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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12/04 09:23:08
Name 눈시BBbr
Subject [일반]  휴전과 고지전 - 5. 백마고지 전투


+) 각 전투의 자세한 지도 포기. -_-a 그냥 중간중간 올려놓은 지도로 대강 위치라도 알아주세요 (...);

1952년 7월, 군사분계선에 배치된 UN군은 총 5개 군단 17개 사단이었습니다.
서부전선에는 미 1군단, 미 1 해병사단과 영연방 1사단, 미 3사단, 미 2사단이 있었습니다. 서해안부터 철원 북방까지를 맡았죠.
중부전선에는 미 9군단이 국군 9사단, 미 7사단, 국군 2사단, 미 40사단으로 금성 방면을, 국군 2군단이 국군 6사단, 수도사단, 국군 3사단으로 화천 방면을 맡고 있었죠.
동부전선에는 미 10군단이 국군 7사단, 미 25사단, 국군 8사단, 미 45사단으로 양구 북쪽을, 국군 1군단이 국군 5, 11사단으로 동해안을 맡고 있었죠.

(이후 병력 교체가 있지만 생략)

한편 공산군은 서부전선에 중공군 4개 군 12개 사단을, 중서부전선에 중공군 3개 군 9개 사단을, 중동부전선에 중공군 68군과 북한군 2군단 2개 사단을, 동부전선에는 북한군 2개 군단 4개 사단을 배치하고 있었습니다. 총 11개 군단 33개 사단을 배치하고 있었죠.

보시다시피 양쪽 다 서부에 가장 병력과 화력을 집중했는데 정작 전투는 다른 곳에서 벌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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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회담이 무기한 휴회되면서 UN군은 대규모 공중 폭격에 나섭니다. 이에 스탈린은 모택동에게 이런 전문을 보내죠.

"우리는 적과의 장기적인 전투에서 적극적인 군사행동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 만일 우리가 적극적으로 군사행동을 보여주지 않고 소극적인 수비를 계속하면 적은 우리의 힘을 간과할 것이며 우리에 대한 군사적인 압력을 가할 목적으로 항공폭격을 계속할 것이다."

참... 뒤에서 다 조종하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

이전 편에서 말 했듯 모택동이 이런 것에 계속 끌려다닌 게 의문입니다. 미군을 한국에서 완전히 철수시킨다는 문제는 과연 중공군이 그걸 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걸리고, 포로를 더 받겠다는 건 그런다고 죽어나갈 일선 병사들이 더 많을 거니까요.

양쿠이숭楊奎松 북경대 교수는 자신의 연구에서 그 이유를 중공군 출신 포로가 너무 적었다는 점에서 찾고 있습니다. 당시 미군이 송환하기로 한 이들 중 (52년 7월 13일 기준 8만 3천명) 중공군 포로는 6400명 뿐이라는 거였죠. 여기에 미 제국주의자와 싸운다는 명분으로 미군이 완전히 물러날 때까지 몇 년이고 버텨도 된다고 여겼다고 분석합니다.

+) 그리고 김일성은 계속 징징거립니다. -_-; 가령 모택동이 6천명 얘기하는데 UN 공습으로 하루만에 6천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제발 끝내자고 나왔죠. 이쯤되면 김일성이래도 불쌍합니다. 어쩄든 피해자는 북한 주민들이기도 하구요.


주은래가 계속 왔다갔다 하면서 휴전할까요 말까요 하긴 했지만, 모택동이 스탈린의 주장에 대립했다는 증거는 없는 것 같습니다. 위의 연구에서도 스탈린이 중국에 강경입장을 종용했고 스탈린 사후 소련의 정책이 바뀌면서 바로 그 주장에 따랐다고 하는 걸 봐선 모택동이 스탈린의 뜻을 따른 걸 부정하는 것 같지도 않구요.

글쎄요... 역시 미국과 맞선다는 점 때문인 것 같아요. 소련의 지원도 계속 받을 수 있고 그에 대한 대의명분 역시 계속 세울 수 있죠. 미국과 맞서는 것은 물론 전면에 나서지 않은 스탈린 대신 제 2, 3진영에 이를 제대로 알릴 수 있거든요. 실제 그런 효과가 나왔죠. 스탈린 생전에는 공산진영의 2인자로 만족했지만, 그 후에는 소련과도 대립, 오히려 미국과 친해질 정도였으니까요.

