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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11/20 14:29:14
Name 가브리엘대천사
Subject [일반] [연재] 빼앗긴 자들 - 16
문득 정신이 들어 눈을 뜨자 새하얀 공간이 보였다. 천장인가? 그러기에는 아무런 경계도 보이지 않았다. 하늘이구나, 싶었던 칼레인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이 누워있던 곳을 내려다보았다. 당연히 침대가 있어야 할 곳에 아무것도 없자 살짝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았다. 두 눈을 비비고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제야 이곳이 매우 낯설다는 것을 깨달았다. 불길한 생각이 드는 것을 애써 외면해 보았지만, 그것은 점차 현실이 되어 눈앞에 펼쳐졌다.

주변 사물 모든 것에 하얀색이 스며든 것처럼 끝도 없이 펼쳐진 새하얀 공간이었다. 자신의 기억이 맞는다면, 이런 곳은 아키엔 왕국 어디에도 없었다. 아무리 넓은 경작지라도 하더라도 그 끝이 보이기 마련이고 하다못해 나무 한 그루라도 있는 것이 정상이건만, 이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혹시 색깔이 하얘서 내가 인지를 못 한 건가, 하고 잠시 주위를 돌아다녀 보았으나 정말 말 그대로 휑한 공간이었다.

칼레인은 오른손을 들어 올린 다음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태곳적부터 내려오는, 이곳이 현실인지 아닌지 분간할 수 있는 요긴한 방법을 사용하였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고개가 옆으로 홱 돌아갔다. 오른쪽 뺨이 붉게 달아올랐고 그는 저도 모르게 욕지기를 내뱉었다.



‘꿈은…… 아닌 것 같군.’



꿈일 거로 생각하고 너무 강하게 후려친 게 잘못이었으나 누굴 탓할 수도 없었다. 뺨을 어루만지던 칼레인은 왠지 자신이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설마 누가 이런 내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싶었던 그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자신의 바로 뒤에 검은색 옷을 입은 자신과 똑같은 사람이 서 있었다. 코앞에서 갑자기 사람이 툭 튀어나왔기에 비명이라도 질러볼까 싶었으나, 칼레인의 입이 열리기 전에 그의 입이 먼저 열렸다.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폐하.”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온 거냐. 여기가 어디냐.”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폐하.”

“……여기가 어디냐고…….”

“반갑다는 인사 정도는 해 주시는 게 어떨까요.”



칼리스토의 입가에 메마른 미소가 걸렸다. 꿍한 표정의 칼레인이 뭔가 말을 하려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말을 자르며 칼리스토는 말을 이었다. 애초에 대답 따위는 애초에 요구하지 않았다는 듯이. 덕분에 칼레인은 입을 반쯤 벌린 멍한 상태로 있어야만 했다.



“당연히 폐하의 의식 속입니다.”

“짐의 의식 속? 그렇다면, 짐은 아직 살아 있는 것이냐? 죽은 것이 아니냐?”

“죽고 싶으십니까?”



뭔가 뉘앙스가 미묘했지만 그런 것 정도는 그냥 넘길 수 있었다. 칼레인은 말장난 그만하고 제대로 답하는 듯이 눈에 힘을 주며 그를 응시했다. 칼리스토는 부드럽게 옷매무시를 하며 답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계십니다. 기억하십니까? 신의 위대한 권능을 발휘한 직후 끈 떨어진 뒤웅박처럼 화살에 맞아서 굴러떨어진 것을.”

“그…… 꼭 그런 식으로 비꼬아서 말을 해야만 하는 거냐?”



