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이 되고 싶어요 (上편)
-어렸을 적 내 꿈엔
누군가의 팬이 되고 싶던 시절이 있었다. 국민학생에서 초등학생이 되던 시절, 같은 방을 썼던 삼촌은 이문세의 팬이었고, 앞집 형은 듀스의 팬이었고, 옆집 누나는 김원준의 팬이었다. 딱지 친구는 김건모의 팬이었고, 그 친구의 누나는 신승훈의 팬이었으며, 그 누나의 절친은 이승환의 팬이었다. 얼마 전 우리 동네로 이사를 온 형아는 디제이 디오씨의 광팬이었는데, 이런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 서태지와 아이들의 팬이었다.
개중에는 사대주의에 빠져 팝송을 숭상하던 친구들도 있었는데, 나는 그들의 경전마저도 그냥 그랬다. “뭔 말인지도 모를 노래를 왜 듣냐?” 내가 초등학생이던 시절에는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쳐 주지 않았다. 물론 중학교 이후에는 영어를 배운 것 같긴 한데, 나로서는 여전히 팝송은 경음악 같다. 보컬도 뭐, 하나의 악기 아니겠어? 여하튼 당시 나는 누구의 팬이라고 하긴 뭐 했다. 그래도 나름의 경전은 있었으니, 바로 이 모든 노래의 종합선물세트, ‘최신가요베스트’!
1990년대에는 길보드차트가 성행했는데, 길거리 구루마(수레)에서 최신 인기가요 곡을 짜깁기한 테이프를 팔았다. 나는 학교 앞 문방구에서 이 짝퉁 가요모음집을 사서 즐겨 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수요일엔 KBS의 가요톱텐, 토요일엔 MBC 인기가요 베스트50, 일요일엔 SBS 인기가요도 즐겨 봤다. 특히 수요일에는 부모님이 수요예배를 드리러 교회를 가셨기 때문에 매주 놓치지 않고 방송을 봤다. 그 모음집의 히트곡을, TV에 나오는 가수의 인기곡이 좋았고, 꽤나 챙겨 들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나는 인기가요를 좋아할 뿐 누군가의 수록곡까지 챙겨듣는 팬은 아니었다.
삼삼오오 모여 자신의 우상에 대한 간증을 나누는 아이들이 부러웠다. 때때로 종교 갈등이 벌어져 더 위대한 우상을 겨뤘는데, 대개는 쪽수가 많은 쪽이 이겼다. 가끔은 핵주먹 신자를 보유한 종교가 이변을 일으킬 때도 있었지만, 위력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발린 종교인들은 굴욕감을 달래며 열심히 전도에 나섰다. 그들 사이에서 나는 “그 노래도 좋고, 이 노래도 좋고, 다 좋은데?”라고 했고, 신자들은 “어쩌라고?”와 다를 바 없는 “어, 그래.”를 했다. 영혼 없는 중생의 의견은 담임이 정한 급훈과 같았다.
언젠가 한 친구에게 팬이 되는 방법을 물었다. 걔는 별 이상한 걸 묻는다는 식으로 나왔는데, 나는 나의 ‘꾀돌이’ 과자 절반을 왼손에 부어주면서 되물었다. 그러니 걔는 이렇게 물었다.
“요즘 무슨 노래 좋아하냐?”
“글쎄, 유피의 <바다>?”
“그럼, 그 곡이 들어있는 유피 앨범 사서 들어봐.”
그래서 사서 들었는데, <바다>말고는 좋은 곡이 하나도 없었다. <뿌요뿌요>도 인기를 끌었지만, 나는 별로였다. 들을수록 별로였다. 정말 믿을 수 없을 만큼 별로였다. 그 앨범을 샀기 때문에 더 별로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한 푼 두 푼 모았던 그 세월, 나의 꾀돌이, 나의 새콤이달콤이, 나의 아폴로, 나의 치토스! 유피의 팬이 되기 위해 슈퍼마켓을 피했고, 문방구 아저씨의 반기는 인사를 무시하던 그 세월아! 요약하면 ‘내 돈 내놔!’
그 이후 나는 누군가의 팬이 되기를 포기하고, ‘최신가요베스트’를 듣는 삶에 만족하기로 했다. 포기하면 편하다는 말은 정말이었고, 종교다원주의자의 넉넉한 품을 얻었다. 그러고 한참을 잘 살았다. 축구도 하고, 야구도 하고, <삼국지5>도 하고, 《슬램덩크》도 봤다. 그뿐만 아니라, 탁구도 치고, 볼링도 치고, <스타크래프트>도 하고, 《엔젤전설》도 봤다. 그렇게 잘 살아갔는데, 그랬는데, 마른하늘에서 날벼락을 맞았다. 그러니까 내게도 계시가 왔다. 사도 바울이 다마섹으로 가는 노상에서 느닷없이 예수를 만났듯, 나도 추석을 쇠러 간 시골에서 날벼락을 맞았다. 어린이였던 나는 그새 고등학생이 되었는데, 알고 보니 나의 우상은 중졸이었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겠지만, 나는 그게 중요해진다. 바야흐로 때는 2000년 9월 9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