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6/08/16 17:18:50
Name 감모여재
Subject [일반] [수필] 재판이 끝나고
수원지방법원 제3별관 205호 법정에서 오후 2시 20분 재판을 마치고, 소화초등학교 앞 정류장으로 가 5422번 버스를 기다린다. 귀에 꽂은 한 쪽 패킹이 빠진 낡은 이어폰에선 아재감성이 짙게 묻어나는 노래가 흘러 나온다. 보통 날이네요 어느새.. 뭐 이런 노래들 말이다. - 사무실에서 재판 시작 1시간 30분 전에 나와 강남역으로 가서 5422번 버스를 타고 소화초등학교에서 내린다. 재판을 한다. 다시 5422번 버스를 타고 강남역으로 와서 지하철을 혹은 740번 버스를 타고 사무실로 간다. -  신분당선이 개통되기 전까지는 나의 수원 재판루틴은 항상 일정했다. 한 달에 적으면 한 번, 많으면 예닐곱번씩. 그렇게 5422번 버스는 내 수원재판의 영원한 동반자가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신분당선 광교연장노선이 개통되면서 내 루틴에 조금씩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신분당선 연장선이 개통되었는데 한 번은 타봐야지.’ 라는 야매 철덕의 호기심에서 시작된 자그마한 일탈에 불과했다. 그런데 은근 신분당선을 이용해 보니 적잖이 편하더라는 것이다. 5422번 버스는 수원에 갈 때야 좋지만 올 때는 교보타워사거리를 거쳐 다시 강남역까지 오느라 시간이 한참 걸린다. 그 뿐이 아니다. 강남역 버스 정류장에서 다시 740번 버스정류장이나 강남역까지 걸어가는 것도 여름에는 엄청난 고역이다. 강남역의 그 인파를 생각해보라!

그에 비해 신분당선을 이용하면 광교중앙역에서 강남역까지 30분도 걸리지 않을 뿐 아니라, 강남역에서 2호선으로 환승하는데 드는 노력은 5422번 버스를 타고 가다가 다시 지하철이나 740번을 타기 위해 들이는 노력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편하고, 시원하고. 그렇게 언젠가부터 – 아마도 날이 점점 더워지던 올 5월쯤부터 – 나는 수원을 갈 때는 5422번을 타고, 수원에서 돌아올 때는 신분당선을 타는 이중생활을 만끽하고 있었다.

오늘도 그럴 생각이었다. 5422번 버스를 타고 광교중앙 환승센터에 내려서 다시 신분당선을 탈 생각이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버스에 타자마자 의뢰인에게 급한 전화가 왔고, 통화에 집중하다 보니 광교중앙역도 지나쳐버리고 말았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간만에 느긋하게 드라이브나 즐겨볼까. 어제는 잠도 충분히 잤다. 평소 같으면 버스 안에서 늘 부족한 수면시간을 보충하지만 오늘은 창밖을 감상하면서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겠지.

버스는 열심히 달린다.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신갈인터체인지를 놀이기구 타듯 삥 한 바퀴 돌아준다. ‘아주 스릴 만점이야.’ 생각하는 순간, 창밖으로 나지막한 아파트가 몇 동인가 눈에 들어온다.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아파트. 그래, 난 저 아파트를 알고 있다. 그것도 아주 잘.

10년도 전에 나는 너를 매일같이 저 나지막한 아파트까지 데려다 주고는 했다. 사실 데려다 준다는 표현은 맞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늘 너의 차를 타고 저 나지막한 아파트까지 갔던 거니까. 그래도 난 내가 널 데려다줬다고 생각한다. 매일 새벽까지 힘든 작업을 마치고 돌아가는 네가 혹시나 졸지는 않을까, 집 근처에서 위험한 일이라도 있지는 않을까 하고 너의 옆자리에 앉아 여기까지 왔던 거니까. 너의 아파트에 도착하는 시간은 늘 새벽 3시 아니면 4시. 너를 집에 들여보내고 나서 나는 첫 차가 올 때 까지 하염없이 서울방향으로 걸어가곤 했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마냥 걸었다. 너와 함께여서 설레었던 시간들을 곱씹어 마음으로 소화시키며.

어느 날인가는 조금 일찍 널 데려다주기도 했다. 밤 12시쯤 널 데려다주고 서울 가는 버스를 탄다. 양재에서 내려보면 지하철은 이미 끊겨있었다. 그 때도 난 터벅터벅 마냥 걸었다. 양재에서 신림까지,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너는 알고 있었을까. 그렇게 널 데려다주고 마냥 정처없이 거닐던 시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는 걸.

그래, 그 때 나는 너를 너무나도 사랑했다. 그런데 널 사랑한다는 걸 깨닫기에는 내 마음에 빈자리가 너무 없었다. 너와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 너는 눈부신 햇살이 보드랍게 천변의 버드나무들을 어루만지는 늦가을 풍경을 보고 말했다. ‘언젠가 이 풍경도 우리에게 잊혀지는 걸까.’ 아마도 아닐 거야. 너의 나지막한 아파트를 바라보며 혼자 되뇐다.