만날 때마다 겪었기에 익숙하기는 했으나 오늘은 어째 말 속에 가시가 있는 듯한 느낌이었기에 잠자코 들으려던 칼레인은 기어이 한마디 했다. 칼리스토의 입가가 실룩이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그는 그것에 대한 반응을 보이는 대신 자기 할 말을 계속 해 나갔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습니다. 화살도 급소에 맞았고요. 이대로라면 폐하 위에 거대한 석판과 조각상들이 올려질 것입니다. 물론 그나마도 저들에게서 승리할 경우에 말이지요. 진다면 여지없이 어깨 위에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이 녀석이 나한테 단단히 뭔가 맺힌 게 있는 모양이구나. 칼레인은 욱, 하고 뭔가가 솟아오르려는 것을 다시금 참아내며 마음을 다스렸다. 그리고 그의 화법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 자신이 대화를 주도해 나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짐의 아들이…… 죽었다.”

“알고 있습니다.”

“너는 이 전쟁의 승패가 짐의 아들에게 달려 있다고 했지. 그렇다면 이 전쟁은 지게 되느냐?”

“폐하께서 더 잘 아시겠지요.”

“하나 더, 짐의 아들이 죽으면서, 짐에게 어떤 힘을 부여했다. 그게 네가 말한 신의 권능인가?”



칼리스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으나 칼레인은 무시했다.



“그 힘을 얻게 된 순간 저절로 알 수 있었다. 그 힘은 너나 짐의 아들과 같은 오래된 종교의 사제를 위한 힘이라는 것을. 허나 짐 또한, 너에 의해서 오래된 종교로 개종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째서 짐은 그 힘을 한번 밖에 쓰지 못한 거지?”

“……폐하께서는 완전한 사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폐하께서 유폐되셨을 때 저와 한 계약은, 폐하를 오래된 종교를 믿는 신자로 만들기 위함이었지 폐하를 사제 그 자체로 만들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뒤를 이을 후계자가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모든 것을 양보하고, 그 아이에게 힘을 부여하였건만…….”



주변이 서서히 어두워지는 것 같아 칼레인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새하얗게 빛나던 하늘이 먹구름에 잠식되듯, 먹물이 스며들 듯 소리 없이 어둠에 휩싸이고 있었다. 그 어둠이 칼리스토에게서 뿜어지고 있음을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검은 그림자가 길게 늘어뜨려지며 주변은 한기로 가득 차 오르기 시작했다.



“그 아이는 죽었고,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갈망 때문에 염원을 담아 폐하께 그 힘을 빌려드렸던 겁니다.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짐이 사제가 아니기 때문에?”

“네. 그 아이가 죽은 지금, 오래된 종교의 사제는 저 하나뿐입니다. 그 힘은, 이제 다시 제게 돌아왔지요.”



한기가 더 심하게 몰려왔다. 칼리스토의 주변으로 펼쳐졌던 검은 그림자가 시퍼렇게 빛나며 얼어붙는 것이 보였다. 칼레인은 매우 급하게 변해가는 주변 상황에 현혹되지 않으려고 했으나 온몸에서 느껴지는 추위 때문에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다.



“그럼, 그 권능을 가진 너는, 무엇을 할 수 있느냐. 짐을, 살릴 수도, 있는 것이냐?”



입이 덜덜 떨려왔기에 제대로 발음하기도 힘들었으나 용케도 하고 싶은 말을 완성할 수 있었다. 이제는 몸 전체가 시퍼런 한기에 휩싸여 있는 칼리스토의 목소리가 사방에서 울리듯이 들려왔다.



“가능, 합니다.”

“정말, 이냐? 그렇다면, 짐을, 살려주길, 바란다.”

“……살아나시면, 무엇을 하시렵니까?”

“다시, 다시 죽을, 것이다.”



말장난처럼 들렸으나, 이미 그와 함께 모든 것을 겪고 있었던 칼리스토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라키쉬만 형제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아키엔 왕성은 그대로 초토화가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왕이 다 죽어가는 지금 그것은 기정사실. 칼레인은, 자신이 스스로 했던 말을 지키기 위해서 다시 살아나려고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말 그것뿐일까……?

