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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12/31 02:31:29
Name 가브리엘대천사
Subject [일반] [연재] 빼앗긴 자들 - 25



불빛 하나 보이지 않는 밤은 참으로 깊고도 길었다. 칼리스토가 건넨 약을 손에 쥔 채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안나는 아침이 되자 혼미한 정신을 깨우기 위해서 목욕물을 데우라 일렀다. 오늘 오라버니에게 진실을 물어볼 작정이고 그것은 감당하기 힘든 것일 수도 있었다. 이런 해롱거리는 상태로는 마주할 수 없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한잔 마시며 몸을 녹이던 그녀는 목욕물이 다 데워졌다는 말에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물이 조금 뜨겁구나.”

“송구하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안나의 말 한마디에 시녀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찬물을 퍼와 탕 온도를 조절했다. 이미 다년간 경험한 일이었기 때문에 너무 온도를 낮춰서 다시 목욕물을 데우느라 시간을 허비하는 일은 없었다. 안나는 고맙다는 듯 살며시 미소 지으며 걸치고 있던 옷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기분 좋은 따뜻함이 전신을 휘감았다. 욕조에 있는 시간이 갈수록 그녀의 얼굴에 만족함이 피어오르자, 시녀 한 명이 무릎을 꿇고 부드럽게 그녀의 목 주변과 어깨 부근을 어루만지듯이 마사지를 하기 시작했다.

“공주님, 아드리아 공작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오라버니께서?”

목욕 삼매경에 빠져 있던 안나는 요안네스가 찾아왔다는 말에 퍼뜩 깨어났다. 아직 준비가 덜 됐기 때문에 지금 당장은 곤란했다. 눈앞에서 커피에 약을 넣을 수야 없는 일이었다. 그런 것을 요안네스가 좋다고 마실 리도 없었다.

“잠시 후에 다시 오시라 일러라.”

“네…… 네?”

공주가 요안네스의 방문을 이런 식으로 거절한 것은 처음이라 시녀는 조금 당황했으나 공주는 제대로 들은 게 맞으니 가서 전하라 손짓했고, 시녀는 이걸 공작 전하께 그대로 전해도 되는 일인가 고민하면서도 이미 발걸음은 그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전하, 황공하옵게도 지금 공주님께선 목욕 중이신지라…… 자, 잠시 후에 다시 뵙기를 청하십니다.”

조각 같은 외모의 요안네스를 바라보며 말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말이 떨린 시녀는 고개를 날름 숙였다. 덕분에 요안네스가 무슨 표정을 짓는지 알 수 없었다. 다행히 불호령이 떨어진다든가 하는 일은 없었다.

“아, 그러하냐. 여인의 목욕은 시간이 오래 걸리는 법이지. 그럼 조금 후에 오찬을 함께 했으면 좋겠다 전하거라.”

“네, 전하.”

순순히 돌아가는 요안네스를 바라보며 시녀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역시 몸은 이미 탕으로 향해 있었다.

“오찬을 함께 하길 원하신다?”

“네, 공주님.”

“음…….”

안나는 요안네스가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알 것 같았다. 이미 마누엘이 저 상태가 되어 황제위를 유지하기 힘든 이상 다음 황제는 요안네스가 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선천적으로 없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자줏빛의 가호였다. 당연히 안나 자신에게 있는 자줏빛의 가호를 이용하여 자연스럽게 정통성을 획득하고 제위에 오르려는 생각임이 분명했다.

‘역시, 오라버니는 황제가 되고 싶으신 거구나.’

그것을 탓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지금 상황이 그러했다. 요안네스가 아니면 황제가 될 남자 후계자가 없었다. 물론 자줏빛 가호를 받고 있는 안나나 아그네스가 정통성 및 계승권 순위에서 그보다 높긴 했지만, 그를 밀어내고 황제가 되는 것을 바라는 봉신들은 없을 터였다. 따라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동안 거부해 왔다고 해도 일이 이 지경이 됐는데 누가 탓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안나가 궁금한 것은,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이 혹시 요안네스가 의도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되어서 황제가 되는 것과 작정하고 작금의 상황을 만들어서 스스로 황제가 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었으니까. 사실을 마주하기 두려웠지만, 부디 최악의 상황은 아니기를 마음속으로 빌며 안나는 욕조에서 일어났다. 비단결 같은 피부가 오늘따라 유난히 백옥처럼 하얗게 빛나는 것 같았기에 물기를 닦으며 걸칠 것을 건네주던 시녀들도 저절로 눈을 내리깔았다.

“전하께서 드실 테니 소홀함 없이 준비토록 일러라. 오찬은 내 방에서 할 것이다.”

“네, 공주님.”

“참, 그리고 메뉴는 모두 전하께서 선호하시는 것들로 채워야 한다.”

“알겠습니다.”

