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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5/07/26 14:08:49
Name 바위처럼
Subject [일반] 정말 열받는 일
한 아저씨가 있다.
마르고, 어깨가 약간 굽은, 하늘색 얇은 남방에 면바지를 입고 서류가방을 든,
머리가 약간 헤진
어디에나 있을법한 아저씨다.
이 아저씨는 내게 와서 물었다.
이 메모리 카드를 60만원에 샀노라고.
나는 숨이 콱 막혔다.
128기가짜리 SD카드를 60만원에 산 이 아저씨가..
차라리 어딘가의 판검사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도 아니면 국세청의 고위직이거나
못해도 어디 경찰서의 경감쯤 되는 이기를 바랬다.
하물며 자식중에 법조인이라도 있기를
그도 아니라면 차라리 친형제에 거대 깡패 두목이라도 있기를.
그러면 어디 골든타임 드라마의 한 장면이나
일본 소년 만화의 짜릿한 권선징악의 한 씬 처럼
자기에게 '법적으로 하자가 없는' 사기를 친 저 용팔이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보복을 해줄거라는 기대가 생길 테니까.
그러나 나는 아무말도 못했다.
단지 기계처럼
우리는 정품 메모리 카드를 판매하고
그 메이커는 저희가 취급하는 메이커가 아니며
동일한 사양의 샌디스크 메모리는 12만원 정도 판매하고 있습니다.
라고.
붉게 달아오르는 열을 귀 끝까지 느끼면서도
차마 그것이 가짜 상품이라고
사기당한거나 다름없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 손님은 무려 50만원을 손해보고도
어쩔 수 없다며 몇 번의 하소연과 몇 번의 가격 확인 후
잘 알아봤어야 하는데, 믿으라고 하더라고요. 허허 웃으며
이미 개봉을 해 버린 메모리카드를 몇 번이고 뒤집어 보고는
선선한 웃음과 아쉬움, 그 사이 한숨에 느껴지는
사회를 오래 버텨온 한 성인으로서의 화에 대한 지독한 인내로
돌아갔다.
사장님은 우리 거래처인데 사기당했다고 말 할수는 없는 거라며
어쩔 수 없다고 하셨지만
나는 마치 이 더러운 사기극에 공범이 된 것 같은 불쾌함이 목 끝까지 찐득거렸다.
여기에서 돈을 벌고 먹고 사는 모든 이들이 용팔이라 불려도
우리는 이미 모두 공범이나 다름없는 못된 사기꾼들이라고 생각해도
몇 십만원의 월급이 아쉬워 입은 돌처럼 무겁게 떨어지지 않는다.
자리에 앉아 분을 삭이지 못해 씩씩대며
소비자 기본법을 뒤져보고 신의성실의 원칙 같은걸 찾아 읽어도
사장님은 그저 앵무새마냥
그런 분쟁도 여러번 있었는데 다 저들이 이겼다며
안걸리게끔 유령 법인도 만들고 상표작업하고 자기들이 그냥 비싸게 가격 올려놓고는
자유시장거래 원칙에 맞춰서 판매하는거라고
그랬다.

나는 어쩐지 그 마른 아저씨의 걸음걸이가 자꾸 어른거려서
다음달 까지만 일하겠으니 사람을 구해달라고 말했다.
눈 앞에서 50만원을 잃고도 체념하려 애 쓰는 그 아저씨도
부정을 바라보면서도 입을 다물어야 하는 거래처의 사정도
그리고 이 모든것에 순응하지 않으면 책임 질 능력조차 없는 나도
방금 일어난 것들로부터 어떤 도움도 될 수 없는 엄숙한 법률의 권위도
이 모든 것들이 일상적으로 통용되는 이 화려한 쇼핑의 공간이 지독하게 혐오스러웠다.


사장님은
그건 천천히 알아보자며, 구해질 때 까지는 일해달라고 하고는
전화를 받는 척 자리를 피했다.


