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에야 남자들도 예전보다 육아휴직을 많이 쓰는 분위기라 그다지 신선한 이야기는 아니겠습니다만, 그래도 주위에 보면 육아휴직을 쓰는 남직원들이 많지는 않더군요.
저에게도 다신 없을 경험이었던지라 기록을 남길 겸, 그리고 휴직중에 정서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셨던 피지알러들에게 공유도 드릴 겸 해서 끄적거려 보는 글입니다.
올해 3월에 회사 선배 남직원 한분이 육아휴직 3개월을 하시더군요.
30대 후배 남직원들이 육아휴직하는 거야 뭐 그러려니 했었는데, 같은 40대인 선배가 육아휴직을 한다고 하니 뭔가 신선했달까요?
이것저것 물어보고 나니 저도 생각이 바뀌더군요.
와이프한테 얘기했더니, 마침 본인도 커리어를 이어나가려면 몇달간 직장생활을 해야할 것 같다고 하네요.
제가 휴직을 하면 프로젝트 활동 및 구직에 많은 도움이 될거라는 얘기였습니다.
게다가 올해가 육아휴직을 할 수 있는 마지막 해였죠. (법적으로 자녀나이가 만 8세 이하 또는 초등학교 2학년 이하여야 함)
그래서 5월부터 휴직을 하는 걸로 3월에 미리 팀장님과 부서장님께 말씀을 미리 다 드려놨는데...
제 몸이 심하게 아픈 상황인 걸 4월쯤에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2월부터 몸이 좀 안좋긴 해서 병원 다니면서 약을 먹고, 3월에는 며칠 입원도 하고 그래서 나았나 싶었는데,
계속 차도가 없어서 종합병원에서 검사를 했더니, 6개월 이상의 장기간 치료가 필요하다는 소견이 나와버렸죠.
(어떤 병인지는 다른 글로 자세하게 풀어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연차휴가를 써서 조금 일찍 4월 중순부터 7월까지 약 100일간의 휴직(휴가 포함)을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사실, 육아휴직을 하면 아이들을 돌보는 데 시간을 쓰는 것 뿐 아니라, 가족들과 여행도 가고, 그간 못했던 취미(게임이라던가....)도 실컷 즐기고 술도 실컷 퍼마시고 하는게 뭔가 일반적인 남직원들의 로망일텐데, 몸상태가 엉망이니 제대로 할 수 있는게 거의 없었습니다.
5월 한달간은 아침에 일어나서 약을 먹고 소파에 앉아서 5분 정도 책을 보다가 지쳐서 하루종일 누워있는 게 다일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약을 한달정도 먹은 6월부터는 어느 정도 일상생활이 가능해져서 여러 활동(?)을 좀 했는데, 몇가지를 적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아이들 생활에 좀 더 깊숙히 관여했던 일들]
1.
5월 중순쯤에 아들놈이 같은 반 급우가 장난을 심하게 친다고 얘기한 걸 들은 적이 있습니다.
초2학년들이 그렇지 뭐.... 하고 그땐 그러려니 하고 넘겼는데, 아들녀석한테 또 그랬다는 군요.
근데 장난친 부위가.... 사타구니 급소랍니다 ;;
얘기를 들어보니, 그 아이는 키도 크고 잘생겨서 인기도 많은 아이라는 군요.
그런 아이가 울 아들놈처럼 조용한 애한테 왜 그런 심한 장난을 칠까 싶었는데, 사건이 있기 며칠 전에 반에서 팔씨름이
유행했었나 봅니다.
체격이 큰 그 아이가 여러 아이를 으스대면서 이겼고, 조용히 있던 제 아들놈한테도 걸었는데..... 아들놈이 이겼답니다.
반 애들이 다 보는데서요.
아마도 딴에는 체면을 구겼다고 생각했나 본데, 그래서 그 뒤부터 그런 장난을 친다는 군요.
장난을 당한 뒤론, '빨리 여름방학을 했으면 좋겠다'라거나, '얼른 9월이 와서 집근처에 새로 생기는 학교로 전학을 갔으면 좋겠다'거나 하는
말이 초2 어린이한테서 나오는데, 어떤 부모가 참겠습니까.
