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에게 어렸을 적의 가장 강렬했던 기억은 목숨을 위협받았던 기억입니다.
그리고 그 경험이 호기심에서 비롯 되었다는게 내가 왜 그랬을까란 생각을 지울 수 없게 만듭니다.
저는 성향상 겁이 많고, 조심하며, 규칙을 지키려 노력하는 편입니다.
그리고 만화를 좋아하고, 스포츠를 좋아하고, 음악과 책을 좋아합니다.
제 이야기는 제가 국민학교 1학년 때로 돌아갑니다. 당시에 대한 배경 설명을 하자면
제가 살던 지역은 수도권 인근이라는 이유로 90년대에 급격하게 발달하던 지역이었습니다.
아직 쓰레기 종량제가 시행되지 않아 학교에서도 소각장이 있어 교내에서 발생하던 쓰레기를 소각하던 시절입니다.
저는 여느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골목에서 놀던 평범한 아이였습니다.
나이 한 두살 정도는 무시하고 골목에 있는 주택의 아이들은 다 같이 놀던 시절이었죠.
당시에 1학년은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누어 등교했습니다. 그 날은 오전반이고, 체육이 있어 나일론 체육복(반팔)을 입고 등교했었습니다.
정확하게 날짜는 기억이 안 나지만 여름이었고, 여름방학 이전이었습니다.
그 날은 다른 친구들이 오후반이었는지 동네에 있는 아이는 저와 아직 유치원생이던 동생이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그 동생과 골목을 누비며 놀고 있었죠.
그렇게 이 골목, 저 골목을 돌아다니던 저희는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말았습니다.
새로이 올라가는 상가 건물 공사현장에서 어떤 아저씨가 플라스틱 쓰레기통에 불을 붙여 쓰레기를 소각하는 장면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불이 무서운 것, 위험한 것이란 생각이 없었습니다. 왜냐면 화약으로 만든 불꽃놀이를 그냥 문구점에서 팔던 시절이었거든요.
저희는 그냥 지나다가 발견한 그 소각 현장을 발견하고 호기심에 찬 얼굴로 5m 정도 떨어진 곳에서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저는 봐서는 안 될 것을 보고 말았습니다...
바로 조강지처가 좋다는 국민연료... 네. 부탄가스 였습니다.
당시의 저는 가스의 위험성을 인지하지 못 했습니다. 그래서 그 아저씨에게 물어봤죠. "부탄가스 태워도 되는거에요?"
그 물음을 던진 몇 초 후, 번쩍하는 빛을 보았습니다.
앞서서 저는 만화를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당시에 유행하던 만화책은? 네. 드래곤볼이었죠.
제가 당시 마지막으로 본 만화책이었고, 사이어인 침공 에피소드가 진행중이었습니다.
제가 그 만화책에서 마지막으로 본 장면은 어떤 장면일까요? 바로 이 장면입니다.
네. 저는 순간적으로 이 빛은 위험하다는 것을 느끼고 등 뒤에 있던 유치원생 동생을 지키기 위해 그 앞을 가로 막았습니다.
어른들이 만화책 많이 보지 말고, 절대 따라하지 말라는 이유가 있었네요.
그 결과 그 동생은 약간의 화상으로 크게 다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대신에 저의 운명은 피콜로 대마왕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 번쩍한 이후에 제가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상가의 아저씨가 호스로 뿌려주던 물, 그리고 조금씩 돌아오는 시야,
아무런 정신은 없지만 집으로 가야 한다는 의지 뿐이었습니다.
200m 정도 떨어진 집까지 그 상태로 걸어갔고, 저는 주인집 아주머니의 등에 업혀 동네에서 가장 가까운 종합병원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당시 제 상태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좁아진 시야에 들어오는건 바싹 탄 삼겹살 같은 제 피부 뿐이었죠.
눈에 보이는 피부가 전부 타버려 라인조차 잡을 수 없었고, 결국 머리카락을 전부 밀어버린 후 머리에 라인을 잡았습니다.
당시의 기억이 전부 파편화 되어버려 정확하지는 않지만 화상 범위가 너무 넓어 목숨이 위험할 수 있다는 말은 기억이 납니다.
결과적으로 정확하진 않지만 약 3개월정도 입원했습니다. 타버린 피부를 적신 거즈를 붙여 떼어내고, 매일 하루에 한 번 링거를 꽂기 위해
두꺼운 바늘을 혈관에 꽂고...(이 이후로 주사바늘에 대한 공포감이 아예 없습니다. 채혈도 헌혈도 너무 편안하게 합니다.)
