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에 알던 바흐, 베토벤, 쇼팽 같은 고전-낭만 시대 보다는 현대와 좀 더 가까운 시대의 음악이 어떤 것들이 있는 지 궁금해져서
현대음악으로 분류되는 음악가들의 음악을 찾아서 들어보고 있습니다.
현대미술도 그렇지만 현대음악도 일반적인 생각으로는 좀 어렵다라는 느낌이 팍 들었죠.
존 케이지의 '4분 33초' 같이 아무 연주도 안하고 방치해놨을 때 들리는 소음 같은 것들을 우연성 음악이라고 하는 등,
뭔가 특이하고 생소하고, 일반적인 관점에서 아름답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 것만이 '현대' 예술의 범주에 들어가는 건가 하는 선입견도 좀 있었는데요.
순수 클래식 음악이 지금은 주류 장르는 아니지만, 클래식 음악의 이론이나 작법은 대중음악이나 상업음악에서 여전히 큰 영향을 발휘하고 있죠.
1800년대 후반에서 1900년대 초반까지, 역사적으로 보면 현대시대에 접어드는 무렵에 활동했던 [클로드 드뷔시(Claude Debussy)]는 프랑스 태생의 [인상주의] 음악가로 분류되고, 그리고 [달빛(Clair de lune)]으로 대표되는 클래식 치고는 듣기 편안하고 말랑말랑한 음악을 만들었던 사람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요.
고전적 분위기가 강했던 기존 클래식 음악의 여러가지 틀을 깨는 시도로, 그 이전 시대와 이후 시대의 클래식 음악 스타일에 확연한 변화를 가져다준 현대음악의 서막을 여는 음악사적 중요성이 높은 인물입니다.
드뷔시로 인해서 기존 클래식 음악 스타일이 웅장하고 화려한 분위기 일변도에서 가볍고 편안한 분위기로, 딱딱하고 정형화된 스타일에서 모던하고 자유로운 느낌으로 변화되어, 지금 우리가 듣는 클래식 음악, 클래식 작법을 따르는 오케스트라나 피아노, 대중음악 스타일로 변화하는 데 여러가지 영향력을 주었는데요.
다만 그가 틀에 박힌 음악을 만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첫 빠따로 보여줌에 따라,
자신이 의도한 거는 아니였겠지만 이 모습을 본 후배 음악가들은
[이제 온갖 기발하고 희한한 발상을 숨기지 않아도 되겠구나! 하고 단체 각성하는 바람에]
우리가 생각하는 그 '난해한 현대음악'이 만들어지는 계기를 만든 발단을 제공했다고도 볼 수 있겠네요.
(현대 클래식 음악이 시작되는 두 축이 드뷔시랑 쇤베르크(Schoenberg)인데, 드뷔시는 음악성과 대중성을 잘 절충한 느낌이고, 사실 찐 난해함은 쇤베르크입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드뷔시가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점은 기존의 낭만주의 음악과 확연히 다른 변화를 모색하면서도
전혀 생소하지 않고 듣기 좋은 음악을 들려준다는 점입니다. 마냥 실험적이고 차별화되는 듣기 난해한 음악 만드는 것 보다, 참신하면서도 대중성 있는 음악을 만드는 게 훨씬 어렵다고 하죠. 클래식 음악사 계보에서 대중적으로 인지도 있는 음악가는 대부분 고전-낭만시대에 몰려있는 편이고 현대음악은 현재와 더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대중적으로 많이 들어봤거나 제목을 알고 있는 곡이 오히려 더 적은 것 같은데요.
드뷔시는 '달빛(Clair de lune)' 하나 만으로도 인지도와 인기 측면에서 다른 현대 클래식 음악들을 훌쩍 뛰어넘죠.
피아노 취미생한테는 쇼팽 녹턴 Op 9. 2번째 곡과 더불어 그럴싸하게 분위기 낼 수 있는 클래식 양대 산맥이고,
여러 미디어에서도 BGM으로 종종 사용되기도 하죠. 근래에는 사이버펑크 2077의 한 퀘스트에 절묘하게 등장해서 큰 임팩트가 있었죠.
