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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11/18 23:23:04
Name 눈시BBbr
Subject [일반] 불굴 - 완. 마지막 공세, 도솔산 전투
한국에 있어서의 정치적 목적은 무엇인가?
- 한반도의 통일, 독립, 민주정부의 수립이다.
한국에 있어서의 군사적 목적은 무엇인가?
- 침략을 격퇴한 다음 휴전협상을 통해 적대행위를 종결시킨다.

이 둘은 명확히 구분되어야 한다.

미국은
- 우선 적을 38선 이북으로 격퇴, 휴전을 모색하되 휴전선은 휴전이 가능하게 설정한다. 즉 북쪽일수록 좋지만 한국의 방위 및 행정에 적합하고, 중공의 체면을 유지시킬 수 있는 선으로 해야 한다.
- 한국의 통일은 외교적 방법으로, 그 이전까지 한국의 주권행사는 휴전선 이남으로 국한하고 북한의 재침을 억제, 격퇴시킬 수 있을 정도로 한국군의 방위력을 육성, 지원한다.

5월 16일, 미 국가안보회의에서 이런 결정이 내려집니다. 따라서 차후공세는 그 휴전선을 정하기 위한 공세가 될 것이었습니다.

5월 말까지 이어진 반격으로 아군은 문산-연천-화천저수지-양구-양양을 잇는 캔자스선을 다시 확보하게 됩니다. 문제는 이제부터였죠. 미 합참은 중공군의 두 가지를 더 고려합니다. 중공군 차기공세시 후퇴할 수 있는 공간 10km와 비무장지대 설치를 위한 공간 10km였죠. 현재 전선에서 20km는 더 북진해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와이오밍선과 신캔자스선이 설정됩니다. 임진강-철원-김화-금성 남쪽-펀치 볼로 이어지는 선이었습니다.


"빨갱아~ 빨갱아~ 휴전회담을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계속 치고 가리~"

또한 이 작전은 아군이 승리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기도 했습니다. 양쪽 다 휴전을 생각하긴 했지만 미는 상태에서 밀리는 쪽의 휴전 제의를 받는 게 더 좋았으니까요. -_-a 좀 유치하다는 생각도 듭니다만.

이렇게 아군이 주도권을 잡으면서도 적의 체면도 나름 살려주는 작전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 개성이 목표에서 빠집니다. 임진강 이북으로 평양까지 가지 않는 이상이야 (...); 적절한 방어선을 잡기 어려웠고, 동서로 같이 진격하기엔 아군의 병력이 부족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개성을 적의 손에 둔다면 나름대로 체면도 살려줄 수 있게 되죠. 실제 공산군도 개성의 중요성을 알았고, 바로 이 곳을 휴전회담장으로 선정했구요.

한국에서 38선 정지 반대 시위가 한창이던 6월 1일, 리지웨이는 작전을 실행합니다. Pile Driver, 말뚝 박기 작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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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전선의 목표는 철의 삼각지대였습니다. 교통의 요지로 공산군 공세의 근원으로 파악하고 있었죠. 리지웨이는 전곡-철원-김화-화천을 연결하는 와이오밍선을 긋고 캔자스선을 확보하면서 캔자스선의 안전을 확보하는 작전을 개시합니다.

여기에 동원된 건 미 1군단과 9군단, 이를 위해 밴플리트는 10군단에 배속된 국군 9사단과 미 3사단을 29일부러 1군단에 배속시킵니다.


미 1군단은 국군 1사단을 임진강 남쪽에서 방어를, 미 1기병사단은 전곡-연천 도로로 임진강 상류쪽을 확보하게 하고 국군 9사단을 산악지대로 보내 고대산을 공격, 미 3사단은 철원을, 미 25사단은 김화를 향해 공격하게 합니다. 방어 및 군단의 공격을 엄호하기로 한 1사단과 1기병사단은 비교적 수월히 임진강을 완전히 확보하지만, 나머지는 공격이 그리 쉽지 않았죠.

역시 문제는 날씨였습니다. 5월 말에 내린 폭우로 도로는 진흙탕이었고, 그 후로도 흐리거나 폭우가 쏟아지거나 하면서 진격을 막았습니다. 진격하는 입장에서도 힘들었지만 아군의 장기인 포병과 공군을 활용할 수 없다는 것 역시 컸죠. 중공군은 그 동안 1개 사단을 남긴 채 주력이 북쪽으로 후퇴합니다. 남은 적들은 방어를 강화하고 있었죠.

