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림픽 여자배구 이야기3 - 거대한 반격
. 이번 올림픽 경기 가운데 가장 의외였던 장면은 일본전 승리 후 라바리니 감독이 코트로 뛰어들어가 정신없이 뛰며 기뻐하던 모습이었다. 누가 보면 메달이라도 딴 것 같은 분위기였다. 물론 목표로 설정했던 8강 진출을 확정지은 것이기도 하고, 인터뷰에서 한국인들에게 한일전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흥분했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내가 보기엔 그와는 다른 약간 더 개인적인 이유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 이걸 이해하려면 우리 여자 배구가 목표로 삼았다는 ‘8강’이 어떤 의미인지를 먼저 생각해봐야 한다. 대개 ‘목표’라고 하면 자신이 실제로 이룰 수 있는 것보다 적어도 한 단계쯤 위의 무언가를 의미한다. 이번 올림픽에서 여자 배구는 A조, B조 각 6팀 씩 12팀이 출전해서 상위 네팀씩이 8강에 진출하는 시스템이었으니 ‘8강 목표’란 ‘조예선 통과’를 의미하고 이를 뒤집어 이야기하자면 현실적으로는 조예선 통과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는 뜻이 된다.
. 기억이 희미해지셨을지 모르겠지만 2019년에 있었던 대륙간 예선전에서 사실 우리팀은 예선을 통과하기에도 아슬아슬한 전력이었다. 심지어 지난 글에 언급했던 쌍둥이가 있었음에도 그랬다. 태국과의 경기를 온국민이 마음졸이며 보던 기억이 나시는지? 지금 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최상의 전력인데도 올림픽 출전조차 간당간당했으니 전력의 절반이 무너진 상황에서 조예선을 통과한다는 것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기약없는 희망이었다. 그래서 멋지게 말하자면 ‘8강 진출’이지만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예선만 통과하면 성공인데 쉽진 않을 것 같아요’가 자그마치 ‘목표’로 설정된 것이다.
. 이 상황에서 우리 팀에서 상당히 큰 행운이 따랐다. 조편성이 대단히 유리하게 된 것이다. 이번 올림픽의 조 편성은 다음과 같다.
- A조 : 일본, 세르비아, 브라질, 한국, 도미니카공화국, 케냐
- B조 : 중국, 미국, 러시아, 이탈리아, 아르헨티나, 터키
. 우와, B조는 정말 해도해도 너무하지 않은가? 혹시 잘 모르시는 분은 ‘그래도 중국은 쫌 해볼만하지 않은가요?’ 하실지 모르겠는데 축구와 달리 배구는 중국이 현재 전세계 랭킹포인트 1위고 심지어 지난 리우올림픽 금메달을 차지한 디펜딩 챔피언이다. B조의 살벌함은 1위인 중국이 예선에서 탈락해버렸다는 것으로 충분히 설명이 될 듯 하다.
. 다행히 A조는 김연경의 표현을 빌자면 ‘그래도 해볼만’한 구성이다.(‘그래도’가 좀 슬프게 들리긴 하지만..) 4위 안에 들려면 예선 5경기 가운데 적어도 3경기를 잡아야 하는데 일단 세르비아와 브라질은 프리패스라고 보고 케냐는 잡을 수 있다고 판단하면 남는 것은 일본과 도미니카공화국이다. 우리가 풀세트로 잡았던 일본을 세트 스코어 3:1, 게임 양상으로 보면 상당히 일방적으로 잡아낸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세계 랭킹 7위의 도미니카 공화국은 상당한 강국이다. 게다가 우리 선수들이 힘들어하는 파워 위주의 플레이를 펼치는 팀이기도 하다.
. 이에 비하면 일본은 세계 랭킹은 도미니카보다 더 높지만(4위) 우리 팀보다 평균 신장이 낮고 세대 교체로 들어온 젊은 선수들의 경험이 조금 부족하다는 한계가 있어서 치밀하게 준비한다면 승부를 해볼 수도 있어보였다. 속마음까지야 모르겠지만 내가 라바리니 감독이라면 이렇게 케냐 1승, 도미니카는(당연히 준비는 하겠지만) 하늘에 맡기고, 일본전에 승부를 본다, 그러면 2승으로 아쉽게 탈락하거나 천우신조로 세 전투에 모두 승리하면 8강 진출, 이렇게 계산을 내고 ‘8강 목표’를 내걸었을 것 같다.
