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유게시판에 각자도생 그 자체인 논란성 글, '지금 이대로도 나 사는데 지장없다. 나 죽고 나서 망하거나 말거나 내 알바 아니니 니들 알아서 살아남아라' 식의 글이 올라왔길래 생각을 정리해봅니다.

각자도생, 각자 스스로 알아서 삶을 도모하자는 말이죠. 이 말은 특유의 간지 때문에 적자생존과 더불어 수많은 중2병 환자들의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그런데 현대 사회에서 살아보니 각자도생이란 삶의 방식은 허점으로 범벅이 되어 있더군요.

세상을 둘러보면 각자도생으로 구성되는 사회는 극히 드뭅니다. 협력을 통해 강력한 맹수들을 사냥해 온 인간 사회에서, 각자도생이란 생존방식 자체가 매우 비효율적이기 때문이죠.

저는 각자도생 주의자들의 주장 자체가 현대사회에서나 부릴 수 있는 투정이자 어리광이라고 단언하는데요. 중세시대나 부족시대였으면 각자도생주의자들은 촌장 손짓에 끌려나가 맞아 죽었거나 마적단에 노예로 끌려갔을 겁니다. 국가가 사회 안전망을 보장해주고 고도의 인프라스트럭쳐를 깔아주니까 저런 소리를 인터넷으로 할 수 있는 거죠.

현대 사회에선 그런 유아적 인식으로도 살아갈 수 있으니 참 이 세상이 따뜻하고 아름답습니다. 도시문명이라는 게 참 편리하게 만들어졌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 저도 저러고 살 때가 있었습니다. 20대 초반즈음에, 히키코모리로 살면서 '풋. 인간이 무슨 사회적 동물? 느그 인싸들이나 그러고 살아라. 나는 나 외의 아무 인간도 필요가 없다' 하고 냉소할 때가 있었어요.

그런데 5년쯤 지나고 생각해보니, 그렇게 방구석에 갇혀 있는 동안 제 골방의 전기를 유지보수하는 기술자가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는 부분에 생각이 미치더군요. 제 방에 수도와 전기를 공급해주는 인프라스트럭처망은 저절로 솟아나서 돌아가는 게 아니더란 말이죠.

즉, '나 혼자서도 잘 먹고 잘 살지 않냐. 무능하게 징징대지 말고 알아서 살아남아라. 왜 나한테까지 피해주냐' 라는 공허한 주장 이전에, 내 재능과 노동력을 사 주고 내게 서비스를 제공해주는 사회가 있었다는 겁니다.

그 뒤로 저는 각자도생이란 방식 자체가 국가의 안전보장과 인프라에 대한 무임승차가 기본 탑재된 기생충 마인드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사고관이 개인에겐 일차원적이고 근시안적인 이득을 주겠지만, 그런 사람들이 다수가 아닌 건 이유가 있죠.

게임이론으로 따져봐도 거짓말쟁이, 통수맨이 소수여야 사회가 돌아갑니다. 이기주의자들이 소수여야만 기생하며 꿀을 빨 수 있는 사회가 터지지 않고 유지라도 될 수 있는 것이죠. 이기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머리가 좋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기생충처럼 사회 체제의 꿀을 빨아왔을 뿐이란 겁니다.

각자도생주의자들이 어디 필리핀 무인도나 소말리아 황야 점거해서 혼자 산다면 인정하겠습니다만, 그런 사람들은 꼭 인터넷 인프라 잘 갖춰진 현대사회에서 나갈 생각을 하질 않더군요.

국가와 동료 시민들이 제공하는 서비스와 인프라는 다 꿀을 빨아 먹으면서, '그런 걸 왜 나한테 강요함? 나랑 상관없는데??? 에베벱. 니들이 망하거나 말거나 나는 내 꿀 더 빠는데 신경쓰겠다'고 하는 모습이 좀 웃겼습니다.

이런 걸 이기주의라 하는 건 이기주의에 대한 모욕이고, 유아적 어리광이라 불러야겠죠. 동물이 모래에 머리를 박고 시야에서 적이 사라졌으니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식의 유아적 세계인식 그 자체고요.


2.

그렇다면 양식이 있는 민주사회의 시민이라면 저런 유치하고 저열한 세계관 대신 어떤 가치를 추구해야 할까요. 저는 개인주의자이자 자유주의자로서 '남에게 피해 안 주고 자기 의무 지키면서 살면 그만' 이라는 답을 냈습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개인주의라고 해서 혼자만 잘 먹고 산다는 방식이 결코 아니란 것인데요. 대충 긁어온 문장에 따르면, 사회학자 뒤르켐은 개인주의는 이기주의와 다르게 개인의 존엄성과 자율성을 중시하고 타인을 배려하며 공동체에 대한 의무를 강조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는군요. 바꿔 말하면 내가 시민으로서 할 도리를 다하며 사회의 역할을 존중하겠다, 그 이상의 개인 영역에는 국가가 개입하지 말라는 말로도 읽을 수 있겠습니다.

