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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11/16 18:10:56
Name 눈시BBbr
Subject [일반] 불굴 - 9. 중공군, 패주

"알긋나. 느그는 무조건 이기야 된다."

여기서 다시 시작해 봅시다.

백선엽은 당시 1군단장으로 "전선에 큰 주머니가 생겼다"면서 "두 사람(백선엽과 라이딩스 3사단장)이 중공군의 공격을 반드시 막아야 된다"고 했다고 회고합니다. 이건 좀 순화한 버전인 것 같습니다. 육군에서 낸 현리 전투(1988)에서는 "두 사람의 직책이 달려있다"면서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고 하거든요. 원래 전쟁사가 현대로 오면서 순화되긴 합니다만 (...)

그 정도로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국군 3군단의 붕괴는 그 정도로 심각했고, 더 이상 밀릴 경우 어디까지 갈 지 몰랐습니다. 반면 여기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국군 1군단 예하 2개 사단과 미 2사단, 증원된 미 3사단 정도였습니다. 이들의 손에 모든 게 달려 있었습니다.

현리 전투에서 나오는 음모론은 미군이 일부러 3군단의 붕괴를 유도했고, 그 틈을 타고 온 중공군을 섬멸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V작전이었죠. 이건 당시 굴욕을 겪은 유재흥부터가 부정하는 음모론입니다. 미군이 3군단이 그 정도로 붕괴될 거라고 예상했어야 가능한 것이죠. 특히 최후에 있었던 7사단 재편병력이 중공군 선봉을 막지 않았으면 모든 게 끝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것 아니었으면 미 3사단이 증원돼도 이미 늦은 상황이었거든요. 전쟁을 슬슬 끝내려던 이들이 전선의 전면 붕괴를 각오할 수 있었을까요?

따라서 제 결론은 미군은 그 정도로 국군의 상황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알몬드는 오마치가 그 정도로 중요한 지 몰랐고, 자기 지역에 타 부대가 들어오는 건 알몬드 뿐 아니라 어느 군대든간에 싫은 상황입니다. 이 틈을 중공군이 노렸고, 성공했죠. 그런 상황에서 밴플리트의 반격 작전 역시 성공했고, 이것이 미군에 대한 음모론을 부채질합니다. 모든 걸 다 알고 여유있게 한 것이냐 최악의 상황에서 겨우 막아낸 것이냐의 차이입니다.

가장 극단적인 음모론인 "남침유도론"을 생각하면 쉬울 겁니다. 이 음모론에서 미군은 소련, 중국, 북한의 상황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고, 미군이 빠지면 북한군이 침공할 것 역시 알고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래도 미국에 이득이었던 것을 군산복합체의 음모로 한국전쟁이 있으면 전쟁 물자를 더 많이 팔 수 있었던 것으로 이유를 대죠.

하지만 그럴 거면 중국의 국공내전이 더 장기화되는 편이 유리합니다. 인구로만 수억명 단위로 싸우는 걸 포기하고 남북 다 합쳐봐야 4천만도 안 되는 전쟁을 계획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죠. 이후 쿠바와 베트남에서 미국이 한 걸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미국은 정말 전쟁을 유도했지만, 다 실패했습니다. 특히 베트남전에서의 실패는 미국이 얼마나 몰랐는지를 말 해 줍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이 6차 공세에서 미국이 무언가를 의도했다는 음모론을 다 부정합니다. 리지웨이는, 밴플리트는 국군의 상황이 이 정도인 것을 몰랐고, 나중에야 국군의 질을 끌어올리는 걸 시도합니다. 그리고 이 최악의 상황에서 그들은 최선을 다 한 것으로 보는 것이죠.

본론 들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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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2사단은 6차 공세 전까지 가장 격전지였던 인제-홍천 축선을 맡고 있었습니다. 9, 38, 23연대 순으로 배치됐고, 맨 우측의 23연대에는 프랑스대대와 국군 5사단 35연대 3대대가 배속돼 있었죠. 23연대는 보병-전차로 구성된 특수임무부대로 우측을 막고 그 후방에 프랑스 대대를 배치, 23연대 주력은 예비로 남깁니다.