하늘에 뜬 해를 보니 아직 오찬까지는 시간이 넉넉했다. 그 사이 안나는 어떻게 하면 티 안 나게 이 ‘티오펜타 베리타스’ 라는 고풍스러운 이름의 약을 요안네스가 먹게 할지 고민에 빠졌다. 조금 쓰다고 했으니 제일 편하고 쉬운 방법은 칼리스토가 제시한 것과 마찬가지로 커피에 슬쩍 타서 먹이는 것이었다. 원래 쓴 것에 조금 쓴 것을 더 탔다고 해서 그것을 귀신처럼 알아맞히지는 못할 테니. 요안네스는 여러 방면에서 뛰어났지만 그렇다고 미각까지 축복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안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좋은 방법이 떠올랐는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 방법이라면 탈 없이 요안네스가 약을 먹게 할 수 있었다.

해결책을 찾은 안나는 모든 일이 무사히 이뤄지길, 그리고 가능하면 별 탈 없기를 바라며 잠시 산책을 나섰다. 눈이 내린 것이 녹지 않았기에 세상은 하얗기만 했다. 가끔 부는 바람에 땅에 소복이 쌓인 눈송이가 눈 새의 깃털처럼 펄럭였다. 어쩌면 정말 눈 새의 깃털인지도 몰랐다. 전설에서나 등장하는 새하얀 빛깔의 거대한 눈 새였고 아무도 본 적은 없었으나 모두가 혹시나 하며 믿는 존재였다. 그런 티 없이 맑은 새가 우아하게 날갯짓을 하며 창공을 나는 상상을 하니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어릴 적에는 정말인 줄 알고 눈이 오기라도 하면 온종일 하늘을 바라보곤 했는데. 이제 그것을 진실로 믿기에는 너무 커버리고 말았다. 아아, 그래 맞아. 하늘을 바라볼 때면 추우니까 걸치라고 오라버니께서 망토를 준비해 주셨지.

저도 모르게 요안네스와의 어릴 적 추억에 빠진 안나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눈길을 거닐었다. 한참이 지나도 그녀가 돌아오지 않자 시녀 한 명이 헐레벌떡 달려와 오찬 준비가 다 되었을뿐더러 공작 전하께서도 이미 당도해 계심을 알렸다.

“전하,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눈에 취해 있었습니다.”

“하하, 괜찮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같이 구경할 걸 그랬구나.”

치마를 살짝 들며 예를 올리는 안나에게 요안네스가 빙긋 웃어 주었다. 둘은 요리장이 온 힘을 다해 발휘한 것을 시녀장이 세려된 감각을 발휘하여 배치를 완료한 오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렇게 둘만 같이 식사하는 건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전하.”

“음, 둘만 있을 때는 전하라는 호칭 말고 그냥 오라버니라고 부르는 게 어떻겠느냐.”

“하지만 지금 둘만 있는 건 아니니까요.”

“그럼 뭐, 다 내보내면 되지 않느냐.”

요안네스는 뒤에서 대기 중인 시녀들에게 모두 나가 있으라 일렀고 식사에 방해받고 싶지 않으니 따로 지시가 있기 전까지는 들어오지 말라고 했다. 시녀들은 잠시 안나의 눈치를 봤으나 그녀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시녀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안나는 요안네스를 향해 빙긋 웃었다.

“그렇게 저랑 둘만 있고 싶으셨던 건가요, 오라버니?”

“저들도 계속 서 있는 건 싫어하지 않겠느냐?”

“그러니까, 저랑 둘만 있고 싶으신 게 아니라 저들의 다리 상태를 염려하신 거다 그 말씀이시지요, 전하?”

“아하하, 이거 무서워서 말도 못하겠구나. 그래, 다시 말하마. 이렇게 너랑 둘만 있고 싶었다. 오랜만이지 않느냐. 그간 여러 가지 일들도 있었고…… 하지만 계속 침체 된 상태로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니.”

말하는 요안네스의 얼굴에 살짝 그늘이 졌다 사라졌다. 마누엘이 저리된 것과 일레키우스 황제가 돌연 붕어한 것까지 많은 일이 순식간에 벌어졌다. 한 달이라는 시간이 숨 가쁠 정도로 흘러가 버렸다.

“하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우리가 계속 슬퍼하기만 한다면 마음이 아프실 거에요. 그런 의미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어머니를 위해 먼저 건배해요. 그리고 마누엘의 상태가 호전되기를 기도하죠.”

와인잔을 가볍게 부딪힌 뒤 그들은 슬픈 일들은 될 수 있는 대로 머릿속에서 지우고 과거의 즐거웠던 얘기들을 하며 오찬을 즐겼다. 요안네스로서는 안나에게 혼인 얘기를 해야 했기에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지 말아야 했고, 안나로서는 요안네스를 끝까지 붙잡아 두고 후식까지 먹여야 했기에 기분 좋은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다행히 그녀가 생각했던 대로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로 채워진 풍성한 식사에 요안네스는 아주 만족해했고, 거기에 제위를 목전에 두고 있는 그의 간절함이 더해져 둘이 즐기는 오찬은 서로에 대한 칭찬과 과거의 아름다운 추억에 대한 회상으로 넘쳐 났고 그러다 보니 그들이 사귀던 시절의 감정까지 되살아나 버리고 말았다.

“그때 오라버니 정말 순수했는데 말이지요.”

“지금은 아니란 말이냐?”

“음, 아무래도? 그 뒤로 여러 번 구혼이 들어왔고 게다가 뭐, 오라버니도 동정은 아니니까요. 순결한 저와는 다르지 않겠어요?”