결국... 중국이 더 좋은 평가를 얻으려면 역시 피를 흘려야 된다는 걸까요? 핵전쟁에 대해 모택동이 했던 대범한 생각들을 보면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은 듭니다. 중국에는 어쨌든 참 많은 젊은이들이 있었으니까요.

어쨌든 스탈린이 죽자마자 태도를 바꾼 걸 보면 미국과의 직접 대립을 천년만년 바란 것 같진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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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됐든, 회담은 결렬됐고 중공군은 크게 증강돼 있었습니다. 한 판 붙어볼 만한 환경이 된 것이죠.

조중 연합사령부는 2단계의 추계 공세를 준비합니다. 1단계는 9월 18일부터 10월 5일까지, 2단계는 10월 6일부터 31일까지였죠. 이제까지의 소규모 전투와는 격이 달랐습니다. 한 곳에 몇 배의 병력을 동원하는, 중공군 특유의 작전이 나온 것이죠. 거기다 이전과는 달리 포병, 공군의 전력이 크게 강화돼 있었구요.

그 이전, 7월부터 곳곳에서는 격전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공세 전의 시운전이었죠. 장마로 인해 큰 영향은 주지 못 했지만, 이들 역시 가을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진행됩니다.

판문점 동쪽의 해발 122m 벙커 고지에는 미 1 해병사단이 있었습니다. 적은 40군을 동원해 8월 9일부터 16일까지 일곱차례나 공격해 옵니다. 해병대는 이를 끝까지 버텨냈죠. 570명을 사살했고 전사 92명, 부상 529명의 희생이 나옵니다.


그 후 적의 목표는 사천강-장단에 있던 국군 해병대에 쏟아집니다. 9월 6일부터 10월 31일까지 네 차례나 되는 공격을 받았지만 모두 막아냈죠. 1550여명의 적을 사살했고, 전사 66명, 부상 262명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한편 미 2사단 전방인 불모(Old Baldy), 폭찹 고지 등에서도 격전이 계속됩니다. 이 전투는 11월까지도 계속됐고, 결국 막아내는데 성공하죠. 이 때 마지막까지 적을 막아냈던 타이 대대는 작은 호랑이(리틀 "타이"거)라는 별명을 얻습니다.

그 외에 미 3사단, 영연방 사단의 캐나다 여단, 그리스 대대 등이 격전을 치렀고 고지를 지키거나 후퇴하거나를 반복합니다. 뒤를 이어 국군 1사단도 투입, 고양대-임진강 전투를 치렀죠.

그 동안 동해안에서는 국군 1군단이 월비산을 잃은 후 351고지를 두고 격전을 벌입니다. 7월 10일부터 12일간의 전투로 적 445명을 사살, 아군 68명이 전사, 467명이 부상당했죠. 고지가 한 때 피탈됐지만 탈환했구요. 11워 9일에도 적의 대규모 공격이 있었지만 막아냅니다. 한편 펀치볼 동쪽의 812, 854고지(일명 쌍용 고지)를 지키고 있던 8사단 역시 9월 21일부터 3일간 적의 공격을 막아낸 후 미 45사단과 교대했고, 서쪽의 크리스마스 고지를 지키던 7사단도 10월 6일부터 13일까지 적 공격을 막아냈죠.

이렇게 공산군은 전 전선에서 공격해 옵니다. 그 중 가장 치열했던 곳은 바로 중부전선, 철의 삼각지대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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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동쪽 금성천이었습니다. 7월, 그 동안의 작전으로 아군은 금성천을 넘어 금성 남쪽까지 도달해 있었고, 여기서 적의 감제고지 두 개를 빼앗는 작전을 펼칩니다. 하지만 이 작전을 실패로 끝났고 장마로 인해 소강상태에 들어갔죠. 8월 초에도 소규모 공방이 있었지만 막아냅니다.

9월, 적의 공격이 다시 활발해집니다. 6일 26연대 5중대가 전원 전사하면서 고지를 잃게 되고, 탈환을 위해 6차에 걸쳐 돌격했지만 모두 실패합니다. 9일에야 겨우 탈환에 성공했고, 그 때부터 20일까지 혈전이 반복됩니다. 전면의 수도사단이 확보하고 있던 수도고지는 물론 3사단의 독수리고지 역시 혈전이 계속됐죠.

