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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9/07/19 12:29:04
Name aurelius
Subject [역사] 스페인 유대인들의 역사 (수정됨)
철학으로 유명한 바루흐 스피노자(Baruch Spinoza)
비교우위 경제학으로 유명한 데이빗 리카도(David Ricardo)
그리고 대영제국의 수상 벤야민 디스라엘리(Benjamin Disraeli)

이 3명의 공통점은 셰파르딤 유대인들의 후손이라는 점입니다.
현재 이스라엘을 구성하는 유대인들의 80%는 아슈케나지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셰파르딤 유대인은 우리에게 잘 와닿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실 유럽의 중세와 근세를 이끈 것은 바로 이 셰파르딤 유대인들입니다. 이들의 역사를 알아보면 정말 놀라운 사실들을 몇가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셰파르딤(Sephardim), 그들은 어디에서 왔는가?

셰파르딤 유대인은 지금의 스페인에 기반을 두었던 유대인들을 일컫는 명칭입니다. 셰파르딤이라는 단어 자체가 히스파니아, 스페인을 뜻한다고 합니다. 이들은 그럼 언제 스페인에 정착했던 것일까요?

확실한 학설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기원에 대한 학설은 여러가지입니다. 가장 확실한 사료에 의하면 로마 티투스 황제 시대 때 대거 이주했다고 하는데 다른 학설에 의하면 바빌론 유수 때부터 이곳에 정착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톨레도(Toledo)의 명칭이 히브리어 툴레툴라(Tulaytulah)에서 왔다는 학설이 있을 정도입니다. 이러한 학설을 지지하는 이들에 의하면 스페인의 유대인들은 페니키아인들이 스페인 남부에 식민도시를 건설할 떄부터 이주해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1497년 스페인에서 유대인 추방령이 내려졌을 때 한 랍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들은 우리가 예수를 죽인 민족이라고 미워하는데, 이곳에 사는 우리들은 바빌론 때부터 이곳에 와서 살았다. 우리는 예수가 죽었을 때 팔레스타인에 있지도 않았다. 우리에게 예수의 죽음의 책임을 묻는 것은 진실로 부당한 것이다!"]

로마제국 시대 스페인의 유대인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살았습니다.
그들은 농업에도 종사했고, 수공업에도 종사했씁니다. 그리고 현지의 주민들과도 전혀 문제 없이 지냈습니다. 
그런데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이후, 유대인들에 대한 간헐적인 탄압이 시작되었습니다.

2. 서고트족의 히스파니아 점령, 서고트 왕국 시대의 유대인

처음 히스파니아를 점령한 서고트족은 종교에 비교적 무관심했습니다. 비록 그들은 기독교(아리안주의)를 믿고 있었지만, 제국교(로마제국 정교, 즉 가톨릭)에 대해서는 적대적이었고,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관심이 적었습니다. 하지만 서기 587년 리카르트 왕이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유대인은들은 위기를 맞게 됩니다. 그는 제3차 톨레도 공의회에서 유대인들을 강제로 개종하는 것을 시도했고, 유대인과 기독교인 간의 자녀 또한 반드시 기독교로 개종시키고자 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이 공직 참여하는 것을 금했고 기독교인과 통혼하는 것도 금했씁니다.
하지만 리카르트왕의 이러한 과격한 행보는 그닥 성공적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고트족 중에서도 아직 가톨릭으로 개종하지 않은 이들도 많았으며, 그리고 이들은 가톨릭에 대한 반감으로 유대인들을 보호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도 잠시

지제부트 왕(612-620)의 치세에 유대인들은 다시 강력한 탄압을 받게 됩니다. 그는 반유대주의를 왕국의 공식적 정책으로 삼고 613년에는 왕국의 모든 유대인들한테 개종 아니면 추방을 택하라고 명령합니다. 이에 많은 유대인들은 북아프리카 또는 갈리아(프랑스)로 망명을 떠났고 또 9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은 개종을 택했습니다. 하지만 개종한 유대인들은 비밀리에 유대교와 유대인 정체성을 유지했습니다.

그리고 621년에는 유대인들에게 우호적인 왕이 새로 권좌에 올랐습니다. 그의 이름은 스윈틸라.
그의 치세 동안 개종한 많은 유대인들이 다시 유대교로 복귀하였고 망명한 일부 유대인들은 다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이도 역시 잠시 동안의 단비였습니다.