고전적이고 극단적인 개인주의가 아니라, 사회를 포용하는 현대적 수정 개인주의이지요. 맹목적 희생이나 집단주의, 간섭과 검열은 배격하지만, 이타성과 공동체를 위한 헌신은 긍정하는 개인주의 말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시민의 의무를 해석해 봅시다. 민주사회 시민에게 부과되는 국방, 납세의 의무는 대체로 사회를 유지하는 데 그 목적이 있죠. 이때 시민이 사회가 돌아가게끔 의무를 다한다는 것 자체만으로 사회와 매우 깊이 연계됩니다. 대표적으로 국방의 의무만 봐도 사회적 협력 그 자체니까요.

따라서 남에게 피해 끼치지 않고 내 할 일만 잘 하는 개인주의적 삶의 방식을 취한다 해도, 결과적으로는 의무를 다하는 시민들이 합쳐진 유기적 사회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나뭇꾼이 자기 먹고 살자고 나무 베어서 파는데, 그걸로 시민들이 난방 혜택을 보는 셈이죠. 또 정부가 나무 썰려 나가는 만큼 식수도 병행하라고 법을 만들면 그게 나무꾼에게도 장기적 이득을 주는 식이고요.

물론 나무꾼이 각자도생적 이기주의자라면, "어차피 나 죽을 때까지 산이 민둥산 안 되는데 내 알 바 아니다" 라고 할 수도 있겠죠. 그게 나무꾼 개인에게는 근시안적 이득을 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국가와 동료 시민들 입장에서는 그런 근시안적 생각을 신경써 줄 가치가 결코 없습니다. 나무꾼이 나무를 남획해서 산사태라도 나면 그건 사회와 시민의 피해니까요.

이걸 요즘 예시로 바꿔 말하면 마스크 안 쓰겠다는 반백신주의자 정도가 되겠지요.

설령 위 예시처럼 타인에게 즉각적, 직접적 피해를 주는 각자도생이 아니더라도, 각자도생적 사고방식은 대체로 신경써줄 가치가 없는 무의미하고 유아적인 케이스가 많더라고요. 세금 아까우니 출산율 정책 때려치자는 소리나 현 세대, 특정 계층만을 위한 포퓰리즘 정책을 요구하는 사례 같은거요.

국가는 국민 뒤 닦아주는 기계가 아니며, 국민 1인의 입맛에 맞는 정책만 추진하지도 못합니다. 국가는 모든 계층과 연령층, 미래 세대를 총망라하는 정책을 펴기 마련이거든요. 그 중 일부가 거슬린다, 본인에게 이득이 안된다고 훼방 놓느니 국가와의 계약을 중단해야죠. 전 세계가 출산율 정책에 열성적인데 대체 어디를 갈 수 있을런지는 모르겠지만요.


3.

그래서 저는, 논란이 된 글의 글쓴이와는 다르게, 저와 아무 상관없는 간호사, 청소 노동자나 전기 기술자가 죽을 만치 힘들다 하면 관심을 가지겠습니다.

노동자들이 부조리나 부패로 힘들어서 일을 못하게 되면 제게 피해가 닥치기 때문입니다. 그런 동료 시민들의 노력으로 수도, 전기, 도로, 의료 같은 인프라가 유지되고 저도 꿀을 빨 수 있는 것이거든요.

그러니 제가 뭘 하지는 않더라도 문제 인식은 할 겁니다. 그걸 고치겠다는 사람들 발목 잡거나 형성된 여론에 대고 비아냥거리지도 않을 거고요. 돈 드는데 때려치자며 정책 추진을 반대하지도 않을 겁니다.

문제가 된 출산율이야 해결하기가 아득하고 어디서부터 손대야 될지 모르는 문제이긴 하죠. 그래서 저는 출산율 문제에 대해 침묵하겠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장기적 해결을 위한 여론을 모으는 동료 시민들에게 시비를 걸지도 않을 거예요.

의사 표현은 자유라지만 여론 형성을 방해하고 사기를 꺾는 행위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내 저열한 만족감 충족 외에는 아무 의미가 없죠. 아무리 내 관심분야가 아니고 우선순위가 낮은 분야라 해도 이득이 하나 없는 행동입니다. 사회적 신뢰자본을 공연히 깎아먹고 불신과 냉소만 부추기는 행위란 것이죠.

저는 개인주의자로서 제가 사회적 문제를 어찌할 깜냥은 없습니다만, 개인주의적 관점으로 봐도 장기적 문제를 막기 위해 헌신하는 시민은 충분히 존중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출산율 붕괴로 자본주의 사회의 시스템이 붕괴하고 세수, 연금, 소비력이 급감하면 그 피해는 제게 미쳐 개인주의적 삶의 근간이 붕괴할 테니까요.

