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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8/11/30 10:50:31
Name RushHour
Subject [일반] 가족의 재발견 – 아버지는 오늘도 성장하신다. (수정됨)
"아빠, 아빤 행복해?"

"…아니.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단다."



아버지는 시골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어릴 땐 살림에 보탬이 되기 위해 다른 집에 가서 막일거리를 해결하고 먹을 걸 받아 오셨다고 합니다. 종종 집에서 감자와 고구마를 삶아 먹을 때면, 아버지는 겨울에 산에 올라가 땔감을 구하기 위해 잔가지를 꺾다가 먹던 감자가 그렇게 맛있었다는 이야기를 하시며 감자를 참 맛있게 드셨습니다.


아버지의 평생의 꿈은 배불리 먹는 것이었습니다. 당신과 당신의 가족 모두가 배불리 먹게 하려고 아버지는 모든 걸 바치셨습니다. 당신이 원했던 대학에서의 교육은 받지 못했지만, 간신히 꼴등으로 입학한 대구 모 고등학교에서 나중엔 수석을 차지할 만큼 지독한 노력파인 아버지는 당신의 성실함과 타고난 숫자 감각으로 은행에 취직하셨습니다. 은행에서 얼마간 돈을 모으고 나온 아버지는 사업을 시작하셨고, 집안 사정으로 고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했던 두 남동생과 함께 밤낮없이 사업확장에 몰두하셨습니다.


80~90년 제조업 붐과 함께 사업은 번창했고, 우리 가족은 아버지의 바람대로 배불리 먹게 되었습니다. 다들 이젠 너무 배불리 먹어 통통하게 살이 올라 걱정이지만, 어머니 아버지는 포기하신 것 같고 누나는 시집가기 전에 뺄 거라고 믿습니다. 아무튼, 아버지는 그렇게 당신의 꿈을 이루셨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행복하지 않다고 하십니다.


고등학교 때, 아버지는 목소리가 참 좋으셨다고 합니다. 어머니도 종종 말씀하시는 걸 보면 단순한 자기 자랑은 아님이 분명합니다. 타고난 자질 덕에 고등학교 음악 선생님들은 아버지께 성악가의 길을 권하셨고, 아버지 또한 진지하게 그 길에 대한 열망이 있으셨다고 합니다. 칠순이 내일모레인 지금도 가족끼리 노래방에 가면 나훈아의 노래를 부르며 마이크를 놓지 않으시는데 몸에 정기가 넘쳐났던 유년기 땐 오죽하셨을까 싶습니다. 그 정기를 해소하기 위해 사업체를 운영하는 바쁜 일정에도 교회에서 성가대에 서셨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그런 모습이 못마땅했는지, 아버지가 교회 다녀오시면 “그놈의 집사, 권사들이 좋다고 하니까 괜히 헬렐레 해가 지고. 그 꼴 보기 싫어서 교회 안 간다!” 라고 지금도 농을 던지시곤 합니다. 하지만 음악은 결국 수단일 뿐입니다. 아버지가 성악을 하셨다고 하더라도, 행복하다고 대답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얼마 전 가족끼리 외식을 마치고 집에 오는 길에 아버지에게 은퇴하시면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습니다. 내심 이번 겨울 아버지께 선물해드린 목도리를 두르고 “신사” 처럼 아버지가 종종 이야기하시던 신학 대학원에 수업을 들으러 나간다는 이야기를 하시길 기대했는데, 아버지의 대답은 전혀 달랐습니다. “내 내면을 들여다보고 싶어.” 늦둥이 막내아들의 공부가 늦어지는 바람에 은퇴를 늦추신 아버지는 이미 배불리 먹고 먹이겠다는 평생의 꿈을 한 번 이루신 분입니다. 그렇기에 당신의 친구들이 집에서 여생을 즐기는 지금 매일 현장으로 나가는 자신의 처지에 그렇게 만족하시고 계시진 않습니다. 무엇보다 매사에 권면과 걱정으로 당신의 삶을 지탱하시던 당신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작고하신 터라, 그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을 위한 삶을 누리고 싶은 마음은 더 클 거라 짐작합니다.



당신에겐 가족의 안위와 자식의 성장과 성공이 자신의 행복보다 더 중요한 때도 있으셨습니다. 그리고 분명 지금도 그러한 마음은 아버지가 매일 흘리는 땀 방울 방울마다 진하게 맺혀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하지만 삶은 모두에게 공평합니다. 제겐 성인과도 같은 아버지도 인간의 감정과 욕구에서 벗어날 수 없고, 그렇기에 자기희생으로 가득했던 당신의 마음은 앞으로 더욱더 자신의 행복을 향한 몸부림을 계속해 나갈 것입니다.