633년 새로운 왕의 치세에 제4차 톨레도 공의회가 열리고 이때 다시 반유대 정책이 도입됩니다. 그리고 특히 개종했음에도 비밀리에 유대교를 신봉하는 이들을 향해 강한 비난을 하고 이들을 타킷으로 하는 적대적인 정책을 도입했습니다. 이후 제5차, 제6차, 제7차, 그리고 제8차 공의회에서 모두 유대인들은 강제 개종의 대상이 되거나 추방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12차 톨레도 공의회에서는 개종을 거부하는 유대인들의 재산(토지) 소유를 금합니다.

이러한 조치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농업에서 자취를 감추도록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위와 같은 반유대 정책은 100년 동안 지속되었고 제16차 톨레도 공의회에서 이러한 조치들을 재확인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을 뿌리뽑으려고 100년 동안 무려 16차 공의회까지 가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유대인들이 남았다는 것을 보면 당시 스페인에 얼마나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100년 동안 지속되는 탄압을 견디지 못한 유대인들은 북아프리카와 갈리아(프랑스)로 대거 떠났습니다. 이때 프랑스로 떠난 유대인들은 그곳에서도 나름대로의 공동체를 발전시켰는데, 이들은 나중에 서유럽의 아버지 카를 대제(Charlemagne)의 비호를 받게 됩니다.

카를 대제는 [유대인들을 황제의 개인 소유로 하여 다른 이들이 유대인들을 재판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3. 이슬람에 의한 히스파니아 정복, 그리고 유대인들의 해방

711년, 타리크 이븐 지야드가 고트족과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스페인 유대인들의 삶은 극적인 변화를 맞이합니다.
무슬림 사료와 기독교 사료 모두 유대인들이 정복자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슬림 정복자들은 정복한 일부 도시들을 유대인들에게 맡기기도 했습니다. 코르도바가 대표적이었습니다. 사실 100년동안의 탄압을 생각하면, 유대인들이 이 무슬림 정복자들을 해방군으로 맞이한 게 전혀 이상하지 않죠.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비록 무슬림 정복자들이 유대인들을 완전히 동등히 대우한 것은 아니었지만, 유대인들은 고트족 왕국의 치하에서보다는 훨씬 자유롭게 살 수 있었습니다.

특히 우마야드 왕조가 공고해지고 유대인들의 삶이 대폭 개선되기 시작하면서 다른 지역의 유대인들도 스페인에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유럽국가들에서는 물론, [심지어 모로코와 바빌론(지금의 이라크)]에서도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이에 따라 스페인의 유대인 공동체는 범유대공동체의 핵심이 되었고, 이곳에서 히브리 철학, 문학, 과학이 번성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다양한 곳에서 온 유대인들을 흡수하면서 [스페인의 유대인들은 라틴어, 그리스어, 아랍어 등을 능숙하게 구사하여 많은 아랍어로 된 그리스 고전을 다시 그리스어 또는 라틴어로 번역하고 또는 히브리어로도 번역했다고 합니다].

4. 유대인들의 황금기, 알-안달루스

유대인들이 황금기를 맞이한 건 코르도바의 무슬림 왕국 시대의 일이라고 합니다. 코르도바의 칼리프 압드 알-라만 3세의 궁중고문이었던 하스다이 이븐 샤프루트가 그러한 황금기의 대표적인 인물이죠. 그는 유대인이었고, 궁중 의사였을뿐만 아니라 조세와 해외무역을 담당했습니다.
또한 그는 히브리 문학을 후원하였고, 많은 유대인들이 코르도바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특히 이 때 많은 수의 히브리 문학이 출간되고, 히브리어와 문자를 다시 정립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출간된 히브리 문학은 다양한 분야를 망라했습니다. 종교, 자연과학, 천문학, 수학, 음악, 그리고 정치 등이 주요 주제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때 프랑스와 독일 등지의 유대인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히브리어 사전이 집필되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궁중에서의 막강한 영향력을 바탕으로 비잔틴 제국의 헬레나 공주에게도 서신을 보내 비잔틴 제국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을 알-안달라스의 유대인들처럼 자비롭게 다뤄달라고 탄원합니다.

5. 또 다시 비극으로, 1066년 그라나다 대학살.

