로도 계속 비판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쩔 수 없는 게 얼마나 있든, 그는 그 때 그걸 해야 될 위치에 있었으니까요.


"이 쓰라린 전투를 거울 삼아 나라 지킴을 새롭게 다지고 이 전투에서 이름없이 몸 바친 호국영령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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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가평의 용문산에는 정반대의 상황이 펼쳐집니다.


당시 6사단은 압록강 초산에서부터 사창리까지 패배를 거듭하면서 최악의 국군으로 낙인찍힙니다. 이미 압록강에서 "못난 국군"의 대표가 됐고, 특히 사창리 전투의 경우 정말 할 말 없기도 합니다.

겁쟁이 블루스타, 미군은 6사단을 이렇게 부르며 침을 뱉거나 돌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굴욕을 다 받아야 했죠.

이게 오히려 6사단의 전의를 올립니다. 나라지키는 건 일단 둘째 치고, 이 "쪽팔림"을 만회해야 했습니다. 미군은 잘 안 알아줬어도 국군 내에서 6사단은 최고의 전공을 올린 것으로 평가됐고, 특히 개전 초부터 낙동강에 올 때까지 힘든 일을 다 맡아 하며 큰 공을 세웠던 게 6사단이었습니다.


"이번 싸움에서만은 여러분이나 나 사단장이나 ‘필승의 싸움’ ‘조국을 지키자는 기필코 이기는 싸움’을 하여야 한다. 이번 싸움에서 우리는 반드시 그리고 크게 이겨야 우리기 살고 조국을 구해낼 수 있다. 총 한발이라도 적병의 가슴을 향해 정확하게 쏘아야 하며 단 한방이라도 더 많이 퍼부어야 한다. 일만 병사가 단 일발의 소총 사격을 제대로 쏘고 못 쏘고, 잘 쏘고 못 쏘고에 따라 전선이 수백리 북상하기도 하고 역으로 내려오기도 한다는 것을 깊이 명심하라. 나는 지난번 사창리 패전 이후 고심 끝에 필승의 새 전술을 개발하였다. 나는 이번에 우리가 크게 이기고 위대한 승리의 선물을 조국에 안기게 될 것을 확신한다."

"앞에 도열한 제군들의 불타는 결의와 적개심의 표출로 보아 이번 싸움의 승리는 우리의 것임을 굳게 믿는다. 자! 나아가 싸우자! 그리고 승리의 기쁨을 후방 가족과 이 조국에 바치자!"

다가오는 6차 공세는 6사단에게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사단장 장도영은 중공군을 유인할 계획을 이미 세워놓고 있었죠. 이를 위해 2연대를 북한강과 홍천강의 합류지점으로 전진배치합니다. 2대대는 모두 "결사"라고 적힌 머리띠를 둘렀고, 1대대 장교들은 "우리에게 마지막 기회가 왔다. 이 설욕의 기회를 깨끗이 장식하자!"고 결의합니다. 3대대는 후방에 예비대로 남았죠.


17일, 동쪽에서 돌파구가 열리면서 중공군은 다시 가평에 병력을 투입합니다. 이번 목표 역시 동서부전선을 반으로 갈라놓는 것이었습니다. 63군 3개 사단이 투입됐고, 이를 막는 게 6사단이라는 걸 알면서 낙관적으로 생각했을 겁니다.

야간부터 중공군의 도하가 시작됩니다. 소규모 정찰대로 이를 파악했지만 나서서 막기는 어려웠죠. 원래 목표 자체가 적의 공세시 주저항선으로 후퇴해 막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좌측의 국군 2사단 31연대와 우측의 미 7사단 31연대가 주저항선으로 철수합니다. 2연대가 포위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새까맣게 기어올라옵니다"라는 당황하고 비장한 떨리는 당시의 육성 보고가 아직도 내 귀에 쟁쟁하다." - 원시찬, 당시 6사단 2연대

하지만 2연대는 물러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불을 피우고 차량을 다수 이동시키는 모습을 보이는 등 이 곳을 주저항선인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일단 밤을 버티는 게 중요했습니다. 국군의 패배는 언제나 밤에 이루어졌고, 낮이 되면 포병과 공군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결정적인 순간을 버텨야 합니다.

2연대는 성공했죠.

아침까지 계속된 공격을 막아내면서 사단과 군단에서 5개 포병대의 화끈한 지원포격이 옵니다. 거기다 공군까지 오면서 중공군은 큰 타격을 받게 됐죠. 그리고 밤에 다시 포위 공격이 시작됩니다.