“이거야 원, 별말을 다 하는구나. 내 비록 몇몇을 품에 안은 적은 있지만, 사랑을 준 적은 없다. 만일 있었다면 사생아들이 넘쳐 났겠지.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그들은 모두 수녀원으로 가 버리지 않았느냐?”

얼마나 옴므파탈적인 매력을 선보인 것인지 안나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단순히 잘 생겼다는 것에 그녀들이 홀라당 넘어간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도 큰 부분을 차지하기는 했지만 뭐 하나 흠 잡을 것 하나 없는 여인에 대한 배려와 자상함, 물 흐르듯 뛰어난 언변, 기사들도 선망해 마지않는 남자다운 탄탄한 육체와 황제의 아들이라는 배경까지. 모든 것이 어우러져 만들어 낸 결과일 것이다. 물론 요안네스가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설명할 수 없는 매력 때문이기도 했다. 자신도 한때는 얼마나 힘들어했는가. 깊이 교제하며 결혼을 생각하기 전에 관계가 끝났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어쩌면 수녀원에 고귀한 신분의 여인이 한 명 더 들어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녀들 말고 제가 모르는 누군가가 또 있었을 수도 있잖아요?”

“이 오라비가 그렇게 못 미더우냐?”

“못 미더운 건 아니고…….”

어쩌다 보니 왠지 투정을 부리는 것 같아 안나는 멋쩍게 웃어 버렸다. 요안네스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보다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적장자인 그가 누군가를 몰래 만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소문이 나지 않으려야 안 날 수가 없는 위치였으니.

“하면, 이제 오라버니의 사랑은 누가 받게 되는 건가요?”

“음 글쎄. 내가 보기에는 아주 고귀한 신분의 어떤 여인이 될 것 같은데.”

“만나 본 적 있나요?”

“당연히 만나 본 적 있지.”

“어떻게 생겼어요? 느낌이 어떻던가요?”

과연 이 대화가 어디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었지만, 안나는 짐짓 딴청을 피우며 캐물었고 요안네스는 흐뭇하게 웃으며 그녀와의 이 기묘한 대화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처음 봤을 때는 완전히 꼬맹이라서 그냥 귀엽다는 생각 밖에는 들지 않았다. 하지만 난 그때부터 확신했던 것 같아. 나와 그 여인은 인연이라는 것을. 커가면서 더욱 확신할 수 있었지. 그녀는 다른 여성들과는 기본적으로 달랐어. 스스로 타오르는 신성 같은 존재라고 할까. 몸짓 하나, 손길 하나, 모든 것이 아름답고 황홀했다. 어쩌면 저렇게 상류 사회에 꼭 맞게 생겼을까 싶을 정도였지. 내가 아는 한 고귀하다는 표현이 그처럼 어울리는 여인은 없었다.”

요안네스의 입으로 재탄생되어 들려오는 자신의 성장기에 안나는 저도 모르게 빠져들었다. 분명히 본인의 과거와 현재를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능변가인 요안네스의 입을 통하니 정말 저런 여인이 존재하기는 할까, 도대체 누구길래 오라버니의 마음을 독차지하고 있는 것일까, 순간적으로 질투심까지 들 정도였다.

“그런데 왜 여태껏 혼인하지 않으신 거죠?”

요안네스는 잠시 입을 다물고 안나를 응시했다. 본인의 이야기에 너무 도취해 있던지라 질문을 해 놓고도 자신도 왜 이렇게 바보 같은 걸 물어봤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띄운 그녀였지만 요안네스는 그런 그녀의 모습조차 사랑스러워 보였다.

“으, 으흠, 그러니까, 방금 그건 못 들은 걸로 하시고. 뭐, 그녀도 이름이 있겠죠? 이름이 뭔가요?”

그대로 눈을 마주하기는 조금 부끄러우니까 고개를 살짝 돌리며 시선을 회피한 안나는 이제 정점을 찍자는 듯 말했다. 끝까지 맡은 배역에 충실한 그녀였다. 요안네스는 물론 있고 말고 하며 가만히 이름을 띄워 올렸다.

“그녀의 이름은…… 아일라노레.”

당연히 안나로 시작할 줄 알았건만 웬 생뚱맞은 여인의 이름이 들려오자 그녀는 고개를 홱 돌려 요안네스를 바라보았다. 요안네스는 뭐 잘못 됐냐는 듯 눈을 깜빡였다. 안나는 이거 왠지 자신이 놀림을 받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티 내지 않으려고 억지로 미소 지으며 부들거리는 입을 열었다.

“예, 예쁜 이름이네요. 근데 성은 없나요? 고귀한 신분이라 해 놓곤.”

“……기억 안 나는 거냐?”

“네?”

“이 이름, 네가 지은 건데.”

“네?”

안나는 내가 저런 이름을 지은 적이 있던가 싶어 곰곰이 생각해 보았으나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혹시 나 몰래 오라버니가 어디서 나랑 비슷한 여자를 만나 놓고는 농담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으나 그럴 리도 없었다. 결국, 그녀는 기억에 전혀 없다는 표정을 지어야만 했고 요안네스는 그럴 수도 있겠지, 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너는 너무 어렸으니까. 한 세 살 됐었나.”

