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활병원의 물리치료사로 근무하다 보면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병은 고학력자나 저학력자, 남자나 여자, 부자나 가난한 자를 가리지 않고 찾아오기 때문이다.
(물론 병은 사람을 가리지 않지만 그 이후의 재활이나 병원생활에 있어서는 사람을 가리기도 한다. 이를테면 돈이 많거나 적은 것 등등..)
그래도 재활병원에서 특히나 중추신경계 손상 환자를 마주하다 보면 나보다는 훨씬 윗세대의 어르신들을 치료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뇌졸중이라는 것이 아무래도 60대 이상에서 빈번하게 발병하다보니 어쩔 수 없으리라.
그런 면에서 올해 2월에 입원한 그녀는 참 특이한 환자였다.
환자정보 기록지를 보면서 아찔했던 환자였으니 말이다.
나이는 40대 초반에 두 딸을 둔, 자신의 소규모의 뷰티샵을 운영했던 그녀는 10년전부터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모 대학병원의 정신과 진료를 꾸준히 받으면서 우울증 약을 복용하고 있었고 주 1회는 심리상담도 받았다고 했다.
하지만 코로나가 터지고 자신의 뷰티샵은 점점 운영이 어려워지고 대학병원에서의 진료를 받기도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또한 자신의 가장 큰 버팀목이던 남편(육군 상사)의 근무지 이동으로 같이 지낼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그녀는 해선 안되는 선택을 했다.
병명은 저산소성 뇌손상.
환자력을 주욱 읽어보니 자살시도 환자였다.
나름 10년이 넘는 경력의 물리치료사였지만 자살시도 환자는 맡아본 적이 없기에 당황스러웠다.
그녀의 치료를 처음 하게 된 날.
그녀는 사지마비 환자가 사용하는 커다란 휠체어에 앉아서 눈에 초점도 없이 나와 마주했다.
저산소성 뇌손상 환자다 보니 사지의 움직임이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타났고 고개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대학병원 중환자실에서 12일, 일반 병실에서 10일 정도를 지내고 우리 병원으로 온 상태였기에 당연히 좋을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그녀의 보호자는 강원도로 배치되었던 남편이었는데, 다행히 군대에 가족돌봄 휴직계를 제출하고 아내를 돌볼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아내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것을 차분히 받아들이고 있었고 삶이 계속 이어질 수 있음에 감사한다고 했다.
다만 그녀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을 처음 발견한 것이 10살밖에 되지 않은 큰 딸이어서 큰 딸도 심리치료를 받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사실 그는 그녀가 너무 미웠다고 했지만 그래도 중환자실에서 처음 눈을 떴던 그 순간 그 미움이 다 사라졌다고 했다.
그녀는 참 다행이었다.
그녀를 성심성의껏 돌봐주는 남편이 있었으니.
2월 초부터 시작된 그녀와 나의 재활치료는 생각보다 굉장히 진행속도가 빨랐다.
그녀는 미세한 손의 움직임이나 균형조절에서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운동을 시작한지 2주만에 혼자서 매트에 앉아 유지하는게 가능해졌다.
처음에는 담당 치료사인 나의 얼굴도 나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고 본인이 위치한 곳이 어디인지도 알지 못하던 그녀는 3월 중반부터 내 양쪽
어깨를 잡고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기 시작했고, 본인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자신의 병실 호수가 몇호인지 기억했다.
확실히 젊은 연령과 극단적인 시도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발견된 덕분인지 회복속도가 나도 놀랄 정도로 빨랐다.
어느 덧 그녀는 나와 운동을 하는 중간중간 이런저런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빠르게 회복했다.
4월 초가 되어서는 바퀴가 달린 보행기를 잡고 치료실을 3바퀴 이상 걸을 수 있게 되었고 혼자서 식사도 가능하게 되었다.
식판을 혼자서 내놓을 수 있었고 오늘 아침에 어떤 반찬이 나왔는지 기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녀는 아직도 자신이 왜 저산소성 뇌손상이 왔는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가족들도 철저하게 그녀에게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음을 알리지 않았기에 나 역시 그녀에게 발병 이유를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녀는 자신이 왜 병원에 왔는지보다는 어떻게 해야 빨리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에 더 큰 관심을 가졌기에 그 이상 내게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5월이 되어서 드디어 보행보조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걷기 시작했다.
