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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09/20 15:38:27
Name 콩콩지
Subject [일반] 김대중 자서전을 읽고
"황혼이 찾아왔고 사위는 고요하다." 머리말의 첫문장부터 가슴을 친다. 나는 이 문장을 입밖으로 가만히 소리내어본다. 기교를 부리지 않고 단문으로 써내려간 자서전의 문장들은 정갈하고 품격이 있다. 14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지만 내용은 산만해지거나 흩어지지않고 끝까지 집중력을 유지한다. 김대중은 삶의 기로에 놓였을 때 행한 선택에 대해 억지로 부연하거나 변명하지 않는다. 다만 구체적인 사실들을 시종일관 담담히 서술할 뿐이다. 억지스러운 수사없이도, 이러한 문장과 사실들이 1400페이지 넘게 흐르고나면, 결론은 결국 마지막 장, 마지막 문장으로 자연스럽게 모아진다. "나는 마지막까지 역사와 국민을 믿었다."


'김대중 자서전'은 한 사람의 일대기이기 이전에 훌륭한 근현대사 교과서다. 1924년에 태어나 2009년에 죽었다. 우리의 할아버지 세대가 그랬듯이 일제시대, 6.25, 산업화, 민주화를 다 관통해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얻을 수 있는 뜻밖의 소득 중 하나는, 교과서에 박제되어 너무나 오래되어버린 것만 같이 느껴지는 해방직후의 혼란상과 6.25, 4.19혁명 직후의 세태를, 김대중의 몸을 통해 생생하게 느껴볼 수 있다는 점이다. 윤태호 작가가 그린 '인천상륙작전' 보다 더 직접적이고 체험적이다. 김대중은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 활동에 참가했고, 인민군에게 체포되어 목포형무소에서 총살될 뻔 했다. 4.19혁명 직후 민주당에 몸담으며 정치인들의 이합집산을 두눈으로 직접 바라봤다. 그 시절을 산 사람들의 불안과 고민이 그대로 느껴진다. 오래된 역사의 한 페이지로 느껴지지 않고, 오늘날 정치인들의 세태와 그대로 겹쳐서 보인다.


자서전은 1권과 2권으로 되어있다. 1권은 대통령 당선 직전까지를, 2권은 당선이후부터 서거 직전까지를 다룬다. 물론, 1권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박정희 시대와 전두환 시대에 김대중이 했던 민주화운동에서 겪었던 고초다. 이 부분은 이희호 여사의 자서전 '동행'과 상당부분 겹치지만, 그 깊이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 시절 김대중을 끊임없이 괴롭혔던 건 죽음의 공포다. 선거유세를 하러 가던 길에 공화당 소속 의원 소유의 화물트럭이 들이받고, 납치를 해서 죽이려 하며, 법정에서 사형판결도 받았다. 이 모든 사건의 경위는 이미 많이 알려졌지만, 그 자신의 삶의 맥락에서 그 자신의 목소리로 직접 들어보게 되면 권력의 잔인함과 집요함이 다시금 무섭도록 새겨진다.


2권을 시작하며, 김대중은 자신의 가장 큰 업적을 민주화, 햇볕정책, IMF극복과 정보화 시대 진입으로 꼽는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애착을 가지고 설명하는 건 단연 햇볕정책이다. 햇볕정책은 누가 뭐래도 김대중 정부의 큰 '사건'이다. 평가는 엇갈리지만 영향력은 지대했다.당시에 초등학생이었던 난 잘 느끼지 못했지만 생각해보면 정상회담이 당시 한국사회에 가져왔을 충격은 지금은 상상하기 힘들만큼 컸을 것이다. 대화와 협력을 위해 임동원 특사를 수없이 파견하고 미국에 한국의 입장을 설명하려 노력하는 과정을 들여다보면, 결코 그것이 단발적이고 감상적인 행동이 아니라, 치밀하게 전략적으로 준비된 정책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클린턴정부와 부시정부로 이어지며 대북 정책이 어그러지고 변화하는 과정도 자세히 나와있는데, 이 자체로 북한의 국제정치학적 입장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집이다.


