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글은 코멘트화하는 것이 맞을 것이지만, 아래에 올라왔던 본문(https://pgrer.net/?b=8&n=47080)이 삭제된 터라 새로운 스레드로 올려도 무방하겠다 싶어 아래의 글에 올렸던 코멘트에 몇 마디를 더 첨언해서 글을 올려봅니다.

저는 "왜 유난히 축구에는 전문가가 많은것일까요?"라는 글에 동의하지는 않습니다만, 그리 이상하다고 보진 않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가질 법한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저만한 국가대표/클럽을 운영하는 놈들이 어련히 잘 알아서 하겠느냐, 전문가들이 허섭한 판단하겠냐, 감독들이/구단주가 그 정도도 모르겠느냐.'와 같은, 다시 말해 국가대표/클럽팀의 운영은 어느 정도 전문적 합리성에 기반해서 돌아가고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인데, 이러한 전제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니까요.

그러나 이로부터 "국가대표/클럽팀의 운영에 있어서 전문성이 결여되어 있고 감정적이며 자의적일 뿐인 팬들의 견해는 배제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도출해내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원래 전문가 오브 전문가들이 모인 집단도 얼마든지 뻘타를 날릴 수 있기 마련이고 - 연준 같은 조직도 실수를 범하지요 - 어느 분야든 간에 전문가들끼리도 이견이 생기는 경우가 부지기수이죠. 전문가라고 해서 모든 일을 완벽하게 처리할 순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전문가들의 판단을 과도하게 신뢰하는 것은 막연한 환상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특히 축구를 비롯한 스포츠 분야 같은 경우는 매니아들의 의견이 전문적이지는 않을지언정 <전문가들이 최종적으로 내리는 판단>과 크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명확히 보이는 부분은 명확히 보죠. 팬들 사이에서의 선수의 인기와 선수 주급 사이에서, 그리고 선수 주급과 팀 성적 사이에서 통계적으로도 꽤나 높은 인과관계가 포착된다는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거칠게 말해 실재적인 선수의 기량과 팬들이 느끼는 선수의 기량 사이에 괴리가 별로 없단 이야기지요. 가령 2010년 월드컵의 독일 vs 아르헨티나의 8강전 같은 경우 축구의 전문가 오브 전문가일 마라도나보다도 어설픈 축구 매니아가 훨씬 밸런스 좋은 선발 멤버로 포메이션을 구성했을 공산이 큽니다.

또한, 팬들은 전문가들과 달리 이해관계가 얽힌 것이 없다보니 상대적으로 객관적인 견지에서 사태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합리적인 판단을 가리는 집착, 지나친 몰입에 의한 맹목성, 사적인 감정, 파벌, 원한 관계, 자기 고집, 당장의 성적에 급급한 나머지 생기는 근시안적 태도 등으로 인한 오판으로부터 어느 정도는 자유롭다는 거지요. 이 역시 흔한 사례입니다. 위의 마라도나가 아니더라도, 팬덤의 지속적인 비판이 종국적으로는 맞다는 것이 증명되고 감독이나 보드진의 똥고집이 삽질이었음이 드러나는 경우는 굳이 사례를 꼽을 필요도 없을 정도로 흔해 빠졌죠. 가령 감독지황이라고 말할만한 알렉스 퍼거슨은 사적인 감정으로 스탐을 방출하려 했고, 팬들은 이에 크게 반발했지만, 결국은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고, 나중에 꽤나 후회했지요. 레알 마드리드의 <외질 방출과 결부된 베일 영입>은 (나중에 성공으로 이어질지는 몰라도) 일단은 당초 의도와는 어긋난 결과를 낳고 있고, 이는 팬들은 예견했지만 페레즈는 예견하지 못한 바입니다. 지난 시즌 바르셀로나의 팬들 중 상당 수가 지나친 메시와 챠비의 혹사가 문제를 일으킬 것이며, 압박전술의 정교함의 하락은 챔피언스리그 상위 단계에서 경기 장악력과 수비에 있어 문제를 야기할 것이라고 예견했는데, 결과는 그대로 되었지요. 굳이 축구 아니더라도 다른 스포츠에서도 쉬 볼 수 있죠. 백인천이라든가, 양승호라든가, 이순철이라든가 등등..

