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들은 매일같이 쏟아지는 신상품들의 홍수 속에서 소비를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날이 갈수록 현대인들이 꼭 소유해야 하는 '필수품'의 영역이 넓어지고 있습니다. 남성들의 경우 과거엔 스킨, 로션 정도만 바르거나, 혹은 그것조차 바르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에는 자외선 차단제는 필수요, 수많은 남성용 화장품들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피부 관리와는 관련없는 직업군으로 여겨졌던 군인들 사이에서 피부 관리가 열풍이라는 뉴스는 이제 오래전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옷은 하루에 한 벌씩 갈아입는다 쳐도 일주일에 한 번은 빨래를 할 것이라 감안했을 때 넉넉잡아 상, 하의 10벌이면 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옷장에 수 많은 옷들이 쌓여있어도 '입고 나갈 옷이 없다'라는 느낌이 듭니다. 사고 한 번 없이 관리가 잘 된 자동차도 어느 정도 연식이 차면 촌스럽다는 이유로 자연스레 교체를 고려하는 대상이 됩니다. 우리나라도 절대 빈곤을 극복한 선진국이 되면서 사는데 꼭 필요한 물건들은 부족함이 없는 시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소비자들은 더 나은 새로운 상품들을 갈망합니다. 이처럼 멀쩡한 과거의 제품들을 낡은 것으로 인식시켜 새로운 유행을 창출해야 하는 개념을 미국의 사회학자 소스타인 베블런(Thorstein Bunde Veblen)의 유명한 책인 <유한계급론>(1899)에서는 '계획된 진부화(Planned Obsolescence)'라고 불렀습니다. 이처럼 자본주의 세계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소비'는 절대 빠질 수 없는 생활 양식입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소비품들 혹은 소비를 하는 패턴들은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만들어 졌을까요? 예를 들면 중세시대 유럽 왕족 혹은 귀족들의 초상화를 보면 여성들보다 더 화려한 치장을 했음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색조 화장, 과장된 가발, 겨울 이불인지 가늠이 안 될 정도로 화려한 복식, 스타킹, 하이힐 등을 착용하고 있습니다. 지금 어떠한 남성이 저렇게 입고 다닌다면, 바로 '지하철 빌런' 정도로 여겨질 법한 패션입니다. 그럼 언제부터 남색, 회색 등 단조로운 색채와 셔츠, 재킷, 바지 등 간단하고 지루한 구성으로 이루어진 남성 양복이 오늘날까지 세계의 표준으로 자리잡게 되었을까요? 남성 양복은 간소화되고 남성용 예복인 턱시도의 존재감은 점점 초라해진 반면, 언제부터 여성용 예복인 드레스는 높은 가격과 화려함, 수많은 종류를 자랑하게 되었을까요? 왜 남성들과는 반대로 여성들의 일상적인 의복과 치장은 점점 화려해졌을까요?
루이 14세의 초상화
성형수술의 경우엔 의학적인 목적으로 시작되었고, 현재도 종종 그러한 목적으로 시술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현대에는 미용의 목적이 강한 '소비상품'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물론 직업군에 따라선 소비보다 '투자'의 영역이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럼 미용 목적의 성형수술은 언제부터 본격화 되기 시작했으며, 각 문화별로 선호되는 눈, 코, 입, 몸매의 형태는 어떤 방식으로 결정이 되었을까요? 현대의 온라인 거래가 모태가 되는 '우편 거래'가 미국에서 발생한 배경은 무엇일까요? 옛날 사람들의 시선에서는 너무나 거대하고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던 형태인 '복합 쇼핑몰'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을까요? 이 책은 위와 같이 현대인들은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며 일상적으로 소비하고 있는 상품들과 소비하는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에 답변하는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배경이 되는 역사들 중에는 당연히 재밌고 흥미로운 역사도 있지만, 인류의 각종 흑역사도 포함 됩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게 읽은 부분 하나를 소개하자면 5번 챕터 '비누'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단지 위생 상품으로만 여겼던 비누에는 제국주의와 인종차별이라는 인류의 비극이 담겨 있습니다. 유럽이 산업화가 되고 19세기 중반에 이르자 비누가 본격적으로 보급화되면서 유럽인들에게 '위생(Hygiene)'의 개념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이 때 비누의 주요 기능은 때를 씻겨냄과 동시의 미백 기능이 있었습니다. 산업화 이전에도 노동계층은 상류계층보다 야외에서 일을 많이 하기 때문에 햇빛에 그을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따라서 상류계층으로 보이고 싶은 유럽인들 사이에서도 미백 기능에 대한 수요는 분명히 있었다고 합니다. 이 때 '피어스 비누(Pears' Soap)'라는 상품이 미백 기능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끕니다. 피어스 비누는 이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깨끗한 집, 화목한 가정, 사랑스러운 아이들이라는 '높은 삶의 질'을 의미하는 듯한 이미지들을 광고의 전면에 내세우며 더욱 높은 인지도와 판매량을 얻게 됩니다. 아마 당시에 소비자들이 느끼기에 피어스 비누는 현대인의 '건조기', '식기세척기', '로봇청소기' 정도와 같은 존재감이었을까요? 내가 저 것만 구매해서 사용한다면 훨씬 높은 삶의 질을 영위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제품이었나 봅니다.