갑자기 한기가 사라졌다. 추위가 빠르게 가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에 맞춰, 검은 그림자가 안개처럼 흩어졌다. 어둠이 조금씩 가시며 다시 주위가 밝아져 왔다. 마치 새벽처럼, 어슴푸레한 여명의 빛이 두 사람을 휘감기 시작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요. 폐하는 모든 것을 가지실 운명인가 봅니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칼리스토의 얼굴은 그늘져 있었다. 뭔가 씁쓸함이 가득 묻어 있는 미소를 띤 채 그는 가만히 칼레인을 응시했다. 뭔가 말할 수 없는 수많은 감정이 담긴 눈빛이었다.



“본디 세상에 단 하나여야 하는 인간이 쌍둥이로 태어난 것은…… 인간은 알 수 없는 신의 거룩한 의지가 담겨 있는 법일 겁니다. 저의 경우는, 폐하의 여분으로 만들어진 거겠지요.”

“여분이라니? 네가 짐의 부속품이라도 된다는 것이냐?”

“아닙니까? 제가 폐하께 생명을 드리지 않으면 폐하는 이대로 승하하십니다. 그것을 바라십니까?”



칼레인은 말하지 못했다. 이미 기뻐했기 때문이다. 그에게 자신을 부활시킬 권능이 있다는 사실에. 하지만 그것이 그의 목숨을 빼앗는 일인 줄은 몰랐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의 수명을 자신이 가져가게 되는 것임을.



“바라지 않으시겠지요. 그것은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폐하께서는 사셔야 하니까요. 폐하의 가문을 위해서. 폐하의 백성을 위해서. 폐하의 나라를 위해서.”

“……너는 죽을 셈이냐?”



칼리스토는 말없이 소매를 걷어 보였다. 예전에는 목과 턱 부근에만 보이던 몽글 거리는 흉물스러운 검붉은 덩어리들이 이제는 그의 팔에도 뻗어 있었다. 보지 않아도 온몸이 저렇게 되었을 거라는 것쯤은 능히 알 수 있었다.



“저는 곧 죽습니다. 육신을 버렸음에도, 이 저주는 제 영혼까지 갉아먹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의 영혼조차 소멸해 버릴 겁니다. 제게는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거의 없는 셈이지요. 비록 제가 신께서 주신 권능을 다시 가지게 됐음에도…… 그것이 저를 위해 허락되지는 않았나 봅니다. 오직 폐하를 위해서일 뿐.”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떨구는 칼리스토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문득 칼레인은 입을 열었다.



“짐을 위해서만이라면…… 한 가지 물어보자. 너는 그때, 짐이 아버지께 잡혀서 처결을 받을 때도 그 자리에 있었다. 짐이 왕좌를 차지할 수 있게 해준 것도 너이고, 지금 사경을 헤매고 있는 짐을 살리고자 목숨을 버리려고 하는 것도 너이다. 헌데, 그때는 왜 그냥 놔두었느냐? 왜 그때는 그냥 보고만 있었지?”



고개를 들어 올린 칼리스토의 눈이 칼레인을 가만히 응시했다. 속을 알 수 없는 깊은 호수와도 같은 눈이었다. 너무나 심연이어서, 오랫동안 바라보면 저절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호수에 문득 물이 차올랐다. 옅은 비췻빛이 반짝이는 듯하더니 이내 주르륵 흘러내렸다.



“……싫어서.”

“뭐라고?”

“나만 너한테 다 줘야 하는 게 싫어서.”

“무슨……?”

“왜 나만 그래야 하지? 왜 나는 내 것을 갖지 못하고…… 너에게 다 뺏겨야 하는 거지? 너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가? 한날한시에 태어나고서도, 같은 보랏빛 출생의 왕자이면서도 끝없이 끝없이…… 마침내 목숨마저 가져다 바쳐야 하는 내 마음을, 네가 알기나 해? 왜 너는…… 왜 너만…….”

“…….”

“모르겠지. 모를 거야. 동생은 원래 그런 거니까.”

“동생이라서…… 형에게 다 줘야 한다는 그런 말이냐?”



칼리스토는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뺨을 닦아내며 말했다.



“아니, 형이라 동생에게 다 줘야 한다는 말이야.”

“무슨 소리냐, 형은 내가 아니더냐?”

