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5/07/21 22:40:58
Name 이걸어쩌면좋아
Subject [일반] 첫사랑 이야기..
첫사랑을 했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던 초등학교 때 처음 만났고, 그땐 너무 어리기도 했던지라 서로 좋아하나? 정도였어요. 요즘이야 아이들이 성숙해서 할거 못할거 다한다지만 제 세대는 아니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었고, 몇 년인가를 친구로 지내다가 그 친구가 그러더군요. 나 여자 좋아한다. 지금 애인도 있어. 근데 널 잊어본 적도 없다. 다시 만나기까지 내가 널 얼마나 찾았는지 아느냐. 넌 내가 설레고 두근대는 유일한 남자다..라고요.

멍했죠. 혼자 좋아하는줄 알았는데 그 친구도 절 좋아한다는걸 알아서 기뻤고, 동시에 연애하긴 어렵겠구나 싶어서 슬펐습니다. 그 때 느꼈던 감정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네요. 인지부조화가 이런건가 싶었습니다.

그 후에도 친구로 지내다가 제가 고백을 했고, 연애를 하게 됐습니다. 보통의 이성애자들이 하는 연애와 달랐던 점은, 그 친구는 여전히 레즈비언인채로 남자인 저를 남자가 아닌, 사랑하는 사람으로 여겼기 때문에 레즈비언들이 많이 모이는 카페, 모임, 행사 등에 절 데려갔었다는 것 정도였네요. 네가 날 좀더 이해해줬으면 한다..는 말과 함께요. 아 니가 우리 xx이를 채간 놈이냐.. 하는 그 친구 지인들의 시선은 덤이었죠.

아는 분들은 아실겁니다. 레즈비언(게이는 잘 모르겠습니다)들이 많이 모이는 카페같은게 꽤 있더라구요. 저도 그 친구와 연애하면서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갔던 것 같네요. 카페에 꽤 많은 사람이 있는데 저 혼자 남자일 때의 그 느낌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시선을 어디에 둬야할지도 모르겠고, 그 친구 지인들은 계속 뭔가 물어보면서 정신없게 하고 했었어요. 고등학생 때 남자에게 고백받아본 적은 있었지만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이는 경험은 처음이었죠.

별일없이 만났어요. 종종 다투긴 했지만 오래가지 않고 바로바로 풀었어요. 그 친구는 몇 번의 연애 경험이 있었지만 전 첫 연애였던지라 모든게 서툴렀고, 어설펐고, 밀려오는 감정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반면 그 친구는 자기가 리드해가면서 많은걸 알려줬죠. 정말 애정이 있어서 하는 모든 종류의 애정행각은 그 친구가 다 처음이었어요. 연인사이에서만 허용되는, 연인이라면 누구나 하는, 다양한 걸 알려줬죠.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처음 받아서인지 더 감정을 조절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하루는 크게 싸웠습니다. 왜 싸웠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안 나지만 아마 레즈비언인 자기 지인을 보는 시선이 안 좋았다..뭐 이랬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러지 말랬잖아..부터해서 며칠 시간을 갖고 다시 보기로 했었죠.

며칠뒤 다시 만난 자리에서의 분위기는 괜찮았습니다. 보통의 연인들이 그러듯 서로 서운했던 것들 풀고, 내가 미안하다, 아니다 내가 더 미안하지, 앞으로 더 잘할게.. 괜찮았어요. 그 친구가 화장실 간 사이에 그 친구의 애인이라는 사람에게 온 전화를 제가 받기 전까진.

비웃더라구요. 더러운게 누굴 건드리려 하냐고, 그 친구가 정말 사랑하는게 누군지 알긴 하냐고, 넌 소모품이야, 일회용이야, 외로움을 달래려는 도구였을뿐이야, 어차피 내게 오게 되어 있었어, 멍청하구나 당신, 전화를 끊고선 멍해지더라구요. 이게 무슨 소리야..하고.

