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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11/25 21:57:15
Name 눈시BBbr
Subject [일반] 전쟁 속의 한국 - 3. 거창 양민 학살 사건
첫 글에서 네 가지 조건을 얘기했습니다. 참전한 개개인의 증오, 장병들이 이런 증오로 개인행위를 할 수 없게 하는 훈련 및 군기, 이 장병들에게 윗선에서 내리는 방침, 그리고 이걸 고려할 수 있게 하는 여유죠.

개전 전의 좌익 척결이나 빨치산 토벌 때는 네번째를 제외한 모든 게 결여돼 있었습니다. 증오가 깊은 이들이 우선으로 등용, 투입됐고, 훈련은 제대로 되지도 않았으며, 윗선부터가 그 증오에 미쳐 마음대로 노는 걸 허용했습니다.

개전 후의 상황을 보면 북한 역시 이게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인민재판이 이루어진 거죠. 북한군은 물론 현지에서 협조한 이들 역시 한국과 우익에 대한 증오를 한껏 보여줬고, 훈련도는 아무리 중국의 지원 및 소련의 훈련이 있어도 부족했으며, 김일성은 이를 허용했습니다.

국군이 후퇴할 때의 보도연맹 학살은 세 번째의 이유가 가장 큽니다. 이승만 정권이 이를 허용한 것이죠. 윗선에서 이를 허용하지 않으면 그런 대규모의 학살은 이뤄질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첫번째와 두번째가 제대로 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일선의 서북청년단 등 극우 단체는 사적인 원한으로 보도연맹에 끼워놓고 위에서 풀어준만큼 놀았고, 설령 두번째인 군기를 잡았다 해도 윗선에서 이를 강요한 이상 막을 수 없었습니다. 결정적으로, 네번째인 여유가 없었습니다.

북한군의 후퇴 과정 역시 이랬습니다. 일선부대는 급한만큼 자기를 적대하는 이들을 다 죽이고 갔고, 적대하는 게 확실하지 않음에도 학살하고 갔으며, 김일성은 후퇴하면서 북한 내에 잡아둔 적대세력을 다 죽이고 갔습니다. 이것 외에도 민간인에 대해서, 전쟁포로에 대해서 김일성 등 수뇌부부터가 이에 대한 중요성을 무시했고, 이런 걸 지키기엔 군기가 너무 잡혀 있지 않았으며, 병사들은 우익에 대한 증오와 해방군이라는 지위로 민간인들을 짓눌렀죠.

남북에서 이에 탄압 받고 반발해 대항하는 세력이 나타난 건 당연한 이치죠. 남측의 초기 빨치산만큼이나 북쪽에서도 이런 모습이 보입니다. 신천대학살은 이런 환경에서 나온 것이죠. 북진에 호응한 게릴라전, 그에 대한 보복, 또 보복... 이렇게요.

전쟁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국군의 민간인 범죄는 줄어듭니다. 전선이 안정돼 갈수록 그랬죠. 확실한 적이 눈 앞에 있었고, 후방의 치안은 주로 경찰이나 우익 청년단체들이 맡았으니까요. 이들에 의해 북한군이나 빨치산에 부역하고 내통했다고 잡혀가거나 죽은 경우를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국군의 경우 UN군이 보는 눈도 있기도 했고, 어쨌든 스스로도 대민피해를 최대한 줄이고 이를 행한 자는 처벌하는 등 나아진 모습을 보여줬죠.

하지만 이 과정에서 큰 참사가 일어나니 바로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입니다. 여기서 11사단이 보여준 모습과 그 뒤를 이은 8사단, 백 야전사령부의 모습은 너무나도 다르죠.

미군의 경우 국군보다는 사정이 좋았습니다. 화력이나 오폭에 의한 희생은 따로 다뤄야 될 것이고 개인 단위로 적 포로나 민간인을 쏜 경우는 있었지만 군법으로 처벌했죠. 그럼에도 노근리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가장 큰 건 미군들의 훈련 부족과 밀리는 과정에서 받은 게릴라전이겠지만, 피난민들을 미군에 접근시키지 말라는 방침이 없었다면 그렇게 큰 일은 일어나지 않았겠죠. 뭐 미군 윗선에서도 그 정도로 여유가 없어서였겠지만요.

