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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02/24 03:06:30
Name 王天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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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일반] 만신 보고 왔습니다.(스포일러 있습니다)


만신은 무녀를 높이 부르는 말입니다. 한자를 빌려 萬神 이라고 적기도 하는데, 이는 곧 무녀가 만명의 신을 품에 안고 사는 사람이란 뜻이겠지요. 우리가 알고 있는 신의 수를 다 합쳐봐야 백명이 넘을려나요? 수만 귀신을 품고 사는 존재로서의 위엄이 제목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듯 합니다.

이 영화는 ‘무녀’라는 소재를 다각도로 파고듭니다. 김금화란 이름을 가진 무당의 일생을 통해 무녀의 巫와 女를 빠트리지 않고 다루고 있죠. 그것이야말로 이미 매스컴의 소재로 불티나게 풀려나가는 이 소재를 굳이 두 시간 짜리 영화로 만들어 낼 수 밖에 없었던 의의일 것입니다. 아마 이 영화는 무당을 가지고 할 수 있는 모든 이야기를 하는 작품이라 봐도 무방할 겁니다.

이 영화는 특이하게도 다큐멘터리와 드라마가 혼재된 장르입니다. 김금화의 과거를 회상할 때마다 영화는 그녀의 족적을 드라마로 재구성해서 보여줍니다. 여기서 가장 간단하게 생각할 수 있는 감독의 의도는 다큐멘터리의 장르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극적 재미’이겠지요. 누군가의 일생을 따라가는 수단이 인터뷰, 그리고 실제 현장을 담은 논픽션 영상으로만 채워진다면 러닝타임 두 시간은 몹시 길고 지루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또한 실제 촬영 자료가 없는 그녀의 유년기나 일상의 부분부분을 드라마를 통해 채워넣을 수 있지요. 그래서 우리가 아는 배우들이 무녀 김금화의 인생을 재현할 때, 그 인생의 굴곡은 한층 풍성하게 다가옵니다.  

극적 재미를 위해서라면 아예 그녀의 일생 자체를 통째로 드라마화 하는 것은 어땠을까요. 아마 이 소재가 가진 실화의 파괴력은 허구 속에 파묻히고 말았을 겁니다. 무녀의 이야기는 어떻게 읽어도 믿기 어려운 이야기이니까요. 이 소재 자체가 가지는 신비함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기 위해서 영화는 다큐멘터리를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동시에, 실존 인물의 담담한 인터뷰를 통해 전달되는 감정의 내밀함과 그녀의 삶 부분부분을 실제 영상을 통해 ‘목격’하는 기회 역시도 결코 살려낼 수 없었겠죠. 이 영화가 통째로 재현드라마였다면, 무당으로서, 한 여자로서 겪어야 했던 그녀의 인생사 모두는 통속극으로 치부되고 말았을 겁니다. 따라서 이 영화가 다큐멘터리와 허구적 드라마가 서로의 단점을 상호보완해주는 전략을 취한 것은 아주 영리한 수라 보입니다.

다큐멘터리라는 장르가 지루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감독의 기교가 나레이션과 드라마의 여백을 채워넣고 있기 때문입니다. 탱화처럼 그려진 무녀 그리고 신들의 기기묘묘한 그림과 동시에 깔리는 꽹과리, 피리 등 빠른 템포를 지닌 사운드트랙은 그야말로 굿판처럼 얼을 빼놓습니다. 신내림을 처음 경험하는 김금화의 유년기부터 청년기와 중장년기를 거치는 그녀의 신비한 체험을 소개할 때마다 음산하고도 귀기어린 음악은 보는 이의 신비감과 공포를 건드립니다. 물론, 이것은 썩 유쾌한 음악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기꾼 쯤으로 인식되던 무당의 진면목을 드러낸다는 부분에서 이 영화가 가진 미스테리 장르로서의 흥미는 다른 엑소시즘 영화에 결코 꿀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 장면마다 증언처럼 삽입되는 다큐멘터리는 어지간한 모큐멘터리보다도 설득력을 갖추고 있죠. ( 정작 극적으로 재현되는 장면보다 김금화 본인의 담담한 인터뷰에서 소름이 끼칠 수도 있습니다 )

