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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 03:41
저도 20살까지는 문학 거들떠도 안보고 역사책만 읽다가, 대학교 가서 문학 좋아하는 여자친구를 사귀면서 조금씩 읽기 시작했는데요.
안읽던 스타일의 글을 읽으려니... 여기서 무슨 교훈이나 메시지를 얻어내야 하는건지 감도 안잡히고, 큼직한 테마가 있는건 알겠는데 그걸 파악하려고 이 쓸데없어 보이는 분량의 글을 다 읽어야 하는건가 싶어서 읽다 덮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다가 이거다 싶게 마음에 꽂힌 작품이 도스토예프스키의 Notes from Underground 였는데요. 주인공의 그 암울하고 찌질한 내면에 대한 고백들이 하나하나 절절하게 느껴지더라구요. 되돌아보니 고등학교때 제일 재밌게 읽었던 소설이 죄와 벌이었네요. 그 이후에는 헤밍웨이를 읽었습니다. The sun also rises, A farewell to arms... 담담하고 투박하면서도 솔직한 문체가 마음에 들더군요. 제 삶에 평소에 잘 나타나지 않는, 약간은 과격한 남성성을 대리 경험하는 느낌도 들어 좋았구요. 요즘은 스타인벡을 읽고 있습니다. Of mice and men, Cannery row... 캘리포니아 살았던 경험을 비추어 읽어보며 미국적인 고독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던 것 같아요. 이런 제 경험에 비추어 볼때, 제가 문학작품을 읽는 이유는 말씀하신 것처럼 간접체험을 위해, 그리고 문장의 아름다움을 즐기기 위해 인것 같습니다. 그런데 국어시간에 배우는 문학의 역할같은 이런 이유 외에 더 원초적인 이유가 있는데, 사람은 결국 언어를 사용하는 존재이고, 언어는 이성적 판단을 설명하기 위해 존재함과 동시에 감정을 설명하기 위한 역할도 있다는 것입니다. 정보, 논리, 이성을 위한 글만 읽다보니까 감정을 설명하는 말/글에 대한 능력이 현저히 부족해진 제 자신을 발견했고, 제 감정을 묘사할 수 있도록 문학을 읽은것이 제1목표였습니다. 이른바 '공감능력'이 조금은 자라난 것을 느낍니다. 그런데 아직도 시는 잘 못읽겠어요... 무슨 말을 하는지 파악도 공감도 안돼요 크크크 갈 길이 머네요...
20/06/04 15:44
진솔한 답변 감사합니다. 저도 '감정의 묘사를 보며 공감능력을 기르기'가 잘 되었으면 좋겠네요. 시는 자의적해석이 너무 심할 것 같아서.. 저도 평생 접할 지 모르겠습니다.
20/06/04 03:49
제 가장 짙은 문학 경험은 전쟁과 평화였습니다. 한 달 정도의 여행, 최고로 웅장하고 꽉찬 여행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간접체험 맞고, 작가는 길잡이겠죠. 여행이 별로라면 소설도 즐기지 못할 수 있습니다. 여행의 대미 중 하나는 사람의 표정을 경험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소설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중간적 성격이 있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추천합니다.
20/06/04 07:33
문학 작품 별로 안 좋아하시는 분이 프루스트를 읽는게 처음부터 미스였네요.
게임에 별로 재미 못 느끼는 사람이 다크소울부터 시작하면 갑자기 재미가 생길리 만무하겠죠.
20/06/04 08:02
문학은 쓰는 사람도 재미있어서 쓰는 거고, 읽는 사람도 재미있어서 읽는 것이니까 굳이 '무언가를 얻기 위해' 문학을 읽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영화를 볼 때에도 무언가 깨달음을 얻기를 바라면서 영화관에 가지는 않잖아요? 취향에 맞는 만화나 영화를 찾아가듯이 문학도 끌리는 것부터 시작하시면 될 듯합니다.