그리고 중공군, 이들의 대민피해는 정말 없습니다. 최소한 지금까진 못 찾았어요. 그들이 제일 늦게 참전했고 치안은 북한군이 맡았다는 점은 있을 것이고, 역시 전선이 비교적 안정된 상태라는 점도 있을 겁니다. 그 목적이 민심 장악이라는 것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게 있다한 들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대민피해를 주지 않았다는 점은 높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 부대원들이 쫄쫄 굶어죽어가면서도 약탈 같은 게 없었다는 거니까요.

중국인들이 한국인에 비해 더 도덕적이어서 그런 건 아니죠.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을 거치면서 민간인의 피해가 없어야 된다는 걸 확실히 배웠고, 전투력은 약하더라도 이에 대해서는 확실한 방침과 교육이 있기 때문이었죠. 남침을 돕고 직접 참전했음에도 그들을 무시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미군처럼 보급이 충실하지도 않았음에도, 그렇게 많은 병력이 있었음에도 이를 제어했으니까요. 대민피해라는 점에서 6.25에서 가장 좋은 모습을 보여준 건 중공군이었습니다.

그럼... 거창 사건을 시작하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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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 사건으로 시작된 빨치산, 개전 당시에도 많은 병력이 여기에 투입돼 있었습니다. 이후 북한군은 후퇴하면서 많은 병력을 빨치산으로 돌리죠. 이전의 남로당 계열은 구빨치, 이들은 신빨치라 불렸구요. 북진 때도 이들을 토벌하거나 보급로를 지키기 위해 많은 병력을 후방에 둬야 했습니다.

후퇴하고 전선이 안정되는 과정에서 이들을 토벌할 부대가 필요했고, 태백산 지구의 경우 전선과 가까웠던만큼 미군과 국군이 번갈아가며 대규모로 토벌한 후 국군 2사단이 맡게 됩니다. 이들 역시 51년 4월까지 토벌작전을 벌이다가 전선에 투입, 몇 개 대대규모로 빨치산 토벌 부대가 남아서 활동하긴 했습니다만 더 이상의 큰 작전은 없었습니다.

문제는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영호남 일대의 빨치산, 이 곳은 확실한 후방이고 인구밀집지역이었던만큼 반드시 토벌해야 했습니다. 거기다 민간인들에게 피해가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이를 제대로 신경써야 했죠. 게릴라전에서 민간인의 피해가 아예 없게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토벌은 필요 없었다고 하지 않는 이상은요.

한반도는 장기간 게릴라전을 벌이기 힘든 곳입니다. 산이 많아 게릴라 자체에는 좋지만 국토가 넓지 않고 4계절이 있으며, 외부로부터 지원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죠. 만주는 넓어서 주민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식량 정도는 농사로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베트남 같은 경우는 외부에서 지원 받을 수 있었죠. 한반도에선 이게 불가능했고, 북한에서도 이들의 활동 기간은 3년 정도로 잡았습니다. 북한에게는 버림패였죠. 특히 남로당 계열의 구빨치는 북한으로서도 없는 게 나았으니까요.

이런 상황에서 빨치산이 믿을 건 아이러니하게도 군경이 주민들에게 가혹하게 대하는 것이었습니다. 애초에 좌익에 대한 탄압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그들이었죠. 주민들이 군경에 대해 안 좋게 본다면 그들의 힘 역시 커질 것이지만 그냥 전쟁 자체가 싫어지게 될수록, 그걸 넘어서 군경보다 빨치산을 더 싫어하게 될수록 그들은 더 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생필품부터 병력을 더 얻으려면 주민들에게 가야 했고, 몰리면 몰릴수록 약탈로 변해갔죠. 이렇게 그들은 군경에 몰리고, 북한에게는 버림받고, 주민들도 등을 돌리면서 몰락해 갑니다.

결국 이 토벌 과정에서 얼마나 민폐를 적게 하면서 토벌을 잘 해는가가 중요한 것이죠.