드뷔시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어떤 스타일인지 대략적으로 말씀드리면,
음악적으로는 엘리트 코스를 밟은 사람이였는데도 음악 스타일에서 반항아적 기질을 많이 보였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소싯적에는 당시 클래식 음악계를 주름잡던 바그너에 존경심을 갖고 독일로 유학을 간 적이 있는데,
그의 음악을 듣고는 [바그너의 음악은 새벽으로 오해받는 황혼이다.]라고 대차게 까고 나서는 본격적으로 기존의 음악 문법의 틀을 깨는 곡들을 작곡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클래식 음악은 바흐로부터 점진적으로 발전하면서 확립된 몇 가지 양식과 원칙들이 존재했는데요.
곡은 주제가 제시되고 그 다음 발전하고 이런식으로 만들어가는 구성적인 측면도 그렇고, 화음도 어떤 화음은 듣기 좋으니 쓰고 어떤거는 듣기 안좋으니 쓰지 말아야 하고, 이런 음 다음에는 이런 음이 나오는 건 기피해야 하는 등의 사항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생각해보면 이런 원리는 괜히 생긴 거는 아닐 것이고 저렇게 곡을 만들어야 자연스럽고 듣기 좋다라는 경험들이 쌓여서 만들어진 것이겠죠.
하지만 이것들이 굳어지다보니 작곡가들은 감히 여기서 벗어날 생각을 감히 못했던 것인데,
드뷔시는 이런 금기를 무시해도 충분히 듣기 좋은 음악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던 것이죠.
이러한 변화의 시도로 나타난 결과가 틀에 꽉 짜여져 있지 않고, 모호하고 몽환적인 특유의 스타일로 나타났는데,
이것이 인상주의 미술이랑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긴 해서 세간에서 그의 음악을 '인상주의' 음악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다고 하는데요.
[그런데 사실 드뷔시는 본인 음악 스타일을 '인상주의'로 불리는 것을 싫어했다고 합니다.]
자기는 딱히 인상주의 미술을 모티브로 하거나 의식하고 만든 적이 없고 오히려 '상징주의' 시 같은 곳에서 더 모티브를 받았다고 하는데,
세상 사람들이 아니야 그냥 인상주의가 더 잘어울려 이러는 데 어쩔 도리가 있나요. 인상주의 음악이라는 수식어가 너무 찰떡궁합이라 더 좋은 표현도 없기도 하겠고요.
(어째 뉴에이지 음악가들이 뉴에이지로 불리는 거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대중적으로 너무 퍼져서 어쩌지 못하는 거랑 비슷한 듯)
당시에는 그의 음악도 인기가 많았고 또 프랑스 사람 아니랄까봐 여성 편력도 화려했다고 하는데요.
다만 말년에는 이혼과 재혼이 반복되며 가정사가 순탄치 않았고, 암 투병과 말년에 불어닥친 1차세계대전 전쟁 등으로 좋지 않은 일을 겪으며 1918년에 55세에 근현대 인물 치고는 조금 빨리 세상을 떠났습니다.
화려한 제국주의 유럽에 어울리는 음악을 만들고 삶을 살다가 유럽이 암흑기에 빠지기 시작하는 절묘한 시기에 역사 속으로 퇴장하는 바람에, 인상주의 음악 사조는 급속도로 자취를 감추면서(대중음악에서의 영향력은 여전히 남아있긴 합니다만) 현대음악 역사의 서막은 막을 내리고,
그 이후는 분석적이고 치밀한 구성을 추구하는 [음렬주의] 같은 스타일,
건반을 광광 때려서 화음을 다 뭉개트리면서 타악기스럽게 사용하는 [원시주의]같은 스타일,
그리고 혁신과 실험보다는 고전의 스타일을 발전적으로 재해석하자고 하는 [신고전주의] 같은 스타일로 계승되게 됩니다.
