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과수원옆집입니다. 오늘은 제가 어린 시절 감명깊게 읽었던 책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절대 정치적인 의도를 갖거나 그런게 아니라, 진짜 예전부터 써야지 써야지 했는데 선거철이 되어서 혹여나 '양비론'으로 읽힐까 아주 조심스러운 마음입니다. 그런 의도가 없음을 미리 밝힙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책을 가끔 사오셨습니다. 그런데 책들이 지금 생각하면 좀 이상한데, 책의 주제나 경향(?)같은 것들이 아버지의 취향과는 전혀 관계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아마도 서점에서 아버지가 엄선한 책이 아니라, 가끔 아버지 사무실에 누군가가 찾아와서 책을 팔았고 그 중에 눈에 띈 걸 골라서 가져오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하기사 예전에 학교에도 도서외판원들이 선생님들한테 양해를 구하고 책을 팔곤 했었죠.(선생님들이 뭔가 대가를 받고 기회를 주신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방금 들었네요.)
제가 받은 8~9살때 책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도구와 기계의 원리', '떡배단배', '나는 겁쟁이다', '범의 넋 두손이'. 그리고 언제 받았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자연의 수학적 본성'이라는 책도 받았네요. 과학과 만화와 동화가 모두 들어있네요. 이 책들 중에 제가 가장 재미있게 읽은 책이 바로 떡배단배입니다.
떡배단배의 줄거리는 간단합니다. (그런데 너무 오래되어서 기억이 좀 풍화되었네요...)
갑동이가 머슴 돌쇠랑 같이 섬에 가서 사는데 거기에 단배가 나타납니다. 갑동이는 마을사람들의 물건을 단배랑 바꿔서 단것을 마을 사람들에게 갖다줍니다. 그리고 나중에 떡배가 나타납니다. 떡배도 마을사람들의 물건을 떡으로 바꿔주죠. 이 과정에서 마을사람들은 떡배와 단배에 완전히 종속됩니다. 이가 아파 치과진료를 받고... 단 것을 생산하기 위해 수수깡을 농사짓고(이 부분은 지금 생각해보니 거의 플렌테이션이네요)... 그 과정에서 마을은 떡배를 지지하는 세력과, 단배를 지지하는 세력으로 나누어집니다. 떡배와 단배는 그들에게 무기를 제공하기도 하죠.(어릴 적에 이 부분이 재밌었는데 무기 이름이 '대자 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마을의 갈등이 심화될 때, 머슴 돌쇠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갑니다. 마을사람들은 처음에는 돌쇠를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나중에는 돌쇠에게 감화됩니다. 그리고 떡배와 단배의 최종 전투 이후 마을은 평화로워집니다.(기억으로는 떡배는 모두 떡이 되고, 단배는 모두 단것이 됩니다.)
이 책에서 사람들은 단배에 뭔가를 항의하러갔다가 '엥!' 하고 떡배에 갔다가 다시 '엥'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어릴 적에는 그렇게 말 몇마디에 '엥!'하고 가는 그 표현 자체가 너무 재밌었고, 또 수수깡을 잔뜩 쟁여놓고 부귀를 누리는 갑동이가 부럽기도 하고 뭔가 두서없지만 유치한 포인트들이 많아서 재미있었습니다. 또 그런 모습 가운데 중심을 잡고 있던 돌쇠가 마을사람들에게 하는 말도 멋있었구요.(정확한 문구는 기억이 안나지만 저들은 모두 우리편이 아니고, 우리는 우리가 알아서 살아야 한다는 취지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 정도 말씀드렸으면 다 아시겠지만 떡배와 단배는 외세를 은유합니다. 그리고 돌쇠는 거기서 중심을 잡고 살아가는 자주세력(?)이라고 할 수 있죠. 어떻게 보면 이 책은 자주파(?)의 승리로 읽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마도 마해송씨는 '너무 외세에 의존하지 말자.'는 교훈 딱 그 정도만 말하고 싶은 것 같기는 합니다. 애초에 동화기도 하고, 돌쇠가 뭐 대단한 영도력으로 승리를 이끈 게 아니라 사실 떡배와 단배끼리 자멸했던 거라....