“제가 세 살 때 그런 이름을 만들었다고요?”

“이런, 정말 기억이 안 나나 보구나. 네가 아그네스랑 인형 놀이 하다가 인형한테 붙여 준 이름이었는데. 왕자 인형은 그때 네 눈에 띈 내 이름을 대충 붙여 놓고, 공주 인형한테는 아일라노레라는 이름을 붙이기에 내가 물어봤었지. 그 이름은 어디서 나왔느냐고. 그랬더니 네가 네 이름과 어머니 이름을 조합해서 만들었다고 말했었다. 어어,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말고. 내가 지어낸 게 아니라 진짜 있었던 일이다.”

뭔가 말을 들으니 어렴풋하게 기억이 날 것 같기도 했으나 기억의 끝자락을 잡기에는 너무나 멀리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결국, 요안네스가 말한 여자의 이름이 딴 여자의 이름이 아니라는 걸 알아냈으니까.

이야기가 멀리 돌아오기는 했지만 요안네스는 안나가 태어날 때부터 그녀를 사랑해왔고 아직도 사랑하고 있음을 고백한 셈이었다. 마누엘의 황태자 책봉식이 있던 날에 잠시 확인했었던, 안나도 바라마지 않았던 일이었다. 그때는 그러면 안 된다고, 접어야 한다고 못 박기는 했지만, 이제는 어떨까. 모든 상황이 바뀌고, 이제 손만 내밀면 그 장밋빛 미래를 가질 수 있게 된 지금은.

안나는 조금 죄책감이 들었다.

‘내가…… 너무 대놓고 오라버니를 의심한 건가?’

생각해 보니 이 의심은 칼리스토가 그런 말을 한 것에서부터 시작됐었다. 사실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가 마누엘이 뭔가를 빼앗겼다는 듯이 말했고, 그러다가 우연히 요안네스의 흠칫하는 표정과 마주했었고, 진실의 약을 주며 자신과 요안네스를 묶는 듯한 칼리스토의 말에 안나는 자신이 어쩌면 교묘하게 휘둘려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기에, 그녀는 다음 계획을 실행에 옮겨야만 했다. 진실이라면 알아내야 했고, 그저 의심일 뿐이었다면 한 치의 미련도 없이 완전히 마음속에서 몰아내 버려야 했으니까.

“흠흠, 음, 식사는 대충 다 한 것 같군요. 커피 한잔 마셔요. 제가 드릴게요.”

“그래, 부탁한다.”

시녀가 없으니 안나가 직접 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녀로서는 다행이었다. 이다음 일들도 그녀가 직접,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으니까.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요안네스 앞에 대령하고 자리에 앉은 안나는 커피 향이 무척이나 감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 모금 음미했다. 요안네스 역시 향에 만족했는지 푸근한 미소를 짓다가 홀짝 마시고는 컥, 인상을 찌푸렸다.

“으헉, 이, 이거 향은 좋은데, 맛이 엄청나게 쓰구나. 그냥 마시기가 힘들 정돈데.”

“어머, 그래요? 하지만 절 사랑한다면 다 마셔주실 수 있죠?”

“어? 아…… 뭐, 그렇다면야.”

“아하하, 농담이에요. 이번에 새로 들여온 커피인데 저는 쓴맛이 마음에 들더라고요. 잠시만요.”

티 테이블로 간 안나는 투명한 농당액이 담긴 병을 집어 들었다. 설탕을 녹여서 만들었기에 맛도 부드럽고 단맛이 강해서 지금처럼 커피가 너무 쓸 때 넣어서 마시곤 하는 액체였다. 평상시 요안네스는 손도 대지 않는 것이었으나, 안나가 일부러 몇 배는 더 쓰게 만들어 놓은 커피를 마시기 위해서는 필수적이었다.

“이걸 조금 넣으면 괜찮을 거에요.”

“그래, 고맙다.”

요안네스는 한 모금 마신 뒤 이제는 좀 마실만한 듯 빙긋 웃었다. 안나는 앞으로 흘러내린 머릿결을 살며시 쓸어 넘겼다. 조금 긴장했는지 식은땀이 묻어났다. 요안네스가 눈치채지 못해야 할 텐데…… 다행스럽게도, 요안네스는 몇 모금 더 커피를 마신 뒤 잔을 내려놓았다.

안나는 가만히 심호흡을 했다. 이제 시작이었다. 조금 전 넣어서 마신 농당액에는 칼리스토가 준 진실의 약이 담겨 있었다. 너무 쓴 커피를 마실 경우 요안네스가 농당액을 찾을 것이 분명했기에, 그리고 만일 찾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신이 권해서라도 먹일 작정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건넬 수 있는 농당액에 진실의 약을 탔다. 그편이 커피잔에 바로 약을 타는 것보다 훨씬 자연스러웠고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문제는, 효과가 언제 나타나는지 모른다는 거였다. 지속시간이야 대략 차 한잔 마실 정도라고는 했지만 먹으면 바로 나타나는 것인지 아니면 한참 후에야 나타나는 것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모른다고 해서 그냥 멍하니 있을 그녀가 아니었지만 마주하게 될 진실이 겁나 조금 머뭇거리는 사이 요안네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음, 이제 오찬도 다 마치고 후식까지 즐겼으니 내가 찾아온 이유를 말하는 것이 나을 것 같구나.”