"어디에서 그런 힘이 솟았는지 모릅니다. 복부에 무수한 파편상을 입고도 콸콸 쏟아지는 피는 아랑곳하지 않고 죽어라 방아쇠를 당겼으니까요. 오른팔에 총을 맞으면 왼손으로 당기고, 두 팔을 못쓰게 되면 이빨로 수류탄 안전핀을 뽑아 발로 굴렸습니다. 전투에 참가했던 우리 모두가 한결같이 그런 샘솟는 힘으로 싸웠습니다"

"같은 호 속에 전우의 시체가 함께 있었습니다. 전우의 시체가 썩는 옆에서 대소변을 배설하고, 선 채로 잠깐씩 자고, 배는 고파 죽겠는데 먹을 건 없고…. 다른 게 지옥일까요? 그런데도 우리는 호 속에서 대소변을 보고 밥 한 끼 제대로 못 먹었지만 놈들을 물리치지 못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일념으로 정말 독하게 싸웠습니다. 물이 고인 호 속에서 그 고통을 참으며 밤을 새우고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는 건 인내력의 한계를 넘은 거지요"

이틀 동안의 끝없는 공격, 2연대는 이를 끝까지 물리칩니다.

이 때 3대대는 늘 그랬듯이 통신망이 단절되기도 했지만, 통신대장 이천길 하사와 노승호 상병이 적의 포화를 뚫고 연결하고 돌아오면서 연결을 재개할 수 있었습니다. 그 보답은 어마어마한 포격지원이었죠.

중공군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툭 치면 억 하고 물러나던 국군은 일단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2연대가 너무 오랫동안 버티고 있었고, 포병, 공군의 지원은 너무 강력했죠. 완전히 포위된 상황에서도 이렇게 버틴다는 것, 결론은 이 곳이 주저항선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중공군은 예비대 하나 없이 3개 사단 모두가 돌격, 2연대를 공격합니다. 연대는 최악의 상황에 처했고, 마침내 포위망을 탈출합니다. 그리고 3시간의 혈전 끝에 후퇴에 성공했죠. 하지만 아직도 본대에 비해 돌출돼 있었습니다. 적은 다시 왔고, 2연대는 다시 포위될 것이었죠.

바로 이 때, 장도영은 7연대와 19연대에 공격명령을 내립니다. 20일 05시였습니다.

경악한 것은 중공군이었습니다. 적의 주력을 공격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대규모 병력이 역포위를 시도하고 있었으니까요. 지칠대로 지쳤고 이제 주저항선을 뚫었다고 방심하던 순간,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고 싱싱한(-.-) 병력이 들이닥친 거였죠.아군의 병력은 2개 연대에 불과했지만, 적에겐 이게 너무나도 커보였습니다.

현리에서의 국군과 좀 다르지만, 그래도 비슷한 상황이 펼쳐집니다. 중공군 3개 사단은 전의를 완전히 상실, 도주했죠.

사단장 장도영은 이들을 그냥 보내줄 생각이 없었습니다. 들어올 떄는 마음대로였지만 나갈 때는 아니었죠. 그들 뒤에는 강이 있었습니다. 도망가기엔 아주 어려운 환경이었죠.

21일 03시부터 시작된 북상, 적은 2개 연대를 남겼지만 아군의 돌파에 분산됩니다. 이렇게 적은 가평, 춘천 쪽으로 흩어졌고, 6사단은 강을 넘어 이를 쫓습니다. 진격이 재개된 것은 24일이었죠.


용문산지구전투 전적비

추격전은 28일까지, 서쪽으로는 청평을 넘어 가평으로, 동북쪽으로는 춘천을 넘어 화천발전소까지 계속됩니다. 대대규모의 저항은 있었지만 너무도 약했습니다. 황급히 도주하다가 겨우 만든 혼성부대들이었고, 보급을 못 받으면서 굶어죽기 직전까지 간 적들이었죠. 곳곳에서 적이 투항해왔고, 노무자가 포로를 잡아오기도 합니다. (...);; 1개 소대에 1개 중대 병력이 투항하는 일까지 벌어졌죠. 사로잡은 적에게 나팔을 불게 해 적을 집결해 격파하기도 했습니다.


중공군 포로들

10일간의 전투 동안 최종전과 사살 17177명, 포로 2183명이라는 말도 안 되는 전과가 나옵니다. 개전 이후 최대의 대승이었고, 이후에도 이 정도 승리는 없었죠. 6사단의 피해는 전사 107명, 부상 494명, 실종 33명이었습니다.

+) 이게 과장이 아닐까 찾아봤는데 이보다 두세배의 집계도 나옵니다. (...);;; 한 명 단위까지 있는 걸로보아 저게 최소치인 것 같습니다.


이렇게 6사단은 재기에 성공합니다. 밴플리트가 직접 와서 장도영을 치하했고, 이승만은 이 소식을 듣고 감격해서 화천댐 저수지의 이름을 "대붕호"에서 "파로호"로 바꿉니다. 적을 격파하고 포로를 많이 잡은 호수라는 것이죠.