묻더라구요. 표정이 왜 그러냐고. 너 애인이라는 사람한테 전화왔는데 설명해봐라..하니 당황하는게 눈에 보입니다. 그리고 하는 설명은, 저와 냉전중일때 너무 외로워서 전 애인에게 연락을 했고, 만나서는 갈데까지 갔지만, 다시 사귀자고 한건 아니다, 술을 너무 마셔서 실수한거야, 제정신이 아니었나봐, 그 사람이 오해하고 혼자 멋대로 저러는거다, 신경쓰지마 내가 알아서 할게..

그런거 있잖아요. 딱 봐도 아닌데 일단 수습하려고 하는게 보이는.. 듣고있기가 힘들어서 먼저 간다하고 나오는데 붙잡더군요. 전 놓으라고 소리치고, 울고불고, 너 이러려고 나 만난거냐, 내가 남자라고 이런거냐, 그 친구는 그런거 아니니까 진정하고 내말좀 들어보라하고..

결국엔 말하더라구요. 너랑 있는게 정말 좋고 아직도 설레고 두근거리긴 한다, 근데 이러면 내 정체성이 뭔지 잘 모르게 될 것 같다, 널 만나고 있으면 내가 아니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다시 전 애인과 사귀게 됐다, 널 잃긴 싫다, 사랑하는건 진심이다, 이것밖에 안 되서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그렇게 헤어졌어요. 이후에도 연락은 가끔 왔고, 요즘도 오지만 간단하게 대답하고 한 달에 두어번정도 만나서 커피 마시고 그러는, 친구인척하는 애매한 사이가 됐네요. 연락올때마다 며칠씩 힘들어하는건 덤이고, 만나고 오고선 밥도 잘 못 먹고 종일 멍해있고 그러지만요.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이후의 연애에 영향을 미쳤는지 잘 되진 않았습니다. 사귀는 것과 동시에 헤어짐을 준비하게 되더라구요. 또 바람나면 어쩌지, 그 상대가 여자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난 정말 잘 하고 있나, 괜한 아가씨 괴롭히고 있는건 아닐까.. 다른 사람을 잊지 못하고 만나는게 죄짓는 기분이라 연애하면 항상 미안하다는 말을 달고 살았고, 더 좋은 사람 많은데, 너 좋다는 사람 많은데 왜 나랑 만나니, 이런 말을 참 많이 했어요. 나쁜 놈이죠 제가.

요즘도 만나면 그 친구는 그럽니다. 난 아직 널 사랑한다, 감정은 변하지 않았다, 언젠가 다시 받아달라 할지 모른다, 니 옆에 아무도 없다면 내가 있어도 될까, 그땐 다신 떠나지 않을거야, 두근대는 말들을 쏟아내죠. 어릴 땐 잘 몰랐지만 나이가 들고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경험을 하다보니 이젠 어느정도 이해가 되면서 안쓰럽기도 하더라구요. 너도 고민이 많았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많이 힘들었겠구나, 내게 보였던 절망은 빙산의 일각이었구나, 좀더 털어놓고 기대지 그랬어..

세상엔 다양한 종류의 연애가 있을겁니다. 제 연애도 그 중 하나겠죠.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모든 연애가 오래오래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갑자기 감성이 터져서 토해내듯 썼네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우주모함
15/07/21 22:51
수정 아이콘
흠.. 다시 사귀는게 어떠신지요.

왜 그런말 있잖아요. 한번 일어난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수도 있으나 두번일어난 일은 반드시 다시 일어난다고..
사람행동도 그럴거같거든요. 바람폈다고는 하지만 아직 한번이잖아요.

그리고 제 생각에 저 여자분은 레즈가 아닐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이성애자라서 좀 다를수도 있지만, 본인의 성적 취향이 있다면 아무리 동성이 매력적이라도
절대 동성이 좋아지지는 않거든요. 아무리 잘생기고 아무리 예쁜남자를 봐도..그냥 남자일 뿐이지 0.001%도 설레인다던지 하는 감정이 생기지 않는데
님을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었다는 자체가.. 진짜 레즈라면 힘든 일이 아닐지요?