유대인들의 황금기로 알려진 9세기부터 11세기 동안 많은 유대인들이 비약적으로 출세했습니다. 그들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사무엘 이븐 나그렐라(993-1056)였는데, 그는 그라나다 왕국의 재상 자리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이슬람 왕국 역사에서 군대를 지휘한 유이한 유대인 지도자였고(다른 한명은 그의 아들.....), 그라나다 왕국의 국정을 총감독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저술한 탈무드 개론은 지금까지도 통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비약적인 출세는 많은 무슬림들의 반감을 샀습니다. 특히 사무엘이 죽고 그의 아들 요셉 이븐 나그렐라가 재상으로 취임했을 당시 성난 무슬림 군중은 왕궁을 포위하고 쳐들어가 결국 그를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날 4천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이 학살당했습니다. 때는 1066년. 그라나다 대학살이라는 후세에 악명을 떨치게 되고 이는 이슬람 왕국의 본격적인 유대인 탄압을 알리는 서곡이었습니다.

한편 당시 북부에서 다시 세를 규합하고 있었던 기독교 왕국들 - 카스티야, 레옹, 아스투리아스, 아라곤 - 은 맹렬한 반격을 개시했습니다. 그리고 이슬람 도시들인 하나씩 적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결국 1085년에는 대도시 톨레도 또한 기독교 왕국의 손에 넘어갑니다. 이에 알-안달루스 왕국은 근본주의자들이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이슬람 왕국의 약체화는 제대로 이슬람을 섬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으며 따라서 이질적인 것들은 모두 개종시키거나, 추방시키거나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급기야 1172년에는 이슬람 왕국에 거주하는 유대인과 기독교도들에 대한 추방령이 내려지고, 많은 유대인들은 다시 기독교 왕국으로 피난길에 떠났습니다. 마침 당시 기독교 왕국들은 그들의 조상 서고트왕국과는 달리 유대인들을 우호적으로 환영했습니다.

6. 알폰소 6세와 알폰소 8세, 그리고 유대인들

1085년, 톨레도를 재정복한 알폰소 6세는 유대인들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부유하고 유능하다는 점에 착안하여 유대인들에게 여러 특혜를 부여해주었는데 무엇보다 유대인들을 기독교인들과 법적으로 동등한 사람들로 만들었던 점이 컸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에게 귀족들이 향유하는 권리 또한 부여해주었고, 이는 다른 귀족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조치에 감동을 받은 유대인들은 자발적으로 알폰소 6세를 섬겼으며, 알폰소의 군대에는 심지어 4만명에 달하는 유대인 병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알폰소 6세의 유대인 편애는 심지어 교황마저 우려케 했습니다. 당시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알폰소 왕에게 "유대인을 기독교 형제 위에 두지 말라고" 충고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알폰소의 유대인 우대정책은 많은 기독교인들의 반감을 샀습니다. 급기야 왕국의 세자 산초가 우클레스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분노한 민중은 유대인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알폰소6세는 혼란을 야기한 폭도들을 모두 처벌하고자 하였으나 그 전에 죽어버렸습니다.

알폰소 사후, 몇십년 후에 새로이 등극한 알폰소 7세는 레온, 톨레도 그리고 산티아고의 왕, 스페인의 황제를 자처했고 그는 민중의 요구를 수용하여 처음에 반유대적 정책을 실시했으나 왕국의 필요에 따라 다시 유대인들을 기용합니다. 그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세금을 징수하게 했으며, 심지어 유다 벤 요세프 이븐 에즈라라는 유대인을 재상으로 등용했습니다. 알-안달루스에서 추방된 유대인들을 대거 받아들인 시기가 바로 이때였습니다. 그 후 유대인들은 다시 안정적인 삶을 꾸려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카스티야의 알폰소 8세(1166-1214)는 유대인들에게 오르, 셀로리코, 그리고 마요르카를 맡겼으며, 나바라 왕국의 현자 산초 왕은 유대인들에게 에스텔라, 후네스, 무라뇽을 맡겼습니다. 특히 알폰소 8세는 라헬이라는 유대인 여인을 깊이 사랑했는데, 그가 유대인들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한 것은 이 때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알라르코 전투에서 알폰소 8세가 이슬람세력에게 패배하였을 때, 사람들은 그가 라헬이라는 유대인 여자에 빠져있어서 그런거라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결국 귀족들은 라헬과 그녀의 가족을 무자비하게 살해합니다.