가령 저는 카뮈의 <이방인>을 참 좋아하는데요, 그것은 주인공인 뫼르소가 제가 살지 않는(못하는) 삶을 대신 살아준다는 점 때문입니다. 뫼르소는 굉장히 무던한 인물로, 그 무던함 때문에 트러블을 겪곤 하는데 그것은 그가 일상적인 관습을 끝까지 거부하고 자신의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살아서입니다. 저도 항상 내가 살고픈 대로, 거짓 없이 살고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현실에선 여러 문제 때문에 그러기가 어려운데 뫼르소는 인간이 택할 수 있는 여러 삶의 방법 중 어느 한 극단을 살아간 인물이라는 점이 매력적이에요. 그런 새로운 삶의 방법, 인간상을 찾아가는 것이 문학을 읽는 즐거움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 삶의 모습이 누군가에게는 삶의 지표(소위 '인생의 진리'라고 하는 것)가 될 수도 있겠지요. 물론 문학인 만큼, 말씀해주신대로 언어적인 요소도 중요합니다. 다만 그것은 단순히 있는 척, 예쁜 척하는 그럴싸한 말들을 나열한 것과는 좀 다른데요, 저는 종종 살면서 언젠가 느낀 적이 있지만 말로는 정리할 수 없었던 그런 느낌을 소설에서 어떤 말로 표현해줄 때 쾌감을 느끼곤 하거든요. 무정형의 감각을 어떤 말로 완전히 '포착'해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지만, 어떤 감각들은 말로 정리하지 않으면 어느샌가 흘러가버리니까요. 이따금씩 소설의 표현들이 강하게 남아서 그런 지나간 감각들을 되짚어보게 해주는데 그것이 또다른 문학의 매력이 아닌가 합니다.
20/06/04 15:50
제가 궁금해했던 핵심사항 두가지에 대해 이토록 좋은 설명을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보통의 경우, 아무리 질문을 구체적으로 하려고 해도 답변자의 답변이 항상 어느정도 빗나가곤 하는데, 제가 무엇을 궁금해한지 정확히 꿰뚫어주셨네요.
20/06/04 08:05
밀란 쿤데라의 소설의 기술이라는 에세이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불멸 이라는 소설에서 작가가 어떻게 느껴야할것인지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주 설명해줍니다. 문학이 뭘까 빠른 해답을 찾고 싶으시다면 밀란 쿤데라의 저서들을 추천합니다.
20/06/04 08:24
기본적으로는 재미있으니 읽는 건데 만화나 영화랑은 좀 결이 다른 재미인 것 같기는 합니다. 한번 재미를 느끼고 그 경험 때문에 계속 읽게 되네요 요즘은 한참 안읽었지만...
어떤 중대한 진실이랄것까지는 없어도 두고두고 생각나는 구절들이 있기는 합니다. 때로는 같은 책을 다시 읽어도 새롭게 다가오기도 하고요. 꼭 고전에서만 그런 것도 아니고요. 예컨대 반지의 제왕에서 쉴롭과 대치하는 부분에서 프로도와 샘의 심리묘사를 보면 영화와는 다른 감동이 있죠. 그리고 다른 이유로는 저 개인적인 지적인 허영(?)을 채워줍니다. 크 책 읽는 나의 모습에 취.한.다. 뭐 이런 느낌...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정체모를 뿌듯함이죠. 뭔가 문학으로 정신이 풍요로워질것 같은 근거없는 기대도 있고요.
20/06/04 08:34
'나는 개인이오'
문학을 읽는 이유는 보편적인 인간이 아니라 특정한 일 개인의 세계관을 이해하기 위해서이지요. 물론.. 일 개인의 스토리란 건 보편적이고 광범위한 서사들에 비해 하잘것없는 부수적이고 말초적이고 피상적이고 지엽적인 이야기로 느껴지기 쉽습니다. 글쓴분도 그러니까 철학이나 과학이나 역사나 경제학이나 정치학이나 법학이면 몰라도 왜 문학을 읽어야 하는지 의문이신 거고요. 그까짓 거 인간이 대대손손 축적해 온 지고의 보편 지식에 비하면 얄팍한 거 아닌가 하고. 헌데 우리가 알아둬야 할 점은 그렇게 부수적이고 말초적이고 피상적이고 지엽적인 게 바로 우리 자신이란 거죠. 그 하잘것없음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나만의 자소서고요. 왜냐하면 보편적인 지식들은 전체적인 구조를 설명해줄 수는 있지만 정확하게 내 사유와 정념과 감각, 궁극적으로는 내 인생이라는 유일한 나만의 절대값을 설명해주지 못하거든요. 아무리 그럴 듯한 과학이나 철학이나 역사의 이론도 나를 위해 준비된 건 아닙니다. 아무리 미시적인 진실을 지향하는 학적 통찰이라고 해도 적어도 백 명, 천 명, 만 명 단위의 집단적인 인간을 위한 것이지 바로 나 자신을 해명하기 위한 것은 아니에요. 결국 나는 영영 세계로부터 타인들로부터 무시받고 외면받을 운명인 거지요. 그에 대해 할 수 있는 유일한 반항이 우리 자신의 이 하잘것없음을 예술의 형태로 소명하는 거고요. 내 인생은 칸트 헤겔 루소 키에르케고르 비트겐슈타인 콰인 니체 등등을 경유하는 방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지만, 결국 내 이야기를 내가 나만의 방식으로 표현해야만 그 하잘것없음을 충분히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죠. 