“그렇게 믿게 하고 싶었는데…… 아니야. 먼저 태어난 건 네가 아니라 나였어. 나였는데…… 나는 태어나서 울지 않았지. 너는 태어나서 울었고. 정상적인 아기의 행동을 보인 건 너였어.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가문을 멸망시킬지도 모르는 쌍둥이가 태어났는데 한쪽은 울지도 않아. 불길한 징조지. 늦게 태어나서 버려졌다고? 다 너를 안심시키려고 한 소리지. 하! 내가 왜 그랬을까.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그런 거짓말까지 하며 너를 지켜온 걸까…….”

“어째서, 왜…… 그런 거짓말을…….”

“됐어, 지금 그런 얘기하고 있을 때는 아니니까.”



칼레인의 말을 자르며 칼리스토가 한 걸음 다가왔다. 칼레인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칼리스토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어렸다. 목소리가 다시 차갑게 변했다.



“왜요, 제가 버려졌기 때문에, 제가 모두 가져야 하는 것을 폐하께서 다 가져가 버렸기 때문에, 인제 와서 복수라도 할 거 같아서 그러십니까? 겁이 나십니까?”

“그…… 그런 게 아니라…….”

“절 미워하지 마십시오.”

“미워하는 게 아니야! 짐은, 아니, 저, 그러니까…….”

“미안해하지도 마십시오. 우린 어차피 한 몸, 하나의 영혼을 가져야 했었던 사람들입니다. 이제는, 사람들에서 사람으로 되돌아가야 할 시간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칼리스토…….”

“근데, 한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폐하께서 거세당했다는 거지요.”



칼레인의 미간이 꿈틀하는 것을 바라보며 칼리스토가 말을 이었다.



“생명도 제 것을 바치는데, 그것도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뭐? 나보고, 너의 그…… 그것을 달고 살아가라고?”

“우린 한 얼굴 쌍둥이입니다. 저의 씨앗이나 폐하의 씨앗이나 근본적으로 같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게 무슨…….”

“물론 정말로 그럴 건 아닙니다.”



칼레인은 뭐라고 한 마디라도 집어 던져 주고 싶었으나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 그를 동정하게 하고, 미안하게 만들었던 것은 그의 말에 굴복하게 하기 위한 전략이었던가 싶을 정도였다.

칼리스토는 손을 들어 올렸다. 검게 변해 버린 손에 흰빛이 뒤덮인 노란 섬광이 타올랐다. 반짝이는 그것은 이내 불꽃이 되어 활활 타올랐고 칼리스토의 오른손을 완전히 뒤덮어 버렸다.



“저는 잃어버린 이름의 신을 섬기는 오래된 종교의 사제. 신께서는 제게 잃어버린 것을 복원할 권능을 주셨습니다. 제게 주어진 이 권능으로, 폐하의 잃어버린 남성성을 되찾아 주고, 폐하의 꺼져 가는 생명의 불을 다시 지필 겁니다. 그러니 거절하지 마시고, 옷이나 벗으시지요.”

“……뭐?”



장난하나 싶었으나 칼리스토의 얼굴은 진지했다. 칼레인은 좀 더 버틸까 싶었으나 이내 의원에게 환부를 보여주는 거뿐이다, 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천천히 입고 있는 옷을 모두 벗었다.

칼리스토의 빛으로 뒤덮인 손이 그의 샅에 머물렀다. 거세형을 받을 때 양쪽 고환이 모두 터져 버리고 음낭이 으깨졌었으나 그가 응급처치를 깔끔하게 한 덕에 남근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환부 역시 말끔하게 봉해진 상태였다.



“이것으로…… 폐하는 다시 아들을 가질 수 있을 겁니다.”



빛이 활활 타올랐다. 몸이 불에 타는 듯한 기분에 칼레인은 이를 악물었으나 고통은 길지 않았다. 몸을 관통하는 듯한 날카로운 고통이 잠깐 일어난 뒤 곧바로 지금 상황에서는 적절하지 않은, 깊은 쾌감이 몸을 휘감았다. 그 기운에 취해 저도 모르게 신음을 토해냈던 칼레인은 뭔가 묵직한 것이 느껴지자 눈을 떴다. 완전히 새로 태어난 그의 남성을 손에 쥔 채 칼리스토가 흘리듯 말했다.