먼저 공격을 시작한 것은 국군 9사단이었습니다. 현리 전투의 치욕을 겪었던만큼 뭔가를 보여줘야 했죠. 9사단 28연대는 우선 7일에 향로봉과 지장봉을 포위공격, 점령합니다. 사단장 최석은 지체하지 않고 나머지 두 개 연대를 고대산에 투입하죠.

문제는 아직 우측의 미 3사단 7연대가 도착하지 못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중공군의 방어가 강화되면서 이들과의 연계작전이 필요했고, 11일까지 기다렸죠. 이후 이들이 도착하자 협공, 점령에 성공합니다. 이렇게 현리의 치욕을 씻게 됐죠. 뭐 그래도 할 때는 하는군요 -_-a 이 전투로 사살한 중공군이 900여명, 생포된 게 26명입니다. 9사단 역시 158명의 사상자를 냈구요.

한편 미 3사단 본대와 25사단도 악천후와 적의 방어 속에 고생하다 날씨가 갠 9일부터 어마어마한 화력을 퍼부었고, 적은 공황상태에 빠져 후퇴하게 됩니다.

11일까지 1군단은 모두 와이오밍선에 도달했고, 방어를 강화하면서 정찰을 실시합니다. 적은 평강을 비워놓고 북쪽 산악지대에서 강력한 방어진을 짜 놓고 있었죠.

한편 미 9군단은 미 2사단, 24사단, 7사단, 국군 6사단은 미 24사단을 예비로 두고 나머지 3개 사단으로 진격을 개시합니다. 역시 악천후와 적의 방어 속에 어려운 작전을 펼치게 됐죠. 하지만 날씨가 개면서 진격도 순조로웠고, 좌측의 국군 2사단과 중앙의 미 7사단은 병력을 효율적으로 투입하며 11일에 와이오밍선을 확보하게 됩니다.

가장 힘든 전투를 치른 건 6사단이었습니다. 적은 1개 사단 규모의 부대를 배치했고, 사단장 장도영은 측면을 포위하는 것으로 맞섭니다. 7연대 1중대가 적의 후방으로 진출에 성공했고 이를 이용해 적을 물리쳤지만 곧 역습을 받아 물러나야 했죠. 날씨가 갠 9일부터 다시 공격해 11일까지 와이오밍선에 도달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 와이오밍선은 철원-김화-평강의 철의 삼각지대를 감제하는 고지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이 작전들이 모두 성공하면서 적 역시 평야를 버리고 북쪽 산악지대에서 방어선을 쌓았죠. 금방 끝날 줄 알았던 전쟁이 길어지면서 이 곳에서 끝없는 고지전이 계속됩니다.

여기서 눈여겨볼 만한 인물이 미 7사단 31연대 1대대장입니다. 동양인, 그것도 한국계 미국인이었죠.


바로 김영옥입니다.

오랜 기다림 끝에 한국에 온 그는 이 때 대대장이 돼서 중공군과 싸워가며 북진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도 그의 장기인 포병 지원을 마음껏 사용했죠. 문제는... 고지를 점령한 후 휴식을 취하던 상황에 왔습니다.

갑자기 연대 정찰기가 하늘을 맴돌고 있었던 것이죠. 아군 식별용 대공포판도 깔아놨겠다 별 일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와 버립니다. -_-;

곧 155mm 포탄이 1대대 지휘부를 때리기 시작합니다. 2분간 계속됐고, 근접신관인 VT신관이었습니다. 순식간에 지휘부가 큰 피해를 입었죠. 김영옥 역시 중상을 입고 후송됩니다.

이들을 때린 군단포병대는 555포병대였습니다. 헌데 이들은 포격이 부정확하기로 소문났는데, 하필 이 때만은 아주 정확했죠.

근데 그 이유가 어이없습니다. 너무 북쪽에 있어서 아군인 줄 몰랐다는 것이었죠. =_=; 정찰기부터가 6km 전방에 돌출돼 있다고 판단했고, 대공포판은 적의 기만이라고 여겼던 것이죠. 정작 그의 1대대는 2.5~4km 정도만 더 북진했었을 뿐입니다. 이건 참...