담임 선생님한테 분노를 머금은 (하지만 내용은 차가운) 장문의 문자를 보냈더니, 금방 전화가 오더군요.
그 아이 부모도 담임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놀랜 모양인지, 저한테 사과하고 싶다고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다는데 그건 거절했습니다.
아직 아이들이 어리니, 행동이 어떻게 변하는지 보고 나서 다음 스텝을 밟아도 될 것 같았습니다.
그 아이는 다음날 손수 사과편지를 써왔고, 다행히 그 이후엔 아들래미한테 친절하게 대해준다고 하네요.
아이의 행동거지도 바뀌었다고 하니, 부모님한테 엄청 혼난 듯 합니다.
이후에 아들래미도 저한테 엄청 앵기고 그러네요. (그 전에도 그랬습니다만 더 심해졌...;; )
아무래도 아이에게는 '나를 아빠가 보호해주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끔 해준 사건이 아닐까 싶습니다.
2.
아들놈이 왼손잡이입니다.
어려서부터 왼손을 쓰는 걸 굳이 제지하고 고치라고 하지 않아서, 밥먹는 것, 글씨 쓰는 것, 배트/라켓 사용, 축구 등은 모두 왼손/왼발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학교 다녀오더니 왼손으로 글씨쓰는게 너무 불편하다고 하더군요.
글자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고 책은 오른쪽으로 넘기게 되어있는데, 왼손으로 글씨를 쓰려니 본인이 쓴 글씨가 본인 손에 가리고,
쓸 때도 밀어써야 하는게 아니고 몸 쪽으로 당겨쓰려니 종이 받치는 것도 힘들고, 아이 입장에선 문제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오른손 글씨로 바꾸기로 하고, 휴직중에 매일 제가 맡아서 연습을 시켰습니다.
처음엔 힘들다고 그만하고 싶다고 하기도 했는데, 노력하면 할 수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서 달래가면서 연습시켰지요.
한 4개월 정도 하고 나니 지금은 오른손으로만 글씨를 쓰고 왼손은 어떻게 쓰는지 까먹었다네요 후후.
3.
아이들이 읽을 책을 월단위 정액제 구독서비스로 이용하고 있었는데, 구독서비스가 좋은 점도 있지만 아무 책이나 마구 보게되는 점이 있더군요.
그래서 제가 날을 잡고 이리저리 알아보고 나서 중고로 전집 하나랑 단편 몇권을 사서 들여놨습니다.
애들이 본인 책이라고 하니 더 좋아하면서 읽고 또 읽고 하네요.
4.
딸래미가 기침때문에 병원을 찾았다가 '편도 비대증' 이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어쩐지 잘 때 입을 벌리고 자는 경우가 잦고, 입냄새도 좀 심한편이었거든요.
바로 종합병원 진료를 보고 수술 날짜를 잡았습니다.
2박 3일은 입원해 있어야 하는 수술이라고 해서, 와이프가 딸래미랑 같이 병원에 있었고, 저는 아들래미랑 집에 있었지요.
제 휴직 중에 수술 일정이 잡힌 것이 참 다행이었습니다.
5.
유부들은 아시겠지만, 초딩들은 방과후 교실 이라는게 있습니다.
컴퓨터, 수학, 영어는 물론이고, 줄넘기, 축구, 생명과학, 드론, 배드민턴, 체스 등등의 다양하고 유익한 클래스가 방과후에 열리는 건데,
시간당 수강료도 일반 학원에 비해 저렴해서 수강 신청이 무지 치열합니다.
저희도 애가 둘이라 각자 애들 한명씩의 방과후 수강신청을 맡아서 신청했는데, 어찌나 긴장했던지 손이 떨려서 클릭버튼을 잘못 누를 정도였습니다.
다행히 원하는 수업에 무사히 신청이 되어서 3개월간 애들 앞에서 생색 좀 냈지요.