이것이 문학의 '창작'입니다. 그리고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런 하잘것없음 속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몸부림 치고 있다는 걸 이해하게 되면 그 순간 우리는 경멸이 아니라 공감과 연민과 유대감을 느끼게 되고, 이것이 문학의 '감상'이지요. 이건 이상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실관계를 놓고 보더라도, 보편적인 이야기는 공감을 얻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감정이입을 하게 되는 건 지극히 특수한 이야기죠. 않이 이게 무슨 소리냐? 보편적이라는 것은 널리 공감된다는 뜻이고 특수하다는 것은 일부에게나 공감된다는 뜻 않이냐? 네.. 그런 측면도 있죠. 하지만 그건 공감의 '넓이'의 측면에서 그렇습니다. 공감의 '깊이'의 측면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나지요. 지극히 보편적인 이야기란 이를테면 이런 겁니다. 'X가 돈을 도둑 맞았다' 이 사건은 거의 명제에 가까운 진술이죠. 어떤 구체적이고 특수한 요소도 갖추고 있지 않은, 그야말로 흔한 인간지사에서 가장 공통적인 양상만 남긴 겁니다. 그야말로 수학적이고 철학적이고 법학적인 명제이지요. 절도란 워낙 일상사다 보니 우리는 일단 얕은 수준에서 저 사건을 이해하고 역지사지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깊은 수준의 감정이입이 일어나진 않죠. 보편적인 만큼 알맹이와 내용이 없거든요. '뭐야,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거야?'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죠. 우리가 위의 이야기에 더 몰입하기 위해서는 X는 누구인지,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고향은 어디고 학교는 어딜 다녔고 직업은 무엇인지, 잃어버린 돈의 액수는 얼마인지, 어떻게 번 돈인지,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잃어버리던 당시에는 어디에 돈을 넣어뒀는지, 그 날 아침에 식사는 무엇을 했는지, 돈 빌려줄 친구는 있는지, 당장 그 달에 내야 할 공과금이 얼마인지 등등의 제반 사정을 알아야합니다. 물론 그렇게 단서와 조건이 하나하나 붙을수록 공감의 범위는 축소될 수 있죠. 화자의 인종이나 직업이나 연령이나 지역이나 성별이나 국적 등등에 따라 공감의 행렬에서 이탈하는 사람이 분명 나올 겁니다. 하지만 남아 있는 사람들이 가지는 공감의 정도는 분명 짙어질 수밖에 없죠. 절도 당한 사람이 '누구'이고 그 사람에게 있어 그 돈이 어떤 '의미'이고 이 사건이 가지는 '무게감'이 얼마나 되는지가 점차 느껴지니까요. 그리고 그렇게 깊이, 좁게 내려가다 보면 역설적으로 결국에 가서는 그 특별하고 구체적인 요소들 사이에 겹겹이 싸인 피해자가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죠. 이건 특정성이 전혀 없는 이야기에서는 받을 수 없는 '동질감'이고요. 따옴표를 과도하게 남용한 감이 있습니다만 따옴표끼리 연결해 보면 결론이 쉬 도출됩니다. 공감은 특수한 이야기에서 강렬해지는데, 그건 이야기가 구체성과 미시성을 띠어야 역으로 실제로 내심 깊이 느낄 수 있는 무게감과 동질감을 불어넣을 수 있기 때문이죠. 그때 비로소 우리는 상대방이 나와 같은 인물이고 똑같은 인생의 무게를 지고 산다는 걸 느끼게 되는 거고요. 그렇게 사건과 인물의 표층이 아니라 심층으로 들어가는 것이죠. 겉으로 보기에 모니터는 LED일 뿐인 것 같고 게임은 그래픽의 장난질인 것 같지만 실상 안에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죠. 말하자면 이건 지면 밑에 묻혀 있는 거꾸로 뒤집힌 피라미드 같은 것입니다. 가장 표면이 넓은 지표면 위에서는 사람들이 언제나 그렇듯 일상을 영위하며 거리를 돌아다니며 진부한 인생을 마네킹처럼 살아가요. 하지만 바닥을 파면서 지하를 드러내면 그간 지표의 퇴적물에 깔려서 보이지 않았던 마네킹 안쪽의 실상이 조금씩 드러나는 거죠. 그렇게 밑으로 밑으로 삽을 들고 숨그네를 뛰며 파 나가보면 나와 조금도 다를 게 없는 그 사람의 인생의 무게가 느껴지고요. 조금 거창하게 말하면 쇼펜하우어식의 의지로서의 세계인 거고요. 결국은 나도 너도 육체의 감옥 안에 갇혀 있는 무한한 정신을 갖고서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존재라는 그런 동지의식. 그래서 특수한 이야기라는 건.. 그만큼 예리하게 우리 모두의 기저의 깔린 구석을 겨냥하며 내포된 의미를 파헤치는 밀도 있는 이야기입니다. 반대로 보편적인 이야기는 변죽만 울리고 끝나는 산만한 이야기인 거고요. 