한번 기회를 줘보시는게 어떠실까요?
어쩌면 저 여자분 말대로 다시는 님을 배신하지 않을수도 있고
혹시나 저 여자분이 님의 평생의 인연일수도 있잖아요.

더군다나 글을 보면 님도 아직 계속 좋아하시는 것 같고..
다시 사귀었다가 잘 안되더라도 그건 그때가서 헤어지면 되죠.
지금은 일단 서로 끌리는대로 하는 것을 권해드려용
이걸어쩌면좋아
15/07/22 02:23
수정 아이콘
지금 만나는 사람이 있어서 당장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 친구 말로는, 자기가 레즈비언인걸 깨닫기 전에 절 좋아했고, 그 감정이 유지된채로 성향을 알게 된거라 혼란스럽다 하더라구요. 실제로도 그런 것 같고..
어떻게든 흘러가기야 할텐데, 어렵네요.. 조언 감사합니다.
친절한 메딕씨
15/07/21 22:52
수정 아이콘
양성애자 셨나 보네요..
정말 특이한 첫사랑입니다.
이걸어쩌면좋아
15/07/22 02:24
수정 아이콘
주변을 봐도 저같은 경우는 없더라구요. 그래서 조언 구할데도 없고..
la_belle_epoque
15/07/22 01:53
수정 아이콘
여자분이 남자분께 너무 큰 상처를 안겨주셨네요...
내가 힘들다고 남까지 힘들게 하는건 무책임한거에요.
이걸어쩌면좋아님께서 새로운 사람 만나셔서 받은 상처가 치유되셨으면 좋겠어요.
자기의 상처가 내것보다 더 크다는 이유로 제게 상처만을 주었던 사람이 있었거든요.
지금의 남자친구를 만나면서 많이 치료되었어요.
그 어떤일이 있더라도 가장 소중한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에요.
꼭 행복하시길 바라요.
이걸어쩌면좋아
15/07/22 02:29
수정 아이콘
상처의 크기를 비교하는건 불가능하다고 보는 입장에서 la_belle_epoque님도 많이 힘드셨을 것 같습니다.
전 새로운 사람을 만나도 겁부터 나서 어찌해야할지 잘 모르겠어요.
좋은 사랑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la_belle_epoque님도 꼭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la_belle_epoque
15/09/11 11:21
수정 아이콘
나는 이런저런 일을 겪었고, 너는 순탄했잖아.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해도, 내가 이런사람이어도 너는 이해해줘야해.
니가 성격도 더 좋은게 맞는거고, 그러니까 참아줘야해.

그 사람의 종합적인 태도가 딱 위의글 같았어요.
몇년이 지난일이지만 아직도 생각하면 후회되는 연애였네요.
지금 남자친구를 만나고 저는 건강한 연애는 어쩌면 인생을 바꿀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걸어쩌면좋아님도 행복하시길 진심으로 진심으로 바라요!
이걸어쩌면좋아
15/09/16 01:13
수정 아이콘
좋은 인연 만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저도 나이가 들다보니 과거의 제가 저질렀던 철없던 행동에 대해서도 많이 후회하고 반성하게 되더라구요. 이러면서 성숙해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같은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좋은 인연은 옆에서 바라보는 것으로도 같이 기분 좋아지더라구요. la_belle_epoque님의 연애도 오래오래 가시고 과거의 상처가 무색하게 항상 웃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행복하세요. 그럴 자격 충분합니다.
해피팡팡
15/07/22 06:20
수정 아이콘
모든게 처음이었던 애정이 있어서 하는 모든종류의 애정행동 + 바람폈다는 고백아닌 고백..