[처갓댁 인테리어]
- 장인장모님이 3년 전에 소형 평수 아파트를 구매하셨는데, 올해 37년간 살던 빌라를 아예 처분하고 저희 집 근처로 이사를 오셨습니다.
애초에 저희 집 근처로 알아보신 것도 제가 추천을 해서였고, 와이프도 좋아했지요.
문제는 아파트가 거의 20년이 다 된 아파트여서 좀 낡았다는 거였는데, 와이프가 인테리어를 아예 도맡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본인이 인테리어 컨셉부터 잡고, 업체들을 만나고, 업체 선정하고, 자재 고르고, 중간중간 공사현장에 가보고.... 죄다 담당했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한게 없고, 다만 와이프가 바삐 돌아다니는 도중에 집에 잘 붙어 있었지요.
애들이 학교에서 오면 간식챙겨주고, 카드게임 같이 하고, 가끔 티비로 영화도 같이 보고, 중간중간 와이프 데리러 차 몰고 같이 가기도 했습니다.
저의 적극적인(?) 내조 덕분에 인테리어는 가성비 훌륭하게 마무리가 잘 되었고, 두분은 두달 전에 이사 오셔서 아주 만족하면서 지내고 계십니다.
물론 장인장모님을 한달에 한두번 뵐 때마다 이 모든 건 '와이프의 인테리어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준 사위 덕분' 임을 꾸준히 어필하고 있습니다 크크.
[와이프 구직 면접]
- 와이프가 집에서 가까운 회사를 찾다가 한 회사에 면접을 가게 됐습니다.
거리는 가까운데 교통편이 안좋은 곳에 위치해 있어서 면접 때도 제가 데려다주고, 채용이 확정된 이후에 며칠간은 제가 데려다주고, 태워오기도 했습니다.
와이프가 며칠 다니다보니 흔한 헬반도의 좋소기업임이 드러나서 그만두고 현재는 다른 일을 하고 있긴 합니다만, 그래도 구직활동을 도와줬다는 점이 뿌듯하네요.
[가족 여행]
- 6월 초~중순 일정으로 제주도 여행을 9박 10일로 다녀왔습니다.
가기 전에는 렌터카도 비싸고, 숙박비도 비싸고, 제주도 물가도 비싸고 모든게 비싼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눈 딱 감고 다녀오니 7월엔 저희가 했던 고민들이 하찮게 느껴질 만큼 더더욱 비싸졌더군요 ;;
여태까지 가족여행 중에서는 가장 길게 다녀온 여행이었는데,
다녀오기 전 : 제주도 한달살이를 뭐하러 해? (그 긴) 한달 동안 뭘 한다고...
다녀 온 후 : 제주도 한달살이를 뭐하러 해? (그 짧은) 한달 동안 뭘 한다고...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열흘이 금방이더군요.
아이들과 갯벌/낚시/승마 체험과 오름 오르기, 수영 등 실컷 즐기고 왔습니다.
나중에 아이들에겐 어떤 여행으로 기억될 지 모르겠네요.
아빠가 몸이 안좋은 때였다는 걸 나중에 꼭 알려줘야겠습니다 크크.
[독서]
- 5월에 몸이 아직 많이 안좋을때는 독서를 좀 하고 싶어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조금만 읽어도 몸이 피곤하고 눕고 싶어지더라고요.
근데 아이러니하게도 독서 말고는 할 수 있는게 없었습니다.
신체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컨디션이 아니었거든요.
웹서핑도 도저히 할 체력이 안되었는데, 그나마 가끔 피지알에 들어와서 글도 읽고 키득대면서 시간 보내고 했네요.
피지알러들께 이 글을 빌어 감사드립니다.
여튼 그래서 근처 도서관에서 소설 몇권을 빌려서 읽기 시작했는데, 그중 하나가 해리홀레 시리즈였습니다.
요 네스뵈의 소설은 '스노우맨'을 가장 처음 접했는데, 상당히 재미있어서 오슬로 3부작도 손을 좀 대볼까 하고 생각만 하고 있었거든요.
