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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02/28 19:18:13
Name nameless..
Subject [기타] [기타] 비즈니스 모델 깍던 노인
[비즈니스 모델 깎던 노인]

벌써 3년 전이다. 창업을 결심한 지 얼마 안되서 대치동 인근에 내려가 살 때다. 한 달에 한 번 꼴로 있는 고벤처에 참여하기 위해 광화문에 갔다 오는 길, 청량리역으로 가기 위해 동대문에서 일단 전차를 내려야 했다. 그때 동대문 맞은편 길가에 앉아서 사업모델을 깎거나 다듬어 파는 노인이 있었다. 안그래도 고벤처 멘토들에게 아이템이 부실하다는 이야기를 잔뜩 듣고 오는 길이었다. 더불어 BM(business model)이 명확하지 않다거나 마케팅 방안이 확실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던 차에 사업모델을 다듬어볼 요량으로 깎아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런데 값을 굉장히 비싸게 부르는 것 같았다. 얼마전 00만원하던 사업모델을 00만원이나 받는게 아닌가.

『좀 싸게 해줄 수 없습니까?』 했더니,
『사업 모델 하나 가지고 에누리 하겠소? 비싸거든 다른 데 가 사우. 요즘 가격이 올라 이 이하로는 안되우』 대단히 무뚝뚝한 노인이었다. 더 값을 흥정하지도 못하고 잘 깎아나 달라고만 부탁했다. 그는 잠자코 열심히 깎고 있었다. 처음에는 빨리 깎는 것 같 더니, 저물도록 이리 돌려 보고 저리 돌려 보고 굼뜨기 시작하더니, 마냥 늑장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만하면 다 됐는데, 자꾸만 더 깎고 있었다. 인제 다 됐으니 그냥 달라고 해도 통 못 들은 척 대꾸가 없다. 사실 막차 시간이 빠듯해 왔다. 갑갑하고 지루하고 인제는 초조할 지경이었다.

『더 깎지 않아도 좋으니 그만 주십시오』
라고 했더니, 화를 버럭 내며,
『끓을 만큼 끓어야 밥이 되지, 생쌀이 재촉한다고 밥 되나』 한다. 나도 기가 막혀서,
『사업할 사람이 좋다는데 무얼 더 깎는다는 말이오? 노인장, 외고집이시구먼, 차 시간이 없다니까요』

노인은 퉁명스럽게,

『다른 데 가 사우. 난 안 팔겠소』 하고 내뱉는다.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그냥 갈 수도 없고, 차 시간은 어차피 틀린 것 같고 해서, 될 대로 되라고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마음대로 깎아 보시오』
『글쎄, 재촉을 하면 점점 거칠고 늦어진다니까. 물건이란 제대로 만들어야 지, 깎다가 놓치면 되나』

좀 누그러진 말씨다. 이번에는 깎던 것을 숫제 무릎에다 놓고 태연스럽게 곰방대에 담배를 담아 피우고 있지 않은가. 나도 그만 지쳐 버려 구경꾼이 되고 말았다. 노인은 비즈니스의 형태가 잡혀지자 기존 사업 아이템에서 세계를 정복할 것 처럼 써놓은 부분을 칼로 제거하고 핵심파트너, 핵심활동, 핵심자원, 가치제안, 비용구조, 수익원 을 고려해 복잡하기 그지없었던 주변것들을 제거했으며, 새로운 BM을 올려놓고, 원형으로 돌리면서 표면을 아주조금 갈아냈다. 대략 10 바퀴 미만으로 돌려서 갈아낸 뒤 아이템 위에 BM을 살포시 올려놓고 엄지손가락으로 꾹 눌러서 부착시켰다. 30 초 정도 손가락으로 누르고 난 담에 그늘에서 다 붙을때 까지 건조시켰다. 기존 여러 기업이 하던 것을 그대로 따라해도 될 것을 시간을 끄는것 같았다. 저리 시간을 끌다니. 그렇다고 기다린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그냥 내버려 두었다. 남들 같으면 끝났다고 할 형태였음에도 노인은 인앱결제에서 취소, 황불 등 부분까지 손보고 있었다. 결제만 하게 하면 될것을. 그리고 모나지 않게 둥글게 비즈니스 모델의 모양을 만들고 난뒤 또 주변을 다듬기 시작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기존 아이디어를 크게 손상시키는 것은 아닌것 같았다. 그리고 사업과정에서 생각한 적도 없었던 CI (Corporate Identity)를 가미해 싹싹 밀어올리며 고르게 다듬었다. 마지막으로, 고객관계와 마케팅 채널 등을 가미해 단단하게 마무리했다. 더불어 『사업은 뜨내기 손님을  겨냥한 서비스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단골손님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라우.』라고 혼잣말까지 뇌까린다. 얼마 후에야 비즈니스 아이템을 들고 이리저리 돌려 보더니 다 됐다고 내준다. 다 되기는 아까부터 다 돼 있었다.

차를 놓치고 다음 차로 가야 하는 나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 따위로 장사를 해 가지고 장사가 될 턱이 없다. 손님 본위가 아니고 제 본위다. 그래 가지고 값만 되게 부른다. 상도덕도 모르고 불친절하고 무뚝뚝한 노인 이다」 생각할수록 화증이 났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다보니 노인은 태연히 허리를 펴고 동대문 지붕 추녀를 바라보고 섰다. 그 때, 그 바라보고 섰는 옆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노인다워 보이고, 부드러운 눈매와 흰 수염에 내 마음은 약간 누그러졌다. 노인에 대한 멸시와 증오도 감쇄된 셈이다.