“알고 있어요.”

“……그래, 알 거라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짐작하는 것과 직접 말하고 듣는 것과는 다르지 않겠느냐. 그래서 묻고 싶구나. 나와, 혼인할 마음이 있느냐?”

“저와의 혼인은 오라버니께 정통성을 부여할 테니, 제가 거절한다고 해도 오라버니께서는 계속 부탁하시겠죠?”

“그건 거절이냐?”

“그럴 리가요. 저도 오라버니와 함께하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어요. 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라도 도와드릴 거에요. 그러니, 저의 자리가 오라버니의 옆이라면, 응당 그리해야겠지요.”

안나의 긍정에 요안네스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혹시라도 안나가 튕기거나 정색을 하고 거절하면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밤새도록 고민해 왔던 것이 허사가 되어 버렸지만, 이제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녀는 자신과 혼인하기를 바라고 있으며 지금 상황에서 둘의 결합을 방해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요안네스는 살며시 한쪽 무릎을 꿇으며 안나의 손을 잡았다.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신부로 만들어주마. 오늘의 결정을, 절대로 후회하지 않게 해 주겠다.”

가만히 손에 입을 맞추는 그를 바라보며 안나는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너무 커서 요안네스가 들어 버리면 어쩌나 싶을 정도였다. 그녀의 마음은, 그녀의 머리와는 달리 이미 요안네스에게 흠뻑 빠져 있었다. 하마터면 그 마음에 그대로 끌려가 버릴 뻔했으나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잠시 입술을 깨물던 그녀는 이내 내뱉어 버렸다.

“오라버니, 그 전에 저 궁금한 것이 하나 있어요. 솔직하게 답해 주세요.”

“그래, 무엇이든 물어보아라.”

“마누엘과는…… 정확히 무슨 일이 있던 거죠?”

“마누엘? 갑자기 그 얘기는 왜…….”

“부탁이에요. 말씀해 주세요.”

요안네스는 살짝 눈썹을 치켜들었다. 그 일에 대해 자신을 추궁이라도 하는 것인가 싶었으나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니 숨길 것도 없었다. 그랬기에 그녀가 알고 있는 대로 요안네스는 답을 해 주었다.

“그때 말했듯이 물을 끼얹을 바가지를 가져오려고 나는 탕에서 나와 있었다. 마누엘에게는 그대로 탕에 있으라고 했었는데, 내가 안 보는 사이에 그 녀석이 나오려고 했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미끄러졌겠지. 나도 마누엘이 사고를 당한 뒤에야 봤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밖에 모르겠구나. 더 궁금한 것이 있느냐?”

그의 대답에 안나는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 약효가 돌지 않은 것인가? 아니면 칼리스토가 자신을 농락한 것인지도 몰랐다. 역사에 존재하지 않는 약을 자기는 가지고 있다며 줄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안나는 자신의 경솔함을 탓했으나 아직 기회는 있었다. 그냥 궁금했다고 둘러대고 아까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충분히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해소되지 않고 있는 마지막 의혹에 이끌려 다시 입을 열고 말았다.

“음. 그러니까, 마누엘이 그냥 일어나다가 사고를 당한 거다 그 말씀이지요?”

“그래. 나도 무척이나 안타깝지만 그게 사실이다. 그러고 나서…… 우리 모두 알다시피 그렇게 되어 버렸지.”

“그렇군요. 마누엘은 무척 아파했겠지요?”

“그래, 무척이나 아파하더구나. 둘 다 한꺼번에 터진 게 아니라 하나씩 터졌기 때문에 고통이 배가 됐을 거야.”

말을 한 요안네스의 얼굴에 순간 당혹스러움이 서렸다. 안나 역시 조금 의아함이 들었으나 이내 그것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랬기에 요안네스가 말을 돌릴 틈을 주지 않고 되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계신 거죠?”

“왜냐하면, 내 손으로 직접 터트렸으니까.”

“무엇을요?”

“마누엘의 고환을 말이다.”

요안네스는 기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안나 역시 따라서 일어났다. 공포와 배신감과 놀라움이 뒤섞인 혼란스러움이 그녀의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허옇게 변해 버린 얼굴로, 안나는 쐐기를 박듯이 물었다.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세요. 어, 어떻게 했다고요? 왜 그랬다고요?”

“내 손으로 마누엘의 고환을 모두 터트려버렸다. 그래야 마누엘이 후사를 보지 못할 테고, 자연스럽게 내가 제위에 오를 명분이 생길 테니까. 안나!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것이냐?!”

내뱉어진 말은 주워담을 수 없었다. 다급하게 입을 막아보았으나 이미 안나는 모든 사실을 알게 된 뒤였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경악에 차 안나를 바라보던 요안네스는 화가 나는지 입술을 깨물었다. 어디에 뭘 어떻게 집어넣었기에 자신이 숨기려고 했던 진실을 죄다 불어버린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녀가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모든 것을 알아버린 이상, 둘 간의 혼인 역시 성사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장밋빛 미래였던 것이 갑자기 극도의 혼란스러움으로 가득 차 버렸다. 어떻게든 이 난관을 타개해야만 했다.