그러다가 '박쥐' 가 해리홀레 시리즈의 첫 작품이라는 걸 알게돼서 '바퀴벌레' 까지 읽었는데, 뭐랄까요... 좀 음울한 분위기가 제 컨디션에 더해져서 기분이 더 안좋아지는 느낌이었달까요;;;
그래서 다른 책을 찾다가, 예전에 '별의 계승자' 1권을 재미있게 읽었던 게 생각나서 2권부터 시작했습니다.
3권까지 읽고 너무 재미있어서 5권까지 세트로 구매해버렸는데, 몸이 좀 나아지니까 읽는 속도가 현저히 느려져서 아직도 4권 읽는 중입니다 크크
책도 좋지만 요즘은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게 너무도 감사한지라, 책은 좀 뒷전이 되네요.
(네, 핑계 맞습니다 크크크)
[영화]
- 남들은 휴직하면 영화도 많이 보고 드라마도 많이 본다길래 저도 그럴까 싶었는데, 도저히 취향에 맞는 작품을 찾기가 쉽지 않더군요.
애초에 티비를 거의 안보는 편이었던지라, 기를 쓰고 찾는다고 해도 한계가 있더라고요.
어느 정도냐면 저희 집에 넷플릭스 계정은 있는데, 넷플릭스를 안봅니다. (읭?)
킹덤 (주지훈, 배두나 나오는거요) 도 시즌1의 3번째 에피소드를 보다가 너무 늘어진다 싶어서 안봤구요.
오징어게임은 아예 시작도 안했습니다.
그렇다고 유튜브를 보느냐? 그것도 아닙니다.
그냥 영상을 찾아서 보는 걸 귀찮아 하나봐요. 웃긴 건 와이프도 저랑 똑같습니다.
어쩌다 주말에 애들이랑 '1박2일' 재방송 보면서 낄낄대거나, '나혼자 산다' 재방송에서 기안84의 기행을 보며 공감(?)을 하는 게 다였습니다.
최근에 가장 재밌게 본거는.....몇년전에 백종원이 나온 '스트리트 푸드 파이트' 였고요.
가장 최근에 본 드라마는...... 시크릿 가든 입니다..... (현빈이랑 하지원 나온 그 드라마 맞습니다)
VOD로 본게 아니고 본방 때 봤으니.... 12년도 더 됐지요.
여튼 그러다가 6월에 탑건 매버릭이 개봉한다길래 개봉일에 봐야지... 하다가, 어? 울 동네에서 유료 시사회 하네? 하고 온 가족이 보러갔습니다.
그리고는... 혼자 가서 5번인가 6번을 더 봤습니다 ;;;
영화관에서 포스터 받아오고, 포스터에 맞는 액자 사러 다녀오고, 그걸 집에 걸어놓고 흐뭇해하고...
집에 있을 때는 맨날 OST 틀어놓고, 차 안에서도 무조건 그 OST 틀고...
남들이 보면 아주 쌩 쑈라고 할만큼의 덕질이었는데 너무 즐겁더군요.
그래도 와이프가 '당신이 지금이나 이런 거 하지, 또 언제 이러겠냐' 하고 다 이해해줘서 참 고마웠습니다 크크크
[종합 후기]
지나고 나니 3개월간의 육아휴직은 너무 금방이더군요.
왜 3개월을 했을까... 4개월 정도 할걸...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업무적으로 9월엔 복직을 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더 하기는 힘들었을 거 같구요)
다만 휴직이 길어질 수록 경제적인 압박이 더해져오니.... 현실적으로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그래도 몸이 아파서 어쩔수없이 하게 된 육아휴직치고는 아이들과 저에게 많은 추억을 남겨준 기간이 아니었나 싶구요.
육아휴직을 생각도 안해본 분들께는 한번쯤 고민해보시라고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이미 고민중이시라면? 고민할 필요도 없습니다. 강력 추천드립니다.
기회가 되면 위에 말씀드렸던 질병에 대해서도 글로 한 번 써보겠습니다.
(막바지이긴 하지만 아직도 투병중이긴 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손금불산입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4-05-28 11:49)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 게시글로 선정되셨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