이 상황에서 선봉을 맡은 건 국군 36연대 3대대와 아이반호 부대라 불린 사단 지휘소 방호부대였습니다. 이들 역시 국군 1개 중대로 이루어져 있었죠. 전초기지로 적의 대규모 공격이 시작되면 주저항선으로 후퇴하는 부대였습니다만, 이게 묘한 효과를 가져옵니다.

중공군이 이 곳이 국군 지역이라고 생각해 버린 것이죠. -_-;

이 곳을 공격한 중공군은 12군 예하 3개 사단, 16일 07:30부터 적의 소규모 부대가 보이자 23연대는 국군을 철수시킨 후 방어를 시작합니다. 이 때 중공군은 괜히 미군 전차를 만나 깨지거나 2시간 동안 길을 잃거나 아직도 국군인 줄 알고 공격하거나 했죠. (...); 덕분에 돌파가 좀 늦어졌습니다. 이들이 바로 하진부리까지 도달해 마지막 포위망을 만들었어야 했던 이들입니다.

우회를 했던 부대는 우회했지만, 상당수의 병력이 원래 미군을 맡기로 한 15군과 함께 공격을 계속합니다. -_-; 이제와서 작전을 크게 변경할 수 없었죠.

이렇게 미 2사단은 네 번째로 포위당하는 신기록을 세우게 되고, 23연대는 적이 도로를 점거하면서 후퇴를 시작합니다. 선봉은 프랑스 대대였죠.

한편 가리산에 배치된 38연대도 곳곳이 뚫리고, 고지 정상까지 뺏기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23연대 사이에 적이 들어차 버렸죠. 연대에서는 급히 네덜란드 대대를 보내 이 곳을 뚫고 있던 프랑스 대대와 함께 중공군을 막아냅니다.

중공군은 18일까지 미 2사단의 섬멸을 노렸고, 처음이야 좀 삐끗했지만 17일까지 어느 정도 진행되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을 반긴 건 어마어마한 포탄이었죠.


밴플리트는 포병에게 일일 가용보급량의 5배를 쏟아부을 수 있게 해 줍니다. 전쟁의 신은 포병이라는 걸 아주 잘 알았던 것이죠. 이런 밴플리트 탄약량은 고지전에서도 계속됩니다. 화력을 자랑할 순 있지만 역시 금방 떨어지는 단점이 있었죠. 그래도 이걸 밀 수 있는 걸 보면 역시 미군인가 봅니다.

특히 중요했던 곳은 맨 우측의 벙커고지였습니다. 해발 778m에 있는 고지였고, 23연대 3대대 K중대가 지키고 있었죠. 이 곳은 2주일 동안 사방에 철조망과 지뢰를 덮고 모래주머니 2만개를 동원해 진지를 구축한 곳이었습니다. 야포의 직격탄도 견딜 수 있는 곳이었죠. 말 그대로 벙커였습니다.

중공군은 여기 1개 연대를 보내 파상공세를 계속했지만, 압도적인 화력에 밀려납니다. 포병은 이 곳에만 1만발에 달하는 포를 쏘며 도와줬죠. 밤이 되면서 고지를 뺏기는가 했는데 곧바로 예비소대를 투입해 백병전으로 맞섭니다. 지칠대로 지친 중공군은 1개 소대의 반격에 물러날 수밖에 없었죠.

19일이 되면서 알몬드는 2사단이 너무 돌출돼 있다고 판단, 철수를 명령합니다. 벙커고지의 영웅들을 비롯한 2사단 주력이 후퇴했고, 별 공격을 받지 않았던 해병 1사단이 이를 엄호했죠. 하지만 철수로 역시 만만하지는 않았습니다. 곳곳에 출몰한 중공군의 집중사격을 받아야 했고, 지뢰를 밟아 후속차량이 갇히는 일도 있었죠. (아군의 지뢰인지 적 지뢰인지는 모르겠군요) 이 과정에서 폭우가 쏟아지면서 19일 자정이 돼서야 겨우 신 방어진지로 갈 수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작전을 지휘하던 사단장의 헬기가 불시착하기도 했죠.

