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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대 배치를 받고 이틀째 고참들의 서열, 계급, 이름을 423 운율로 관물대 상단을 보며 외우고 있던 나에게, 등에 당장 승천할 것만 같은 황금용이 그려진 깔깔이를 입은 엄병장이 와 건빵 10개를 내밀었었다. 야, 이거 1분에 10개 먹으면 내가 꽁꽁짜장 사줄께. 껌이지 싶었는데. 그때 입안이 참 뻑뻑했었다. 지금 눈으로 건빵을 먹은 기분이다. 안구야 힘내라. 감가상각비는 내가 쏠쏠하게 챙겨 줄께. 물론 내 돈은 아니야.
눈을 양손으로 두어번 비빈 뒤 CCTV를 보며 몇층인지 유추한다. 이열횡대로 나열된 층 버튼이 아랫줄인지 윗줄인지 아리까리 하다. 좌에서 몇번째인지도 확신이 안선다. 세번짼가, 네번째인가. 그래서 다시 CCTV를 감는다. 그리고 몇초인지 잰다. 108동 공동현관문 비밀번호를 물은 뒤 관리사무실을 박차고 나와 적토마를 얻은 여포처럼 100m를 22초로 초고속 주파하며 108동을 향해 달음박질 한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10초. X층에 엘리베이터가 섰다. 비정한 신은 나에게 또 선택을 강요한다. 좌우로 집이 있다. 이문 너머 일까. 저문 너머 일까. 어느문 뒤에서 그는 범죄의 흔적을 하이타이로 세탁하고 있을까. 사실 CCTV로 잰 시간이 정확히 맞다고 확신 할 수도 없다. 아랫층이나 윗층일수도 있고 그 아랫층이나 그 윗층일수도 있다. 다짜고짜 탐문 수사를 하기엔 범위도 넓고 자칫 잘못하다 권력의 정점에 선 단체인 부녀회에 거수자로 찍혀 남은 업무 기간동안 숙소 생활이 난처할 우려가 있다. 2주에 한번 수요일에 열리는 알뜰장터에 떡갈비를 사러 갈때 수제 어묵 트럭 튀김기 뒤에 삼삼오오 모여 나에 대해 수근대겠지.
한걸음만 더 나아가면 되건만.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작업화 밑창이 다 닳을 정도로 터덜거리며 관리사무소를 지나칠 적에 점심을 먹고 이를 쑤시던 관리소장이 나를 부른다.
= 가니 사람 있습디까?
무신 소리세요. 어딘지 확실히 모르는데. 비정한 신에게 선택을 강요당하는 이 애달픈 심정을 관리소장님은 아십니까.
- 아니요. 정확히 어딘지 모르겠심니더.
= 그래요? 108동으로 헐레벌떡 뛰어가기에 나는 아는 줄 알았지.
- 소장님, 장기수선충당금으로 CCTV 좀 개비 하시소. 눈 아파 죽겠심미더. 잘 비지도 않하고. 그라고요~
= XXXX홉니다.
투덜이 스머프처럼 한바탕 투덜 거리려는 찰나 관리소장님이 되고말고 아무거나 툭 던진다.
- 소장님 내 대서 죽겠심미더. 장난치지 마시소.
= XXXX호라니까요. 허 참.
- .....소장님이 우째 아시는데요.
= 108동에 *, *호 라인에 등록된 흰색 승용차가 그집 밖에 없으니까.
오, 주여 당신께 감사하리다. 관리소장, 내게 주심을. 귓가에 실로암이 재생된다. 머리 속에 포항 불꽃 축제에서 보았던 1등 팀인 중국의 폭죽이 터진다. 범죄 현장 CCTV, 지하 주차장 입구 CCTV, 동 입구 CCTV, 엘리베이터 CCTV, 해당 동에 등록된 차량. 이건 뭐 내가 갈 필요도 없이 본가에 키우는 봉칠이(5세, 개)가 증거가 담긴 장바구니를 물고 경찰에 출두해도 검거가 가능한 상황이다.
관리소장님께 담배 한보루로 나의 감사함을 표현했다. 건강을 해치는 물건에 소장님 건강하세요를 매직으로 적어 드렸다. 나의 스타급 센스덕에 주는 나도 받는 소장님도 헛웃음이 나온다. 책상에 담배를 두면 누가 자꾸 가져갑디다.하며 담배를 첫번째 서랍에 넣고 시건 장치를 한 뒤 관리소장님이 나에게 108동으로 나서자고 한다. 그런 관리소장님을 만류했다. 제가 다 알아서 하겠심니더. 고개를 갸웃거리는 관리소장님을 뒤로 하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며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관리사무실을 나섰다.
난 니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잡지 않겠어. 잡히고 나서 휴~ 어쩔수 없지 하는 자포자기하는 행복을 주지 않겠어. 사냥꾼에게 쫓기는 불안감을 안겨 주겠어. 내가 받은 심적 고통을 너도 받아 보아야 해. 혼자서 뇌내 막장드라마의 한장면을 연출하며 근처 피시방으로 갔다. 모든 CCTV를 캡쳐했다. 얼굴은 검은 깍두기로 가렸다. 그리고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붙일 전단지를 작성 했다. 아무말도 적지 않았다. 그저 사진만 나열하였다. 발로 차를 까는 사진, 지하 주차장을 나가는 사진. 오늘 사진은 이 두개로 충분하다. 내일은 공동 현관 사진이 추가 될 것이고. 모레는 엘리베이터 사진이 추가 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날 전화번호를 적어 줄 것이다. 크기는 18포인트와 28포인트중 어떤게 좋을까.