제가 떡배단배를 다시 떠올린 건 바로 일베가 한참 번창하기 시작하던 2010년 즈음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일베라는 용어를 써서 정치글이 될까 두렵네요 ㅠㅠ 그러면 그렇게 처리해주세요) 그 즈음 편가르기가 참 심해졌던 것 같아요. 경제학에서 '성의 대결'이라는 간단한 모형을 배웠을때는 이름이 진짜 구리다 생각했는데 지금을 보면 구린 건 제 머리였구요..유튜브나 블로그나 다 대립이 일상이 되고 일상이 대립이 되는 삶들이 펼쳐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말은 좀 복잡한데... 어느 샌가 니편 내편 가르는게 더 심해진 느낌이에요. '인터넷에는 차별이 없다!'는 이원복 씨의 그림과 달리 네트워크에서는 동종의 사람들이 집결하는 정도가 더 세져버렸고(역시 말콤 글래드웰 센세...) 그러다보니 편가르기가 정말 심해진 세상 같습니다.
그런 세상에서 제가 떡배단배를 다시 떠올린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너는 단배편이냐! 떡배편이냐! 이렇게 사상검증을 당한 돌쇠가 '난 누구편도 아닌데?'하는게 지금 좀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연상이 된게 아닌가 싶어요. 뭐 돌쇠도 떡배가 옳다고 생각했으면 떡배를 지지했을 거고, 단배가 옳다고 생각했으면 단배를 지지했겠지만, 자기가 옳다고 생각해서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처럼... 저는 저도 그렇고 사람들도 누구편이라는 낙인을 스스로 새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저 자신에게 충실하게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정치학에서 '정당일체감'이라는 용어가 있죠. 스포츠에서도 동일감 일체감 엄청 중요하고요. 저 오늘 쇼메가 못해서 너무 슬픕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체감에 자신을 너무 많이 담그거나, 사고를 의탁하지 않고 사람들이 그저 자신에게 충실했으면 좋겠어요. 남에게 충실하고 남을 위해 살아가는게 아니라...
그렇게 저는 떡배단배를 읽었고, 그래서 저는 떡배단배가 생각나는가 봅니다.
잡설
도구와 기계의 원리 : 이 책 진짜 최고입니다. 기계덕후 기질이 보이는 아이에게 선물해줘야 할 책 1위
나는 겁쟁이다 : 이 책도 진짜 은은하게 울렸습니다. 잘난 척하지만 실제로는 초라한 아이의 모습을 보여줘서 ㅠㅠ
자연의 수학적 본성 : 아버지는 왜 이 책을 선물하시고 문과로 가게 만드셨는가 ㅠ 저는 수학이 좋아서 재밌게 읽었습니다.
범의 넋 두손이 : 이 책도 외세에 맞서 싸우는 두손이라는 힘캐 이야기입니다. 마지막에 머리깎고 일본으로 유학가면서 뇌 탑재를 다짐합니다. 저는 정말 재밌었는데 이두호씨 작품입니다.
덧
아버지와 달리 저는 딸내미의 명에 순종하기에 오늘도 옥토넛 책을 사다 진상하였습니다.
몇년만 더 지나봐라...도구와 기계의 원리 꽂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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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기억하는 동화입니다. 마해송 선생님이 살던 시대상도 그렇고, 그냥 노골적인 미국과 소련 패러디죠. 동화의 교훈도 딱 미국도 소련도 못 믿을 놈이니 자주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정도. 세상사가 동화처럼 미소가 치고받아서 서로 공멸했으면 재밌었겠지만 아쉽게도 우리의 현 모습은 떡배를 물리치고 단배와 한 몸이 되서 살아가고 있네요.
네 미소 간 갈등 이야기이긴 하죠. 단배가 꽤 젠틀하게 묘사된 것도 그렇고… 그렇지만 말씀하신대로 미소공멸 자주생존 이런건 동화일테고 마해송 선생님도 진짜 그걸 바랐기보다는 “주체적으로 살자” 말씀하신 것 같아요. 저는 세상에 더 많은 떡배단배들이 생겨났다고 보고 제 식대로 해석했구요. 그나저나 이거 읽으신 분 뵈어서 진짜 반갑네요. 제 주변엔 하나도 없더라구요 ㅠ
제가 같이 있던 전집의 다른 동화들은 기억 안 나고 (뭐, 또 누군가가 거기 있던 동화얘기를 하면 기억날 지도 모르지만요) 떡배 단배를 기억하는 이유도 비슷합니다. 떡배와 단배에서 주는 맛있는 것들의 묘사를 잘 해놨던 거 같고, 그래서 나도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