하지만 다시 방어를 시작했고, 하늘에는 든든한 우군이 나타납니다.

19일 낮에는 B-29 17기가 떴고, 20일에는 21기가 뜹니다. 정말 미칠듯한 화력 공세였죠. 중공군은 더 이상 전선 돌파를 하지 못 하게 됩니다. 돌파구의 왼쪽을 완벽히 틀어막은 것이죠. 21일이 되면서 중공군의 약세가 두드려졌고, 알몬드는 22일부터 반격을 개시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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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밴플리트 장군은 “적에게 최대한 응징을 가해야 한다”면서 국군 3군단 얘기를 꺼냈다. “저항을 계속 이어가면서 후퇴하라고 여러 번 강조했다. 그러나 3군단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면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맺혀도 단단히 맺힌 모양이었다. 전선에서 중공군에 허망하게 밀린 3군단에 대한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닌 걸로 보였다." - 백선엽

한편 우측의 국군 1군단은 적의 선봉이던 북한군 5군단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여기서 일시적으로 적을 막아내는데 성공하죠. 특히 현리 철수 당시 동쪽 포위망이 약해지게 됩니다. 그리고 적의 첫 번째 포위망이 실패한만큼 후속부대의 진출 역시 더 늦어지게 됐죠.

이 때 군단장 백선엽은 3, 9사단이 뚫리면서 수도사단과 11사단을 후방으로 물리게 됩니다. 서쪽이 뚫린 상태에서 지키자니 퇴로가 없었기 때문이었죠. 그래도 1군단에 대한 적의 목표는 섬멸이 아닌 돌파였고, 덕분에 1군단의 피해는 크게 없었습니다.

문제는 이 때부터였습니다. 국군 1군단이 어디까지 지켜야 하는가였죠. 밴플리트는 바로 이 때 날아와 대관령을 어떻게든 지켜야 한다고 했고, 백선엽은 이를 받아들입니다.

밴플리트의 명령을 받은 백선엽은 바로 1군단 지휘관들에게 이 사실을 알립니다. 헌데... 이 때 좀 결정적인 일이 벌어집니다. 수도사단이 움직이지 않는 거였죠.

+) 이하의 내용은 그의 회고록에 나타나고 전사에는 딱히 보이는 게 없네요.

대관령에 투입될 부대는 수도사단 1연대였습니다. 헌데 3시간 넘게 수도사단에서는 아무런 회답이 없었다는 것이었죠. 항명이나 다름없는 것이었습니다. 수도사단장은 바로 송요찬, 둘 사이에 무슨 갈등이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이건 치명적이었습니다.

+) 백선엽은 평안도 파벌의 리더(장도영은 넘버 2 (...)), 송요찬은 무파벌이었습니다. 이미 이 때 송요찬이 이 파벌 인사에 대해 불만을 가졌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전장에서 치명적인 것은 부인할 수 없군요. 아무튼 백선엽 입장에서 서술하는 것이니 이에 대한 참고는 필요하겠네요.

송요찬이 1연대를 뺄 수 없었던 이유는 동해안, 사단의 정면으로 적이 내려오는 상황에서 정예 1연대를 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대관령을 확보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때 군단 작전 참모로 있었던 공국진은 이렇게 백선엽을 다그칩니다.

"육군 소장으로 만족할 겁니까, 아니면 명장으로 이름을 남길 겁니까?"

공국진은 이 때의 일을 백선엽이 대륙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어 화를 잘 내지 않아서 일부러 화를 내게 만들었다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백선엽이 빡친 건 맞는 것 같고 (...); 이후 빨치산 토벌 과정에서 둘은 다시 부딪히죠. 아무튼 공국진은 이런 회고를 남깁니다.