이 전투로 수도사단은 전초기지를 잃었지만 수도고지는 지켜냈고, 그 틈을 타 6사단이 동쪽에 다시 전초기지를 설치합니다. 이를 통해 금성으로 가는 도로를 통제할 수 있게 됐죠. 수도사단의 피해는 전사 455, 부상 1419명, 적 사살은 2406명이었습니다. 한편 3사단도 전초기지를 상실하고 주방어선을 지켜냈고 적 664명 사살, 전사 109명 부상 384의 피해를 입습니다.

이렇게 아군은 전투는 다시 소강상태에 빠집니다. 하지만 이 금성돌출부는 적의 최종공세에서 집중공격을 당하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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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전선마다 편차가 있지만, 적의 공세는 9월 말부터 10월 초까지 크게 줄게 됩니다. 일단 적이 계획한 추계공세 1단계가 끝나가는 것이었죠. 하지만 2단계가 남아 있었습니다.

철의 삼각지대에서 적의 주공은 위에서 나온 수도고지 등의 전투, 즉 김화-금성천에 이르는 동쪽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음 공세는 서쪽, 철원이었죠. 철원평야를 장악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주 목표는 395고지, 그리고 좌측의 프랑스대대가 방어하는 화살머리고지였죠. 화살머리고지에서는 프랑스대대가 1개 연대의 적을 훌륭하게 막아냅니다. 그리고 동쪽 395고지에서는 10월 6일부터 최대의 혈전이 일어납니다.


常勝 白馬

이 고지가 바로 백마고지입니다. 자... 다른 건 다 넘겨도 이거는 좀 설명해야 될 것 같네요.

9사단은 현리 전투의 굴욕을 겪었던 부대입니다. 사단장 김종오 역시 3사단장이긴 했지만 역시 굴욕을 겪었죠. 춘천-홍천 전투의 영웅인 그에게는 너무나도 힘든 시절이었을 겁니다.

이에 그는 강도 높은 훈련을 개시합니다. 특히 사격에 합격 못 하면 외출외박을 통제했죠 (...);;; 이에 병사들의 실력이 크게 늘었다고 합니다.


진지공사 역시 강도 높게 진행됩니다. 여기서 중요했던 것은 통신선이었죠. 더 이상 포격은 아군의 전유물이 아니었고, 중공군의 포격에 의해 통신선이 쉽게 날아가 버립니다. 전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이기도 했죠. 나중에는 이렇게 통신선을 끊은 후 그걸 복구하러 오는 병력을 포획하는 전술까지 만들어질 정도였죠. 여기서 9사단은 통신선에 최대한 피해가지 않게 공사를 진행했고, 이게 큰 도움이 됐죠.


  395고지는 높진 않았지만 전략적으로 중요한 고지였습니다. 철원 평야 자체를 감제할 수 있었으니까요. 아군이 마지막으로 점령한 후 3개월 동안 이 곳에는 아무런 전투가 없었습니다. 기 모으는 중이었던 것이죠.

전투 직전, 행운이 따릅니다. 중공군의 군관 하나가 귀순해 온 것이었죠. 중공군 38군이 새로 투입됐고 곧 대공세를 취할 것이라는 거였습니다. 이에 사단에서는 각 진지에 일주일 이상 버틸 수 있는 보급품을 추진한 후 예비대인 28연대를 부릅니다.

그리고 10월 6일, 적의 미친듯한 포격이 시작됩니다.


"오게 두어라."

그렇게 15일까지, 무려 12차례에 걸친 공방전이 시작됩니다.

시작은 6일 19:15, 고지는 △자로 맨 앞의 낙타능선에는 30연대 1대대 11중대가 진지를 차려놓고 있었습니다. 중공군의 공격은 여기로 집중됐죠.

"죽기를 각오하고 진지를 고수하라! 아군의 지원화력은 그대들을 충분히 엄호할 것인즉, 앞만 보고 싸우라!"