피어스 비누가 전면으로 내세웠던 광고 이미지. 사랑스럽고 깨끗해 보이는 아이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시 시대는 제국주의 시대였습니다. 유럽인들은 자신들을 아프리카의 열등한 유색인종과 구분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비누를 활용한 위생의 관념이 여기에 활용됩니다. 불과 비누가 대중화되기 이전만해도 아프리카 인들과 위생수준이 별반 다르지 않았던 유럽인들은 어느새 자신들을 비누를 사용해 몸을 씻는 '문명인'이며 아프리카인들을 더러운 '비문명인'으로 취급하기 시작합니다. 아프리카인들이 피부가 검은색인 것은 비위생적이기 때문이고 유럽인들은 청결하기 때문에 피부가 하얀색이며, 따라서 아프리카인들은 문명인들의 상품인 '비누'를 통해 청결해질 필요가 있다라는 이념을 설파합니다. 당시 피어스 비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위생 상품 관련 회사들의 광고는 노골적으로 인종 차별적이었습니다. 그때의 사회적 분위기에서는 딱히 문제가 될만한 내용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광고에서 비문명화된 우스꽝스러운 표정의 흑인들은 비누를 마치 부시맨의 콜라병처럼 신비한 물건으로 우러러 봅니다. 책에 있는 여러개의 광고들 중 개인적으로 가장 충격을 받은 광고는 어린 흑인 아이가 피어스 비누로 씻으면 백인처럼 피부가 하얘진다는 내용의 광고 입니다. 굳이 흑인 아이를 출연시킨 것은 단순 미백 효과를 넘어서 마치 비문명인이 비누를 사용함으로써 비로소 문명인에 편입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듯 합니다.
광고를 통한 계속된 설파는 제국주의적 목표를 달성하는데, 여러가지 측면에서 꽤나 효과적이었다고 합니다. 첫 번째로 총과 칼을 이용한 강압적인 굴복보다는 훨씬 더 신사적인 방법으로 식민지 흑인들의 마음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20세기 전환기에 남부 아프리카에서 흑인 학생이 백인 선생님에게 비누로 열심히 씻었는데도 '선생님은 백인인데 나는 아직도 흑인이다'라고 불평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지금의 시점으로 봤을 땐 참으로 황당한 일입니다. 백인은 문명인, 흑인은 비문명인이라는 지속적인 '세뇌'의 성공 사례일 것입니다. 두 번째로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인들의 마음을 비누로 사로잡을 수만 있으면 앞으로 비누는 물론 치약, 가글액, 치실, 탈취제 등 온갖 종류의 위생 상품의 잠재적 소비자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인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단지 '노동력' 뿐이었다고 합니다. 위생과 청결은 아프리카인들의 '노동력'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는 데 이용될 뿐이었지요. 매일같이 아무 생각없이 사용하는 비누가 이처럼 제국주의의 선봉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꽤나 충격적이면서 흥미로운 내용이었습니다.
흑인의 피부를 하얗게 만든다는 점도 황당하지만, 항상 흑인은 뭔가 신기해하는 표정을 지어야 함
이 책은 위의 '비누' 챕터를 포함하여 총 25개의 챕터로 되어 있으며, 각 챕터는 '비누'와 같은 각 키워드별로 담긴 역사적, 사회적 배경을 세심하게 탐구하고 있습니다. 또한 마지막 보론으로 절대적인 연구 역사가 길지 않아 앞으로 발전과 논의의 여지가 무궁무진한 소비사에 대한 현황과 전망에 대해도 간략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상품들과 소비 생활의 배경에 대해 알 수 있는 흥미로운 책이자, 앞으로 새롭게 발명되고 판매될 상품들이 등장했을 때, 그 배경에 대해 좀 더 깊은 생각을 가질 수 있는 시야를 제공하는 좋은 책이라 생각합니다. 따라서 많은 분들이 충분히 관심가지고 한 번 쯤은 읽어볼만한 책으로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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