"드디어 군단장은 화가 났다." (...)

백선엽은 수도사단 사령부로 갔고, 여기서 명령에 복종할 것이냐 불복할 것이냐 묻습니다. 누워 있던 송요찬은 급히 "명령에 복종하겠다"고 대답했죠. 여기서 백선엽은 미 고문관 로저스를 일부러 데려갔다고 합니다. 명령에 불복할 경우 그 자리에서 자를 예정이었던 것이죠.

+) 이게 파벌 싸움이었다면 정말 짜증나는 대목입니다. 그래도 여기서는 송요찬이 잘못했다고 봐야죠. 전쟁이 어떻게 끝날지 모르는 가운데서 (정말 파벌 때문이었다면) 그 자체를 망칠뻔한 대목이니까요. 공국진은 이에 대한 결과를 일부러 찾아가서 끝까지 봤다고 합니다. 참고로 그는 백선엽에 반대되는 함경도 파벌이었습니다. 나중에 빨치산 토벌에서도 함께 했지만 작전을 짜다가 대립, 짤립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할 말이 좀 있네요.

헌데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상중하로 낸 한국전쟁에서는 1연대가 제대로 상황도 알지 못 한 채 투입됐다고 적고 있다는 점이죠. 반면 백선엽 회고록에는 한신 연대장이 이미 준비를 끝내놓고 있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지금 나오고 있는 공식 전사에는 이에 대한 말이 없구요) 이렇게 본다면 얘기가 또 달라지죠. 1연대가 준비되지 않은 상황이라 시간을 들였다는 쪽으로요. 송요찬 쪽 입장을 안 봐서 모르겠습니다만, 이를 참작하긴 해야 될 듯 하네요.

뭐 그래도 1연대 투입은 적절했습니다. 1연대가 고지에 오른지 불과 1시간이 지나 중공군이 나타났고, 곧바로 혈전이 시작됩니다.

+) 현장에 있던 공국진은 "1연대가 고지에 올라선 뒤 동쪽 방향을 향해 계속 총을 갈겨대면서 ‘신나는 전투’를 벌였다"고 증언합니다 (...);;

서쪽에 비한다면 상황은 괜찮았습니다. 1군단은 그 동안 북한군 정도만 상대하며 별 피해를 입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거기다 적은 급히 온데다 중공, 북한군이 따로 놀았구요. 이거에 비하면 아군은 꽤 셌죠. 수도사단 자체가 1, 6사단과 비교할만한 정예사단이었고, 동해안의 요지를 거의 홀로 맡아 왔습니다. 부족한 건 중공군과의 전투 경험 정도였죠. 거기다 수도사단에는 이름 높은 맹장이 있었으니...


바로 연대장 한신이었죠. 낙동강 전선에서 후퇴명령을 거부하고 3일 동안 고지를 사수했고, 수 틀리면 상관한테도 덤비는 (...);;; 깡다구를 가진 이였습니다.

이들 앞에 있던 건 2개 사단(워낙에 혼성이고 급히 일어난 일이라 정확한 규모는 모르나 봅니다) 정도, 난이도야 좀 쉬웠을지 몰라도 역시 쉬운 전투라는 건 없습니다. 이 곳은 돌파구의 우측이었고, 대관령을 점령당하면 남쪽은 물론 동쪽 강릉도 위험했습니다. 강릉에는 미군 비행장도 있는 상황이었죠. 단지 패하는 게 아니라 1군단까지 붕괴된다면? 동해안은 어찌될 지 몰랐습니다.

그리고 수도사단은 공산군을 제대로 막아냅니다. 특히 1연대의 수훈이 컸습니다. 한신은 때로는 적을 기다렸다가 화력을 집중해서, 때로는 백병전으로 적을 막았고 미리 준비된 방어선들로 철수해 가면서 큰 피해를 입힙니다. 이 때 1연대의 전사자는 12명이었다고 합니다. 공산군이 입은 피해는 천 명 정도로 추정하죠. 1연대와 함께 배치된 11사단 20연대 역시 적을 무사히 막아냈죠.