결정적으로, 여타 학술 분야에서 <전문가들 사이에 합의된 일반적 견해>가 깨어져나가는 경우가 흔치는 않지만 드물게나마 있습니다.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이 놀고 잠자고 있던 것이 아님에도, 그네들의 학적 전문성이 결여되어 있던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예컨대, 얼마 전까지만 해도 2차대전의 프랑스 전역의 경우 '리델 하트의 영향을 받은 독일군이 전격전으로 프랑스 박살냄 후덜덜'이라는 게 정론이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전격전 그런 거 온겜넷식 포장에 불과했다는 것이 드러났죠.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한국사학계에서는 내재적 발전론이 정론이었고 식민지 근대화론은 어용이론 취급을 받았지만, 지금에 와서는 19세기 조선은 망해가고 있었고 인구도 줄고 있었고 실물경제도 파탄나고 있었다는 식의 식민지 근대화론의 연구 성과에 반박할 수 있는 이는 없게 되었고요. 세계화에 따른 각국의 긴밀한 경제적 공조가 전쟁을 불능케 할 것이란 19세기의 정치/경제 전문가들의 낙관은 1차대전 앞에서 무력했습니다. 유럽 열강들의 제국주의와 식민지 정책이 경제적으로는 뻘짓에 가까웠다는 것이 중론으로 자리잡은 것은 얼마 되지 않죠. 당장 80년대만 해도 종속이론이 한국학계의 주류였고.. 정조의 편지들이 공개되면서 벽파-시파에 대한 기존 통설은 완전히 박살이 났고, 한때 주류 이론이던 구조주의 언어학은 촘스키의 공세 하에 멸망에 가까운 길을 걸어갔으며, 타입1 근섬유와 타입2 근섬유의 비율은 선천적인 것으로 완전히 고정적이며 근섬유의 숫자도 바뀌지 않는다는 식의 일반론은 최근에 와서는 '그래도 약간 바뀌긴 바뀌던데..그리고 근섬유가 늘어나는 경우도 배제하긴 어렵겠더라 크;'라는 식으로 수정이 되었죠. 이러한 사실들은 전문가들에게도 미지의 영역이란 언제나 존재한다는 것이며, 특히 자연과학이 아닌 사회과학이나 인문학은 더더욱 그렇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물론 이러한 사실들이 과학의 지위를 유사과학이 언감생심 넘보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본문의 범위가 지나치게 넓어질 듯 하여 일단 생략합니다.)

학술의 분야에서도 이럴진대, 전문가 집단이 확보하고 있는 전문성에 있어서 학술 분야에 훨씬 못 미치는, 그 성격상 실증적이기보다는 예술계에 가까운 형태의 상호 승인과 권력 구축에 의존하는, 나아가 가장 기초적인 수준의 통계학적 접근조차 거부하고 있는 축구 전문가 집단을 신격화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축구 관련 종사자들의 전문성은 보통 기대되는 전문가들의 수준에 미치지 못합니다. 가령 <축구철학의 역사>의 저자인 영국의 칼럼리스트 조나단 윌슨은 축구 전문가 중 최고 수준에 달할 것이고 많은 탁견을 내놓고 있지만, 까놓고 말해 여타 학문 분야로 치면 교수 레벨은 커녕 석사 학위자 수준에도 못 미칠 공산이 큽니다. 다른 분야에 비해서 축구는 전문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단적인 예이지요. 여타 분야와는 달리, 축구 전문가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펼 때 확실한 레퍼런스에 기반한다거나 실증적인 근거를 가지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상당부분 직관적이고 주관적 경험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죠. 98월드컵 직전에 한국의 많은 전문가들은 네덜란드 상대로 해볼만하다는 식의 이야기를 했지만, 결과는 월드컵 역사상 가장 압도적인 패배 중 하나로 이어졌습니다.