당시 진지 주변에는 7겹이나 되는 철조망과 지뢰지대가 있었고, 중공군은 포격으로 이들을 깨부수고 왔습니다. 하지만 포병은 이에 대해 충분히 준비가 돼 있었죠. 아군의 포격이 정확하게 때렸고, 적은 큰 피해를 입은 채 한 시간만에 물러납니다. 방어가 잘 돼 있었기에 치열한 포격에도 부상병 한두명이 생기는 정도였고, 통신도 끊기지 않았죠.

그리고 적이 물러난 지 25분만인 20:40, 적은 정면을 포기하고 양쪽으로 밀고 들어옵니다. 끝없이 포를 쏘며 막았지만 방어선 한 쪽이 뚫려버립니다. 이에 백병전으로 막아내는 동시에 예비대를 투입, 돌파구를 틀어막고 적을 쫓아냈죠.

그리고 7일 00:40, 적은 세 번째 공격을 감행합니다. 동쪽에 병력을 투입하는 척 하면서 주력을 북쪽에 밀어붙였고, 끝없는 포격 끝에 대부분의 진지가 드러나게 됩니다. 05시까지 계속된 공격 끝에 이들을 물리치는데 성공했지만 적은 낙타능선 서쪽에 새로운 진지를 만들 수 있었고, 이를 쫓아내려는 시도는 실패했죠.

적은 아군의 방해에도 여기에 병력을 집중, 14시부터 공격을 재개합니다. 아군은 이들을 막아내려 했지만 적은 그 사이에 다른 방향으로 낙타능선을 공격하고 있었죠. 아군은 지칠대로 지친 반면 적은 계속 병력을 교체 투입하고 있었습니다. 낙타능선이 떨어졌고, 적은 본격적으로 인해전술을 보여주죠.

이어 8일 아침, 적은 안개 속에서 공격해 옵니다. 적을 확인하기 힘들었고 포병, 공군의 지원 역시 힘들었죠. 여기에 오폭까지 나오면서 결국 주봉을 상실, 후퇴하게 됩니다. 방금 전까지도 아군이 차지했던 주봉에 포격을 요청, TOT 포격과 함께 공군의 폭격이 끝없이 적을 때렸죠. 이 틈을 타 사단장 김종오는 예비대를 최대한 끌어모아 역습을 개시, 15시간만에 주봉을 탈환하게 됩니다. 적은 9일 00:20에 다시 공격해 왔지만 화력으로 이를 격퇴할 수 있었죠. 그 동안의 방어로 적의 패턴을 알아내 화력을 집중시킨 덕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끝은 아니었습니다. 적은 재편 후 다시 공격해 왔고, 양측의 대대가 포위, 후퇴하게 됩니다. 이에 김종오는 다시 역습부대를 투입해 몰아내야 했죠. 그러고도 10일 새벽에 다시 공격해 와서 또 주봉을 잃었고, 다시 역습을 개시, 탈환합니다. 그리고 아침에 또다시 적이 공격, 주봉을 잃고 결사대를 보내 중화기를 제압 후 또 탈환했죠. 정상에는 적 시체 150구가 쌓여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12일까지... 정말 쉴 시간 없는 전투가 계속됩니다. 그리고 13일 03시를 기점으로 적의 공격이 마침내 끝났죠. 이에 김종오는 반격을 명령, 15일까지 잃었던 고지들을 모두 탈환해내고 적을 축출하죠.


땅에는 수많은 적군의 시체가 쌓여 있었습니다. 확인된 적의 시신만 1만 4389구였습니다. 적 38군이 아예 소멸한 것이죠. 이후 38군은 23군과 교대합니다.

9사단의 피해 역시 적지 않았습니다. 전사만 505명, 부상 2526명, 실종 391명이었습니다.

그렇게 백마고지 전투는 끝납니다.

이 백마고지 전투가 유명한 건 역시 말도 안 되는 혈전이었다는 것이겠죠. 아군의 경우 9사단 하나였지만 중공군은 3개 사단을 모두 투입해 말도 안 되는 큰 피해를 입었으니까요. 그러고도 아군의 승리였구요.

하지만 이 전투에서 도출할 수 있는 전훈이 많다는 것도 있습니다. 전쟁 내내 쌍방 모두에 문제가 됐던 부대의 고립이 없었습니다. 통신선은 언제나 유지됐고, 안개로 인한 오폭은 있었지만 모두 연락이 잘 돼 효율적인 전투를 수행할 수 있었죠.