이렇게 돌파구의 오른쪽이 지켜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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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리지웨이는 동부전선에 급히 미 3사단을 투입합니다. 그 외에도 가용한 모든 병력을 투입할 예정이었죠.

3군단이 밀리고 밀리면서 60km에 달하는 돌파구가 만들어지고 있었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하진부리까지 밀고 내려오는 적을 막아내야 되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먼저 가느냐의 시간 싸움이었죠.

20일에 하진부에서 겨우 수습을 시작했던 국군 3군단은 21일에 다시 붕괴, 남하하고 있었습니다. 중공군은 이들을 쫓아 계속 내려오고 있었죠.

바로 그 때인 22일, 미 3사단은 운두령에 도달했고, 18일까지 격전을 치르며 운두령을 확보합니다. 여기에 미 7사단이 내려오는 중공군에 맞서 방어를 시작했죠. 돌파구는 막혔고, 오히려 남쪽까지 내려온 중공군의 후방이 차단됐으며, 이 때 중공군의 고질적인 약점이 드러납니다.

5일만에 공세종말점에 도달한 것이었죠.

23일부터 아군의 총반격이 개시됩니다. 서쪽으로는 미 2사단과 해병대, 국군 6사단, 중앙에는 미 3사단, 동쪽으로는 국군 1군단이었습니다. 팽덕회는 21일에 이미 공세의 실패를 깨닫고 철수를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너무 늦었죠.

여기서 돋보이는 것은 미 2사단과 187공수여단에서 뽑은 특수임무부대 게르하트 TF입니다. 이들은 전차를 중심으로 밀고 나갔다가 지뢰를 탐지하고 천천히 전진했죠.

이 때 알몬드가 날아와서 "지금 지뢰 따위를 걱정할 때가 아니다. 귀관은 지뢰에 부딪힐 때까지 최고속도로 진격하라"는 명을 내립니다.

... 알몬드 답습니다. -_-;

운에 맡긴 진격, 다행히 중공군은 지뢰를 심을 여유가 없이 도주했고, 게르하트부대는 시속 10km의 속도로 적진을 돌파합니다. 적의 항복이 이어졌고 이들을 태울 차가 부족해 공병 4명이 80명의 포로를 감시해야 될 정도였죠.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28일까지 아군은 38선을 회복하고 수많은 적을 포로로 잡습니다. 화천 저수지에서 잡은 포로만 3만 8천여명이라고 합니다. (용문산 전투에서 보듯이 포로의 수가 심하게 어긋나는데 -_-a 6사단이 전투로 잡은 게 아니라 그냥 이 쪽에 있던 부대가 잡은 포로를 다 합친 게 아닐까 합니다)

이렇게 중공군 6차 공세는 아군의 완승으로 끝이 납니다.

중공군은 분명 처음은 좋았습니다. 그 산길을 빠른 속도로 질주하는 운동전을 보여주었죠. 하지만 역시 거기까지였습니다. 산악지대이니만큼 보급이 더 힘들거라는 UN군측의 판단이 옳았죠. 돌파구의 왼쪽에서 미 2사단이 버티면서 애초의 계획은 어그러졌고, 3중 포위망 중 첫번째가 어느 정도 됐고 두번째가 약간 됐을 뿐 세번째는 만들어지지도 않았습니다. 그 전에 그들이 지쳐버렸죠. 거기다 포위망에 가뒀던 국군은 허망하게 도망쳐 버렸구요 (...)

반면 UN군은 4월 공세 때 선보였던 화해(火海) 전술을 다시 보여줬고, 이것이 중공군에게 제대로 통한다는 것을 다시 알게 됐습니다. 여기다 급히 예비대를 투입한 게 아슬아슬하게 맞았고, 그 특유의 기동력으로 적의 전의를 완전히 꺾어놓았죠.

이젠 어떤 상황에서도 지지 않는다는 걸 확실히 깨닫게 된 공세였습니다.