재활에 사용되는 자전거 대신 트레드밀을 이용할 수 있을 정도로 빠르게 회복되었다.
그녀는 잘 걷기 시작한 이후 나에게 하나하나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녀의 집은 지은 지 10년이 조금 넘은 2층 주택이었고 그녀의 집 근처 아파트에 친정부모님이 살고 계신다고 했다.
집에 돌아가기 위해서는 계단을 오르내릴 수 있어야 한다고 나에게 얘기했고 나는 조금 더 보행이 수월해지면 계단연습을 하자고 했다.
구체적인 목표가 잡힌 그녀는 정말 열심히 재활에 몰두했다.
2월만 해도 제대로 앉아있지도 못했던 그녀는 6월이 되었을 때 처음으로 자신의 집으로 외출 할 수 있었다.
코로나 때문에 병원에 입원했던 환자들의 외출과 외박이 통제되었는데 6월부터는 외출과 외박이 가능해졌고 그녀는 남편과 함께 외출을 했다.
지하철을 타고 내린 후 지하철 역에서 계단을 오르고 자신의 집까지 갈 수 있었다고 내게 기쁜듯 말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녀는 외출을 다녀 온 후 조그마한 메모장에 적어온 메모를 나에게 보여주었다.
자신이 집에 돌아가서 하루 생활을 해보니 불편한게 너무 많았고 이 불편한 점들을 위주로 훈련했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나 역시 그녀의 의견에 동의했고 그녀는 그 날부터 바로 오늘까지 정말 열심히 재활치료를 받았다.
그리고 입원한 지 184일 되는 오늘 그녀는 드디어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병원생활을 마무리했다.
마지막 치료시간에 나는 그녀에게 집에 가서 할 수 있는 운동들을 간단하게 교육했다.
물론 그녀의 퇴원은 보름 전부터 확정되었던 것이기에 오늘 뿐 아니라 그 전부터 조금씩 교육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녀는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정말 열심히 연습하고 훈련을 했다.
그런 그녀가 치료시간이 10분정도 남았을 때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그녀는 자신이 왜 병원에 입원했는지 얼마 전 알게되었다고 했다.
사실 알게되었다는 표현보다는 기억을 떠올렸다는게 맞는 표현같다.
자신은 삶의 의욕을 잃어서 해서는 안되는 선택을 했고 그 죄값을 지금 받고 있는 것이라 말했다.
내가 뭐라 말을 섞으면 안될 것 같았기에 잠자코 듣고 있었는데 그녀의 어깨가 떨리기 시작했다.
후회한다고.. 너무 후회한다고.. 하지만 그 후회를 기억하기에 이제는 다시 그런 나쁜 선택은 하지 않으리라고.
그녀는 이런 말을 하면 이상한 것 같지만 나에게도 절대 그런 선택은 생각도 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 말을 마친 그녀는 울음을 삼키지 못하고 토해내었고 나는 졸지에 치료실에서 환자를 울린 치료사가 되어버렸다.
나는 그저 그녀에게 너무 고생하셨다는 말 이외에는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잘못된 선택을 되돌리기 위해 정말 많은 노력을 했다. 그리고 그녀는 드디어 자신의 삶을 다시 되찾았다.
그렇게 나에게 삶의 중요성과 극단적인 선택이 가져다주는 후회를 알려준 그녀는 오늘 오후 3시 드디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입원복이 아닌 사복으로 갈아 입은 그녀는 내게 고마웠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그녀에게 다시는 만나지 않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그녀가 나를 다시 만나게 되는 건 아마도 그녀의 상태가 좋지 않을 때 일어날 일이기에.
그녀가 울면서 말했다.
삶을 버리려 했던 자신은 너무 큰 후회와 고통을 겪었다고.
그리고 그 선택을 되돌리는데 너무나 많은 시간과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의 희생이 필요했다고.
6개월동안 나와 함께 자신의 삶을 찾기 위해 노력했던 그녀는 나에게 삶의 무게를 다시 한번 각인시켜주고 환하게 웃으며 떠나갔다.
잘가요.
언제 어디서든 행복하시기를 바랄게요.
그리고 언제 어디서든 나도 행복할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