그가 후송된 이후 1대대는 이어지는 공격에서 처음으로 패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일본에서 치료 후 돌아왔지만 고지전에 회의를 느껴 일본으로 다시 돌아가게 됐죠.

그에 대한 더 자세한 얘기는 따로 해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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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10군단은 5월 말의 반격에서 비교적 진격을 하지 못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국군 9사단과 미 3사단을 1군단에 뺏겼죠. 이에 따라 국군 7사단과 5사단을 다시 전선에 투입합니다.

리지웨이는 미 10군단에 좌우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역시 북진할 것을 명령합니다. 특히 우측의 국군 1군단은 캔자스선을 넘어 속초도 넘어 간성까지 진출한 상황이었죠.

알몬드는 서쪽인 화천저수지 쪽에 국군 7사단을, 중앙의 양구일대에 미 1 해병사단을, 동쪽 소양강 쪽에 국군 5사단을 배치합니다. 7사단의 목표는 화천저수지 북쪽 군량현, 해병대의 목표는 양구 북쪽 해안분지, 이른바 펀치볼이었습니다. 국군 5사단의 목표는 원통 북쪽 서화리였죠.  이렇게 설정된 선이 신 캔자스선입니다.

7사단은 7일부터 공격을 준비합니다. 헌데 적을 관측하던 5연대장이 집중포화를 맞아 후송되게 됩니다. 급히 김용배 중령이 신임 연대장으로 왔지만 분위기는 침울했죠. 흥미로운 게 이 때 7사단장이 김용배 준장, 영천 전투의 영웅이었습니다. 동명이인이죠.

+) 이후 7월 2일 김용배 연대장은 적의 포탄에 맞아 전사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연대장 김용배는 휘하 병력들을 다독이며 공격을 시작했지만 실패합니다. 적은 포격에도 별 피해없게 진지를 만들었거든요. 여름이 되면서 우거진 숲은 이를 도와줬구요. 1대대가 작전에 성공하기도 했지만 야습으로 바로 뺏겨버렸구요. 그래도 다음날 다시 뺏기는 했습니다. 그래도 연대 주력의 공격은 지지부진했죠.

이에 사단장 김용배는 3연대를 투입, 5연대는 좌측에서 지원하게 합니다. 공격이 지지부진한 것을 알고 찾아온 알몬드는 우측 해병대에서 포병을 지원하게 했고, 해병대에 갈 공군 역시 이 쪽으로 돌려줍니다.

하지만... 그래도 힘들었죠. 어찌나 잘 짜 놓은 건지 -_-a

이렇게 되자 선봉이었던 1대대장 이종택 소령은 묘수를 짜내게 됩니다. 날이 저물어 가면서 후퇴해야 될 상황이었지만, 오히려 역공을 선택했죠. 야습이었습니다. 적이 야습을 주로 하고 아군은 낮에 공군, 포병의 지원을 받게 되면서 국군은 야습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적도 마음을 놓고 있었죠. 야습이라는 게 어두운만큼 지휘하기 힘들기도 했구요. 하지만 잘 하게 되면 적의 허를 찌를 수 있게 되는 것이었죠. 조명도 없고 지원사격도 없는 기습이었습니다.

+) 시각은 21시, 대체 얼마나 방심하고 있었던 건지 -_-;;;

야습은 성공이었습니다. 적은 후퇴했고, 자정이 지날 무렵 고지를 완전히 점거하는 데 성공했죠. 이렇게 되면서 5연대 역시 진격에 성공했고, 3연대는 신캔자스선을 넘어 전진기지까지 점령하게 됩니다. 이렇게 7사단은 목표를 이루게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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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양구의 해안분지는 주변의 1000m 이상씩 되는 산들에 둘러쌓인 분지입니다. 참 특이해서 운석 충돌로 인해 생겼다는 설과 자연침식설로 나뉘어 있죠. 이른바 펀치볼(화채그릇)이었죠. 공산군은 이 곳을 보급기지로 삼아 주변의 고지들에서 방어했습니다.

미 1 해병사단은 이 곳으로 향합니다.