리지웨이는 곧바로 다음 작전을 준비합니다. 전쟁을 끝내기 위한 최종 공세였습니다. 명예로운 휴전을 위한, 그 휴전선을 만들기 위한 말뚝 박기(Pile Drive) 작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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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는 별개로, 국군에는 남은 게 있었죠.

작전이 모두 끝난 25일, 백선엽은 강릉에서 밴플리트를 맞이합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죠. 참모총장 정일권과 전방지휘소장 이준식이 있었습니다. 일과 끝난 후 "올 갈굼이 왔다"는 이등병의 심정이었을지, 자기는 칭찬받을 줄 알았는데 아니어서 놀란 것일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한국군 3군단을 폐지한다. 육군본부의 작전통제권도 없어진다. 육본의 임무는 작전을 제외한 인사와 행정, 군수와 훈련에만 국한한다. 한국군 1군단은 내 지휘를 받으며, 육본 전방지휘소도 폐지한다."

21일 유재흥에게 했던 말을 공식적으로 언급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하진부리에서의 붕괴가 컸죠. 그 동안 간접적으로 행사했던 작전지휘권을 직접적으로 바꾼다는 것이었습니다.

"늘 허약했다. 정신력은 갖췄지만 용기만으로 나설 수 있는 전쟁이 아니었다. 그 이상의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북한군과 중공군은 늘 그런 국군만을 골라 공격을 해왔고, 3군단의 해체에서 보듯이 늘 그렇게 우리는 뚫렸다. 무엇인가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해야 했다. 그 답을 어디에서 찾을까. 미군은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어떤 힘을 줄 수 있을까."

여기서 단지 미군이 국군을 완전히 가지게 됐구나... 하는 비탄감에 젖으면 안 됩니다. 못 한만큼 새롭게 태어나야 됐죠. 그리고 이 점에서 미군은 확실히 도움을 줬습니다.

밴플리트는 우선 3군단에 있었던 3사단을 국군 1군단에 배치합니다. 하지만 전선에 투입하지는 않았죠. 강원도 양양에 대규모 훈련장이 만들어졌고, 여기서 훈련이 다시 시작됩니다. 사병들만 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사단장까지 참가하는 사단 규모의 훈련이었죠. 이를 위해 150명의 미군 장교 및 하사관이 투입됐고, 가혹한 훈련이 시작됩니다. 합격하지 못 하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되는 훈련이었습니다. 기존의 사단이든 새로 창설된 사단이든 돌아가면서 여기서 훈련을 거치게 됐죠.

동시에 장교들의 훈련도 다시 시작됩니다. 51년 12월 대구에 참모학교가 창설됐고, 52년 1월에는 4년제 육사가 진해에서 다시 만들어집니다. 본격적인 장교 육성이었죠. 51년 말에 250명의 장교가 미국에 유학간 것을 시작해 전군의 거의 모든 장교들이 미국에 단기 유학을 가 새롭게 배우게 됩니다.

국군이 다시 태어나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물론 자주적이진 않습니다. 하지만 소련처럼 (이미 근대화된 전쟁을 많이 겪고도) 남녀 성비율이 회복되지 않을 정도의 큰 피해와 경험을 하고 바꾸는 것보다, 중국처럼 국력을 충분히 가지고도 나중에야 깨닫게 되는 것보다는 이게 낫다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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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기로 생각했던 작전권 문제는 그냥 넘기겠습니다. 머리 잘 굴려서 써야 되는 주제인데 부록 느낌으로 쓰기가 좀 그렇네요. 이게 이슈화 될 때가 또 있으면 써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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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메
12/11/16 19:34
수정 아이콘
잘 봣습니다 백선엽 장군은 역시 대단하네요 전작권이 그 당시에 미군에 있는건 맞는 상황이었죠 아무리 까도 고마운 나라임에는 틀림없긴 합니다
서린언니
12/11/16 20:51
수정 아이콘
이제 김영옥 대령님이 나설 차례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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