“일단 외형적으로는 모두 복원이 된 것 같습니다. 정상적으로 작동하는지 알아봐야 하는데…….”



믿을 수가 없었기에 칼레인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거세되기 전으로 돌아가 있었다. 다시 되돌아온 것인가? 아니, 정말 복원이 된 것인가? 나는, 이제 아들을 다시 낳을 수 있는 것인가? 빼앗겼던 꿈을, 다시 꿀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들이 일시에 떠올라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쳤으나 더는 이어갈 수 없었다.



“흐억!”



고통에 찬 신음을 토해내며 칼레인이 몸을 굽혔다. 이게 무슨 짓이냐고 호통이라고 치고 싶었으나 그의 몸을 젖힌 칼리스토가 조금 전보다 더 강하게 후려쳤기 때문에 그는 저항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고꾸라져 버렸다. 애처롭게 부들부들 떨고 있는 그를 향해 칼리스토는 진담인지 농담인지 알 수 없는 말을 쏟아냈다.



“고통이 느껴지는 걸로 봐서는 제대로 작동하는 것 같군요. 두 번째는, 제 모든 것을 빼앗아 간 것에 대한 저의 소심한 앙갚음이라고 생각하셔도 됩니다. 설마 이런 걸로 전 원망하진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너, 너…….”

“다시 터트려 버리기 전에 엄살 그만 피우고 일어나십시오. 시간이 없습니다.”



엄살이 아니란 건 너도 알 거 아니냐! 버럭, 소리치고 싶었으나 상대가 응해줄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을 칼레인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심호흡을 두어 차례 한 뒤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뱃속에 꼬챙이가 꿰어있는 듯한 얼얼한 느낌에 혹시 또 터져 버린 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었으나 다행히 멀쩡했다. 다만 후들거리는 느낌이 가시려면 한참은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이제, 완전히 안녕입니다. 다시는 제 목소리 같은 거 들을 수 없을 겁니다. 우린 완전히 하나가 될 테니까. 몸도 마음도 영혼도…… 제가 가진 건 폐하도 갖게 될 것이고, 폐하도 제가 될 테니, 그 말은 곧 폐하는 완전한 사제가 되어…….”



칼리스토는 말을 잇지 못했다. 빛이 반짝, 하는 것 같더니 이내 그의 몸이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바닥에 확 펼쳐지듯 쏟아져 내린 빛 가루는 허공으로 날아오르며 회오리쳤고 이내 칼레인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반짝이는 빛 가루에 뒤덮인 칼레인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감정을 느끼며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주변이 점차 밝아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둠이 걷히고, 태양이 떠오른 것처럼 세상이 환희에 가득 차 타올랐다. 마침내 몸이 하늘로 들어 올려지는 것을 느끼며 그는 눈을 떴다.



“폐하! 정신이 드십니까?”



누군가가 자신을 기쁨에 가득 차서 부둥켜 안 듯이 부축하고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니 정말, 사람이 저런 표정을 지을 수도 있구나 싶을 정도로 오만가지 감정이 섞인 얼굴로 가르멜 공작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지금 즉시 의원을…….”



말을 하던 공작은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목에 꽂혀 있어야 할 화살이 없었다. 상처는 아직 남아 있었으나 더 이상 피가 흘러나오지 않았다. 뭔가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몸속의 피가 다 쏟아져 나온 게 아닌 이상에야 피가 계속 흘러야 할 터인데?

주변에 있던 자들도 군주가 다시 일어섰다는 기쁨과 함께 너무나 멀쩡하다는 사실에 혼란스러워하며 그를 에워쌌다. 혹자는 기적이라 말하기도 했고, 누군가는 조심스럽게 정말 악마는 아니겠지? 하고 지껄였다. 그런 모든 것들이 칼레인에게 또렷하게 들려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이 아니었기에 그는 공작을 향해 물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습니까?”

