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라, 달력을 보니 숫자가 이상합니다. 2022년 2월 22일. 2가 6개 들어가는 경이로운 날이네요. 저 같은 일반인에게는 반복되는 숫자가 많은 날이구나, 하고 넘어갈 날이지만 게이머들, 그중에서도 스타크래프트 유저들에게는 기념할만한 날이라고 합니다. 특히 피지알러들에게는 의미가 깊겠네요. 네, 모두가 입을 모아 ‘콩탄절’이라고 말하는 날입니다. 만년 2등만 한 프로게이머 홍진호. 2등의 화신. ‘콩’을 담당하는 그를 기념하기 위한 날이 왔습니다.
사실 저는 게임에 대해 잘 모릅니다. 아마, 관심이 없기 때문이겠지요. 물론 모든 종류의 게임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소싯적(잼민이라고 불리는 초등학생 시절) 유행했던 바람의 나라, 크레이지 아케이드, 마비노기 등등 나름 대중적인 게임들을 즐긴 시절도 있었더랬죠. 어른이 된 지금도 카드게임이나 보드게임 정도는 좋아하지만 컴퓨터 게임을 자주 하지는 않습니다. 아마 못해서가 아닐까라고 생각해요. 피지컬도, 전략형도 아닌 저는 게임을 굉장히 못하는 편에 속하거든요. 여우와 신 포도 일화처럼, 내게 닿지 못하는 포도니까 시큼할 거야라고 포기해버리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승리가 주는 쾌감에 비해 널뛰는(그러나 충족되지 않는) 승부욕을 가지고 있는 것은 너무나 괴롭거든요. 그래서 게임을 보는 것을 차라리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승부욕을 분출시키되, 저는 그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거죠. 3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응원만 보내면 되는 것처럼요. 그러다 보니 넓은 범위에서 게임에 해당하는 스포츠를 관람하는 것도 좋아합니다. 특히나 이번에는 동계올림픽이라는 이벤트가 있어서 눈이 즐거웠습니다. (쇼트트랙은 언제나 짜릿하고 흥미진진한 것 같아요.)
승부의 관점에서 볼 때, 게임은 참 냉정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게임은 즐겜이지~ 즐겨~ 라고 해도, 지면 부들부들할 수밖에 없잖아요. 이기는 쪽이 있으면 반드시 지는 쪽이 있습니다. 1등이 있으면 꼴등이 있구요. 모든 영광과 보상은 1등에게 집중됩니다. 게임이 현실의 축소판이라고 많이 얘기를 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반대가 아닐까 싶어요. 현실이 게임의 확장판입니다. 뭐, 그게 그건가요.
그래서 저는 2등이 항상 제일 불쌍합니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이라는 말이 유행했을 때, 차마 마음껏 웃지 못했던 것은 그 말이 공산당 선언의 유명한 그 첫 문구처럼 우리 곁을 망령처럼 배회하기 때문이겠죠.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고, 영광을 차지하는 이 냉정한 자본주의의 세계에서 2등은 참, 애매합니다. 분명 많은 것을 가졌는데, 그 명예가 1등에게 가리워진 나머지 자신의 능력을, 운을 충분히 감사하게 되지 못하게 된다고 할까요. 실제로 올림픽만 해도 동메달을 딴 선수보다 은메달을 딴 선수들이 더 아쉬워하고 분개한다고 하더라고요. 2등은 참, 잔혹한 자리인 것 같습니다.
홍진호 선수는 어찌 보면 그 잔혹한 자리에 오래 머물렀던 사람입니다. 2등.. 2등..만년 2등만 하던 사람의 기분이란, 참 알 길이 없습니다. 짐작만 할 뿐이지요. 속이 쓰리기도 하고 참담하기도 하고 열등감도 느꼈을 것이고, 뭘 해도 나는 1등이 될 수가 없다는 생각에 큰 벽을 느끼고 좌절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동정하기에는 큰 사람이지만, 연민할 수밖에 없는 작은 사람인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사실 그를 가지고 놀리는 각종 밈들 (황신이다, 콩까지마 등등)에도 불편함을 느꼈던 사람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겠네요. 네, 불편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적어도 자신의 삶에 있어서는 이류가 아니었습니다. 2등일지언정 일류였습니다. 승부를 깨끗이 인정하고, 노력하고, 각종 방송에서도 고군분투하고, 지니어스라는 프로그램에서도 자신의 멋진 전략을 보여주었습니다. 자신을 유머로 소비하는 상황에서도 유연하게 대처하고 그걸 즐기기까지 했습니다. 그걸 보는 저의 심정은 뭐랄까, 참 부끄러웠습니다. 내가 뭘 아는 걸까. 등수로, 점수로, 숫자로, 저 사람의 무엇을 알 수 있는 걸까.
2등도 여러 번 하니 2등의 1등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 멋진 사람. 홍진호를 응원합니다.
(이 글을 게임게시판에 써야 하나 자유게시판에 써야 하나 고민 끝에 자유게시판에 올립니다. 전 사실 스타를 잘 모릅니다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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