상기와 같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마지막에 마음이 약해졌다. 그냥 사진을 나열하고 전화번호를 적었다. 28포인트로.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그냥 빨리 자수하라고.
그렇게 피시방에서 오랜만에 간접 흡연 후 관리사무실로 와서 전단지 좀 붙여도 되겠냐고 관리실에 물었다. 담배가 마음에 들었는지 관리소장님은 마음대로 하라고 한다. 1동에서 10동까지 20대의 엘리베이터 안에 전단지를 붙였다. 마지막에 마음이 약해져 108동에만 붙이면 108동 주민들이 여기에만 있구나 하고 쉽게 알아볼까 걱정이었다. 그렇게 소소한 작업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남은 연차 시간 동안 잠을 잤다. 지리산 잡꿀처럼 잠이 달았다.
일어나서 만나면 어찌해야 할지 고민을 했다. 매생이 채취를 해야 하나, 깡냉이 탈곡을 해야 하나. 아니면 둘을 동시에 해야하나. 얼굴 마주치지 말고 경찰에 가르쳐줄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건실한 영농후계자와 강직한 준법시민의 기로에서 고민하던 중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허허 참, 나의 과학 수사가 빛을 발하는구나하며 전화를 받았다. 목소리 톤은 친구의 장동거이가 좋겠어.
- 여보세요.
= 예, 여보세요? XXX씨 되십니까.
범죄자가 무슨 정보가 이리 빨러.
- 예, 그란데요. 댁이 그랬심미까.
= 무슨 말씀이시죠? 여기 XX시 경찰서 누구누구형삽니다.
- 아, 그렇슴니까.
금방 내시톤으로 돌아왔다.
= 예, 이거 차량 손괴 사건 접수해주셨죠?
- 예. 했지요.
= 그..저기..이런 건은 보통 증거가 확실하면 범인을 잡기가 좀 수월한데요.. 일단..그..여보세요?
- 듣고 있습니더. 말씀 하이소.
= 그...증거가..좀 없네요..
- CCTV 있잖습니까.
= CCTV가 있어요?
발랄하게 반문하는 형사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순찰차 타고 오셨던 경찰관님들이 많이 바쁘셨나 보다. 아니면 usb가 없나보다. 그리고 그거 살 돈도 없었나 보다. 아니면 깜빡하셨겠지. 아니라면 사건 접수서만 제출 했을리가 없지. 암. 저런 이유들로 CCTV 자료 없이 시 경찰서에 서류를 제출 했나 보다.
= 아, 그거 있으면 좀 보내주세요.
- 아직 관리사무실에 CCTV 안 지아졌습니더.
= 가지고 계신 건 없나요.
- 있기는 한데요, 그라면 현장 한번 안나와 봅니까.
= 아..그..예. 한번 가볼께요. 그리고 연락처 문자 보내드릴테니까 나중에라도 보내고 싶으시면 전화 주시고 보내주셔도 됩니다.
문자로 휴대폰, 내선, 메일 주소를 받으며 마음 먹었다. 이유 불문하고 바쁘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민생 치안을 위해 나보다 더 급한 현안들이 산재해 있다고 믿기로 했다. 지금까지 알아서 해결했으니 마무리까지 한번 해보자라는 마음이 들었다. 그치가 자기가 아니라고 딱 잡아 떼거나 얼토당토 않는 변명을 대거나 기타 여러가지 이유로 막힐 때, 그때 공권력의 손을 빌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잠을 더 잘까 하다가 빨래를 하기로 했다. 빨래를 널고 있으면 박기사가 오겠지. 그럼 부어치킨이나 먹으러 가야겠다.
박기사가 늦다. 전화 해보니 오늘은 숙소로 안 오고 본가로 간다고 한다. 내 부어치킨은. 하고 물으니 XX점에 맡겨놨으니 내돈 내고 찾아와서 먹으면 된다고 한다. 경기도 애들은 정이 음써. 지삐 몰라. 하며 박기사가 내돈 내고 사먹으라는 부어치킨을 사러 나섰다.
확실히 치느님을 영접하면 은혜로운 일이 생기고 일이 술술 풀린다. 입주자 대표분에게 전화가 왔다. 관리소장님께 얘기 듣고 본인이 모든 것을 정리해 두었으니 관리사무실로 내려오라고. 그참 관리소장님 담배 반보루 반납 시키야겠네.
닭뼈를 종량제 봉투에 넣고, 종량제 봉투와 재활용 쓰레기를 들고 내려와 지정 장소에 버린 뒤 관리사무실로 갔다. 거기에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없는 연차 하루 까먹게 한, 오늘만큼은 아파트 관리비 항목 중 관리 대행 수수료가 아깝지않다 느껴지게 만들어 준.
그사람이 거기 있었다.
※ 저는 거짓말을 하고 말을 번복하는 나쁜 사람입니다. 저에게 먹을 것을 던지셔도 겸허히 맞겠습니다. 우리집 질병관리본부장께서 말 못하는 열감기 환자에게 맥시부펜 투여를 명하셨습니다. 상황이 급박함을 양지하시어 넓은 아량으로 양해하여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어쩌면 양 조절에 실패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열심히는 했습니다. 열심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