맞다. 내가 5422번 버스를 타는 건 너를 데려다 주던 그 아파트 때문이었다. 아마도 이제는 너를 사랑하지 않겠지만 아무렴 어떠한가. 한 달에 적으면 한 번, 많으면 예닐곱 번의 추억팔이가 지친 내 삶을 위로해준다면 - 내가 이제는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소한 진실 따위는 잠시 잊어도 되는 문제였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는 것보다도 그 때의 나는 너를 훨씬 더 사랑했었다는 것도.

아마 한 동안은 다시 5422번 버스를 타고 서울에 오게 될 것 같다. 아마도 한 동안은.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16/08/16 17:33
수정 아이콘
저희동네 이야기가 나오니 반갑네요..

신분당선 냉방이 아주 시원하긴 하지만 법원에서 광교중앙역까진 거리가 쪼금 있는편이죠 버스타면 코앞에서 내려주는데..
감모여재
16/08/16 17:36
수정 아이콘
네. 그래서 보통 법원에서 광교중앙까지 버스타고 가서 거기서 환승합니다. 흐흐..
Knights of Pen and Paper
16/08/16 17:45
수정 아이콘
익숙한 번호와 익숙한 루트군요
저는 5121입니다. 크크

가끔 와이프한테 야근한다고 뻥치고 강남역 펀샵 오프매장 갈때 5422를 타곤 합니다.
감모여재
16/08/16 20:27
수정 아이콘
5121타시는거 보면 강북쪽이시군요 흐흐
Knights of Pen and Paper
16/08/16 20:52
수정 아이콘
넵 흐흐
저는 주로 새벽과 밤시간대(?) 에 다니는지라 스쳐 지나가진 못했겠네요 흐흐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67460 [일반] 경기침체로 난항을 겪고 있는 서울시 경전철 사업 [19] 군디츠마라6064 16/09/07 6064 0
67414 [일반] 어느 역무원의 하루 ㅡ 땜빵맨 [15] 부끄러운줄알아야지4935 16/09/04 4935 8
67287 [일반] 쳐다봐도 되는 자유? [147] 성동구15104 16/08/28 15104 4
67248 [일반] 사소하지만 제게는 신기했던 일 경험담입니다(괴담 아니에요) [14] 귀여운호랑이5116 16/08/26 5116 1
67232 [일반] [프로듀스101] 주요 탈락자 근황 정리 [19] pioren6181 16/08/26 6181 5
67221 [일반] 인디음악 소개 [18] *alchemist*3809 16/08/25 3809 3
67122 [일반] JTBC의 급부상, 절대권좌에서 내려온 KBS, 언론계 지형변화 [99] 어강됴리12789 16/08/20 12789 4
67060 [일반] 상해에서 택시기사 아저씨한테 한 대 맞을뻔한 이야기 [54] 호랑이기운이쑥쑥11062 16/08/18 11062 3
67020 [일반] [수필] 재판이 끝나고 [5] 감모여재5843 16/08/16 5843 9
67012 [일반] 서울찍고 지산,전주,인천~ 올 한해 대한민국 락페 참가 후기입니다 (스샷다수) [17] 요한9813 16/08/16 9813 18
67009 [일반] 방탈출 카페 이야기 [70] 노틸러스21002 16/08/15 21002 6
66994 [일반] 특과반 이야기 [34] 동전산거4913 16/08/15 4913 0
66961 [일반] 알렉스 로드리게스의 첫번째 장례식 [40] becker11833 16/08/13 11833 22
66869 [일반] 수어사이드 스쿼드에서 짤린 장면 (스포) [35] 에버그린18164 16/08/08 18164 3
66843 [일반] 아버지, 제가 아니라 쟤가 잘못했다구요. [13] 토다기7648 16/08/07 7648 9
66840 [일반] 소소한 바르셀로나 여행 팁(스압주의) [18] Jedi Woon9070 16/08/07 9070 5
66822 [일반] 혹사당한 주인에게 혹사당한 스마트폰이 정신줄을 놓은 이야기 [4] The xian6792 16/08/06 6792 5
66785 [일반] 우이~신설 경전철 공사 중단... 민자사업자 "적자보전" vs 서울시 "계약대로" [10] 군디츠마라6314 16/08/04 6314 0
66782 [일반] SM 가수의 눈물겨운 일본성공기 [30] 카랑카13200 16/08/04 13200 64
66726 [일반] 이 곳이 바로 종교 광신주의자들의 소굴입니까? (수정) [277] 세인트13444 16/08/02 13444 24
66690 [일반] 게을러서 살찐 뚱뚱한 여자 [55] 착한아이17802 16/07/31 17802 12
66679 [일반] 몇가지 아이돌 덕질 이야기 [7] 근성으로팍팍6427 16/07/30 6427 2
66669 [일반] 아는 사람 얘기 [2] 루윈3371 16/07/30 3371 2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