하지만 이 책이 평전이 아니라 자서전이다보니, 김대중은 자신의 오점이 되었거나 논란이 되는 사건에 대해서 자세하게 얘기하진 않고 미미온적이고 방어적인 자세로 간략히 언급만 하고 넘어간다. 김영삼과의 단일화 실패가, 세 아들들의 비리사건이, 권노갑 등 측근들의 비사가, IMF 극복과정과 신용카드 위기 등이 그러한 부분이다. 또 동시대를 살았던 다른 사람들의 증언과 사실관계가 미묘하게 다른 점도 몇몇 부분있다. ​대북송금 특검 문제와 관련해서도 문재인의 언급과 김대중의 항변은 미묘하게 핀트가 어긋난다. 김대중은 글라이스틴 주한 미대사가 5.18 당시 자신을 지지했다고 밝히고 있지만 그렉 브레진스키가 분석한 최근 해제된 기밀문서에 따르면, 당시 글라이스틴은 김대중을 공산주의자로 의심하고 있었다.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는 김대중의 삶과 정치적 행보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솔직히 그저 놀림거리로 전락해버린 것 같은 때도 있다. 하지만 김대중은 그것보다는 더 나은 평가를 받을 자격이 있는 정치인이다. 중대한 기로에서 김대중이 내린 정치적 결정들은, 눈앞의 이익과 편안함의 관점에서만 보면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다. 김대중은 자기합리화를 거부했기 때문에 실제로 몇번이나 목숨을 내놓을 각오를 해야만 했었다. 내란음모사건 때, 사형판결을 받고 했다던 김대중의 최후진술은 감동적이다. 그가 정도(正道)를 걸을 수 있었던 이유는 민주화와, 통일 그리고 역사의 평가에 대한 강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스스로 밝히듯이 김대중도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절망했고 흔들렸었다. 단지 그의 인생사만 돌아보아도, 역사와 정의에 대한 나름대로의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실천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의 신념은 역경의 시기를 맞으며 오히려 더 강해졌다.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면 신념은 산산조각나고 행동은 세태와 부합했을 것이다.


김대중은 삶의 마지막 순간에서 확신을 가지고 말한다. "역사는 정의의 편이다." 나는 아직 이 말이 사실인건지 아니면 당위적으로 그래야만 하는건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현실과 적당히 타협해 이익을 얻고 힘이 생기면 그때 뜻을 펼치면 된다는 자기합리화는 현명해보이고, 우직히 타협을 거부하고 갈길을 가는 것은 어리석어 보인다. 3당합당 당시 대세를 좇아 우후죽순처럼 민주당을 떠나던 국회의원들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대세가 기울었으니 일단 힘을 얻은뒤에 후일을 도모하자고. 김영삼과 결별하고 끝까지 민주당에 남았던 7명의 국회의원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중의 한명이 노무현 의원이었다. 나중에 사람들은 그들의 행동을 기억해주고 정당하게 평가했다. 김대중의 삶을 바라보며 잠시나마 도덕적, 정치적 냉소주의에서 벗어나 사람들의 인생이 다 고만고만 한것은 아닌 것임을, 정치적 철학과 경륜을 가진 리더가 이끌어낼 수 있는 정책적, 사회적 변화의 가능성을 느낄 수 있었다. 역사는 정의의 편인가? 정말 잘 모르겟다. 하지만 김대중 자서전은 그것을 사실이라고 믿고 살아가는 한 사람의 모습을 보여준다. 아직도 우리는 거기에서 배울 것이 많다.




+ 김대중 자서전은 김대중이 직접 모두 써내려간 것이 아니라, 구술을 바탕으로 한 정리를 이택근 경향신문 기자가 편집위원장으로서 정리한 것이다.


+ 고이즈미와 김대중 대통령의 대담 중 재미있는 부분.

김대중 :

"총리께 농담을 하고자 합니다. 교과서, 야스쿠니 신사참배, 남쿠릴 수역 조업 등 이 세가지를 잘 해결하시면 제가 총리를 일생의 최대 친구로서 존경하고 좋아할 것입니다. 하지만 잘 처리하지 못하면 앞으로 만나도 인사도 안 할 것입니다."

고이즈미 :

" 그 다음에는 묶여서 바다에 버려지는 것이 아닌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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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힘
14/09/20 16:06
수정 아이콘
저도 최근에 읽었습니다. 어렴 풋 하게 느끼고 있던 근대사의 풍경을, 김대중의 체험을 통해, 조금 밝아 졌다고나 할까..