하지만 알라르코 전투 이후 카스티야 왕국의 운명은 풍전등화의 상황. 유대인과 비유대인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때 다시 활약하게 되는데, 톨레도의 부유한 유대인들은 알폰소의 전쟁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고, 특히 요세프 벤 솔로몬 이븐 쇼샨의 활약이 두드러졌다고 합니다.  

7. 다시 시련의 시작, 1300년대

1214년, 알폰소 8세는 세상을 떠납니다. 그리고 그의 비호 아래 행복하게 살았던 유대인들에게 다시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페르난도 3세, 하이메 1세 등은 다시 유대인들을 억압하는 정책을 실시했고, 가톨릭 교회는 점점 유대인들을 압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카스티야 왕국은 유대인들이 노란색 벳지를 의무적으로 착용하도록 강제했고, 새로운 시나고그를 짓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가 유대교로 개종하는 것을 엄금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유대인이 기독교인과 같이 사는 것을 금지했고, 같이 마시는 것을 금지했고, 같이 목욕하는 것을 금지했고, 같은 먹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더불어 유대인은 기독교 간호사나 하인을 부릴 수 없었고, 기독교인은 유대인의 판매하는 의약품을 구입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1366년에는 유대인들에 대한 학살이 또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제약들에도 불구하고 유능한 민족은 유대인들은 나름대로 생존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그들은 금융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이는 그 누구도 따라오지 못하는 분야였습니다. 이에 따라 귀족과 왕 모두 급전이 필요할 때 결국 이들한테 부탁할 수 밖에 없었고, 게다가 유대인들은 특별세를 내야 하는 존재였기 때문에, 이 중요한 세원을 굳이 말살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죠.

이 때문에 1366년에 왕위에 오른 엔리케 2세는 그 자신이 반유대적인 정책을 강화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유한 유대인들을 기용하는 데 전혀 거부감이 없었습니다. 그는 사무엘 아브라바넬과 같은 부호들을 기용하여 재정고문으로 일하게 하고 다른 유대인인 요세프 피촌 데 세비야를 기용하여 세금 거두는 일을 위임합니다. 

하지만 세금을 거두로 오는 사람을 좋게 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엔리케 2세가 죽자 결국 귀족과 성직자들, 그리고 엔리카의 아들 자신이 요세프를 모함하여 그를 처형시켰습니다. 유대인들 관리의 권력이 강해지는 것을 두려워한 이들은 다시 왕국 전역에 반유대 공포를 확산시키고 유대인들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더욱 강화했습니다. 그 결과 1391년 또 한 차례의 학살이 발생했습니다.

8. 아브라함 세니오르(Abraham Senior), 그리고 이작 아브라바넬(Isaac Abravanel)

수백년간 지속된 억압과 탄압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의 유대인들은 나름대로의 생활방식을 터득했습니다. 일부는 벳지를 착용하고 게토에 거주하면서 계속 자신들의 주특기인 대금사업을 지속했고, 일부는 겉으로 기독교로 개종하고 비밀리에 유대신앙을 공고히 했습니다. 그리고 카스티야의 이사벨라 여왕과 아라곤의 페르난도 왕이 결혼하면서 통일된 스페인 왕국이 탄생하고 스페인 왕국은 마지막 남은 무슬림 왕국 그라나다를 정복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이 때 두각을 나타낸 유대인 2 명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 세니오르 그리고 이작 아브라바넬이 바로 그 두명이었습니다. 이 두명은 당시 스페인에서 가장 부유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 세니오르의 일가는 선대부터 카스티야 왕국의 조세업무를 담당하고 있었고, 도시의 수공업자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아브라함은 이사벨라 여왕과 매우 긴밀한 관계였습니다.

이사벨라가 공주였을 시절 엔리케 왕이 죽어 승계가 불투명하여 이사벨라 공주의 목숨이 위험했을 때 그녀를 위한 은신처를 제공한 것도 아브라함이었으며, 이사벨라 여왕과 페르난도 왕의 비밀 결혼을 위해 예물을 구하고 준비하는 일도 아브라함의 몫이었습니다. 그는 이사벨라 여왕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 중 한 명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유대인 공동체에 대한 억압을 완화시킬 것을 여왕에게 수차례 건의하였고, 말라가에서 포로 잡힌 유대인들을 풀어주기 위한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그 못지 않게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이작 아브라바넬인데, 그는 포르투갈 태생으로 포르투갈의 알폰소 5세 왕의 재정고문이었습니다. 그 또한 권력과 자금력을 바탕으로 유대인 동포들을 도왔는데, 모로코에서 포로 잡힌 유대인들이 노예로 팔려가자 이들을 다시 돈을 주고 사와서 해방시켰습니다. 그리고 해외 유대인들과도 연줄이 있어서 다양한 국제업무를 맡았다고 합니다. 예컨대 팔려간 유대인들을 되찾기 위해 그는 이탈리아 계 유대인 니심 다 피사(피사의 니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알폰소 왕이 죽자 브라강사 공작이 그를 반역혐의로 구속하려고 했는데, 그는 재빨리 카스티야로 도망가서 이사벨라 여왕의 신하로 들어갑니다.

