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시오, 적어도 얼굴만이라도 좀 보고 가자고 하잖소."
주인은 들은체 만체 담배만을 연신 피워물고 있다.
"이보소, 적어도 새끼를 넷이나 낳아주고 비가오나 눈이 오나 밭일까지 나갔던 나한테 정말 이러기요? 당신도 자식이 있으면 이럴 수는 없는거 아뇨."
철컹
이중 잠금 장치인가? 분명 우리 잠그는 소리는 아까 전에도 들었다. 마치 내 머리에 겨눈 총이 장전되는 듯한 끔찍한 소리. 어쩌면 차 문이 닫히는 소리일지도 모른다. 시동이 걸리기 전 쇠창살 사이로라도 얼굴을 내밀어보고자 했으나 쇠창살의 간격은 앞다리가 하나 빠져나갈 정도로 좁다. 어떻게든 우사를 바라보고자 얼굴을 들이미니 맥아리 없이 우리가 열린다.
주인은 아까 저만치 치워둔 받침대를 낑낑거리며 우리 앞으로 가지고 오고 있었다.
"10분이다. 지금부터 잰다 빨리 다녀와라."
서른 걸음. 우사에서 트럭까지 올때 세어본 걸음 수다. 하지만 세상이 도는지 어두컴컴한 우리 안에서 나와서인지 우사까지 백걸음이 멀어보인다. 석삼이 얼굴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엄마 어디 갔다와? 밭일 다녀오는거야? 오늘 쇠죽에 풀만 들어서 먹다 말았어. 왜 우리 집은 풀만 주고 그래?"
지친다. 우리가 왜 조짚과 볏짚을 먹어야 하는지, 사료랍시고 주는걸 함부로 먹었다간 어떻게 되는지 수백 수천번을 말했건만 석삼이는 아직도 이런 생떼를 쓴다.
"우린 원래 풀만 먹어야 되는거 모르니? 대체 몇 번을 얘길 해야되는데. 너네 큰형 동물성 사료 먹었다 뇌에 구멍 송송나서 고무다리마냥 맨날 비틀거리고 우사 벽에 머리 쳐박다가 픽 쓰러져 죽었거 기억 안 나? 석삼이 반찬타령 지긋지긋해서 엄마 저 멀리 간다."
늘 그렇듯 밭일 다녀온 엄마에게 그날 있었던 일을 말하며 어리광 부렸을 뿐인 석삼이한테 화풀이를 하고 있다. 못난 애미. 1++, 아니 1+는 커녕 3등급으로 개사료로 쓰여도 시원찮을 나. 파랑눈 애비애미를 뒀지만 한국 농가에서 자랐으니 한우라고 자랑스레 떠들던 주인과 우사에서 양것 왔다, 양공주 고 홈 소리를 들으며 온갖 천대와 구박으로 이어진 지긋지긋한 삶의 끝을 앞둔 채 자식에게 작별 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등외품.
"엄마 왜 그래? 석삼이 다신 안 그럴게 그런 말 하지 마 엄마. 석삼이 잘못했어 쇠죽 다 먹을게."
입이 열어지지 않는다. 눈치를 살피며 허겁지겁 사료통에 코를 쳐박는 석삼이를 더이상 쳐다보기조차 어렵다. 숨이 막힌다.
"석삼이 쇠죽 잘 먹고... 주인 아저씨 말 잘 듣는단 얘기 들으면 열밤 정도 안에 올거야. 아저씨 통해서 얘기 다 들을거니까 시킨대로 하고 있어."
허겁지겁 쇠죽을 들이키느라 사레 들려 컥컥대며 대답조차 하지 못하는 석삼이를 뒤로한채 트럭으로 발길을 돌린다. 뭔가 답을 하려는 것 같지만 들리지 않는다. 스물일곱, 스물여섯, 스물.. 아까 이미 한 번 셌던 서른 걸음을 다시 세는 의미가 있는지 궁금하다.
5분도 채 되지 않아 돌아온 모습을 보며 주인은 아무말 없이 새 담배를 꺼내 문다. 트럭에 올라타자 우리 문을 닫고 나서야 담배에 불을 붙인다.
"적당히 피우쇼. 우골탑 그렇게 쌓는게 아저씨 좋자는게 아니라 자식들 잘 되는 꼴 오래오래 보자고 하는거 아뇨. 그렇게 피워 제끼단 나보다도 단명할거요."
못 들은체 딴청을 피던 주인은 이내 담배를 바닥에 내던지고 우리를 잠근다. 하지만 보나마나 차에 올라타자 마자 다시 피워 물겠지.
차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시동 소리가 들린다. 트럭의 금속 바닥이 차지만 편히 엎드려 본다.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 첫째가 소싸움에 우승했다고 의기양양하던 다다음날 육우로 팔려갈때도, 둘째가 시집간다며 꽃단장 한채 트럭에 올라 탈때도, 애들 아빠란 작자가 옆집 알콜 중독자가 주는 막걸리를 병째로 받아 마시고 경운기에 치어 죽었때도, 셋째가 '머리가 아뿌다'며 우사 벽에 머리를 쿵쿵 찍으며 비틀거릴때도, 넷째가 쇠죽에 풀만 들었다는 작별인사를 할때도 난 밭에서 걷고 있거나 우사에 멍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다만 이젠 더이상 서 있을 필요도, 걸을 필요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