빨치산의 활동 및 토벌에 대한 자세한 얘기는 생략하겠습니다. 아쉽지만, 제대로 다루면 분량이 장난이 아닐 것 같네요 =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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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방의 공비 토벌을 맡은 것은 11사단, 사단장은 최덕신이었습니다. 여기서 11사단은 위부터 아래까지, 최악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남원에 본부를 둔 00사단이란 이른바 현지편성 부대 같고 군기 또한 명령불복종, 허위보고 등 문란하기 짝이 없어 주임무가 공비토벌이 아니라 일반인과 관공서 위협 등을 일삼았던 “민폐 사단”이라고 혹평하고 싶었다. 내가 무주경찰서장 당시 바로 옆 거창군이 같이 지리산 덕유산 밑에 있으면서 적 주력 이현상부대보다 오히려 00사단에게 더 신경을 쓰게 되고 더욱이 그 사단장이라는 자의 능력도 문제였다. 5만분지1 지도조차 제대로 판독하지 못했다." - 지리산 공화국, 김두운

이런 상황에서 사단장 최덕신은 견벽청야 작전을 벌입니다. 그 자신의 말을 들어보죠.

"손자병법에도 나오는 이야기인데 국부군의 지장 백 장군이 항일전에 적용해 많은 성과를 거둔 작전개념이기도 해요. 내용은 꼭 지켜야할 전략거점은 벽을 쌓듯이 확보하고 부득이 적에게 내놓는 지역은 인력과 물자를 이동하고 건물을 파괴하는 등 깨끗이 청소해버려 적으로 하여금 이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11사단의 작전지역은 대부분 산세가 험해서 국군이 산 속에 숨은 공비를 일일이 따라다니면서 토벌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나는 군청 소재지 등 경제, 통신, 문화의 집중지를 확보하고 그 사이 군 보급로를 확보하는데 우선 역점을 두었어요. 견벽(堅壁)에 해당하는 작전이지요.
다음으로 공비가 식량을 약탈하거나 인력과 건물을 이용할 수 있는 산간벽촌을 철수시켰습니다. 도처에 산재해 있는 벽촌을 사단 병력을 소수부대로 쪼개서 일일이 보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이것이 청야(淸野)에 해당하는 작전이었습니다."

적 게릴라의 활동을 봉쇄하는 데에서 견벽청야는 크든 작든 나오는 개념입니다. 빨치산이 활동하는 지역의 주민을 이주시키고 식량부터 건물들을 쓰지 못 하게 하는 것이었죠.

문제는 이건 필연적으로 주민의 피해가 나올 수밖에 없는 작전이라는 겁니다. 군기가 개판인 병사들에게 이게 잘 되길 기대할 순 없었죠. 특히 전남을 맡은 9연대의 문제가 컸습니다. 과거사위원회에서는 거창 사건 외에도 이들이 가해자가 된 사건들을 찾아냈고, 아예 따로 책을 낼 정도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최덕신은 군경을 가혹하게 몰아붙입니다. 최대한의 성과를 내라는 것이었죠. 11사단 자신은 물론 경찰의 피해도 컸습니다. 당시 공비 사살 전과는 1950명으로 추정되고 생포, 귀순한 이들이 2178명입니다. 반면 11사단은 전사 531명, 실종 85명, 부상 843명의 피해를 입었죠. 적에 비하면 적지만 다른 토벌 작전에서 이 정도로 큰 피해가 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럴수록 주민들에게는 더 가혹하게 대하게 됐죠.

하지만 일선 병력들이 분노에, 상부의 닥달에 민간인들을 죽이는 걸로는 대량 학살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상부에서 어떤 명령을 내렸는지가 중요하죠.

- 작전지역 내 인원들을 전원 총살하라.
- 공비들의 근거지가 되는 건물은 전부 소각하라.
- 적의 보급품이 될 수 있는 식량과 기타 물자는 안전지역으로 후송하거나 불가능한 경우에는 소각하라.