그러나 이 영화는 그녀의 신비함을 앞세워 그녀를 대단한 사람인양 포장하지 않습니다. 무녀로서의 이질감을 강조하는 동시에, 그녀가 무녀라서 겪을 수 밖에 없는 애환을 보여주죠. 일단 그녀는 무녀라는 직업 때문에 겪어야 했던 사회적 편견과 차별의 아픔이 있습니다. 아픔을 이겨내기 위해 사람들은 그녀를 의지하다가도 한 편으로는 천시하고 박해합니다. 신의 힘을 빌어 병마를 물리치고 복을 부르는 존재이다가도, 헛소리와 춤사위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마녀로 둔갑되곤 했으니까요. 그녀는 거의 일생을 누군가의 손가락질로부터, 위협으로부터 도망다녔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릴 때는 친구들에게, 커서는 공권력과 다른 종교로부터 등 떠밀려야 했던 약자에 불과한 존재였지요.

그녀의 삶은 단지 사회 속 개인의 비극으로 축약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김금화는 시대의 아픔을 등에 지고 살아온 존재이기도 했어요. 일제 강점 시대, 그녀는 굶주림과 싸우고, 위안부에 끌려가지 않으려 억지로 시집을 가야 했으며 시어미의 모진 소리에 시달려야 했던 여자였습니다. 6.25 전쟁 통에서는 분단국가의 가운데에서 사상과 신념을 끊임없이 취조당하며 죽을 뻔한 고비도 몇 번을 넘겨야 했지요. 그녀의 인생은 시대가 남긴 상처 자욱 그 자체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 역사의 격류 속에서 휩쓸려다닐 뿐인 존재로  남지 않습니다. 산 자의 원망과 죽은 자의 원혼 때문에 몇 배의 지옥을 겪었음에도, 신음하는 대신 그녀는 이 모두를 품고 위로하고자 했습니다. 자신의 아픔, 집단의 아픔, 그리고 나라의 아픔 그 전체를 달래고자 제를 지내고 신을 부르며 그녀는 우짖습니다. 다시 말해, 그녀는 산 자와 죽은 자 가리지 않고 아픈 모든 이들의 어머니를 자처했지요. 그리고 그녀는 현대인으로 살아남았습니다. 많은 무속인들이 변화의 바람 속에서 스러져 갈 때, 그녀는 매스미디어와 결합하여 문화재로서, 공연인으로서 이 시대를 대표하고 있으니까요.

   동시에 이 영화는 휴먼 다큐멘터리의 역할 또한 수행하고 있습니다. 이 신화적 인물의 보편적인 면 역시도 성실하게 그려냄으로써 영화 전체에 사람 내음을 가득 채워넣었어요. 그녀의 소명을 제하고 보면, 그녀 역시 평범한 사람임을 관객들은 자연스레 알게 됩니다. 김금화는 한 남자의 아내로서 살기도 했고, 자식을 둔 어미로서도 살아왔다는 것을요. 부득이하게 헤어져야 했던 전남편과의 해후를 담소로 푸는 장면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세월에 풍화되어 어깨가 동그라진 할머니뿐입니다. 용서랄게 뭐 있나, 다들 그렇게 사는 거지. 멋적은 전남편과 함께 나란히 걷는 저 구부정한 뒷모습은 소박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 모진 풍파를 겪고서도 한 나라를 대표하는 무속인으로서 우뚝 일어난 그녀의 성공 스토리 또한 훈훈함을 보태고 있지요.

이 영화가 ‘굿’이라는 행위에 접근하는 각도 또한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아까 위에서 저는 굿이 가진 일반적인 기능, 위로에 대해서 이야기 했지요. 그리고 그것은 우리 민족 고유의 정서 한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한’을 푸는 방법은 슬픔에 겨워 울고 비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이 영화는 굿을 통해 보여줍니다. 무당이란, 굿이란, 울고 애원하고 음울함에 지배되는 것이 절대 아니에요. 꽹과리, 방울, 북이 함께 하는 이것은 신명나는 것입니다. 슬픔을 잊고 복을 부르기 위해서 그녀는 춤을 추고 소리를 합니다. 꼭 누군가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녀 자신의 고달픔을 잊고자 그녀는 쫓기는 와중에도 판을 벌려요. 흥에 겨워 모두가 함께 덩실덩실 웃고 떠드는 그 현장은 에너지가 넘칩니다. 굿은 곧 축제인 거지요. 노래와 춤, 연기와 성대모사까지 동원해 보는 이에게 카타르시스를 전하는 이 행위는 영적인 것만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하나의 무대와 공연으로 기능합니다. 한과 흥이 하나로 섞이는 이 굿이라는 행위의 본질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밝고 즐거운 것이지요.