암튼 유익한 책이었습니다, 읽으면서 마음 아픈 부분도 많았구요,,

인상에 남는 문구로는 '행동하는 양심으로' 였습니다, 저도 공부하고 생각 하면서 '그래 이게 올바른 정의야 , 세상은 이래야지..! '

혼자서 되뇌이는 정도 였는데, 자기가 믿고 있는 신념을 끝까지 지키는 모습을 보고, 제 자신이 조금 부끄러워졌습니다.

양심이 행동으로 옮겨지는게 얼마나 힘든지를 알기에..ㅠ_ㅠ
yangjyess
14/09/20 16:11
수정 아이콘
역사는 정의의 편 맞습니다. 정의는 현실 속에서 끝없이 패배하고... 역사 속에서 영원히 승리하죠... 김대중, 노무현 둘 모두 역사 속에서 승리했다고 할만한 사람들입니다.
지금뭐하고있니
14/09/20 20:00
수정 아이콘
정의는 현실 속에서 끝없이 패배하고... 역사 속에서 영원히 승리하죠..
좋은 표현입니다.
야광충
14/09/20 21:40
수정 아이콘
정말 역사는 정의의 편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느끼는 현실은 역사속에서 승리했다라고 보기에는 두 전 대통령의 삶과 행적에 대한 평가가 실제보다 훨씬 박해보립니다. 공과에 대한 냉정한 비평이야 있어야겠지만, 오히려 외국보다 국내에서 두 인물에 대한 비난이 더욱 더 크고 그들의 치족에 대해서는 극도의 과소평가를 하고 있죠. 아직 시간이 부족한 걸까요?
yangjyess
14/09/20 22:18
수정 아이콘
백년정도는 더 지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쩝.. 역사의 평가라는 측면에서는 그렇게 긴시간이 아니라고 보구요..
14/09/20 16:53
수정 아이콘
15년 전만 해도 3김이라는 게 정치판을 해석하는 유효한 키워드였죠. 그 중에서도 출신 자체가 군사 쿠데타에 기반했던 김종필이나,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호랑이를 때려잡는다'느니.. 집권 후 금융실명제, 역사 바로 세우기 등 굵직굵직한 건들을 터뜨리면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기긴 했지만, 어쨌든 3당 합당이라는 변절의 역사를 지닌 김영삼에 비해, 김대중은 비교적 클린 시트를 고수하면서 역사의 한축을 담당했었습니다.
10여년 전부터 민주개혁진영에서 첫 번째로 연상되는 이름, 그 이름을 걸고 pros & cons가 맞붙는 이름은 노무현이 되었네요. 한때 모든 것을 해석할 수 있는 듯, 모든 것이 걸린 듯 하던 키워드가 시간이 흘러 다른 키워드에 그 자리를 내주는 게 역사의 흐름인 듯 싶습니다.
14/09/20 17:07
수정 아이콘
세일할때 책만 사두고 두께에 압도되어 아직 읽지를 못했는데 얼른 읽어보고싶네요.
치킨너겟
14/09/20 17:35
수정 아이콘
전 이 인물이 놀림감으로 전락해버리는게 안타깝습니다. 한국 근현대사에 이만한 인물도 없는데 말이죠
14/09/20 17:38
수정 아이콘
한국사에 흔치않은 존경할만한 대통령이죠.
콩콩지
14/09/20 18:10
수정 아이콘
사실 객관적으로도 성공한 대통령이라고 평가할만한게, 노무현대통령을 결국 당선시켰죠. 분당이 되긴 했지만... 반면에 이러한 관점에서만 보면 노무현대통령은 실패한것 같습니다. 정동영조차 등졌으니까요.
Gorekawa
14/09/20 20:12
수정 아이콘
거의 유일하게 진심으로 존경하는 대통령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드는 분.
꼭 사서 읽어야겠네요.
METALLICA
14/09/20 23:10
수정 아이콘
말씀하시는것도 논리적이고 관심분야도 다양하시고
당시 사회가 그랬지만 꽉막힌 정치인들만보다가 저런분을 보니 우리나라 정치인같지가 않았죠.
좀 더 일찍 정권을 가졌다면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계셨다면 많은 힘이 되었을텐데..
요즘 돌아가는 현실을 보면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14/09/21 09:51
수정 아이콘
일베충한테는 쓰레기 취급 당하고 깨시민들한테는 노무현보다 저평가 당하는 비운의 인물
실제로 87년 체제 이후로 제일 잘했던 정부는 김대중 정부였을텐데...
14/09/21 21:42
수정 아이콘
김대중 자서전 1권은 진짜 현대사 교과서라고 할 수 있죠.. 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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