“그렇게, 그 정도로, 황제가 되고 싶었었나요? 동생을 그 지경으로 만들어 놓을 정도로?”

“안나…….”

“마누엘을 봐요! 그 어린 것이, 그 불쌍한 것이 지금 무슨 상황인지! 어떻게 오라버니께서 마누엘을……!”

“안나, 오해다, 오해야, 난 그런 적이 없다!”

“이제 약효가 떨어졌나 보군요, 다시 거짓말을 하는 것을 보니!”

“나한테…… 약을 먹였단 말이냐?”

“그래요, 진실을 말하게 하는 약이죠.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난 그저, 진실이 뭔지 알길 바랐을 뿐인데, 한 점 의혹도 없이 오라버니와 혼인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바랐는데, 이게 진실이라니…… 그의 말대로 정말 진실은 쓴 법이군요.”

“칼리스토냐? 그 녀석이 약을 준 것이냐?”

“지금 그런 게 중요하나요? 오라버니가 무슨 짓을 했는데!”

안나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시녀들이 놀랐는지 문 바깥에서 괜찮으냐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여차하면 문을 열고 들어 올 기세였다.

“별일 아니다. 모두 물러가거라.”

놀랍게도 안나는 목청을 가다듬으며 외쳤고 시녀들은 조금 술렁였지만 이내 그녀의 명을 따른 듯 잠시 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요안네스는 의외의 행동을 한 그녀를 바라보다가 한 걸음 다가갔다. 안나는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그 자리는 이제, 안타까움이 메우고 있었다.

“왜 그랬어요?”

“…….”

“기다릴 수 있었잖아요. 오라버니라면……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렸는데 조금 더 기다릴 순 없었던 거에요?”

“무슨…… 말이냐?”

“마누엘은 몸이 약해요. 우리 모두 아는 사실이지요. 그 애가 총명하다고 해서, 황제가 되어 정사를 돌본다고 해서, 그 치세가 천년만년 가는 게 아니잖아요. 그 애는 오라버니를 사랑하죠. 분명히 오라버니를 공동황제로 임명했을 거에요. 만일 마누엘이 아이를 낳는다면 틀림없이 아이의 후견인은 오라버니였을 거구요. 자연스럽게 오라버니는 권력을 쥘 수 있어요. 분명 그리됐을 거라고요. 근데 오라버니는 그걸 송두리째 날려 버렸잖아요!”

“너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느냐?”

“안타까워요. 무서울 정도로. 제게 인내를 가르치던 분이, 정작 그 인내심을 더 발휘하지 못해 우리 모두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니…… 그런 얼굴로 뻔뻔하게 나에게 혼인을 요구하다니!”

안나의 눈에서 불꽃이 튀어 올랐다. 요안네스는 그 기세에 조금 당황했으나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었다. 가만히 안나의 눈길을 마주하던 요안네스는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속죄하듯이 엎드렸다.

“나는…… 거기까지는 보지 못했다.”

“…….”

“그래, 황제가 되고 싶어서, 너처럼 한 걸음 더 물러난 상태로 바라보지 못했다. 그 자리가 뭐라고, 친동생까지 그 지경으로 만들어 버린 내가 너는 괴물로 보일 테지. 용서해다오. 원래 그럴 의도는 아니었다.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어. 난 그저 마누엘이 요구한 대로 같이 목욕만 생각이었다. 그렇게 한 건 정말 우발적이었단 말이다!”

“거짓말!”

“정말이다! 만일 내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

요안네스는 품에서 단도를 꺼내 들었다. 안나가 숨을 들이마시기도 전에 그는 자신의 목에 그것을 들이댔다. 베였는지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 검으로 지금 당장 내 목을 찌를 것이다. 네가 내 말을 믿지 못하고,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말한다면! 주저 없이 찌를 것이다.”

“…….”

“지금 내가 한 말은 사실이다. 그것은 그날, 그때, 나도 모르게 우발적으로 한 행동이다.”

“그 말을 믿으라고…… 자, 잠깐! 검은 내려놔요!”

요안네스가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목을 찌르려 하자 화들짝 놀란 안나가 달려들어 그의 손을 감싸 쥐었다. 조금 전보다 더 피가 흘러내렸으나, 요안네스의 표정은 오히려 밝아 보였다.

“이제 믿어주는 게냐?”

“……지금 오라버니마저 죽는다면 제국은 혼란에 빠지겠지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마세요.”

단도를 빼앗아서 멀리 던져 버린 안나는 상념이 가득한 눈길로 창밖 먼 곳을 응시했다. 오전에 보았을 때는 눈 새라도 날아다닐 것처럼 티 없이 맑았건만, 지금은 그저 축축하고 황량한 느낌밖에 없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왜 이렇게 되어야만 했을까. 요안네스를 등진 상태로 안나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속죄할 기회를 드리겠어요. 마누엘의 치료에 전념을 다 하세요.”

“알겠다.”

“오라버니께서 저지른 일을 아그네스에게도 말하세요.”

“……알았다.”