당시 9연대 3대대는 이런 명령을 받습니다. 거창 사건의 최대 쟁점이 되는 명령서죠. 대대장 한동석은 연대장 오익경이 왜 통비분자들을 그대로 뒀냐고 따졌고, 그에 대해 노약자나 어린이들이라 그냥 뒀으며, 오익경은 그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했다고 합니다. 그 직전 연대 고문관이 전사한 상황이었고, 군 내에서 이를 막을 수 있는 자는 없었습니다. 명령이니까요.

이 때 오익경은 참 계획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발적이 아니라요. 그는 9연대 관할 구역인 함양읍, 휴천면, 유림면, 산청군 금서면, 거창 신원면 등의 책임자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말 합니다.

"(공비에 의해 많은 희생이 나옸고 이제 보니 4개 면민들이 공비들을 재워주고 식량을 제공했으니 빨갱이와 다를 바 없다. 최덕신 장군의 작전명령 1호에 따라 각 면 별로 통비분자들의 명단을 제출받아 집단 처형할 생각이다.) 여러분들은 각 면에 있어서 치안유지를 책임진 지서장으로서 해당면에 분포된 빨갱이들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께서는 자기면에 거주하고 잇는 통비자의 명단을 바로 이 자리에서 보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휴천면 지부장 최시문의 증언에 따르면 각 면에 할당된 명단은 휴천면 1천명, 유림면 3백명, 금서면 5백명, 신원면 8백명 등이었다고 합니다. 누구는 못 하겠다고 아예 모자를 벗고 나갔으며, 누구는 십여명 정도의 명단을 올립니다. 휴천면 지부장 박복원은 잔치를 베풀어 주며 이렇게 말 했다고 하죠. (그는 보도연맹원도 최대한 풀어줬다고 합니다)

"빨갱이라면 산에 있지 죽을라고 집에 숨어 있겠는가?" 차라리 내가 죽었으면 죽었지, 단 한사람이라도 죄없는 주민들을 죽게 할 수는 없지 (중략) 백성들을 빨갱이로 만들 수 잇는 것도 군경들이요, 무죄한 주민들을 죽일 수 잇는 것도 군경들로서, 주민들을 무차별 죽일 수 없으니 죄없는 면민들을 대신하여 차라리 내가 죽겠다고 이렇게 찾아 왔습니다. 죄가 있다면 이 사람에게 있으니 차라리 나를 죽여 주시오."

이렇게 맞서자 오익경은 최덕신에게도 이를 보고하며 애민정신의 모범이라느니, 무고한 사람이 희생되지 않게 하겠다느니 했다고는 합니다. 이렇게 자기 면에서라도 학살을 막거나 줄인 경우가 없진 않습니다. 하지만... 모든 걸 막을 순 없었습니다. 희생이 없게 하겠다구요?


2월 7일부터 8일까지, (10~11일 얘기도 있지만) 700명에 달하는 이들이 학살당합니다. 이걸로 끝은 아니더군요. 각 마을에서 수 명에서 수십명 단위로 학살한 건도 많습니다.

이 때, 학살 전에 어떤 여자가 외쳤다는 말이 참... 슬프게 만들죠.

"백성 없는 나라가 무슨 소용 있십니꺼?"

이 사건은 곧 한국 전체는 물론 해외에도 알려집니다. 그걸 주도한 것은 일선의 병사, 대한청년단 등이었죠. 국회의원에게, 헌병사령관에게 이런 사실이 전해졌고 곧바로 조사가 시작됩니다. 이들이라고 좌익을 탄압 안 하고 안 죽여봤겠습니까? 그들의 눈으로 봐도 말도 안 되는 사건이었던 것이죠.

그런만큼 이에 대한 조사도 말도 안 되는 것 뿐이었습니다. 최경록이 계엄사령관이자 헌병부사령관 김종원을 통해 조사한 인원만 570명이었습니다. 그는 조사 및 관계자 처벌을 요구했지마 신성모에게 막혔고, 경남계염사령관 김종원은 태도를 바꿔 이를 은폐하려 합니다.