"해병들은 그들이 진격하는 동안 일어난 전투는 어느 곳에서나 적을 쉽게 격퇴하였으며 전승을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전투는 결코 전사에 찬란한 페이지로 장식될 수 없었다." - 미 해병 전사

6월 1일, 작전을 시작한 미 해병 5연대는 순식간에 500명이나 되는 사상자가 발생합니다. 험할대로 험한 고지에 여름으로 우거진 숲은 공격을 방해했고, 안개까지 심심하면 끼면서 해병대는 악전고투를 반복하게 됐죠. 공산군 역시 이 일대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고 북한군 12사단을 배치, 무슨 일이 있어도 방어하라고 명령합니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우측의 미 2사단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입니다. 6차 공세 때 큰 피해를 입고 반격에서 주공을 해 왔던 미 2사단이었기에 지칠대로 지쳐있기도 했죠. 알몬드는 이런 2사단을 빼고 대신 국군 5사단을 넣으면서 해병대의 작전 범위를 늘립니다. 거기다 좌측의 국군 7사단에도 지원을 해 줘야 됐구요.

사단장 스미스는 재배치를 어떻게 해야 될까 고민합니다. 예비대는 두 개 연대가 있었습니다. 미 7 해병연대와 국군 1 해병연대였죠. 이 중 7연대는 양구로 반격할 때 선봉에 배치돼서 나름 피해를 입고 지친 상태였습니다. 반면 국군 해병대는 전투력은 약하다고 평가됐지만 그 동안 피해는 거의 입지 않은 상태였죠.

스미스는 국군 해병대를 선택합니다.


"현 시점에서 이 작전을 성공시킬 수 있는 부대는 우리 해병대 뿐이다."
"어떠한 난관이라도 능히 극복할 수 있는 자만이 최후의 승리를 거둘 수 있다!"

연대장 김대식은 처음에 난색을 표하다가 담담히 받아들입니다. 오히려 또 다른 것에 주목했죠. 미군이 실패해서 국군이 넘겨받은 작전입니다. 그걸 국군이 성공시킨다면? 현리에서의 패배에서 한 달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6월 3일, 해병대는 작전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철수하는 미 해병 5연대를 만나게 됩니다. 낙동강에서부터 투입돼 구원투수 역할을 계속 해 줬고, 인천에서도 맹활약했으며 장진호에서도 생환했던 그들, 이랬던 그들이 지칠대로 지쳐서 철수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국군 해병대 역시 앞으로 다가올 전투를 걱정하게 됐죠. 하지만, 그런만큼 승리에 대한 집착도 강해져 갔습니다.

+) 그래봐야 5연대는 동쪽으로 이동하는 것 뿐이었고 계속 격전을 치르게 됩니다.


점령해야 될 목표는 총 24개, 해안분지를 남쪽에서 감제하는 고지들이었습니다. 해병대는 각 대대별로 세 군데에서 동시에 공격했죠.

  7일까지, 맨 좌측의 1대대는 목표 1, 2를 비교적 수월히 점령한 후 4를 공격했지만 실패, 중앙의 2대대는 8을 점령 후 9를 공격했지만 실패, 3대대는 3, 5, 6을 점령 후 13으로 나갔지만 실패합니다. 10일까지 이런 상황이 계속됐죠. 북한군은 밀리는 듯 했지만 갈수록 지연전을 펼치면서 후방의 방어를 강화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 동안 미 해병대는 큰 피해를 입어가면서도 조금씩이나마 전진을 계속했고, 국군 해병대 역시 균형을 맞춰서 전진해야 했습니다.

이에 연대장은 새로운 방법을 모색합니다. 야습이었습니다. 사단장도 반색했고 반대도 심했지만, 밀어붙였죠.

11일 02:00, 좌우의 1, 3대대가 공격을 시작했고 30분 후에는 2대대 역시 적진에 뛰어듭니다. 공격이 없을거라 방심했던 적들은 급히 후퇴했죠. 06시가 되기까지 1, 2대대는 목표 10까지, 3대대는 12까지 도달합니다. 목표 14-15는 캔자스선이 그어진 지역이었습니다. 적에게 줄 시간 따위는 없었죠. 다음 날에 곧바로 공격을 재개했고, 11, 14, 15, 16을 마저 점령하면서 해병대는 캔자스선에 도달합니다.