“오라버니께서는 섭정이 되세요. 공동황제의 자리는 마누엘이 정신을 차리거나 아니면, 아버지의 품으로 갈 때까지 유보하세요.”

“그 말은…… 혼인하지 않겠다는 뜻이냐?”

“몰랐다면 모를까, 오라버니께서 저지른 일들을 알게 된 이상 오라버니의 아내가 될 수 없어요. 적어도, 마누엘이 원래대로 돌아오거나, 제 마음이 오라버니를 용서할 때까지는. 믿었던 오라버니에 대한…… 배신감 때문에 절대로, 지금은 안 돼요.”

“……그러냐.”

“가세요. 나가 주세요. 혼자 있고 싶어요.”

뒤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유리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싶어 돌아보니 유리잔에 와인을 담아 꿀꺽거리며 마시는 요안네스가 보였다. 물 마시듯이 와인을 마신 그는 이내 입술을 깨물더니 와인을 더 따라 부었다. 그리고 안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잘못한 것은 알겠다. 충동적이든 의도한 것이든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인정한다. 하지만 너는, 내가 평생 꿈꿔왔던 것을 포기하라고 말하고 있구나.”

“정말 뉘우친다면…….”

“됐다.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그건 포기해야겠지. 무엇보다도, 네가 태어난 이래 단 한 번도, 너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으니, 너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게 아무리 쓰다 한들 삼켜야 하는 법이겠지.”

와인잔을 들어 올렸다. 잔이 비워져 갔다. 안나는 말없이 요안네스를 바라보았다. 늘 완벽하고 늠름하던 오라버니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초라하고 안타까워 보였다.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이런 모습은, 지금 그가 취할 모습이 아닌데, 하는 마음에 안나는 조금 흔들렸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 내 꿈을 포기하는 것에 대한, 이룰 수 없는 꿈에 대한 건배다. 남은 것은 네가 비워다오.”

한 모금 정도가 잔에 남아 있었다. 안나는 잠시 망설였으나 이내 잔을 집어 들었다. 들어 올려 남은 와인을 모조리 비웠다. 요안네스는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섞인 눈빛으로 안나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그녀를 끌어안았다. 요동치는 심장의 고동이 느껴져 왔다. 가빠지는 숨결이 느껴진다. 천 년 된 고목처럼 늘어진 그녀의 귓가에, 요안네스의 음성이 소름 끼칠 정도로 낯설게 들려왔다.

“하지만 너를 갖는 것은 포기하지 않겠다.”

안나는 말이 없었다. 할 말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입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안네스는 안나의 뺨을 손으로 감쌌다. 눈을 마주쳤다. 터질 것처럼 치떠진 눈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같이 마셨는데, 왜 나는 효과가 없는지 궁금하겠지.”

요안네스는 그녀를 들어 안았다. 뚜벅뚜벅 걸어가, 침대 위에 천천히 내려놓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녀였기에 오직 움직일 수 있는 눈을 심하게 깜빡였다. 소리치고 있었다. 만일 소리가 난다면 비명이 울려 퍼질 것이었다.

“찻잔 끝 부분에 약을 발랐다. 내가 마실 부분만 빼고 말이지. 나도 마비될 위험이 있긴 하지만…… 뭐, 결과적으론, 내 생각이 맞았으니까. 너와의 혼인을 위해,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할 만하지. ”

거추장스럽다는 듯 겉옷을 벗으며 요안네스가 한 말에 안나의 눈은 공포로 물들었다. 속옷까지 모두 벗어 버리자 조각과도 같은 근육들이 보였다. 평소라면 가볍게 탄성을 뱉었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아니었다.

“회임을 한다면, 혼인할 수밖에 없겠지.”

안나는 소리치고 싶었다. 울고 싶었다. 제정신이냐고 외치고 싶었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요안네스가 이끄는 대로 치마가 들어 올려지고 다리가 벌려지는데도 그저 인형처럼 가만히 있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꼭 아들을 낳아다오. 그래서, 내가 갖지 못한 자줏빛의 가호를 누리게 해다오.”

요안네스가 자신의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순간 안나는 온몸이 둘로 쪼개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이대로 정신을 잃어버렸으면 좋으련만, 약효가 유지되는 이상 그럴 수가 없었다. 감각조차 활짝 열려 진 상태라 고통은 그녀의 이성까지 마비시키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요안네스가 강제로 그녀를 범하는 와중에도 그녀를 생각하며 최대한 부드럽게 하고 있다는 것이었으나 그딴 것을 느낄 상황이 아니었다.

눈물이 솟아올랐다. 그대로 흘러내렸다. 한때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던 오라버니였건만 이런 것은 아니었다. 동생의 미래를 짓밟고 자신을 강제로 범하는 요안네스에게서 안나는 죽음을 보았다. 더 이상의 영화는 존재하지 않았다. 거대하게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힘없이 재가 되어 무너져 버리는 제국이 보였다. 그리고, 자신도 스러지고 있었다.

“움직일 수 있게 되면, 네가 선택하거라.”

끝나지 않을 고통이 끝나고, 요안네스가 마침내 그녀에게서 떨어졌을 때도 안나는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요안네스는 옷을 꿰입은 뒤 이내 잔에 물을 채우고는 뭔가를 한 방울 떨어뜨렸다.