이 때 나선 것이 거창 출신 국회의원인 신중목, 그를 찾아온 것은 그가 군수였을 때 만든 대한청년단 부단장 함차산이었습니다. 그는 처음엔 믿지 못 했지만 (어떻게 믿겠어요) 곧 그 지역 출신 국회의원들을 모으고 거창에 다녀옵니다. 이 때 이미 주민들에게는 함구령이 내려졌지만 진상을 알기에 부족하진 않았죠. 그리고 부산의 집으로 돌아온 그에게 김종원은 헌병을 깔아놓았고, 급히 친척집으로 피신합니다. 목숨을 걸고 폭로를 하느냐 마느냐, 그는 폭로를 선택합니다. 3월 15일이었습니다.

그 동안 신성모는 거창에 직접 다녀왔고, 사단장 최덕신의 보고도 12일에 올라왔습니다. 주민들이 공비들에게 협조했다는 내용이 있긴 했지만 희생자들은 대부분 양민이었다는 비교적 솔직한 내용이었죠.

"적성분자라고 대거학살한 주민들 중에는 적성분자도 간혹 있거니와 대부분이 양민이며 심지어는 경찰가족이 포함되어 있으며 무차별적인 사살에 주민들은 무한한 공포심을 포지(抱持)하고 있으며 군에 신뢰감이 전무한 현상임.."

신성모는 직접 거창에 가서 그 희생자 수를 187명으로 줄이라고 했고, 김종원은 그들이 모두 통비분자였다고 발표합니다. 그러면서 국방장관이 직접 갔다왔는데 이를 못 믿냐고 언플했죠.

그러거나 말거나 국회에서는 이에 대한 조사단을 만들었고, 거창으로 갑니다. 여기서 그들은 갑작스런 공격을 당했는데, 모두 김종원이 꾸민 짓이었죠.

국민방위군 사건과 함께 거창 사건이 폭로되면서 이승만은 위기에 몰렸고, 그제야 진상조사를 명령합니다. 이것도 너무 늦었어요. 그 이전에 조병옥 내무장관과 김준연 법무장관이 진상을 파악해야 된다고 했지만 이승만은 이를 거부했거든요. 그리고 이 일이 해외에도 알려지자, 그 유명한 말을 합니다.


"이보라구! 치마폭 부끄러운 곳은 외국에 내보이지 말라고 했잖아!"

이 일로 신성모는 물론 조병옥과 김준연은 잘리죠. 이 때 조병옥은 이렇게 말 합니다.


"이번 거창사건만 해도 엄연히 있는 사실을 없다고 대통령에게 보고하여 사건 조사위 시일을 차일피일 하였던 까닭에 국가위신이 손상되고, 거창사건을 발생하게 한 장본인이 군인인 까닭에 그 책임은 오로지 신국방장관에 있다고 나는 확실히 말하는 바입니다."

나라의 체면이 손상된 건 밝혀서가 아니라 숨겨서라는 것이죠.

이후 군법으로 재판이 진행됐고, 52년 1월 29일에 오익경은 무기징역, 한동석은 징역 10년, 김종원은 3년이라는 참 솜방망이 처벌을 받게 됩니다. 그나마도 9월 14일에는 석방, 10월 8일에는 한동석이 석방됐죠. 김종원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참으로... 구역질 나는 일 아닙니까?

60년 5월, 신원면에서는 겨우 위령비나마 세울 수 있었습니다. 이 때 분노한 유족들이 당시 면장이었던 박영보를 돌로 때려죽이는 사건도 벌어졌죠.

그리고 5.16 후, 이 사건은 다시 묻힙니다. 사람들은 반국가단체로 끌려갔고, 위령비는 땅에 묻혔죠. 독재정권이 끝나고서야 다시 세울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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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은 좀 죽이고 -_- 여기서 생각해 볼 문제는 최덕신의 책임이 어디까지 있냐는 것입니다.

일단 재판 자체에서 최덕신은 책임이 없는 것으로 참고인으로만 나왔고, 주범은 오익경과 한동석이 됐습니다. 어쨌든 최덕신의 명령은 없었습니다. 오익경도 판단은 자신이 한 거라고 진술했구요. 최덕신 역시 자기는 견벽청야를 명령한 것일 뿐이라며 부인했습니다. 뭐 실제 무고한 희생이 없게 하라는 최덕신의 명령을 근거로 오익경을 막은 사람도 있긴 하구요. 자기 책임이 아니라 했을 뿐 양민학살에 대해서 솔직하게 보고하기도 했죠.