나는 또 한번 비겁자가 되었고
직원은 언제나처럼 재수없게 그게 다 사회죠 어쩌겠냐라며
으스대었다.
그날만큼 남의 얼굴을 주먹으로 뭉게고 싶었던 날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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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7/26 14:15
수정 아이콘
진짜 용팔이든 테팔이든 사라져야 할 암적 존재들입니다. 저도 중딩때 당한 적이 있어서 정말 치가 떨립니다.
불대가리
15/07/26 14:16
수정 아이콘
비겁자 아니십니다.
메시지를 전하셨어요 충분해요
마스터충달
15/07/26 14:21
수정 아이콘
제가 군대에 있을 때 들었던 말 중에 이런 게 있었죠. 병영문화 개선 같은 거 하고 싶으면 네가 분대장 달고 하라고, 세상을 바꾸고 싶으면 네가 세상을 바꿀 위치로 가라고. 당시에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변명쯤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전역하고 사회에 진출해보고자 몇번 부딪히고 꺾이다 보니 뭐라도 바꿀라면 내가 뭐라도 되어있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죠;;;

불의를 보아도 아무 손쓸 수 없다는 거,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너무 분해하지 마세요.
다만 나중에 책임질 수 있는 자리까지 가신다면 바위처럼님만은 모른척 하지 말고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주시면 됩니다.
지금 벌어진 일로 자신을 책망하진 마세요. 잊지만 않으시면 됩니다.
스위든
15/07/26 14:37
수정 아이콘
우리나라는 정말 부도덕이 사회에 만연해있는것같아요. 저런일부터 시작해서요.

타사이트에서 어떤 천재가 지각을 하게되어 칠판에 적혀있는 난제를 '숙제'로 알고 풀어버렸고 해당교수는 그학생이 박사과정을 졸업할때 예전에 풀었던 난제에 대해 정리만하여 제출하라했었던 일화를 봤었는데, 거기에 있던 베플이
한국이엿으면 교수가 바로 가로채갔을꺼라고...

물론 모두가 그렇진않겠지만 당연하게 저런 생각을 떠올리게되고 많은분들이 공감한다는거 자체가.. 사회에 부도덕함이 뿌리깊이내려가고있는것같아요
tannenbaum
15/07/26 14:38
수정 아이콘
저또한 비겁자였습니다. 아니 비겁자입니다.
직장생할하며 수많은 부당함을 직면했을 때 외면했습니다.
나와는 상관없다는 이유로 혹은 난 힘이 없으니까... 그리고 내게 불이익이 돌아올까봐....
그나마 경력이 10년 넘어가게 되던 두번째 직장에서는 직위가 있어 눈곱만큼이라도 힘이 생겼고 그리고 언제든지 때려쳐도 먹고 살 자신이 생기니 조금은 덜 외면하게 되었습니다.

자리가 사람 만든다하지요? 난 사람들은 그런 자리에 있지 않더라도 외면하지 않는 용기가 있겠으나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은 악의가 있어서 외면하는 게 아닐겁니다.
Otherwise
15/07/26 14:54
수정 아이콘
웃긴게 저런 상황에서 당한게 바보다 이런 생각이 너무 만연하죠. 진짜 헬조선에서는 당하는게 더 나쁜 것이 당연한건가 싶을 정도네요.
아지르
15/07/26 15:07
수정 아이콘
폰팔이들도 오히려 지인들한테 더 사기를 많이 쳐먹더라구요

통신사 일 하면서 모르는 대리점보다 지인한테 사기당한사람이 더많으니 원..
세종머앟괴꺼솟
15/07/26 15:13
수정 아이콘
헬조센에서는 속이는 사람이 유능한거고 속는 사람만 잘못한거라..
종이사진
15/07/26 15:13
수정 아이콘
다른 사람의 불행을 밟고 거머쥔 이득에 기분 좋아라하는 족속은...
차마 말을 다 쓰질 못하겠네요.
공허진
15/07/26 15:26
수정 아이콘
이 나라에서는 바가지 씌워서 돈을 벌어도 돈만 벌면 되는게 너무 심각 합니다.
대기업이나 용팔이나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매한 가지죠
(대기업이 사실 더 나쁜 놈들이죠, 정부 지원이나 판매량을 생각하면)
당당하게 자국민 등쳐먹기와 호갱 등쳐 먹기의 차이 정도

그나마 지금은 인터넷이 발달하고 정보공유가 활발해서 이정도이지 전에는 더 심했지요
최저가 검색 한번에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어요' 라는 개x리를 안들어도 되고
최신 휴대폰이 89만원? 태블릿이 50만원? 이베이, 아마존 검색해서 환율,관세,배송비만 해도 견적이 나오니까요

다만 최근에는 호갱을 만드는 규제를 당당하게 필요한거라고 사기치는 사례가 늘어나는게 걱정입니다.
15/07/26 16:05
수정 아이콘
i7 2600 출시때 삿는데 구매처한테 q9550을 10만원 받고 판 기억이 떠오르네요.
15/07/26 21:42
수정 아이콘
좋은 글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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