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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2/05/17 16:15:02
Name 쎌라비
Subject [15] 다음
"다음에??"
"그래 담에"

그게 그 친구와의 마지막 대화였습니다.


어린 시절의 저는 다소 개구진 아이였다고 생각합니다. 어린 시절 전 시골에서 자랐고 그 나이 대의 여느 소년들처럼 말썽꾸러기였습니다. 엄마가 약으로 쓰려 얻어다 놓은 굼벵이를 엄마 몰래 닭 모이로 주기도 하고 타다 남은 연탄 사이에 분필을 끼워 넣어 데운 다음 던져서 부숴놓기도 하고 마당에서 돋보기로 달력을 태우다 불을 낼 뻔하기도 하고 친구들이랑 사슴벌레를 잡는답시고 동네 제재소를 헤집어놓기도 하고 팔목만 한 개구리를 잡는다고 밤까지 돌아오지 않아 어머니가 경찰에 신고를 하게 하기도 하고 뭐 그랬던 아이였습니다.

성인이 된 지금도 그렇지만 그 시절의 저에게는 무언가에 꽂히는 시점이 있었습니다. 사슴벌레, 개구리, 도롱뇽 알, 화약총 등등(공부는 제외) 그때의 저는 쇳가루에 꽂혀 있었습니다. 왜 하필 쇳가루에 꽂혀 있었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쇠의 비릿한 냄새가 좋았던 걸까요? 아니면 쇳가루가 자석에 모여드는 그 모습이 좋았던 걸까요? 저는 동네방네 구석구석을 다니며 쇳가루를 모으고 다녔습니다. 주택가의 구석에 버려진 운동기구에서 주차라고 쓰고 유기라고 읽어야 할법한 경운기의 잔해에서 저는 마치 사금을 캐러다니는 광부처럼 쇳가루를 채취하고 다녔습니다. 아무튼 그 당시의 저는 그렇게 쇳가루의 매력에 빠져 있었고 그러던 차 학교에서 친구에게 쇳가루에 대한 정보 하나를 얻게 됩니다. 학교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면장님 집 앞에 놀이터가 하나 있는데 그 놀이터의 구석에 여러가지 농기구나 쇠로 만든 기기들이 버려져 있어서 그곳에 가면 쇳가루를 잔뜩 채취할 수 있다는 정보였습니다. 같이 가기로 한 친구가 무언가 말썽을 피워 엄마에게 귀를 붙잡혀 끌려갔기에 저는 하는 수 없이 말굽자석과 봉투 하나를 들고는 저 혼자 30분이 넘게 땀을 흘리며 면장님 집으로 걸어갔습니다. 하지만 그곳에는 분명히 있어야 할 농기구가 이미 치워버렸는지 보이지 않았습니다.

순간 허탈해진 저는 그래도 그곳까지 온 김에 놀이터에서 좀 놀고 갈 요량으로 그네도 타고 시소도 타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놀고 있던 찰나 구석의 바위에 오도카니 앉아 저를 바라보던 한 아이가 눈에 띄었습니다. 창백해 보이기까지 한 정말 새하얀 피부를 가진 남자아이였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E 성향이 좀 잦아들긴 했어도 그때의 저는 확실한 E 성향을 가진 아이였기 때문에 그 친구를 불러서 배로 그네를 타는 방법(저는 이걸 슈퍼맨이라고 불렀습니다)도 알려주고 시소의 스릴을 올리는 방법도 알려주며(착지 지점의 땅을 조금 파놓음) 함께 놀았습니다. 그렇게 같이 1시간 남짓 같이 놀았을까요?  배도 고파오고 솔직히 이제는 좀 질리기도 해서 저는 이제 집에 돌아가본다며 그 친구에게 인사를 건냈습니다.

"야 형 이제 가볼게"
"아 형 좀만 더 있다 가지..."
"미안 나 가봐야 돼  다음에 놀자"

"다음에??"
"그래 담에"

그 친구는 제가 가는 모습을 손을 흔들며 한참을 바라보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게 그 친구와의 마지막 대화였습니다. 다음은 없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근처를 방문해도 그 친구를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후 저는 학교에서 그 친구가 하늘나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됐습니다. 나중에 부모님에게 듣기로는 그 친구는 백혈병을 앓고 있던 환우였고 요양차 시골에 잠깐 내려와있던 모양입니다. 나이를 먹으며 미루기 대마왕이자 내일 아티스트가 되어버린 저지만 그 일 이후로 저는 오랜만에 보는 친구가 약속을 잡으려고 할때 가끔 이 일과 그 친구의 얼굴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제가 말하려고 했던 대답을 바꾸게 되어버리곤 합니다.

"다음에 볼까?"
"아니 금방 나갈게"

채 10살이 되기도 전에 하늘나라로 떠난 어린 친구가 다음이라는 시간을 가질 수 없게 된 그 이유와 의미를  이제는 그 친구의 몇배의 삶을 산 저로서도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저는 가끔 머릿속으로 제가 그 시절의 소년이 되어 그 친구에게 말을 건네는 모습을 상상하곤 합니다.

"마 한번 보자 담에 만나면 성이 제대로 놀아주꾸마"

* 손금불산입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4-01-15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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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ch_King
22/05/17 17:01
수정 아이콘
정말 저의 오늘 별것없이 지나간 것 같은 하루가 어느 누구에겐 정말 간절히 바라마지 않는 하루가 될 수 있겠군요.
지니팅커벨여행
22/05/17 20:10
수정 아이콘
저도 언젠가부터 다음에 하지 않고 구체적인 날짜를 언급하거나 말 나온 김에 바로 하자 하고 약속을 잡게 되더라고요.
순간순간이 소중함을 느끼는 요즘입니다.
판을흔들어라
22/05/17 21:00
수정 아이콘
어디를 놀러 간다거나 어떤 영화를 본다거나 누굴 만난다거나 무언갈 산다거나 할 때 '다음에 할까?' 하다가 다음이 없더라구요. 오늘 좀 피곤한데 야구 경기는 다음에 봐야지 했다가 그 다음에 야구 보러갈 시간이 안 난다던가 이 과자 할인 하겠지? 하다가 1년 넘게 할인을 못 본다던가...쎌라비님 추억처럼은 아니지만 소소한데서 비슷한 교훈을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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