제가 수행한 기존의 의무가 모두 허사가 되는 것도 싫고요. '나는 국방의 의무 끝냈는데? 그뒤 국방, 군대가 붕괴하건 말건 내 알바 아니다' 는 기계적 단세포적 의무 이행이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어차피 내 대에 인구구조 붕괴 안하는데 육아휴직 꼬와 죽겠다' 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국가의 기본 기능 회복에 발목을 잡는 행위밖에 안되죠.

'나라에 안 기대고 알아서 잘 살아보겠다. 망하건 말건 내 알바 아니다?' 좋다고 치자고요. 그럼 공짜로 받아먹은 만큼은 토해내야죠? 아하, '난 그렇게까진 주장하지 않았다. 나라에서 최소한의 받을 것만 받고 할 거 하면서 그 이후는 내가 알아서 하겠다?'

그럼 국가를 긍정하고 그 틀 안에서 살면서, 국가가 제공하는 서비스와 요구 의무를 취사선택하면 안되죠? 그건 뷔페미즘 그 자체니까요. 지금까지 안전보장해준 사회가 붕괴 우려때문에 뭐라도 조치를 한다는데 나한테 이득 안된다고 '오직 그것만' 반대하는 건 참 웃긴 거 같아요. 이때까지 주는 건 잘 받아 먹었으면서 말이죠.


4.

각자도생이란 언어의 정의에 대해 설왕설래가 많아 정리된 생각이 적힌 댓글을 옮겨와 보겠습니다.

저는 야생적 각자도생을 주장하며 들판에 사는 사람은 차라리 현실적이고 1인분 하며 산다고 평가합니다.

제가 비판하는 것은 도시에 살면서 내 월급으로 먹고살고 노후도 알아서 하겠으니 신경끄라는 쪽인데요. 그런 부류는 의무를 다하건 사회와 연계하건 사고가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을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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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적 용어대로의 야생적 각자도생이 아니라, '최소한의 의무를 다하면서 나라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살길 찾는다' 는 각자도생을 추구하려 한대도 시스템의 유지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각자도생러가 자기 일 밖에 신경을 안 쓰는데 살고 있단 건 타인의 노력에 올라탔다는 얘기라 보고요. 식량, 수도, 전기 자급능력이 전무한 도시인이 각자도생 하려면, 국가의 안전망에 매달리고 붕괴되지 않기를 빌어야만 하죠.

근데 저는 거기서 '?? 그러면 각자도생이 아니잖아. 아무리 봐도 각자도생이란 말은 쓸데없네' 라는 생각이 강하게 드네요. 그냥 개인주의적 삶이라 했으면 좋겠습니다.'사회가 망가지는 판국이니 기대지 않고 스스로 삶을 도모한다' 는 뜻이 중2병적으로 멋있긴 한데 온갖 모순을 내포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차라리 사회 자체와 엮이지 않고 내가 농사짓고 풍차 돌리고 산다는 생존주의는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국가 안전망 없이는 유지조차 안될 삶의 방식을 가지고, 나라에 손 안벌리고 개인이 노력하는 각자도생이라 하니 웃길 따름이에요.

어떻게 라고 물으면 내가 내 월급받아서 살고 노후대책 내 알아서 하겠다는 근시안적인 대답뿐이죠. 노후붕괴 디스토피아라 각자도생 하겠다며 제시하는 게 월급모으기 재태크라니. 그걸로 잘도 각자도생이 되겠습니다. 뱅크런 터지거나 국가가 파산하면 당장 몰살당할 방법이 각자도생이래요. 애초에 이나라 최대의 호황이라던 94년에도 자기 힘으로 먹고 살고 집사고 저축하는 건 다들 하던 일이었어요. 누구에게 손 벌린 사람도 없고요.

노후대책 운운하는 소리 자체가 통화의 가치를 유지해주는 국가와 월급으로 소비가능한 시장 자체에 기생한다는 답변인데 말입니다. 철저히 도시인으로서 사회 시스템에 매달리겠다는 소리고요. 그러면서 출산율이건 인구붕괴건 내 손해는 안보겠다, 뭐 하지마라, 나라가 어찌되건 내 알바 아니라고 하면 웃기죠. 거기에 나라가 왜 이 모양이냐, 못 믿겠다. 역시 내가 알아서 각자도생 해야겠다 에헴! 하면 더 웃기고요.  

그럴 거면 '나라에 손을 벌리지만 최대한 노력해보겠다', '나는 내 먹고 살기 바빠서 어려운 문제는 모르겠다. 그냥 내 본분 다하면서 조용히 살겠다', '그래도 과도한 간섭은 피해달라' 고 겸손해져야 하지 않나요. 왜 바보같은 짓을 하는 사람들이 남을 깔보고 패배주의와 불신을 퍼뜨리며 사회적 신뢰를 저하시키나요.

세금 얼마 내지도 않은 사람들이 내가 낸 세금이 얼만데 하면서 공무원 깔보는 느낌이거든요. 각자도생 같은 거창한 말을 할 정도로 잘나지 않았는데 말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