. 결국 모든 계산이 집중된 이번 올림픽 최고의 핵심 경기가 한일전이었던 것이다. 이를 위해 라바리니 감독은 치밀하게 준비를 해나갔다. 불과 몇 달 전인 5월 27일 우리 팀은 일본을 맞아 3:0으로 셧아웃 패배했다. ‘쌍둥이 폭풍’으로 팀이 초토화된 시기인 탓도 있었지만 경기 내용을 가만히 뜯어보면 라바리니 감독이 매 세트, 심지어 세트 중에도 계속 세터를 비롯한 여러 선수들을 바꾸면서 다양한 실험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장은 욕을 먹더라도 데이터를 축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왠지 히딩크의 ‘오대빵’ 행진이 중첩되어 보인다. 그땐 히딩크가 정말 거하게 국민적인 욕을 먹었는데 라바리니는 상황이 상황인지라 ‘국민적 압박’을 안받았던 것은 쌍둥이의 기여(?)라고 해야 하려나.
. 라바리니의 결론은 ‘공격적 배구’였고 그 핵심은 ‘서브’였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미 통상 공격의 옵션들은 한계가 명확한 상황이라면 남은 카드는 서브밖에 없다고 본 것이다. ‘공격적 서브’라면 자동으로 ‘스파이크 서브’를 떠올리시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역시 자동으로 장윤창... 다시 자동으로 고려증권... 아아, 이게 아니다 정신을 차리자.
. 현대 배구에서는 무조건 세게 때리는 것만이 공격옵션이 아니다. 서브를 길게 때려서 베이스라인 근처로 붙여 ‘이걸 받아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하게 만들거나 반대로 엄청나게 짧게 때려서 후위의 리시버들이 못받게 만들 수도 있다. ‘플로터 서브’라고 해서 공의 가운데를 손바닥으로 강하게 때리면 무회전으로 공이 날아가면서 공이 좌우로 마구 흔들린다. 야구의 ‘너클볼’을 생각하시면 된다. 이 서브가 실제로 공의 궤적을 흔들어 놓을 정도가 되려면 강하게 직선으로 공이 뻗어야 하기 때문에 높이가 부족해서 네트에 걸릴 위험이 있다. 그래서 통상 점프를 하면서 때리기 때문에 ‘점프 플로터 서브’라고 부른다.
이 서브를 가장 위력적으로-혹은 선수들 표현에 의하면 가장 지저분하게 구사하는 선수가 안혜진 선수다. 오늘 경기를 보실때 안혜진의 서브를 유심히 보시면 도움닫기를 하는 대기구역 끄트머리 모서리에서 대각선으로 공을 들고 뛰어나온다. 이러면 공이 진행방향으로 계속 이동하려는 관성이 생기는데 여기에다가 점프 플로터를 강하게 때리는 것이다. 안그래도 플로터 서브는 공이 흔들거리는데 공의 궤적 자체가 대각선으로 꼬여있으니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죽을 맛이다. 게다가 공을 타격하는 순간 손바닥의 움직임으로 여기에 좌,우, 아래의 방향성도 줄 수 있기 때문에 국내 리그에서 안혜진 선수는 이 서브로 많은 에이스를 냈다.
. 하지만 선수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가장 받기 어려운 서브’는 네트 바로 위를 스치고 들어오는 서브다. 공이 걸릴까 말까 혼란스럽기도 하지만 아무리 키가 큰 선수도 네트보다 시선이 위에 있지는 않기 때문에 공이 순간적으로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서브는 당연히 매우 위험하다.