전 이런 아버지를 너무나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아버지는 완벽한 인간은 아니셨습니다. 조금만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셨으면 할 때도 참 많았습니다. 하지만 어제의 아버지는 오늘의 아버지가 아닙니다. 오늘의 아버지는 끊임없는 기도를 통한 자아 성찰과 내려놓음을 통해 한 걸음 더 ‘하늘’에 가까운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아버지 당신이 낮아질수록 아버지는 내 마음속에서 높아질 것입니다. 그러니 아버지는 마음놓고 앞으로 더 행복하셨으면 합니다. 더 이기적으로 당신의 행복을 추구하셨으면 합니다. 당신의 희생으로 인해 배불리 먹으며 자란 아들은 늦은 발걸음이나마 멈추지 않고 옮기며 당신의 유산을 세상의 유산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오늘은 추석입니다. 아버지는 누나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당신의 아버지 어머니의 산소에 벌초하기 위해 반나절 동안 귀향길에 나서십니다. 명절을 함께 보내지 못하는 아들을 걱정하는 아버지는 몇 시간 후에 제게 전화를 걸어 이번에도 함께 하지 못해 너무나 아쉽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어릴 땐 그런 아버지의 걱정이 참견 같아 참 싫었는데, 손주 재롱 보며 여생을 즐기셔야 할 나이에도 현장에서 뛰시는 아버지를 생각하면 이젠 감사하고 죄송할 뿐입니다. 언제부터 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가 통화를 마칠 때 종종 ‘사랑한다 아들아’ 라고 말씀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감정표현이 참 서툴렀던 아버지를 생각하면 이건 참 놀라운 일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 고백에 ‘아빠, 나도요’ 라고 대답하기 시작한 건 정말 더 얼마 되지 않은 일입니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가족에게 감정표현이 참 서툴렀던 절 생각하면 이것 또한 참 놀라운 일입니다. 아버지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저 또한 성장합니다. 그리고 이런 서로 간의 마음이 진실함을 알고 있기에 한가위는 오늘도 풍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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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글은 아니고 지인의 글입니다. 몇 번째 보는 글이지만 볼 때마다 마음 한켠이 너무나도 따뜻해지기에 나누고 싶었습니다.

제 지인은 대부분의 유년시절과 20대를 험난하게 보냈습니다. 집안이 유복해서 먹을 것 걱정이 딱히 없었다는 것 빼고는, 정말 많은 문제가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본인을 거의 그로기상태까지 몰아넣었던 건강문제가 항상 이 형을 괴롭혔었죠. 불의의 사고로 이러한 건강문제가 발생했고, (현재는 매우 나아져서 일상생활이 가능하지만) 평생동안 일반적인 생활조차 불가능해서 평생을 재활이나 하면서 살아야 싶을 정도로 걱정했던 형이였음에도, 항상 상대편이 되어주고 상대의 말을 귀담아들으며 따뜻하면서도 희망적이고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곤 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저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이기도 하고요. 아니, 제 인생을 변화시키고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내서 함께해준 사람이니까요.
우울증으로 2년간 고생하면서 사람들과 대화하는 법도 모르고 사랑하고 사랑받는 법도 모를때, 이 형은 제게 접근하셔서 제 내면을 들여다보고 어루만져주면서 자유롭게 해줬습니다. 모 영화리뷰에서 봤었는데, '스스로를 일으키려는 마음의 의지는 아이러니하게도 타인의 체온을 연료로 삼는다'더라고요. 제가 일어서지도 못할때 저를 항상 믿어주고, 제 낮은 모습이건 좋은 모습이건 끊임없이 변화없이 존중해주고 사랑해줬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저 역시 이런 모습을 온전히 닮으려고 항상 노력중이고요.

정말 크나큰 행운이에요. 많은 면에서 제 아버지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저를 아껴주고 변화시켜준 사람이에요. 
불의의 사고조차도, '지나온 순간에서 단 한 순간도 버리고 싶은 순간이 없다'고, '인생에서 뜻대로 되는 법은 없고 shits happen. 나는 참 고집세고 오만한 사람이였는데, 사고를 겪으면서 겸손해질 수 있었다, 감사할 따름이다'라며 온전히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에는 항상 깊은 감명을 받으며 몰래 북받치기도 하고요.


뜬금없이 글을 끝내지만, 다들 따뜻한 마음으로 따뜻한 겨울 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 Camomile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18-12-01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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쭌쭌아빠
18/11/30 11:14
수정 아이콘
글쓴이님과 지인 분, 그리고 아버님이 부럽습니다.
조용히 추천 누르고 갑니다.
가브라멜렉
18/11/30 11:19
수정 아이콘
추천 드리고 갑니다.
고분자
18/11/30 13:45
수정 아이콘
저도 지인분의 아버님을 존경합니다
요즘 픽션이 많아서 일단 맨 아래줄부터 확인했는데 감동이네요.
잘 읽고 갑니다 ㅜ ㅜ
이유진
18/11/30 14:01
수정 아이콘
왠지 마음에 용기를 주는 글인것 같아요. 세상에는 멋진 분들이 참 많습니다.
백곰사마
18/11/30 14:44
수정 아이콘
며칠전 아버지에게 무심히 언짢게 대했던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되네요.
할러퀸
18/11/30 14:45
수정 아이콘
저도 누군가에게 저렇게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싶네요. 근데 저 자신에게조차 저런말 못해준다는 게 함정 ㅠㅠ
18/11/30 14:47
수정 아이콘
갑자기 니체의 명언이 떠오르네요.
모든 사람이 서서히 자살을 하며 바로 그것을 삶이라고 부르는 곳, 그곳을 나는 국가라고 부른다.
18/12/01 14:34
수정 아이콘
저런 아버지가 되려고 애씁니다만..잘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18/12/06 01:50
수정 아이콘
이밤에 내 삶의 반성을 하게 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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