게다가 축구라는 종목 자체가 지난 수십 년 간 그 어떤 분야보다도 빠른 발전을 일구어냈는데 - 실 플레이타임의 증가, 경기당 러닝거리의 증가, 경기 템포의 향상, 경기당 액션 숫자의 증가, 트레이닝 이론의 혁신적인 발전 등등 - 이는 축구가 그만큼 아직 미개척된 부분이 많고, 통일된 일반론을 내놓기에 어려움이 따르며, 전문가들에게 있어서의 미지의 영역이 꽤나 넓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발전의 여지가 거의 없고 정론을 분명하게 내놓을 수 있을 정도로 고도화 된 종목이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들이니까요.

또한 축구 산업의 규모의 협소함도 고려해볼 여지가 있습니다. 축구 클럽들은 규모를 놓고 볼 때 일반 기업에 비하면 구멍가게 수준이며(세계 기업 매출 순위를 보고 난 다음 축구 클럽 매출 순위를 보고 나면 우스움을 느끼게 되죠.), 축구 클럽의 경영인들은 구멍가게 사장이고, 축구 클럽이나 각국의 축구협회의 종사자들은 구멍가게 종업원인 셈입니다. 대한 축구 협회의 1년 예산은 1000억 정도인데, 이는 일반 기업체로 치면 중소기업 수준에 불과하죠. 따라서 이들이 헛짓거리를 남발하는 것에 이상함을 느낀다거나, 무언가 우리가 모르는 심층적이고 합리적인 이유가 있을 거라고 기대를 품을 이유가 없습니다. 축구 클럽의 운영은 일반 기업체에 비하면 비합리적인 게 당연하다는 거죠. 한국 야쿠르트가 뭐 개삽질 하나 거하게 했다고 해서 이상하게 느낄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근데 한국 야쿠르트는 축구판 뿐만 아니라 전세계 스포츠 산업 내에서 가장 위상이 높고 막대한 자본규모를 자랑하는 레알 마드리드보다도 매출액이 크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시총이 30억 달러라고 하는데, 삼성은 2000억 달러가 넘습니다. 근데 삼성도 이번 갤럭시4 판매 부진으로 인해 2분기에 고전 했었죠. 남양유업이 상궤에 어긋난 행태를 보이면서 올 한 해를 시끄럽게 달구었습니다만, 남양유업보다 큰 스포츠 클럽은 드뭅니다. 따라서 바르셀로나가 2010년에 40M에 샀던 비야를 2013년에 2M에 처분하는 것과 같은 것에서, 어떤 합리적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추론할 이유가 하등 없습니다. 뭐 제한적으로야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요. 근데 그냥 허섭하니까 허섭한 짓 하는 거라고, 무능한 놈들이 하는 일이 항상 다 그렇지-라는 식으로 단순하게 바라보는 것이 훨씬 에너지와 자원과 열정이 덜 들어갈 뿐만 아니라, 실재와도 부합하기 마련입니다.

그리하여 결론적으로, 저는 다소 강경하게 말하자면 전문가들이든 매니아든 라이트팬이든 축알못이든 절대적인 견지에서 보면 아는 게 없기는 매한가지라고 봅니다. 때문에 그 어느 것이나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축구는 전문가들에게만 맡겨두는 것보다는 많은 이들의 관심과 참여,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생산되는 가설과 토론과 논쟁과 반박을 통하여 많은 것을 탐구해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분들이 축구 전문가와 팬의 관계를 정치가와 유권자에 빗대어 비유를 하셨던데, 저는 이것이 아주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치가 오롯이 전문가들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듯, 축구 역시 오롯이 전문가들이 해결할 수 없습니다. 축구 전문가를 참칭하는 잣문가들이 쏟아내는 자아도취적인 주장에는 눈쌀이 지뿌려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만, 만약 축구에 있어서의 전문성의 성채가 그리 공고했다면 잣문가들이 이 정도로 설치지도 못했을 겁니다. 결정적인 부분에서는 까아닥을 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