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22/03/06 00:52:08
Name 시드마이어
File #1 560765E3_38AE_400F_9FD6_BBA73D8474D2.jpeg (149.9 KB), Download : 73
Link #1 https://brunch.co.kr/@skykamja24/652
Subject 만원 신발의 기억 (수정됨)


요즘은 다들 쉽게 나이키를 사서 신습니다. 저렴한 모델이 5만 원보다 낮으니 크게 부담되지 않는 금액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가 초등학생, 중학생 시절에는 나이키 신발이 비쌌습니다. 그때도 6-7만 원이 넘었는데 지금으로 치면 15-20만 원 정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당연하게도 저는 초등학생 내내 시장에서 큰 신발을 사서 신었습니다. 딱 맞는 신발을 신어 본건 중학생이 됐을 때였던 것 같습니다. 시장 신발 가게에 들어가면 기분이 좋았습니다. 새 신발에서 나는 고무 냄새가 좋았고, 신발 속에 들어있는 부스럭 거리는 포장 종이의 촉감도 좋았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만 원짜리 신발에 감사하며 잘 신어왔습니다.

그런데 6학년이 됐을 무렵 저는 여름에 아쿠아 슈즈라고 조금 독특하게 생긴 시원한 신발을 샀습니다. 한 만 이천 원쯤 했습니다. 평상시 사던 것보다 비싸고 예뻐서 친구에게 새 신발이라며 자랑을 했는데 친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난번보단 낫네.”

그 말은 분명 좋다는 말이지만 그날 저는 제 신발과 친구의 신발을 비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들떠서 자랑했던 그 아쿠아슈즈보다 친구는 6배는 비싼 나이키, 아디다스만 신던 걸 이제야 봤기 때문입니다.

아이러니합니다. 나는 지난 수년간 아무렇지 않게 행복하게 만원 신발을 신었는데, 친구의 한마디로 그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게 된 것 같았습니다. 어린 마음에 내가 평생 신어본 가장 좋은 신발도 그 친구한테는 비교도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간은 흘러 중학교 2학년이 됐을 때, 어머니는 제게 인생 첫 브랜드 운동화를 사주셨습니다. 그 당시 인기가 있던 아식스 신발인데 가격이 무려 67,000원이나 됐습니다. 어머니가 이틀을 더 일하셔야 벌 수 있는 큰돈이었습니다. 저는 이 신발을 사고 평생 가장 행복한 밤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배게 옆에 두고 잠을 잤습니다.

다음날 아식스 신발을 신고 등교하는 길은 날개가 달린 것처럼 가벼웠습니다. 아침에 만난 반 친구는 바로 신발이 바뀌었다면서 잘 샀다고 말해줬습니다. 그 순간이 벌써 17년 전쯤인데도 자주 생각나곤 합니다.

저는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누군가와 비교하면 내 행복이 하찮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내가 맛있게 먹은 라면이 비루해 보이고, 내가 힘겹게 만든 작품은 보잘것없어 보이는 날이 오곤 합니다.

매주 이런 감정을 느낍니다. 주말에도 열심히 즐겁게 일을 했음에도 연인과 친구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을 보면 내가 느낀 행복감이 하찮게 느껴지곤 합니다. 수년을 고생하며 만들어간 하루하루가 여전히 평범한 사람들의 행복과 비교하면 대단할 게 없구나 싶기도 합니다.

‘난 만 원짜리 신발은 참 좋았는데, 왜 나는 나이키를 부러워했을까.’

연인들의 모습을 보면 질투가 나기도 하지만 저는 알고 있습니다. 사람은 모든 걸 다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저는 시장 신발에서 감사함을 느꼈고, 누군가는 절대로 시장 신발에서 감사함을 느끼지 못할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는 행복한 연인들 사이에서 신발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 연애를 못하나 봅니다. 내일은 ABC마트에 가서 신발이나 봐야겠습니다.