이 지역까지가 대암산, 캔자스선이었습니다. 이제 이 북쪽으로 치고 가서 해안분지를 완전히 무력화시켜야 했습니다.

남쪽의 17~21을 점령하는 전투는 18일까지 계속됩니다. 15일에 17, 16일에 18, 17일에 19, 20, 18일에 21까지 점령해 나갔죠. 이 점령했다는 말 하나하나에 무수히 많은 땀과 피가 서려 있습니다.


"나는 우선 적이 파놓은 호 속으로 뛰어 들어 가려고 앞으로 엎드리는 순간 적의 박격포 포탄이 나의 바로 왼쪽에 낙하하여 폭발했다. 그 순간 내가 조금이라도, 아니 0.1초라도, 늦었으면 나의 상반신은 포탄의 폭발 폭풍에 의해 아마 날라갔을 꺼다. 순간 나는 다시 나의 왼쪽부분, 특히 무릎부분이 몽둥이로 두들겨 맞은 것 같은 충격과 함께 통증을 느꼈으나 곧 잊어 버렸다. 이때 나는 이미 적진 속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 이근식 소위 (2중대 3소대장)

야간 공격으로 큰 성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주요 공격은 역시 주간에 이루어졌습니다. 적은 그저 수류탄을 굴리기만 해도 됐고, 고지에 오르는 아군을 기관총과 박격포로 밀어붙이면 됐습니다. 해병들은 그걸 피하기 위해서 포복으로 전진하고 급히 개인호를 파거나 적의 참호나 포탄 구멍으로 뛰어들어야 했죠. 어처구니 없는 공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걸 했죠.

위의 이근식 소위는 총도 버리고 수류탄만 들고 적 기관총 진지로 기어가기도 했다고 합니다. 다 올라와서 마주친 적의 눈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죠. 그런 가운데서도 핀을 뽑은 후 (적이 되던지는 걸 막기 위해) 시간을 끌다가 던졌다고 합니다.

주요 전술은 이렇게 기어올라가서 수류탄을 던지거나 백병전을 벌이는 것 뿐이었습니다. 이 때 9중대장 강복구 중위는 적의 패턴을 알아내고 그에 맞춰 공격했습니다. 강약약중강약약? 아니었죠.

적의 기관총이 멈추고 다시 쏠 때까지는 2초라는 틈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2초 동안 올라갔다가 다시 숙이고, 또 2초 동안 올라가고 그렇게 했다고 하죠.

그리고 이제 해병대는 마지막 목표이자 가장 중요한 목표인 22를 노렸습니다. 작전명 도솔산, 역시 야간 공격이었죠. 3대대가 공격을 맡았고, 1대대가 우회합니다. 적은 두 방향에서 쏟아지는 공격을 견디지 못 하고 후퇴, 05:30에 마침내 22를 점령, 이어 23, 24를 점령하며 미 7해병연대와 연결에 성공합니다.

사살한 적 2263명, 생포한 적은 42명이었습니다. 해병대의 피해는 전사 123명과 부상 582명이었죠.

이렇게 해병대는 펀지볼을 장악하는 데 성공합니다. 특히 국군 해병대는 미 해병대의 보조만 하다가 이 작전의 성공으로 널리 알려지게 됐죠. 이승만은 이를 기뻐하며 포상 외에도 볶은 고추장을 장병들에게 전달했다고 합니다. 해병들은 철모에 밥을 가득 담아 비벼서 맛있게 먹었다고 하죠. 이후 미 2사단에 방어진지를 넘겨주고 휴식을 취하게 됩니다.

이 때 이승만이 직접 내려준 휘호가 바로 무적해병입니다.

+) 여담으로 이근식 소위가 남긴 또 다른 에피소드를 소개합니다.