네트에 걸릴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일반인들의 상식으로는 ‘아니, 그냥 상대방 코트에 공을 넘겨주는건데 그걸 못하나?’하고 비난할 여지도 많고 긴장하며 플레이를 준비하던 팀 동료들도 맥이 풀리기 때문에 서브를 실수하면 선수들이 자기 가슴에 한 손을 가져다 대고 다른 한손을 올리며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라고 제스추어를 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래서 왠만하면 무난하게 서브를 넣는 선수들이 프로팀에서도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 그런데 라바리니는 아무리 실수하더라도 반드시 공을 낮게 넣으라고 강제했다. 가끔 서브가 약해지면 ‘우린 여기 공격하러 온거다’라고 질타하기도 했다고 한다. 더 나아가, 통상 ‘네트를 스치는 서브’는 공을 떨어뜨리기 위해 약하게 넣기 마련인데 그러면 다 받을 수 있으니까 낮고, 강하고, 길게 쏘라고 주문했다. 국내 리그를 꾸준히 보신 분들이라면 이번 올림픽에서 우리 선수들의 서브, 특히 염혜선과 터키전에서 역전을 만든 박은진의 서브가 리그에서와는 달리 강하고, 낮고, 길게 뻗는 것을 보셨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안혜진과 같은 고급 서브는 단시간에 익히기 어렵지만 궤적을 낮추어 강하게 치는 서브는 실패해도 욕먹지 않는 분위기만 만든다면 연습을 통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 여기서 그치지 않고 라바리니는 서브의 코스까지 일일이 지정했다. 링크한 사진은 ‘라바리니식 배구’의 특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귀한 자료다. 라바리니의 코트 복장은 전력분석팀과 실시간으로 소통하는 인이어 이어폰과 마이크, 한 손에 큼지막한 작전기록지, 그리고 아이패드다. 라바리니는 아이패드에 엄청난 데이터, 동영상 자료를 넣어가지고 다니면서 수시로 분석하고 선수들에게 작전을 지시하거나 설명할때도 이 자료들을 직접 보여주면서 소통한다고 한다. 이러한 방대한 전력분석으로 작전을 아주 세심하게 짜는데 어떤 선수는 스파이크 도움닫기의 시작 지점과 걸음수까지 지정하는 것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감독의 말대로 한 걸음을 줄였더니 스파이크의 질이 완전히 달라지더라나.
. 제일 위 사진의 장면은 단순한 작전지시가 아니라 라바리니가 손가락으로 서브를 꽂아넣을 선수를 직접 지명하는 모습이다. 이번 올림픽 특히 한일전에서 우리 선수들은 매번 이렇게 직접 지정을 받은 위치로 서브를 꽂아넣었다고 한다. 우리 리그에서도 ‘한 놈만 팬다’ 분위기로 이른바 ‘목적타 서브’를 넣는 경우는 있지만 이렇게 서버, 로테이션 상태에 따라 번번이 리시버를 지정해서, 게다가 코스를 지정했지만 절대 약하게 때리면 안되고 낮게, 빠르게, 길게 서브를 때리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이걸 일일이 지시하는 사람이나, 지시받은 대로 어김없이 꽂아넣는 사람이나 인간계의 존재로 보이지는 않는다.
. 그리고 한일전에서는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운이 따랐다. 일본팀의 에이스인 코가 사리나 선수가 첫 경기에서 부상을 당한 것이다. 선수가 부상을 당한 것을 ‘행운’이라고 말하는 게 정말 미안하긴 하지만 그만큼 이 선수는 위협적인 존재였다. 휠체어를 타고 나갈만큼 심하게 다리를 다쳤는데도 며칠 후에 벌어진 우리나라와의 경기에서 자그마치 27점을 꽂아넣었으니 제 컨디션이었으면 어쩔뻔 했나 아찔하다.
. 결국 한일전은 그렇게 피를 말리는 계산과 준비와 연습 끝에 ‘안되는 것을 되게 한’ 경기였으니 라바리니가 금메달을 딴 것처럼 흥분한 것도 당연하다. 그의 입장에서는 마치 상하좌우로 칼날이 난무하는 좁은 통로를 말도 안되는 계산을 통해 발견한 유일한 통로로 돌파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내가 틀리지 않았어, 우리가 틀리지 않았어!’라고 머릿속으로 한없이 외치지 않았을까?
. 하지만 그렇게 감독 한 사람의 계산과 훈련으로 뚫릴 문이었다면 그리 대단한 벽이라고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언제나 도상훈련과 실전 사이에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벽이 존재한다. 일본팀이라고 아이패드가 없었겠나? 터키팀이라고 낮고 빠른 서브가 위협적이라는 걸 몰랐겠나?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큰 것은 언제나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이다. 이제 올림픽 여자배구 이야기의 핵심이자 마지막 이야기, ‘보이지 않는 힘’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보자.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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