여기에 김종오 자신이 부대 운용을 정말 잘 했습니다. 각 부대는 피해를 입을 것 같으면 다른 부대와 교체됐고, 예비대가 적시에 투입돼 더 큰 피해를 막고 전황을 반전시킬 수 있었죠. 그 동안의 전투는 잘 싸우는 부대가 주로 맡았고, 피해 역시 이들이 더 많았습니다. 이른바 "전공과 손실을 교환하는" 식이었죠. 이런 방식을 바꿔버린 것입니다. 그 자신도 "잘 싸운다고 계속 투입하면 되겠느냐?"고 증언했죠. 바꿔 말하면 정예부대를 빼도 상관없을 정도로 9사단의 전력이 상승했다는 것일 겁니다.

포병의 지원 역시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이는 중공군 역시 마찬가지였죠. 마비가 안 됐을 뿐 아군을 마비시킬 정도로 충분한 포격을 했고, 아군 역시 거대하고 적절한 화력 운용을 했습니다. 이 때 아군이 쏜 포탄이 21만 9954발, 중공군이 쏜 게 약 5만 5천발이었다고 합니다. 여기다 막 창설된 53전차중대가 개활지에 투입돼 적을 견제하고 정확한 포격을 구사, 보전 협동작전을 잘 보여준 것도 있죠.

어쨌든... 여러모로 국군의 능력을 보여준 전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밴플리트는 매일 올 정도로 이 전투에 신경 썼고, 이승만 역시 전투중에 방문할 정도로 이 전투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후 이승만은 9사단에 상승이라는 휘호를 줬죠. 이후 이 말은 해남 아니 백마부대의 자랑이 됩니다. 이 때 능선의 모습이 백마를 닮아서 백마고지가 됐다는 말은 유명하죠. 정작 작전에서는 낙타능선이라 불렸습니다만 (...)

한편 김종오는 이렇게 명장으로 거듭났고, 이후 국군 5번째 대장이 됩니다.

+) 4번째는 박모씨 -_-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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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무리 큰 승리를 거뒀다 한들 고지 한두개로 너무 큰 피해를 봤죠. 밴플리트야 당연했고 클라크 신임 UN 사령관까지 이런 상황을 회의적으로 보게 됩니다. 이에 따라 8일에 아예 클라크가 평양-원산선까지 진격하는 작전을 건의합니다. 하지만... 역시 거부됩니다. -_-a

어쩔 수 있나요. 또 고지전 해야죠. 에휴 -_- 밴플리트는 그걸 대신해 김화 방면에서 새로운 작전을 구상합니다. 당시 전선은 철원-고성 방면에 비해 김화 쪽이 낮은 편이었고 이 때문에 동쪽의 금성돌출부와 서쪽의 백마고지가 집중공격 받았죠. 굴곡을 좀 더 정리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여기에 적의 공세로 뺏긴 주도권을 되찾는 것이 컸죠. 작전명 쇼다운이었습니다. 힘을 과시한다는 것이었죠.

목표는 해발 580m의 저격 능선과 598m의 삼각고지였죠.

여기에 투입되는 건 미 7사단과 국군 2사단, 각기 1개 대대로 고지를 공격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병력의 피해를 막기 위해 근접지원을 최대한 강화하고 5일 안에 순식간에 뺏어버리겠다는 것이었습니다만...

일단 백마고지 전투가 계속되면서 계획된 포격 지원 중 많은 부분이 9사단으로 전환됩니다. 여기서 좀 문제가 나와버렸죠.

14일에 작전은 개시됐고, 2사단은 저격능선으로, 미 7사단은 삼각고지로 공격을 시작합니다. 강력한 지원 끝에 얼마 안 가 고지를 점령하거나 근처까지 갔습니다만, 야간 적의 역습으로 곧 물러나게 됩니다. 다음 날 부대를 바꿔서 공격했지만, 마찬가지였죠.

16일에는 마침내 두 고지를 확보하지만, 역시 19일에 둘 다 빼앗겨 버렸죠. 이런 방식이 계속됩니다. 정말 전형적인 고지전의 모습을 보여주죠. 한 개 대대씩 공격하다가 두 개, 연대 단위로 계속 공격해 갔지만 그 때마다 큰 피해를 입고 돌아와야 했습니다. 그래도 20일이 되면서 양 쪽 다 확보에 성공했죠.