드뷔시 음악에는 두드러지는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 한국계 미국인 유튜버 'Nahre Sol'이 생일 축하합니다 노래를 드뷔시 스타일로 편곡하는 방법을 설명하는 영상이 있어서 아래와 같이 공유하였습니다.
드뷔시 음악, 피아노곡을 기준으로 설명드리면 일단 페달을 많이 써서 여러 음들이 섞여서 울리는 잔향효과를 적극적으로 쓴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붕 떠 있는 듯한 공간감이 느껴지고 나른하고 릴렉스되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존의 클래식 음악에서는 몇 가지 금기시 삼던 화음진행들이 있었는데요.
예를 들면 5도 화음(도-솔), 8도 화음(도-한 옥타브 위 도)은 같은 것들을 연이어서 쓰는 것이 금기였었는데,
소리가 꽉 차있지 않고 텅 빈 것 같은 맥 빠진 소리라는 이유였죠. 지금 생각해보면 의미없는 지적인 것 처럼 보이는데
어쨌든 드뷔시를 비롯한 현대음악 작곡가나 클래식 뿐만 아니라 재즈 음악가들의 여러 화음 시도 덕분에
지금은 훨씬 풍부한 화음이 사용된 음악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네요.
또한 드뷔시는 기존의 장단조 체계와 다른 음계들을 즐겨 사용했는데, 그 중에는 중세-르네상스 시대에 사용되다
바흐가 장단조 체계를 확립한 이후로 200년 넘게 묻혀있던 선법(mode)을 재발굴하여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기도 했고요.
또 드뷔시 음악의 큰 특징이라고 하면 온음음계(whole tone scale)를 즐겨 사용한 점을 들 수 있는데요.
이 음계는 도-레-미-파#-솔#-라#-도 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이 음계는 모든 음이 동등한 간격을 갖고 있어서
멜로디 라인이 뚜렷하지 않게 들리고 어딘지 모르게 묘하고 몽환적인 느낌을 줍니다.
마지막으로 드뷔시의 곡에는 스페인이나 동양을 테마로 하거나, 미국에서 유행한 재즈음악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랙타임(ragtime) 요소를 차용하는 등 주류 유럽 문화와 먼 지역의 이국적인 정서를 가진 곡들도 종종 썼습니다.
여기에는 클래식 계의 대세였던 독일-오스트리아의 게르만 정서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국민악파'의 대두와 함께
당시 시대가 제국주의가 극에 달할 때라 런던이나 파리같은 국제도시에서는 세계 박람회가 열리면서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등 제3세계 문화가 서양으로 쏟아져 들어오면서, 다양한 문화에서 모티브를 얻게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잡썰이 좀 길어졌는데, 피아노 곡을 중심으로 대표적인 곡이랑 추천 곡 몇 가지를 소개드립니다.
드뷔시 음악 자체가 대체로 멜로디 라인이 뚜렷하지 않고 사운드가 붕붕 울리는 듯한 곡들이 많고,
빠른 곡들도 웅장하고 몰아치는 분위기보다는 약간 경박스러움이 느껴지는 가벼운 곡들이 대부분이라
각 잡고 안듣고 그냥 배경음 삼아 틀어놓고 있기 좋습니다.
주말 오후나 밤에 편안히 책 읽거나 그냥 멍때리고 싶을 때도 좋을 것 같구요.
1. 두 개의 아라베스크(Deux Arabesques) (1890년)
두 개의 아라베스크 중 1번은 달빛 다음으로 유명한 곡인데, 시작부분이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다고 느끼시는 분들이 많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드뷔시 초기 곡 중 하나로 달빛보다는 좀 더 고전적인 느낌입니다.
2. 베르가마스크 조곡(Suite Bergamasque) (1890년~1891년)
베르가마스크 조곡은 앞에서도 소개한 달빛(Clair de Lune)이 포함된 4개의 모음곡입니다.