그리고 이 영화는 끊임없이 화합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김금화가 굿을 통해 하려는 것의 본질은 결국 갈라진 무언가를 다시 붙여놓는 일이에요. 신과 인간, 산 자와 죽은 자, 이승에 발 붙인 자와 이승에서 막 발을 떼려는 자, 남과 북에 있는 자, 떠난 자와 남은 자, 미워하는 자와 미움 받는 자, 그리고 한국인과 외국인까지, 그녀가 울어주고 웃겨주는 동안 그 모든 것은 하나로 어우러집니다. 그리고 그녀는 항상 그 사이에서, 양쪽 모두를 보고 서로에게 손을 내밀어주며 살아왔던 존재이죠.

영화의 마지막은 김금화의 유년기로 다시 돌아갑니다. 그녀는 방울과 칼 같은 무구를 만들기 위해 쇠붙이를 모으고 다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치마폭에는 배고팠던 시절의 수저가, 그녀의 머리를 겨누었던 총알이, 무녀로서의 인생 2막을 열어준 카메라가 담깁니다. 그리고 어린 금화의 치마 폭에 무언가를 넣어주는 사람들은 영화 속 배역이 아니라 그 배역을 맡았던 배우들이 류현경 본인으로, 문소리 본인으로, 그리고 김금화 본인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김금화의 인생 조각 조각이 그녀의 인생을 스크린에 담고자 했던 이들의 손에 의해 어린 금화, 넘세의 치마폭에 오롯이 담깁니다. 그녀의 인생이 그렇게 갈무리되고, 그녀의 드라마는 이분되었던 김금화의 실제 삶과 겹쳐지기 시작합니다.

이제 카메라는 어린 금화를 뒤쫓는 카메라와 스텝들, 영화 세트까지 모두 다 노출시킵니다.  카메라 속 스토리와 이를 담는 바깥 세계, 그리고 대역과 본인,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시간, 초현실과 현실 그 모든 경계가 하나의 프레임에 담기며 영화 속 이분되어있던 세계는 하나로 화합니다. 이를 지켜보는 정체불명의 시점은 사람들 사이를 맴돌다 하늘 위로 훌쩍 올라갑니다. 이 모든 것을 지켜 보는 것은 아마도 우리 인간과 늘상 곁에 있는 귀, 혹은 신이라 불리는 그 무언가가 아니었을까요.

한 개인의 인생부터, 국가와 시대, 그리고 이승과 저승까지 이 영화가 펼쳐놓는 세계는 넓고도 세세합니다. 한 인간의 희노애락에서 문화와 전통까지, 이 영화가 꿰뚫고 지나간 자리 또한 결코 얕지 않아요. 이 정도로 많은 것을 차려놓은 영화는 드뭅니다. 그리고 영화가 끝난 후, 무언가 하나는 이해할 수 있게 될 지도 모릅니다. 김금화라는 한 명의 인간일지, 무녀라는 소명일지, 찢어진 국가의 흉터일지, 우리 고유의 문화와 전통일지. 어쩌면 이 영화의 신기에 살짝 취하는 거야말로 가장 제대로 된 감상법일지도 모르죠.  


  
@ 이 영화의 감독 박찬경은 박찬욱 감독의 친동생입니다. 원래 미술계에서 명성을 날리는 분이네요. 이 작품은 그의 입봉작입니다. ( 원래 미술평론가를 꿈꾸었던 박찬욱을 좌절케 한 사람이 바로 박찬경 감독이라는 이야기가 있군요. )

@ 교회 다니는 친구와 이 영화를 보러 갔는데, 몹시 괴로워하더군요. 미안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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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깎이
14/02/24 04:47
수정 아이콘
신의 존재를 믿지는 않지만, 흥미로운 영화네요.
잘 읽었습니다. 기회 되면 꼭 한번 봐봐야겠습니다.
朋友君
14/02/24 21:08
수정 아이콘
꼭 보려고 마음에 둔 영화인데 잘 읽었습니다. 더 보고 싶어지네요.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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