아브라함과 이작은 카스티야 왕국을 위해 혁혁한 공을 세웁니다. 이 둘은 그라나다 왕국 정복 사업에 필요한 군수물자의 거래와 계약, 그리고 이를 위한 보급 등을 책임졌고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신항로 개척 사업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신대륙 발견이라는 엄청난 사업은 이 두 유대인의 자금력 없이 불가능했을 거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이들도 피할 수 없었던 것이 있었으니.............

9. 스페인 왕국의 파이널 솔루션(Final Solution), 1492년의 유대인 추방령

스페인 왕국을 통일한 이사벨라와 페르난도 왕은 전 왕국을 기독교화하고자 결심합니다. 종교재판을 도입하고 이슬람교인과 유대인들 모두에게 강제로 개종하라고 한 것입니다. 사실 이는 이사벨라와 페르난도의 참뜻은 아니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사벨라는 특히 어렸을 적부터 아브라함에게 큰 빚을 지고 있었고, 페르난도는 모계로부터 유대인의 피가 흐른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강력한 반유대/반이슬람 정책을 도입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크게는 두가지

첫째로 사실 이사벨라와 페르난도의 결혼은 교황이 인정한 결혼이 아니었습니다. 이 둘은 비밀리에 결혼했고,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귀족들을 설득하기 위해 교황의 축복을 위조했었습니다. 이에 따라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의 통합을 공고히 하려면 가짜가 아닌 진짜 교황의 축복이 필요했고, 교황청의 뜻에 따라 강력한 종교정책을 시행해야 했던 것입니다.

둘째로는 재정복(Reconquista) 사업이 완수되자, 통합된 국가의 안정을 위해, 다시 말해 카스티야의 여왕과 아라곤의 왕은 민중을 만족시키기 위해 강력한 종교정책이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국퇴회복운동은 그저 국토를 회복하는 것이 아닌, 이교도에 대한 [십자군 전쟁]이었습니다. 가장 열렬한 종교적 열광으로 수행된 전쟁이었습니다. 따라서 무슬림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몰아내고 나니, 그 종교적 열광은 왕국 내 또 다른 타자, 유대인들을 향해 발산되었던 것입니다. 

어쨌든 스페인 왕국은 모든 유대인들의 강제개종 아니면 추방 아니면 죽음을 칙령으로 명시합니다. 이에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당연히 아브라함과 이작이었습니다.그래도 아브라함은 결국 개종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이사벨라와 오랜 인연이 있었고, 그는 이사벨라와의 우애, 그리고 자신의 재산을 잃기 싫었습니다. 그의 개종은 국가적 행사처럼 이루어졌습니다. 여왕이 직접 축복하였고, 대성당에서 아주 화려하게 거행되었습니다. 이는 이사벨라가 아브라함에게 바치는 최대의 예우였고, 다른 유대인들도 그의 모범을 따르게 하려는 계책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친구, 이작 아브라바넬은 개종을 거부하고 망명길에 떠납니다. 그는 당대 최대의 무역국가 베네치아 공화국으로 떠났고, 그곳에서 수차례 페르난도 왕에게 편지를 보내 유대인 추방령을 취소하라고 부탁합니다. 이를테면 베네치아에서 그는 어마어마한 양의 돈을 페르난도가 추방령을 취소하는 대가로 바치겠다고 편지를 써보냈습니다. 이때 페르난도는 잠시 흔들렸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이를 지켜본 왕국 최고 종교재판관은 페르난도에게 ["이스가리옷 유다처럼 몇닢의 은전으로 예수를 팔아넘길 생긱냐고"] 매몰차게 비판했고, 결국 페르난도는그의 간절한 부탁을 거부합니다.