양성애자라는걸 제외하면 제 첫사랑하고 많이 닮아있네요, 굉장히 자존감도 쎄고 감정 기복도 심한 아이였는데 여러모로 연애하기 참 힘들었거든요

충격이 꽤 오랜기간 갔었는데 우연히 만난 지금의 여친을 진심으로 사랑하면서 이젠 기억도 희미해졌네요

중간중간 위기도 많았지만 저때 배웠던 연애경험으로 잘 헤쳐나가지더라구요. 이걸어쩌면좋아님도 지금의 아픔이 도움이 되실날이 있으실겁니다

힘내시길..
이걸어쩌면좋아
15/07/22 14:01
수정 아이콘
사람으로 잊는게 좋다는데 아직 준비가 덜 됐나 봅니다. 시간지나면 어떻게든 되겠죠..
말씀 감사합니다.
깡디드
15/07/23 12:46
수정 아이콘
만약 헤어지시더라도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돌이켜 보면 그래도 아주 고마운 사람이었다고 추억하실 것 같아요.
이걸어쩌면좋아
15/07/23 22:20
수정 아이콘
돌다리가 깨질때까지 두들겨보는 습관이 생겼으니, 고맙다고 해야할까요..크크..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60355 [일반] 요즘 신조협려 2006 (유역비 선녀님 출연) 보고 있는데요.... [67] 바람과별14063 15/08/13 14063 2
60351 [일반] 잘 알려지지 않은 한고조 유방의 흑역사(?) [282] 우주모함9797 15/08/13 9797 2
60349 [일반] 한고조 유방이 파탄난 민생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다 [22] 신불해9139 15/08/13 9139 9
60326 [일반] 애완곤충 사육과 해외곤충. [99] 우주모함11310 15/08/12 11310 2
60171 [일반] (아재주의) 좋아하는 애니음악 10 [89] 삭제됨6712 15/08/03 6712 5
60155 [일반] 한국의 직장인에게 여가는 허용되는가? [148] 라파엘14589 15/08/02 14589 59
60112 [일반] 동상이몽 스킨십父 : 조작 아닙니다. 하던 대로 했어요. [22] 임전즉퇴10788 15/07/31 10788 1
60098 [일반] [펌글/역사] 영조의 사도세자묘지문 [6] sungsik7415 15/07/31 7415 2
60089 [일반] 박근령 "日에 '과거사사과' 자꾸 이야기하는 것 부당" [66] 마빠이10192 15/07/30 10192 5
60079 [일반] 극단적으로 치닫는 남혐과 여혐을 보며 [81] La_vie10940 15/07/30 10940 7
60076 [일반] LG가 2분기에 스마트폰으로 2억의 영업이익을 거뒀습니다 [76] Leeka12213 15/07/29 12213 1
60075 [일반] 출사표를 뛰어넘는 천하제일 명문, 청태종의 대 조선 국서. [36] 우주모함9440 15/07/29 9440 5
60073 [일반] 조공 트레이드의 대가, 서초패왕 항우 [56] 신불해10751 15/07/29 10751 7
60056 [일반] 甲甲하는 무한도전 가요제 [303] 王天君24887 15/07/28 24887 21
60050 [일반] 유방 마누라 여후에 대한 몇가지 이야기들. [24] 우주모함17742 15/07/28 17742 2
60043 [일반] 한고조 유방의 다양한 면모들 [75] 신불해54002 15/07/27 54002 19
60041 [일반] 몇가지 제가 아는 맛집 소개 [53] 우주모함12455 15/07/27 12455 6
60037 [일반] 만화 원피스의 현재 진행상황에 대한 담당 편집부의 인터뷰. [99] 우주모함15763 15/07/27 15763 0
59960 [일반] 무능하다고만 알고 있었던 유방. [49] 우주모함10873 15/07/23 10873 2
59957 [일반] <삼국지> 촉나라의 성립, 그 한계와 멸망. [35] 靑龍8826 15/07/22 8826 2
59938 [일반] [펌글] 조선 실학자의 기독교 비판 [178] sungsik15042 15/07/22 15042 24
59936 [일반] 첫사랑 이야기.. [12] 이걸어쩌면좋아4213 15/07/21 4213 13
59926 [일반] 어그로 관련 자유게시판 운영위의 처리기준 안내 [100] 글곰6387 15/07/21 6387 8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