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가능했던 어느 학창 시절, 중간 고사가 끝나고 물리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들어올때부터 표정이 심상찮았다. 선생님은 다른 과목들의 학년 평균을 하나씩 읊으시더니 맨 마지막에 물리 과목의 학년 평균을 말씀 하셨다.
선생님 입에서 믿을 수 없는 말을 들었다. 학년 평균 39점이었다. 다른 과목들간의 평균 점수 차이가 프로와 아마추어간의 간극 만큼 벌어져 있었다. 선생님은 백점 만점에 반절에도 미치지 못하는 점수에 적잖이 실망하신 듯 했다. 물리 선생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번졌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일주일동안은 물리 수업 진도를 나가지 않고 사랑으로 우리를 다스려 주었다. 옆반 물리시간이면 그 사랑의 소리가 복도를 타고 우리반에까지 들려왔고, 프랑스 어느 공주처럼 두려움에 머리가 하얗게 셀것만 같았다.
기말고사 전, 물리 수업 시간에 더더 믿을 수 없는 말을 들었다. 선생님은 어떻게든 학년 평균 오십점을 넘기고 싶어했지만 학생들을 온전히 믿지는 못했다. 그래서 물리 선생님은 우리에게 시험 문제를 미리 알려 주었다. 인과관계가 다소 어색하지만 여튼 그러했다. 그분은 전교생들에게 주관식 1,2번 문제를 알려주었다. 각각 오점으로 두 문제를 합치면 십점이었다.
더더더 믿을 수 없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 분은 우리 학생들의 실력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시곤, 문제만 알려줘서는 평균 십점을 올릴 수 없다고 판단하셨다. 그래서 문제를 알려 줌과 동시에 정답도 공개하였다. 선생님은 칠판에 주관식 일번과 이번 정답을 큼지막하게 적으셨다. 그리고 꽤나 만족하신 표정을 지어 보이셨다. 그동안 열심히 가르쳤고 너희들도 열심히 따라와 주었기 때문에 지난 번 39점보다는 높은, 그러니까 오십점 이상, 아니 육십점 이상을 기대하는 모습이었다.
기말고사가 치뤄지고 물리 시간이 다가왔다. 문을 열고 들어오시는 선생님의 표정이 한결 가벼워 보였다. 미소를 짓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선생님은 이전처럼 다른 과목들 학년 평균을 나열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물리 평균 점수가 나왔다.
더더더더 믿을 수 없는 말을 들었다. 지난 중간고사 평균 39점에서 정확하게 십점이 더 떨어졌다. 물리 학년 평균 점수 29점 이었다. 교실은 삽시간에 얼어 붙었다. 선생님의 사랑은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울먹이는 친구도 보였다. 선생님은 조용히 말을 이어나갔다.
더더더더더 믿을 수 없는 말을 듣게 되었다. 주관식 1,2번을 틀린 학생이 있다는 것이었다. 한명도, 두명도 아닌 무려 여덟명의 학생이 틀렸다고 말했다. 다들 이게 말이 되냐고, 선생님 채점이 잘못된 것 같다고… 서로를 돌아보며 웅성거릴만도 했지만 그날의 그 교실 분위기는 내 친구 개똥이의 소개팅 분위기 처럼 적막만이 흘렀다.
더더더더더더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선생님이 조용히 책을 펼치곤 수업을 시작한 것이었다. 오늘은 훼이크고 다음 시간에 사랑해 주시려나보다. 해서 다들 다음 물리시간에 잔뜩 긴장 하였지만 선생님은 그 어떤 사랑의 행동을 취하시진 않으셨다. 학생들이 졸던, 딴짓을 하던, 이해를 하든지 말든지… 테이프를 틀어 놓은 듯 오십분간 본인 말씀만 하시곤 교실을 나가셨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그때의 선생님 표정이 떠오른다. 이십구점을 말하셨을 때는 엷게 웃으셨고 주관식 문제를 틀린 사람이 있다고 말했을때는 소리내서 환하게 웃으셨다. 선생님은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더 이상 우리를 사랑해 주시지 않는 선생님은 어떤 마음 가짐이었을까? 그때의 그 선생님 기분을 헤아리면서 오늘도 랭겜을 돌린다.
* 손금불산입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3-12-15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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