문제는 25일에 삼각고지까지 2사단이 맡아버렸다는 것입니다. 그 곳을 맡은 7사단과 에티오피아 대대까지 빠진 것이죠. 7사단의 피해가 큰 것인지 이 정도면 됐다 싶은 건지, 미군의 손해를 더 보기 힘들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30일에 삼각고지에 중공군의 대규모 공격이 왔고, 뺏기게 됩니다. 이에 군단에서는 11월 5일 삼각고지를 포기하게 되죠. 이후 11월 25일까지 저격능선을 향한 적의 공격이 계속됐고, 막아냅니다.

무려 42일간의 작전 동안 국군 2사단은 사살 3772명, 포로 72명의 전과를 거둡니다. 2사단의 피해는 전사 1096, 부상 3496명이었습니다. 야심차게 시작한 것에 비해 삼각고지는 결국 점령하지 못 했고, 2사단의 피해가 너무 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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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전선은 다시 소강상태로 접어듭니다. 양쪽 다 많은 병력을 쏟아부었고, 많은 피해를 입었죠. 특히 UN군으로서는 더 이상의 작전을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중공군이 좀 약하게 나올 때나 가능하지 세게 나오면 피해가 너무 커져 버리니까요. 그런다고 얻는 건 너무 적구요. 공산군 역시 53년 봄이나 여름쯤 해서 또 공세를 할 생각은 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럴 이유가 사라져 버립니다. 대신 그들은 "우리가 전쟁에서 이겼다"고 할 수 있는 대규모 공세로 바꾸게 되죠.

휴전 협상이 무기한 휴회된 가운데, 전선도 조용해진 상황에서 52년도 흘러가고 53년이 옵니다. 그리고 53년 봄, 전쟁을 끝낼만한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죠. 수많은 피가 흐르고 죽음이 있었지만, 정작 전쟁을 끝낸 건 단 한 사람의 죽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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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가루인형형
12/12/04 10:06
수정 아이콘
적의 패턴을 알아내 화력을 집중...역시 극사실주의 김성모 작가군요.
12/12/04 10:32
수정 아이콘
처음 자대배치 받을 때 9사단이 철원인줄 알고 자포자기했었는데 다행이 파주 문산쪽에 있더라구요. 휴.... 크크 백마마크 보니 옛날 생각 많이 나네요. 백마고지에 관한 건 하두 쏘아대서 고지의 높이가 낮아지고 그 모습이 백마같았다나 뭐래나.... 했었는데요 덕분에 잘 읽고 갑니다 ^^
Tristana
12/12/04 10:43
수정 아이콘
전 306에서 6사단 배치받고 6사단이 어디야 이랬는데 훈련소에서 견학간 곳이 백마고지 근처였다는..-_-
12/12/04 10:45
수정 아이콘
625역사 관련 글을 쓰시는 걸 꾸준히 보며 김종오 장군이나 현리전투 등을 보면서 언제쯤 백마고지전이 나올까...ㅠ_ㅠ 하는 생각만 했었네요
드디어 처음 입대하고 정신교육 받을때 9사단에서 상승부터 시작해서 진건 한번도 없다는 듯이 교육했었는데...
상병때(너무 풀린 군번이라...) 전쟁사 관련책을 보고 아... 원래 처음 사단 만들면 신고식처럼 다 말아먹는 전투를 몇번하는구나 했던 기억이 있네요...
항상 재미있게 잘 보고 있습니다 눈시님 흐흐..
눈시BBbr
12/12/04 12:32
수정 아이콘
아무래도 막판에 나오는 거니까요. 9사단... 뭐 현리전투가 진 건 아니지 않습니까? (...) 싸우기도 전에 도망간 거지. 칠천량 해전도 아니고 = =;;; 사실 신고식 겸으로 말아먹는 건 미군의 주특기입니다. ( - -); 국군의 경우야 뭐 -_-; 그냥 개판이었으니...
감사합니다 ^^
wish buRn
12/12/04 11:22
수정 아이콘
DNA소리는 안들어도 되겠군요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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