대체로 내게 더 감동적이고 애절한 이야기는 천만 영화나 시청률 60%짜리 드라마가 아닐 때가 많은 것도 그런 이유일 테고요. 안 봐도 다 아는 뻔하고 진부한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절대적으로 모르고 공감한 적이 없는, 그래서 파고 들어가야만 알 수 있는, 그래서 그 파고 들어가는 과정에서 무게감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이야기에서 울림을 얻는 거죠. 사실은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커뮤니티에서 글을 쓰고 댓글을 달며 대화를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왜 커뮤니티를 하십니까? 하드코어 키배러시가 너무 좋기 때문에.. 는 아니겠지요. 기본적으로는 남들과 대화하고 교감하면서 이해를 주고 받은 겁니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 호기심이 드는 거고 그 속에서 나는 이렇게 느끼고 사유한다는 걸 표현하고 싶은 거고요. 다시 말해 각자 기저의 깔린 구석을 겨냥하며 내포된 의미를 파헤치는 밀도 있는 이야기를 읽고 읽히고 싶은 겁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금 이 스레드에서도 나름대로 자유로이 문학을 쓰고 있는 겁니다. 상호작용이 오가는 인터텍스트로서 말이죠. 당연히 이런 문학적인 커뮤니케이션은 순탄하게 수행되지 않습니다. 글쓴분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으며 머리만 아픈 것처럼요. 이는 본디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무언가를 이해하고 득도하는 과정은 단박에 돈오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만사가 다 그렇듯 인내와 노력 속에서 충분한 퇴적과 적층과 일어나야만 하죠. 이 과정을 비유하자면 커다란 그림이 그려진 채로 100개로 조각난 퍼즐을 맞추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거 하나만 맞추면 모든 그림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런 건 없어요. 간혹가다 눈썰미 좋다든지 자기 경험에 딱 들어았다든지 해서 2-3개만 맞춰봐도 전체 그림이 보이더라 그럴 순 있지만 대체로는 한 50개 70개 정도는 맞춰 봐야 무슨 그림인지 형체를 짐작할 수 있게 되죠. 그리고 그림의 전모를 알게 되는 시점은 벼락같이 찾아옵니다. 34개 맞출 때까지는 가물가물하던 게 35개 맞추고 나니 얼추 견적이 나고 51개 맞출 때까지는 또 그 상태로 쭉 가다가 52개 맞추고 나니 안 봐도 비디오 유튜브 니코동 되는 거죠. 인식 자체는 계단식으로 일어납니다. 하지만 사실은 퍼즐 하나하나를 맞춰나가는 과정이 점진적으로 수행되지 않았으면 불가능한 거죠.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일어나는 문학적인 상호작용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본 다른 회원은 다 이계인 같고 외계인 같고 그렇죠. 말 섞고 키배 뜨고 그러다 보면 뭐 이런 미친 놈이 다 있나 여기가 북한이고 내가 김정은이었으면 넌 아오지였다 싶고 그렇죠. 근데 그러다가도 한 3년.. 4년.. 5년쯤 찬찬히 관조하면서 해당 회원의 퍼즐을 하나 둘씩 넘겨 가다 보면 어느 순간 그 회원의 개성과 인격과 사고방식에 번쩍 눈에 뜨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부터는 왜 그 회원이 그리 꼴통 같았는지가 납득이 되는 거죠. 사실은 꼴통 같은 게 아니라 다 나름의 인생이 있던 게 느껴지는 거고요. 그처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개인'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것입니다. 먼저 내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게 익숙한 이야기들, 조금만 퍼즐을 넘겨 보면 윤곽이 보일 듯한 그런 사람들의 사연들부터 읽으면서 내 이해의 폭을 넓혀가야 비로소 좀 더 내밀하고 미묘하고 그런만큼 보다 더 개성적인, 보다 더 '하잘것없는' 그런 문학들을 읽을 수 있게 되는 것이죠. 그러다 보면 세상의 온갖 하잘것없음에 익숙해지면서 사물과 사물, 사람과 사람, 사건과 사건 사이의 미세한 차이와 고유한 맥락들을 보다 섬세하게 변별할 수 있는 렌즈를 갖게 되는 거고요. 그런 것이 예술가적 개인성일 테죠. '나는 개인이오'
20/06/04 16:09
저의 상상의 범위를 넘어설 정도로 너무도 좋은 답변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페북에 공유하고 싶습니다.(출처 밝히고) 많은 분들에게 큰 울림을 주실 수 있는 말씀이라고 봅니다.
