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비티>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파이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과연 우주 공간 속에서 홀로 남겨진 우주인의 재난이 더 막막할까, 아니면 망망대해 속에서 호랑이와 한 배를 탄 소년이 더 막막할까. 저는 어느 면으로 따지나 후자가 훨씬 더  어려운 상황으로 비춰집니다. <그래비티>에서 발생한 사고는 적어도 우주인이 자기 전문 분야 속에서 여러 전문 지식과 경험 활용이나마 할 수 있는 것이 비해 <파이이야기>속에 소년은 바다와 짐승에 대해서 거의 백지 상태나 다름없습니다. <그래비티>의 여주인공에게 가장 위협이 되는 존재는 그녀 바깥에 존재하는 데 반해, 소년을 가장 위협하는 존재 자체는 무지하고 겁에 질린 소년 그 자체입니다(또한 선뜻 자기 운명과 자기 자신을 받아들일 수 없는 자아). 그런데 <파이이야기>의 소년은 스스로 각성을 하게 되면서 급박했던 위기를 하나둘 생존의 기회로 바꿔 나갑니다. 위기 조건 자체는 <파이이야기>가 <그래비티>도 더 높을지는 몰라도 해결 자체의 난이도에서는 <파이이야기>가 <그래비티>보다 수월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래비티>에서의 생존은 그녀 자신보다 그녀 바깥의 상황이 훨씬 더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물론 <그래비티>에서도 그녀 스스로 각성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믿고 의지할 사람마저 사라졌을 때 그녀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했지만 금세 번뜩하고 정신을 차리는 장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 스스로 각성을 했다고 해서 상황이 크게 나아지는 것은 없습니다. 분명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언가를 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사실 그녀의 운명은 여전히 우주의 손길에 달려 있는 셈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래비티>에서 그녀의 생존 자체는 커다란 감동일 수 있겠으나 여기서 파생되는 메시지의 스펙트럼은 미미하게 느껴집니다. 반면에 <파이이야기>에서 소년의 생존은 감동과 함께 뒤이어 영화를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게끔 만드는 뒷심까지 겸비하고 있습니다. <그래비티>는 여주인공이 살았으니 이제 끝인데, <파이이야기>는 영화가 끝날 때쯤이면 관객의 머릿속을 되레 가장 바쁘게 만들어 버리는 효과를 발휘합니다.


아마도 주변에 좋은 평을 너무 많이 듣고 가서 되레 많은 감동을 빼앗긴 면도 적지 않기는 합니다. 조금 과장되게 말하자면 저는 이런 반감도 약간은 들었습니다. 영화의 비주얼? 그래, 대단하지. 솔직히 나도 손에 땀이 찰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21세기를 사는 문명인에게 마치 콜라맛을 인생 처음 맛 본 부시맨처럼 홀릴 수 있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겠지? 이런 3D영상으로 줄 수 있는 감동은 겨우 시대를 조금 앞당겼을 뿐, 영상을 빼고 나면 후대에 무엇을 남길 수 있지? 지금에야 우주 재난을 소재로 한 영화가 거의 없다시피하지만, 앞으로는 과연 어떨지.
덧붙여 차라리 <그래비티>에 대한 여러 사이트에서의 호평을 보지 못한 상태로 봤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조금 크네요. 그랬다면 제 인생 최고의 영화까지는 아니더라도 굉장히 잔잔하고 볼 만했던 영화로 기억될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