* 손금불산입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3-11-24 10:04)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 게시글로 선정되셨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요슈아
22/03/06 01:15
수정 아이콘
오늘 11만원짜리 나이키 신발 하나 사서 신었는데 마침 이런 글이?!
쿠션 짱짱하니 정말 좋네요.
22/03/06 03:24
수정 아이콘
성인 될때까지 나이키,아디다스,뉴발,아식스 같은 운동화를 한번도 못신어본 가난한 집 자식인데 인생은 운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됩니다. 저는 옷이나 신발가지고 이야기를 들은 적이 한번도 없는데 제가 만약 그런 말을 들었다면 어땠을지 생각하게 되네요.
가치파괴자
22/03/06 04:11
수정 아이콘
아 좋은글 읽고 갑니다. 예전 어릴적 생각과 최근에 드는 철학들이 겹치네요
두 별을 위해서
22/03/06 08:54
수정 아이콘
"저는 시장 신발에서 감사함을 느꼈고, 누군가는 절대로 시장 신발에서 감사함을 느끼지 못할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글 쓴분은 충분히 행복의 의미를 아시는 듯 합니다. 소중한 마음 잘 간직하시고 앞으로도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숨고르기
22/03/06 09:10
수정 아이콘
남과 비교를 멈춰야 행복해질수있다는 진리를 다시 한번 되새기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하우두유두
22/03/06 09:43
수정 아이콘
전 반대로 비오는날 만원짜리 시장신발 신고 다니다가 뒷창이 떨어져서 그사이로 물이 다세서 양말 뒤축이 항상 젖어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발은 항상 좋은거 사줘야지라고 생각합니다..
멋진신세계
22/03/06 09:44
수정 아이콘
비교를 멈춰야한다는 걸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언제쯤 가슴 깊은 곳에서도 그걸 받아들일까요. 그래도 마음에 새겨넣으려고 노력해야겠지요..
우주전쟁
22/03/06 09:49
수정 아이콘
저도 늘 재래시장표 신발만 신다가 중 2땐가 처음으로 프로스펙스 신발을 신었더랬죠...그거 신고 학교 갔던 날이 기억나네요...
외국어의 달인
22/03/06 10:52
수정 아이콘
국민학교시절 까발로 신었습죠. 하하하
22/03/06 11:31
수정 아이콘
제겐 마이마이가 그랬어요. 친구들의 소니 파나소닉 아이와 워크맨과 비교하지 않고 투박한 마이마이 잘 들고 다녔는데 어느 날 친구의 어떤 말 한 마디에 책상속에 숨겨 넣고 이어폰만 올라온 채 플레이버튼만 누르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핀잔을 주거나 비교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제 스스로 그렇게 느낀 것 같아요. 청소년기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며 자아를 만들어가는 시기인만큼 어쩔 수 없지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럼 지금은 좀 나아졌나? 하는데 아직도 물음표네요. 이런 글을 읽으면서 다시 마음을 다잡는거지요. 감사합니다.
어디든지문
22/03/06 12:06
수정 아이콘
시장에서 산 만오천원짜리 신발이 신은지 15분만에 찢어지는 경험을 하고.. 이후 삼만 오천원짜리 르까프 신발 신었네요 크크
나이스후니
22/03/06 13:31
수정 아이콘
그때의 나이키는 참 비쌌죠. 항상 돈이 없어서 아티스같은거
신었는데 영어수업시간에 8달러의 신발을 사는 내용이 나오니, 누군가가 제 신발이다 크게 말해서 반아이들이 웃던 기억이 나네요. 그땐 그렇게 창피하고 서러웠네요
하마아저씨
22/03/06 16:10
수정 아이콘
진짜 중학생때 몇달 알바(시급1800원)해서 에어맥스95, 조던4 샀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덕분에 아직도 신발에 미처서 리셀로 신발 사모으는건 안자랑..
페로몬아돌
22/03/06 17:58
수정 아이콘
저의 마지막 만원 신발은 스베누네요...크크크크
집으로돌아가야해
22/03/06 18:48
수정 아이콘
앗... 아아..
22/03/07 08:33
수정 아이콘
크크크크
앗!힝!엨!훅!
22/03/06 20:44
수정 아이콘
전 오히려 요즘은 울트라부스트같은 푹신한 신발에 맛들여서..
프로스펙스에서 나온 x-40같은 말도안되게 싸고 울트라부스트 느낌나는 신발 사서 신고있습니다
22/03/07 03:11
수정 아이콘