결국 중세와 근세초 유럽 최대의 유대인 사회는 1492년의 추방령으로 붕괴했습니다. 이들은 세계 곳곳으로 피난길에 떠났으며 터키와 모로코로 등지로 떠났습니다.하지만 이 못지 않게 많은 수가 이주한 곳이 바로 네덜란드와 영국 그리고 독일이었습니다.

이제 유럽 유대인들의 중심지는 스페인이 아니라 네덜란드와 영국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네덜란드는 자본주의 세계를 여는 최대의 상업국가가 되었고, 영국은 이를 잇는 세계 최대의 자본주의 제국이 되었습니다.

10. 에필로그, 이주한 세파르딤 유대인들은 어떻게 되었나?

앤트워프, 암스테르담, 그리고 런던에 이주한 세파르딤 유대인들은 나름대로의 공동체를 다시 건설했습니다. 특히 암스테르담에서는 17~18세기 동안 유대인 공동체가 돌려보던 Gazeta de Amsterdam이라는 잡지가 스페인어로 발행되었고 그 잡지에는 마드리드, 톨레도, 이탈리아의 제노바,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등지에서의 소식을 거의 실시간으로 전했습니다. 정치적 변동으로 항상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던 유대인들은 유럽 각지의 정치적 격변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했기 때문에 그 잡지는 유럽 곳곳의 소식들을 아주 빠르게 전했습니다.

이에 따라 어떤 이는 가제타 데 암스테르담은 세계 최초의 비즈니스 잡지라고 평합니다. 오늘날의 파이낸셜타임즈, 또는 이코노미스트라고 할까요. 

오늘날 스페인 정부는 1492년 추방된 유대인들의 후손에게 스페인 국적을 부여하는 국적법을 통과시켰습니다. 2015년에 통과시켰는데, 얼마나 많은 후손들이 스페인국적을 다시 신청했을지 궁금합니다. 

찾아보니까 2019년 7월 기준 대량 1만명 정도 해당 법을 통해 스페인 국적을 회복했다는군요 (https://www.enlacejudio.com/2019/07/02/sefardies-recupera-nacionalidad-espanola-ancestr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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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19 12:58
수정 아이콘
좋은글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오늘
19/07/19 15:00
수정 아이콘
항상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캐모마일
19/07/19 15:12
수정 아이콘
제 동생이 팬이랍니다.(?) 아이디가 없어서 제가 대신 댓글 답니다 크크 우리 아우렐리우스 형님께서 글을 올리셨다며 자주 링크를 보내더군요..-.-흐흐
19/07/19 16:30
수정 아이콘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단순히 레콩키스타 때 유태인이 핍박받았다는 이야기만 들었는데 정말 극심한 왔다리 갔다리 정책의 희생양이었군요.
최근 나온 '돈의 역사' 라는 책에서도 프랑스는 심심하면 왕이 유태인 돈 강탈해간(크킹2생각나네요) 탓에 결국 전쟁에서는 금융이 발달한 영국이 이겼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유태인 최고의 무기는 역시 지혜+금융이 맞나봅니다.
19/07/19 16:40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놀면서 공부하는 PGR21
Hastalavista
19/07/19 19:45
수정 아이콘
저렇게 유구히 두들겨 맞으면서도 사라지지 않은 거 보니 종교가 대단하긴 하군요.
문문문무
19/07/20 08:00
수정 아이콘
(수정됨) 결국 그 유대인들의 자본이 유럽금융자본의 주체? 혹은 토대가 되었고

이후 미국과 일본등지에 씨앗과 막대한 양의 비료를 뿌려 지금의 세계경제와 문화와 정치 를호령하는 미국 유럽(영국포함) 그리고 일본금융자본의 근원이 되었던 것이군요
강미나
19/07/20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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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감사합니다. 하나 추가하자면 1492년 때 상당수가 가까운 옆나라 포르투갈로 이주했는데 로마약탈 후 발생한 반종교개혁 당시 포르투갈에서도 추방령이 발생하고, 이 때 유대인들 중 일부는 무려 브라질까지 이주하죠. 다행히 그 당시 세상 끝이었던 브라질로 이주한 유대인들은 이후 유럽에서 벌어진 유대인 탄압과 달리 몇백년간 평탄한 역사를 보내서 지금은 브라질 유대인의 수가 십만 단위에 달한다고 하는군요. 새옹지마란 이런 것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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