중공군은 혼란 속에서 후퇴하면서 많은 수가 강과 파로호에 빠졌고, 특히 파로호의 경우 적의 핏물로 붉게 물들었다고 합니다. 이후 10년 동안 인근 주민들이 파로호의 물고기를 잡지 않았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사람을 먹고 자란 물고기라는 것이었죠.

승리할 수 있었던 건 역시 장도영의 작전, 원래 전진기지를 배치해야 되긴 했지만 그는 고문관들이 철수해야된다고 난리인 상태에서 절대 2연대를 빼지 않습니다. 모든 게 작전이었다는 것이죠. 그리고 2연대는 여기에 맞춰 혈전을 벌여 지켜냈구요. 아무리 중공군이 강한들 상대 못 할 수준은 아니고, 밤을 버텨 아군의 지원을 받으면 막을 수 있으며, 작전을 잘 짜면 중공군도 공황상태에 빠질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전투였습니다.

이렇게 용문산 전투는 끝납니다. 국군 최대의 패배와 승리가 동시에 나온 게 좀 재밌네요. 에휴... 진작에 이렇게 싸우지 -_-;

그럼 다시 동쪽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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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치터치
12/11/14 17:57
수정 아이콘
늘 댓글 달지는 못해도 늘 응원합니다.
12/11/14 18:07
수정 아이콘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설탕가루인형형
12/11/14 18:12
수정 아이콘
근데 전과는 누가 어떻게 확인을 하나요?
전문으로 전과 확인하는 병과가 있나요? 우리 피해야 점호등을 통해 알 수 있다지만 상대방 피해는 시체 한구, 한구를 다 세어봐야 할텐데...-0-
눈시BBbr
12/11/14 18:20
수정 아이콘
전과 확인을 맡는 부대가 따로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이건 저도 알아보고 싶네요 '-'
막 백 단위정도부터 시작하는 건 말 그대로 추정치, 정찰 등으로 본 적의 전투 전후의 규모를 비교해서 대충 계산하는 거죠. 이외에 포로 진술을 통한 확인도 있구요
저런 경우는 직접 일일이 셀 겁니다. (...) 여기서도 과장이 들어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각 부대에서 집계한 걸 모으는 건데 중복될 가능성은 물론 구라칠 가능성도 있죠. 반면 물에 빠지는 등으로 집계 못 하는 경우도 있으니 축소될 수도 있구요. 때문에 직접 센 시체 수는 위에 나온대로인데 물리친 적 수는 3만에 6만까지도 꼽습니다. 6만의 경우 대체 뭐까지 계산한 건지 모르겠네요 =_=;;; 이 때 온 중공군이 6만이 될까 궁금할 상황인데;
Je ne sais quoi
12/11/14 18:52
수정 아이콘
우와 굉장한데요. 수치만으로 놓고보면 역사에 남을만한 대승이네요.
눈시BBbr
12/11/14 20:19
수정 아이콘
수치로 보면 정말 역사에 남을 대승이죠. 다만 대세에 영향을 못 미친 게 큰 것 같습니다. 저걸 타고 더 세게 공세를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그 다음 아군의 공세는 휴전선 확보 작전이었으니까요 '-')
그래도 전략적으로 가평 일대에서 적이 더 이상의 공세를 할 엄두를 못 냈고 (UN군 상대도 벅찬데 국군도 저렇게 나오니) 이 때 탈환한 지역 밑으로는 적이 공격할 엄두를 못 냈으니 그 영향력은 결코 적지 않습니다
사악군
12/11/14 19:21
수정 아이콘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요새 엄청 페이스를 올리시네요 흐흐 읽기도 벅찹니다.
Tychus Findlay
12/11/14 20:53
수정 아이콘
잘보고있습니다 !
완전연소
12/11/14 21:01
수정 아이콘
속터지다가 좀 시원해 지네요.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
Tristana
12/11/14 21:43
수정 아이콘
사살 17000명!!
6사단이 6.25전쟁 최다 사살 사단이 되는데 결정적 공헌을 한 전투같네요.
6사단가에 용문산 초산 전투 나오는데 말이죠...
물론 사창리전투따위는 정훈교육에서도 나오지 않고 크크
swordfish
12/11/15 00:20
수정 아이콘
장도영 장군 리즈시절이네요. 10년 후 욕심때문에 망했지만
blue wave
12/11/16 08:57
수정 아이콘
통쾌한 승리였네요. 역시 대단한 전술이었던 것 같네요. 용문산 전투는 미국 육사에서도 가르치는 전투 중 하나라던데...
어디서 본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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