다음날 지역 비즈니스센터 대표들에게 새로깍은 비지니스 모델을 내놨더니, 이쁘게 깎았다고 야단이다. 자신들이 알면서도 하지 못했던 것들이 반영되어 있어 이 것을 가지고  IR(investor relations)을 해도 될것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난번과 별로 다른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10년 차 대표의 설명을 들어 보니, 사업모델이 너무 두껍고 배가 너무 부르면 빠른 대응이 힘들고 같은 형태라도 힘이 들며, 너무 얇아 연필처럼 다음어놓으면 사업자체가 쉽지 않단다. 더군다나 정성스레 붙여놓은 BM은 잘 다듬어 놓아 당장 서비스가 시작된다 하더라도 문제가 전혀 없을 정도란다. 더군다나 이 비즈니스 모델을 깍고 다듬은 사람의 내공이 보통이 아니라고 한다. 대충 모양을 잡은 것이 아니라 정성이 들어갔다는 것이다. 더불어 요렇게 아이템에 맞게 알맞은 것은 좀체로 만나기가 어렵다는 말도 부연했다. 나는 비로소 마음이 확 풀렸다. 그리고 그 노인에 대한 내 태도를 뉘우쳤다. 참으로 미안했다.

요새 비즈니스 모델은 겉모습만 그럴듯해 관리를 제대로 안해 휘어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가 없다. 예전에는 사업 아이템이 생기면 일일이 시행착오를 거쳐 비지니스 모델을 완성해 나갔다. 비즈니스 모델를 붙일 때도 회사의 마진과 고객의 목소리를 잘 녹여서 적정선을 찾았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이렇게 하기를 여러번 한 뒤에 비로소 붙인다. 이것을 소라 붙인다고 한다. 물론 날짜가 걸린다. 그러나 요새는 다른이들이 하는 것을 그대로 차용해 그대로 붙인다. 금방 붙는다. 그러나 견고하지가 못하고 쉬 휘어져버린다. 그렇지만 요새 남이 보지도 않는 것을 며칠씩 걸려 가며 소라 붙일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다. 藥材(약재)만 해도 그렇다. 옛날에는 熟地黃(숙지황)을 사면 보통 것은 얼 마, 윗길은 얼마, 값으로 구별했고, 九蒸九日暴(구증구포)한 것은 세 배 이 상 비싸다. 구증구포란 아홉번 쪄내고 말린 것이다. 눈으로 봐서는 다섯 번 을 쪘는지 열 번을 쪘는지 알 수가 없다. 단지 말을 믿고 사는 것이다. 신용이다. 지금은 그런 말조차 없다. 어느 누가 남이 보지도 않는데 아홉 번 씩 찔 이도 없고, 또 그것을 믿고 세 배씩 값을 줄 사람도 없다. 옛날 사람 들은 흥정은 흥정이요, 생계는 생계지만, 물건을 만드는 그 순간만은 오직 아름다운 물건을 만든다는 그것에만 열중했다. 그리고 스스로 보람을 느꼈 다. 그렇게 순수하게 심혈을 기울여 사업을 만들어 냈다.

이 비즈니스 모델도 그런 심정에서 만들었을 것이다. 나는 그 노인에 대해서 죄를 지은 것 같은 괴로움을 느꼈다. 『그 따위로 해서 무슨 장사를 해 먹는담 』 하던 말은 『그런 노인이 나 같은 젊은이에게 멸시와 증오를 받는 세상에서, 어떻게 아름다운 물건이 탄생할 수 있담』 하는 말로 바뀌어졌다. 나는 그 노인을 찾아가서 식사라도 대접하며 진심으로 사과해야겠다 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다음 일요일에 고벤처 차이나포럼이 있어 상경하는 길로 그 노인을 찾았다. 그러나 그 노인이 앉았던 자리에 노인은 있지 아니했다. 나는 그 노인이 앉 았던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허전하고 서운했다. 내 마음은 사과드릴 길 이 없어 안타까웠다. 맞은편 동대문의 지붕 추녀를 바라다보았다. 푸른 창 공에 날아갈 듯한 추녀 끝으로 흰 뭉게구름이 두덩어리 피어나고 있었다. 더불어 노을에 물든 두 덩어리의 붉은 구름 또한 보였다. 구름 사이로 날아다니는 몇 마리의 기러기가 점처럼 보이면서 아, 그때 그 노 인이 저 구름을 보고 있었구나. 열심히 비즈니스 모델을 깎다가 우연히 추녀 끝의 구름을 바라보며 빠져있던 노인의 거룩한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무심히 「採菊東籬不 (채국동리불)다가 悠然見南山(유연견남산)!」 도연명의 시구가 새어 나왔다.

오늘, 창업관련 행사에 갔더니 성공한 것으로 잘알려진 스타트업 대표가 비즈니스 모델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었다. 전에 없이 명쾌하게 이해가 되는 내용이다. 그는 누가봐도 멋진 사업 모델을 만들어 성공한 것이 아니라 레드오션에서 견실하게 자리를 잡아 디스럽트를 한 인물이다. 감탄성이 나올정도의 아이템과 아이디어는 여러번 보아왔지만 그때 노인과 같이 정성들여 만든 사업아이템과 비즈니스모델을 구경한 지는 참 오래다. 문득 3년 전 비즈니스 모델 깎던 노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플래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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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less..
14/02/28 20:09
수정 아이콘
오늘 고벤처포럼과 비슷한 행사인 디캠프에 왔습니다.
첫 발표자분은 스토리가 담긴 성인용품 회사를 창업하신 분이네요.
발표자는 어여쁜 20대 초반 여성분인데, 현재 발표 후 한국 최고의 벤처캐피탈리스트들과 뜨거운 논쟁중입니다.
후끈 후끈한 열기가 느껴지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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