"나는 쓰러진 적을 일으켜 꿇어 앉히고 그 머리에 총구를 댔다. 죽이려는 생각에서 였다. 그런데 그때 전사한 해병들의 얼굴이 눈 앞에 떠 올랐다. 동시에 그들의 원수를 갚아야 된다는 생각도 났다. 순간 적을 보니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무슨 짐승의 얼굴로 보였다. 그래서 군인은 전투 중 적을 사살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고선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적의 얼굴이 보였다. 그 적은 무릎을 꿇고 마치 파리가 두 앞발을 비비고 있는 것 같이 양손바닥을 부쳐서 비비면서 살려달라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하면서 애걸하던 그 절망에 찬 애절한 적의 표정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그 얼굴에서 다시 전사한 해병들의 얼굴을 보았다."

이 때 귀에서 죽이지 말라는 말이 들렸고, 그는 이걸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는 적을 죽이지 않고 포로로 잡았고, 이 덕분에 계속되는 전쟁과 베트남 전쟁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회고하죠. 지옥 같은 전장 속에서 무엇을 느꼈을 지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다른 부분들에는 해병대답게 참 호전적인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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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국군 5사단은 미 2사단에게서 인제-원통 일대를 넘겨받고 원통 북방 서화리 일대로 진격합니다. 이들 역시 10일까지 별 진전 없이 피해만 입다가 11일부터 화력 지원을 받아가며 공격, 14일까지 신캔자스선에 도달합니다.

마지막으로 1군단은 간성 북쪽까지 진출, 11사단이 북쪽의 방어를 맡고 수도사단이 향로봉을 맡게 됩니다. 국군 5사단이 올라오면서 협공을 받게 된 북한군은 측면의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 수도사단을 공격했죠. 수도사단의 주력인 1연대와 1 기갑연대는 12일까지 8차례나 적의 공격을 막으면서 역공을 펼쳐 근처 고지까지 점령하게 됩니다.

이렇게 파일 드라이브 작전, 와이오밍선과 신캔자스선으로의 진격 작전은 비교적 성공리에 막을 내립니다. 적은 반대편 고지에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고, 소규모 전투는 계속 벌어졌죠. 하지만 더 이상의 진격은 UN군에게도 공산군에게도 없었습니다.



리지웨이와 팽덕회, 이 둘의 대결은 리지웨이의 판정승으로 끝났다고 봐도 되겠죠.

6월 30일, 리지웨이는 전 전선에 전투 중지 명령을 내립니다. 휴전 회담 성사가 눈 앞에 온 것이었죠. 그는 1달이면 모든 게 끝날 것이라 생각하고 기간을 1개월로 잡습니다.

이 때 문산에 있던 기자들도 각기 전쟁이 언제 끝날까 예상해 봤다고 합니다. 2~3주가 대세였죠. 한 비관론자가 6주는 걸릴 거라 하자 다들 그를 비웃었다고 합니다. 이제 막 1년이 된 전쟁, 이제 끝이 보일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건 2년이나 계속된 지리한 휴전 협상과 고지쟁탈전의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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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다음 편부터 다른 이야기들, 인물이든 사건이든 그런 걸 좀 다룬 다음에 다시 휴전 회담 및 고지전으로 넘어가보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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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 ne sais quoi
12/11/18 23:28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2년이나 지리하게 밀당 -_- 이 진행된 이유를 곧 알게되겠네요.
내일은
12/11/18 23:33
수정 아이콘
양구는 제가 군생활을 한 곳이라 지리와 지형을 너무 잘알다보니 저 상황이 이입이 되네요.
대암산과 방산면에서 해안면 펀치볼로 넘어가는 고개의 험난함과 추위는 진짜....
내일은
12/11/18 23:42
수정 아이콘
한국이라는 나라가 이렇게 발전할 줄, 특히 서울 중심으로 발전하게 될 줄 아무도 예상 못했으니 한강과 임진강이라는 천연의 방어선을 이용하기 위해 개성을 포기한 것은 이해는 가는 일입니다만...
지금 생각하면 너무 아쉬운 일입니다. 뭐 그 때는 아마 10년 이내로 또 전쟁 할 줄 알았지 그 상태로 60년이 더 흐를지는 정말 아무도 예상 못했을 겁니다.
그리메
12/11/19 10:39
수정 아이콘
그렇죠...그래서 이젠 휴전이라는 표현보단 종전이라는 표현을 써야 맞지 않을까 싶긴 한데 헌법도 고쳐야지 위에 북쪽도 못믿겠지 참 힘든 일입니다. 하아....
12/11/19 12:08
수정 아이콘
하하 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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