“기억을 잃게 하는 약을 탔다. 지금의 기억이 너를 괴롭힌다면 마시거라. 다 지워줄 것이다. 내가 말한 진실까지 지워진다면 좋겠지만…… 그건 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가만히 안나의 뺨에 입을 맞춘 요안네스는 조용히 방을 나섰다. 시녀들에게 안나가 잠시 낮잠을 청하니 방해하지 말라 이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랬기에 안나는 한동안 그 상태 그대로 누워 있어야만 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천천히 마비가 풀리자 억눌렸던 소리가 터져 나오면 저도 모르게 크흑, 하고 울어버리고 말았다. 손을 들어 올렸다. 얼굴을 가렸다. 몸을 뒤틀었다. 산산이 부서진 마음이 쪼개져 버릴 몸만큼이나 아파져 왔다.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상처가 자신의 영혼에 아로새겨진 것만 같았다. 아니, 영혼이 갈가리 찢겨 나간 듯했다. 이 고통을, 이 괴로움을, 신은 내게 안고 살라고 하는 것인가?

순간 요안네스가 한 말이 떠올랐다. 고개를 들어 올린 안나의 눈에 테이블 위에 놓인 잔이 흐릿하게 보였다. 기억을 잃게 한다고? 다 지워준다고? 마누엘에 대한 진실까지? 안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몸으로 침대에서 내려왔다. 설 힘이 없어 그대로 주저앉았다. 엉금엉금 기어가 테이블 위로 손을 올렸다. 잔이 미끄러지며 내용물이 그대로 테이블 위에 쏟아졌다. 밑으로 뚝뚝 떨어져 내리는 물방울들 하나하나가 놀라울 정도로 명확하게 보이는 것만 같았다.

‘마누엘…… 누날 용서해줘. 이런 기억을 안고…… 살 용기가 없구나.’

몸을 당겼다. 입을 가져갔다. 혀를 내밀었다. 아무런 맛이 느껴지지 않았으나 곧 몽롱한 기분이 들었다. 쓰러졌다. 눈이 감겨 왔다. 그래, 이건 꿈일 거야. 깨고 나면 그저 악몽을 꿨다고, 사실은 가짜였다고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는 꿈일 거야. 그렇게 여기며 세상의 모든 것이 어둠에 잠기는 것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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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다반사 님, 약속을 지켰습니다. +_+ 올해가 가기 전에 한편 업로딩했어요 ^^ 매우 힘들었답니당... ㅠㅠ

암튼, 2014년 최후의 날입니다.
다사다난했던 해(늘 다사다난하다는 게 함정이지요) 마무리 잘 하시고, 행복하고 기쁜 내년이 되시길 빕니다.

내년에 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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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다반사
14/12/31 13:11
수정 아이콘
와! 감사합니다. 올 해의 마지막 날에 큰 선물을 주시는군요!
여튼, 요한네스는 분명 동생을 고자로 만들고.. 여동생을 범하는 파렴치한인데..
뭔가 꽤 불쌍하네요. 권력욕이라는게 무서운 것인긴 한가 봅니다. 하기사.. 저 위치의 사람들이라면 어지간한 물욕들은 채우고 남을테니.. 권력과 애정에 대한 욕구만 채우면 되는건가..
그리고 분명 야한 얘기를 써 놓으셨는데 왜 안 야할까요.. 음음,
가브리엘대천사
14/12/31 15:09
수정 아이콘
지금까지 쓴 것 중 가장 긴 한편이었다지요... 흐.... 큰 선물이라 해 주시니 제가 더 감사합니다. +_+

요안네스가 불쌍하게 느껴진다면... 음... 불행 중 다행이네요. 그냥 나쁜 놈. 개.... 로 느껴지면 어쩌나... 했는데.... 사실 현실세계의 나쁜 놈 말고 픽션에서의 나쁜 놈이나 악당은 명분이 있어야 더 그럴듯 하게 보이는지라.... 하지만 그걸 녹여내기에는 아직 저는 실력이.....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야한 얘기(라기 보다는 좀 그냥... 일어나선 안될 얘기지만)가 야하지 않은 이유는, 야해야 할 부분조차도 안 야하게 만드는 저의 모자란 필력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흐드드....
세상만사다반사
15/01/02 02:04
수정 아이콘
차라리 야한 분위기보다 상황적인 묘사가 더 충실하게 표현되어 그런 듯 합니다.흐흐
사실 그 부분만 떼어놓고 보면 므흣한게 야해보인다는... 쿨럭..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가브리엘대천사
15/01/02 17:41
수정 아이콘
허억! 그 부분만 떼어 놓고 보질 않아소리.... 흐흐흐흐... (응?)
에, 또 저 부분은... 음... 관계 맺는 부분이긴 하지만 아름다운 관계가 아닌 일방적인 나쁜 관계라 세세히 쓸수가....;;;;
사실 써본적도 없고...... 데헷.

세상만사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행복하시고, 건강하시길 ^^
14/12/31 15:15
수정 아이콘
2014년 마지막 날에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항상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가브리엘대천사
14/12/31 15:51
수정 아이콘
내용은 좋지 않았지만(;;) 좋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당.
새해 복 많이많이 받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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