문제는 역시 위에 나온 명령서, 이것이 최덕신이 내린 것인가 오익경이 직접 한 것인가입니다. 오익경은 자기가 한 거라 했지만 정작 이 명령서에 "사령관 각하"라는 말이 있다는 것이죠. 스스로를 그렇게 말하진 않았을 거고 이게 최덕신일 가능성이 있으며, 오익경의 변호사도 이걸 내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건 다 무시됐죠.

+) 이 명령서는 김종원에 의해 변경됐고, 이게 들통납니다. 김종원은 이것이 신성모의 명령이라 했죠. 뭐 그래봐야 둘 다 제대로 처벌도 안 받았어요

이게 맞다면, 이 책임자는 두말할 것 없이 최덕신입니다. 재판은 꼬리자르기인 것이죠. 이후 그는 휴전협상의 대표로 나갈 정도로 잘 나갔습니다. 휴전협상 당시 한국 쪽 대표로 끝내 휴전에 사인하지 않은 게 바로 그죠. 이승만의 아주 충실한 따까리였고, 박정희 때도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이 거창 사건의 주동자가 그가 아니더라도 그는 욕 먹어 마땅합니다. 그가 불만이 없진 않을 거예요. 당시 상황은 중공군으로 나라가 망하느냐였고, 그는 빨리 빨치산을 토벌해야 했으며 주어진 병력은 적고 훈련도 안 돼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래도 민간인에 대한 생각 및 효율적으로 작전을 폈어야 했습니다. 전혀 그런 게 안 보였죠. 당장 그의 뒤를 이은 8사단은 횡성 전투로 역시 신편 사단이나 다름 없었지만, 결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똑같은 견벽청야라도 그 내용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내민 것은 국부군이 공산군에 대항해 했던 견벽청야, 근데 이 방식은 일본군이 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국부군이 패한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를 그가 배웠고, 그대로 쓴 것일 뿐이죠.


그가 직접 명령을 내렸든 아니었든, 거창 사건의 가장 큰 책임은 그에게 있습니다.

이런 부분에서 참 웃긴 것이, 최덕신을 감싸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죠.

http://www.minjog21.com/news/articleView.html?idxno=1449
이런 것처럼요.

뭐 어쩄든 그가 억울한 부분도 없잖아 있습니다. 그에 대해서 얘기할 수는 있는 거죠. 하지만 다른 건 다 욕하면서 최덕신만 감쌀 순 없습니다. 그 이유 중에는 그가 독립운동가 출신이라는 것도 있죠. 독립운동가라고 양민학살 해도 되면 이승만이 욕 먹을 이유가 어디 있을까요? 그 역시 이승만을 필두로 한 친일파와 손 잡고 반공을 주도한 이였습니다. 아니 독립운동가 출신 군인 중 그보다 잘 나간 사람은 없다시피해요. 반유신? 그 떄까지 잘 먹고 잘 산 것은 왜 무시하고, 그게 아니더라도 박정희 깠다고 그의 과를 숨겨야 될까요? 남은 건 하나죠. 그가 월북한 것.

국군의 무결과 반공을 중시해서 모든 걸 감쌀 순 있습니다. 실제 군에서도 거창 사건에서 최덕신에 대해서는 별 말 없습니다. 어쨌든 직접 명령을 내리진 않았다고 하니까요. 반면 군경에 의한 민간인 범죄를 중시해서 모두를 깔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최덕신도 당연히 까야죠.

하지만 다른 건 모두 욕하면서 최덕신만 감싸는 경우, 이 경우는 의도가 다른 데 있다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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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불량자
12/11/26 03:52
수정 아이콘
이번 글도 잘 읽었습니다. 이번 연재에 언급된 사건들 전부 전쟁통에 이런 일이 있었다더라 하는 단편적인 지식으로밖에 알지 못했는데 덕분에 많은걸 배우고 또 많은걸 생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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