캐나다 외노자 시절에 걸어서 30분거리 마트에서 50프로 깜짝 세일하는 트로피카나 자몽주스 3개를 백팩에 지고 돌아오는 길이었죠. 추위를 많이 타는 집사람이 날이 추우니 차타고 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던 날이 떠오르네요. 무거운 장거리를 가득 들고 돌아오는 길에 스포츠카를 길에 세우고 마리화나를 피우던 한국인 유학생들 보며, 부러울법도 했는데 돌연 그래도 저 애들은 자몽주스 50프로 세일해서 두개 더 사는 행복은 평생 모르겠지? 하며 위로했던 밤과 비슷한 기분을 느낍니다. 찾을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행복이 눈 앞에 있다면 그 또한 행복이겠지요
지니팅커벨여행
22/03/07 07:46
수정 아이콘
나이키를 살 여력은 안 되고 리복도 비싸고 했지만 다행히도 학창시절 가장 인기있었던 브랜드가 프로스펙스여서 그것만 사서 신었네요.
사실 나이키나 리복이 범접할 수 없던 가격이라 제가 관심을 두지 않어서였을 수도 있고...
물론 지금도 프로스펙스를 신고 있습니다.
나이키를 살 수 있을 정도로 돈을 벌지만 발볼이 좁고 발등 높이가 낮아 너무 불편해서 이제는 아예 살 생각을 안 하죠.
대학교 들어가면서 산 신발이 시장에서 2만3천원 주고 산 운동화였는데 한달 만에 앞꿈치 접히는 부분이 찢어져 그 후론 다시 프로스펙스나 르까프를 사게 되었고요.
그런데 또다른 고민이 생겼습니다.
우리 애들 신발은 어떤 걸로 사줘야 하나...
22/03/07 08:32
수정 아이콘
비오의 카운팅스타라는 노래가사가 생각나네요. 글쓴님이 그시절 느낀 감사한 마음이 그 어떤 비싼 운동화보다 값어치있다고 생각합니다.
23/11/27 17:28
수정 아이콘
저도 어렸을 때, 아마 고등학교때까진 브랜드 없는 신발 신었어요. 부모님이 항상 어딘가에서 운동화를 사다주셨는데 부모님도 브랜드 같은거 잘 모르시고, 저도 딱히 뭘 사달라고 한 적은 없으니까요. 친구의 나이키 신발을 아주 조금 부러워했던 건 기억납니다. 요즘엔 신발을 나이키 아울렛 가서 사는데, 역시나 비싼 건 부담스럽다고요. 마음 속 마지노 선은 7만원 정도인 듯...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3494 집에서 먹는 별거없는 홈술.JPG [23] insane7988 22/04/30 7988
3493 인간 세상은 어떻게해서 지금의 모습이 됐을까 - 3권의 책을 감상하며 [15] 아빠는외계인4808 22/04/29 4808
3492 [테크 히스토리] 인터넷, 위성으로 하는 거 아닌가요? / 해저 케이블의 역사 [32] Fig.13892 22/04/25 3892
3491 소수의 규칙을 증명..하고 싶어!!! [64] 라덱4913 22/04/25 4913
3490 웹소설을 써봅시다! [55] kartagra5326 22/04/25 5326
3489 믿을 수 없는 이야기 [7] 초모완3647 22/04/24 3647
3488 어느 육군 상사의 귀환 [54] 일신4445 22/04/22 4445
3487 (스크롤 압박 주의) 이효리 헌정사 (부제 : 어쩌다보니 '서울 체크인' 감상평 쓰다가...) [76] 마음속의빛3949 22/04/19 3949
3486 [테크 히스토리] 커피 부심이 있는 이탈리아인 아내를 두면 생기는 일 / 캡슐커피의 역사 [38] Fig.12960 22/04/18 2960
3485 『창조하는 뇌』창조가 막연한 사람들을 위한 동기부여 [12] 라울리스타2907 22/04/17 2907
3484 코로나19 음압 병동 간호사의 소소한 이야기 [68] 청보랏빛 영혼 s3320 22/04/16 3320
3483 [기타] 잊혀지지 않는 철권 재능러 꼬마에 대한 기억 [27] 암드맨3887 22/04/15 3887
3482 [일상글] 게임을 못해도 괜찮아. 육아가 있으니까. [50] Hammuzzi2925 22/04/14 2925
3481 새벽녘의 어느 편의점 [15] 초모완2903 22/04/13 2903
3480 Hyena는 왜 혜나가 아니고 하이에나일까요? - 영어 y와 반모음 /j/ 이야기 [30] 계층방정2813 22/04/05 2813
3479 [LOL] 이순(耳順) [38] 쎌라비4058 22/04/11 4058
3478 [테크 히스토리] 기괴한 세탁기의 세계.. [56] Fig.13607 22/04/11 3607
3477 음식 사진과 전하는 최근의 안부 [37] 비싼치킨2847 22/04/07 2847
3476 꿈을 꾸었다. [21] 마이바흐2737 22/04/02 2737
3475 왜 미국에서 '류'는 '라이유', '리우', '루'가 될까요? - 음소배열론과 j [26] 계층방정3458 22/04/01 3458
3474 망글로 써 보는 게임회사 경험담(1) [34] 공염불3549 22/03/29 3549
3473 소소한 학부시절 미팅 이야기 [45] 피우피우3057 22/03/30 3057
3472 [테크 히스토리] 결국 애플이 다 이기는 이어폰의 역사 [42] Fig.12853 22/03/29 2853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