어머니는 언제 죽을 지 모르는 하나뿐인 아들을 간호하시고...(나중에 들었는데 어머니도 수술하신지 얼마 안 되셨던 시기였다고 합니다.)
천만 다행으로 어머니께서 무리를 해서 당시 화상에 좋은 비싼 치료를 다 감당해 주셔서 저는 살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여름이 지나고, 2학기 중반이 될 무렵부터 다시 학교에 갈 수 있었습니다. 유급을 면하기 위해서 였죠.
대신 저는 태양빛을 볼 수 없었습니다.. 화상자국이 태양빛을 받으면 더 심해지기 때문에 태양을 피해야만 했죠.
따라서 아직 늦여름-초가을이었음에도 저는 창이 넓은 모자와 긴팔로 무장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을 감당해야 했죠. "괴물"
다행히 그런 말에 상처 받진 않았습니다. 제가 봐도 괴물 같았거든요.
아직 탄 살을 떼어내고 새살이 차지 않아 알록달록 빨간, 반팔라인을 기점으로 너무나 명확하게 다른 제 팔과, 다리와 얼굴의 피부가 말이죠.
이 후에 모자와 긴팔 없이 바깥을 다닌 것은 2학년이 되서였고, 거실이 없고 주방과 붙어있어서 어쩔 수 없이 문 앞에 가스렌지가 있던 제 방에
가스렌지가 켜져 있어도 들어갈 수 있는건 2학년 2학기가 되서야 였습니다. 트라우마가 상당히 길게 지속되었죠.
이 사고 이후에 바뀐 것들이 있습니다.
1. 호기심이 줄어 들었습니다. 당연하겠죠. 그것 때문에 죽을뻔 했는데.
이 경향이 점차 발전되어 현재는 좋아하는 것 이외에는 타인에게 관심을 주지 않게 되었습니다.
2. 장래 희망이 가수로 바뀌었습니다. 당시에 병원에 누워 움직이지 못 하던 저에게 위로가 되었던 것은
금성 카세트 라디오와 사고나기 얼마 전에 처음으로 직접 구매했던 서태지와 아이들 테이프였습니다.
그 테이프를 들으며 삶에 대한 의지를 찾았고 이 사람처럼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죠.
3. 후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한 번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니까 후회하는 마음을 남기는게 싫어졌습니다.
따라서 이후에 일어난 모든 선택에 대해 그 어떤 것도 후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보기 좋은 이야기가 아닌 것을 남기는게 아쉽긴 하지만 제 어린 시절에 이 이야기를 빼놓고 생각 할 수 없어서 남겨봅니다.
아직도 손등에는 그 때와 같은 알록달록한 피부가 남아있고, 옅어지긴 했지만 저에겐 그 경계도 보입니다.
하지만 다행히 의식하지 않게 되었고, 얼굴도 현재는 일반적인 피부로 잘 재생되어 멀쩡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수가 되겠다는 꿈은 이루지 못 했지만 그래도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어머니에게 감사한 것이 있습니다. 그 사고에 대해 제가 잘 못 했다는 말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왜 그걸 보고 있어서!"라던가 "왜 거길 갔어!"와 같은 말씀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것에 대해 질타하셨다면 저는 크나 큰 상실감을 느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현재보다 더 어두운 제가 되었을 수도 있었겠죠.
아이들은 반드시 좋은 길로 가지 못 합니다. 아이들이니까요.
그렇게 아이들이 잘 못 된 길로 갔을 때 어른들이 해주는 말이 질타가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다쳤던 그 때처럼 질타가 아닌 위로라면, 이해라면, 의지라면 더 좋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결론이 좀 이상하게 흘렀지만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남기는 것이 후회 없을 것 같아서 남겨봅니다.
이만 긴 글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P.S : 당시에 그 부탄가스를 소각하신 분은 경찰로 부터 일주일 후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분에게 원망하거나 비난하고 싶진 않습니다. 그 분도 시대가 낳은 무지의 피해자라고 생각하거든요.
왜냐면 제가 사고난 이후에서야 가스나 스프레이를 버릴 때엔 반드시 구멍을 뚫으라는 캠페인이나 방송이 보이기 시작했으니까요.
* 손금불산입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4-01-22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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