“네?”

“짐이 정신을 잃은 뒤로…… 얼마나 흘렀는지 물었습니다만.”

“그게, 저…… 바로 일어나셨습니다만.”



칼리스토를 향해 기어가다가 쓰러지고는 갑자기 벌떡 일어난 사람이 시간이 얼마나 흘렀느냐고 묻자 공작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칼레인은 그런가? 하는 얼굴로 공작을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찬찬히 모두를 훑어 보았다. 의아하다는 눈빛, 신기하다는 눈빛, 공포에 가득 찬 눈빛까지 다양한 빛으로 감싸진 눈동자가 자신을 향해 몰려 있었다.

그러나 앞에 놓여 있는 칼리스토만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눈은 감겨 있었다. 한번 감긴 눈은 다시 떠질 줄을 몰랐기에, 그의 반짝이는 비췻빛 눈동자는 이제 영원히 과거에 갇혀 버리고 말았다. 그의 미소도, 앳된 목소리도 모두. 다.

칼레인의 눈가가 다시 젖어들었다.



“……칼리스토를 카타콤에 안치시킨 후, 항복할 겁니다.”



한참 동안 아들의 식어버린 얼굴을 어루만지던 칼레인이 울음 기가 채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안 됩니다! 하고 소리치고 싶었으나 자식을 잃고 슬픔에 빠진 아버지에게 차마 왕의 역할만을 강요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가 항복하려는 이유는 귀족들과 백성들의 안위를 위해서였다. 그것 역시 만백성의 아버지이자 군주로서 해야 할 일이었다. 마음에 걸리는 단 하나의 이유였던 그의 아들까지 죽어 버린 이상, 항복을 미룰 이유 따위는 없었다.

다만 그렇게 될 경우 칼레인은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 분명했기에 공작은 대놓고 그의 뜻을 따를 수가 없었다. 어릴 때부터 자신이 맡아서 훈육을 담당해 온 자신의 주군이었다. 장차 성인이 되고 왕이 되면, 이 나라를 크게 번영시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을 정도로 총명하고 강인한 모습에 얼마나 많은 기대를 걸었던가.

이제는, 한낱 이룰 수 없는 헛된 꿈이 되고 말았다.



“부탁입니다. 허락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입가에는 간신히 미소를 띄워보았으나, 눈만은 아니었다. 부풀어 오른 눈동자가 다시금 부서져 내리며 햇살에 반짝였다. 모든 것을 포기한 아버지와 주군과 친구의 눈물 가득 한 푸른 눈을 보는 순간, 공작은 더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



------------



세상만사다반사 님, 은별 님,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
지난 화에 간직하셨던 궁금증이 이번 화에 풀리셨는지요.... ^^;

다음 다음 화가 1부 끝입니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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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다반사
14/11/20 15:51
수정 아이콘
으악! 절단 신공을 이렇게 발휘하시면 안됩니다. 흑흑.. 여튼 감사합니다. 항복을 할 것인지.. 사제의 힘으로 쓸어버릴지 기대되는 다음 화 입니다
가브리엘대천사
14/11/20 21:31
수정 아이콘
허걱, 절단신공이 발휘되었었나요. 흐흐.... 암튼, 읽어주시고 댓글까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편에 모든 것이 해결되.... 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답이 되리라고 생각을 감히 해 봅니다. ^^
세상만사다반사
14/11/21 00:14
수정 아이콘
매일 매일 장문의 글을 올려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매번 써주시는 글을 받아 먹기만 해서 죄송합니다ㅠ
가브리엘대천사
14/11/21 01:08
수정 아이콘
아니에요. 이렇게 읽어주시고 댓글 달아주시는 것만으로 감사해요. 물론 댓글이 더 길어서 저도 뭔가 읽어볼 거리가 많으면 더 좋겠지만^^ 크크크, 지금도 만족합니당. ^^ 날짜가 바뀌었으니 담편을 올려야겠네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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