20/06/04 17:17
감사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문단에서 말씀하신 "조금만 퍼즐을 넘겨 보면 윤곽이 보일 듯한 그런 사람들의 사연"들이 끊임없이 등장 것이 바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스토리이기도 하기에.. 퍼즐조각 모으듯 한번 도전해보겠습니다.^^
20/06/04 14:37
말씀하신 게 모두 맞다고 생각합니다. 철학적 깨달음, 삻의 교훈, 문장의 아름다움, 간접 체험, 단순히 원초적인 재미 모두 맞습니다. 사람이 그렇듯 문학 작품들도 매력이 다 다르고 각자의 취향대로 감상하면 되겠죠. 저는 문학의 매력은 작가에게서 시작되어 독자에게서 완성되는 것이라 생각하는데요. 이야기를 읽는 것만큼 인간의 상상력이 극대화되는 활동은 잘 없거든요. 어렸을 때 독후감을 써보라고 하는 것도 그 돌이켜보고 생각하는 것에서 독서가 완성되기 때문이겠죠. 그리고 이렇게 문학을 읽고 되새기는 건 타인과 사회를 이해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사람의 경험은 한계가 있으니까 내가 겪어보지 못한 것을 문학을 통해 체험하고 이해하기도 하는 것이죠. 그리고 직접 답을 주는 자기개발서나 전문서와 달리 문학은 그걸 은유적으로 풀어내고 답은 독자의 생각에 맡긴다는 것 또한 문학의 성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른 경험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독서의 경험은 훗날 불현 듯 다시 찾아옵니다. 마치 어렸을 때 시골에서 사촌들과 재미있게 놀았던 기억이라던지 옛날에 엄마가 차려준 따뜻한 생일상 처럼요. 예전에 읽은 문학작품이 문득 내 삶에 다시 찾아올 때면 저는 희열을 느끼게 되더군요. 제가 좋아하는 작품에 대한 감상을 몇 가지 짤막하게만 말씀드리면 저는 위대한 개츠비를 고딩때 어머니가 선물해주셔셔 처음 읽었는데요. 끝까지 읽긴 했지만 별로 재미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대하고 책장을 둘러보는데 갑자기 개츠비의 삶이 찡하게 다가오더라구요. 신기한 경험인데, 지금도 개츠비하면 축제나 금주법 이런 것보단 개츠비가 어두운 밤 홀로 대저택 테라스에서 호수 건너편을 바라보는 장면이 먼저 떠오릅니다. 그리고 작품에서는 거의 그려지지 않은 개츠비의 지난 삶과 삶 그 자체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됩니다. 이건 피츠제럴드가 쓴 것과 별개로 제 안에서 완성된 위대한 개츠비입니다. 레미제라블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대하소설 중 하나인데요. 이 소설은 다른 유명한 이야기들보다 후반부에 장발장이 결혼한 코제트를 너무 보고 싶은데 차마 딸의 집까지 가지 못하고 먼발치에서만 바라보다 되돌아오는 일을 반복하는 장면이 먼저 생각납니다. 책을 처음 읽을 때는 고작 과거에 빵을 훔친 일로 부녀를 못만나게 하는 마리우스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정의란 것은 시대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다른 것이니 그렇게 보면 마리우스도 이해가 가고 그냥 안타까운 마음만 들더군요. 사실 이 장면은 흔치 않게 책을 읽으며 펑펑 운 장면이라 평생 잊히지가 않을 거 같습니다. 어쨌든 다른 매체는 충족시키지 못하는 문학만의 매력은 분명히 있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걸 소비하는 건 취향이나 익숙함의 정도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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