1번은 프렐류드(Prélude), 2번은 미뉴에트(Menuet), 3번은 달빛(Clair de Lune), 4번은 파스피에(Passepied)인데,
달빛 말고 파스피에도 비교적 잘 알려진 편입니다.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드뷔시의 많은 곡들을 앨범으로 냈는데,
달빛 연주 영상도 있어서 올려봅니다.
3. 영상(Images) 1, 2권, (1901년~1905년, 1907년)
달빛이 드뷔시 곡 중에는 가장 유명하지만 사실 특유의 인상주의 스타일이 본격적으로 강하게 드러나는 것은
1900년대로 넘어와 이 '영상' 모음곡 부터라고 생각됩니다.
영상은 1권 3곡, 2권 3곡으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요즘으로 치면 싱글, 미니앨범 같은 느낌으로)
이 중 1권 1번 곡, 물의 반영(Reflets dans l'eau)은 앞에서 유튜버 분이 따라하는 드뷔시 스타일 거의 전부가 녹아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4번곡 '잎 사이로 흐르는 종소리(Cloches à travers les feuilles) (15:16부터)는 위에서 말씀드린 온음음계가 사용되어 있어서
일반적인 장조, 단조 음악과는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4. 판화(Estampes) (1903년)
판화는 총 3개의 곡으로 이루어진 모음곡인데, 그 중 1번과 2번은 각각 동양(동남아)과 스페인을 모티브로 한 이국적인 스타일의 곡입니다. 탑(Pagodes)이라는 제목은 '파고다'라고 되어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동양 전통식 탑을 뜻하는데, 드뷔시가 파리 박람회에서 인도네시아 자바 음악을 듣고 감명을 받아 작곡한 곡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동양음악 특유의 5음계(펜타토닉 스케일)로 멜로디가 진행되어 동양적인 느낌을 주고 동남아 타악기인 공(Gong)과 같은 이국적인 악기를 피아노로 묘사하는 부분들이 특색있습니다.
5. 기쁨의 섬(L'isle Joyeuse) (1903년~1904년) (02:29:52)
제목답게 가볍고 쾌활한 리듬감이 있는 곡으로, 판타지스러운 동화 속 나라 같은 분위기의 곡입니다.
지난 달에 지인의 초대로 다녀온 음악회 레퍼토리 가운데 드뷔시의 바다(La Mer)라는 관현악곡이 있었네요. 드뷔시는 평소 즐겨듣는 작곡가가 아니라서 나른한 피아노곡의 이미지만 갖고 있었는데, 의외로 템포도 있고 변화무쌍한 곡이라서 좋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좋은 글 덕분에 드뷔시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되었네요. 감사합니다.
드뷔시 곡들이 그 전의 클래식 음악에 비해서 길이가 짧은 편이고, 악장 구분없이 대중음악 비슷하게 하나의 제목이 하나의 곡 이렇게 매칭이 되는 편이라 피아노곡은 어떻게 보면 그냥 조금 구성이 다양하고 고풍스러운 뉴에이지 듣는 마인드로 가볍게 들어도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지휘자, 연주자별 바리에이션은 나중에 관련 글을 써보고 싶은데,
저 같은 경우는 연주자 구분없이 그냥 아무거나 들어보고 그 중에 마음에 드는 곡이 있으면 그 곡을 연주한 여러 연주자들 것을 들어보면서
그 중에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것 찾아서 위주로 들어보고 있습니다.
저도 클래식 음악을 취미로 입문한지 오래되지는 않아서 긴 교향곡 같은 것은 아직 좀 어려워서,
피아노 곡 기준으로는 소나타는 모든 악장 다 들으려면 너무 길고 구조에 대한 이해도 좀 필요한 편이라
입문용으로는 각 음악가의 프렐류드(전주곡)나 에튀드(연습곡), 녹턴(야상곡) 정도를 추천하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