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23/02/03 08:17:26
Name 밥과글
Subject 소녀 A (수정됨)

같은 동네에 오래 살다보면 그런 관계가 있다. 얼굴도 익숙하고 어릴 때 같이 논 기억도 있는데 이제와서 딱히 친분은 없는.  

나와 소녀도 그런 사이였다.  우리는 어릴 때 같은 골목에 살면서 집을 마주보는 사이였다.  초등학교도 다르고 서로 이름도 모르는 사이였지만 얼굴만은 너무도 익숙한 그런 사이.

아마 추억의 앨범을 뒤지다보면 유치원 졸업 사진 즈음에서 함께 서 있는 모습이 보일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4학년 즈음에 소녀와 소녀의 동생과 나 셋이 골목에서 마주쳐 함께 놀이터를 갔던 기억이 있다.  정글짐에서 넘어져 엉엉 우는 소녀의 동생을 업고 집에 가면서 어딘지 믿음직한 오빠가 된 것 같은 기분에 으쓱했던 한 장면의 파노라마.

짧은 단발머리에 선머슴 같았던 그 아이는 동생도 잘 돌보고 나와도 잘 놀던 착한 아이였더랬다.  

소녀를 재회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의 일이었다.  남자중학교를 다니던 나는 우연히 학교를 가던 길목에서 소녀를 목격했다. 치켜올라간 고양이 같은 눈매에 앙증맞은 입술을 가진 단발머리의 예쁘장한 여자아이.  남자애 같았던 그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고, 착했던 모습도 어두컴컴한 골목 어귀의 그림자에 가려진 듯 했다.

다른 무리들과 담배를 뻑뻑 피우며 나와 눈을 마주쳤던 그때, 분명히 나를 알아본 그 눈빛을 기억한다.  내가 소녀를 기억하듯이 소녀도 나를 기억하고 있었으리라.
한 때는 익숙한 이웃, 놀이터에서 함께 했던 좋았던 기억들.  나는 소녀를 아는 척 하고 싶었지만 함께 있는 학생들이 워낙 악명 높은 아이들이라 크게 용기를 내지 못했다.

기회는 한 달 무렵이 지나서 찾아왔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 소녀는 혼자서 걷고 있었다.  나도 길을 걸었다.  우리 둘은 서로 인사를 건네지도 아는 척을 하지도 않았지만 함께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했다.  마치 진작에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것처럼 소녀가 말했다.

"집에 가는 길이야?"

"어.  잠깐 옷 갈아 입고 학원 가려고."

"너 아직도 그 골목에 사니?"

"그렇지.  넌 이사갔나 보다?"

소녀는 멀리 떨어지지 않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우리는 어릴 때 나누었던 공통의 추억을 얘기하고 서로 알고 있는 친구가 있는지 묻기도 하며 하교길을 함께했다. 말 걸기도 어렵던 소녀가 한 순간에 어릴 적 그 아이로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단 하루, 한 번의 동행이었지만 우리는 분명히 '아는 사이'가 맞았다.  친구라고 부르기 좀 쑥스러워도 반가워할 수 있는 그런 사이.

그 뒤로는 다시 교류가 사라졌다. 여중과 남중으로 학교도 나뉜 데다가 서로 하교하는 시간대가 다른지 잠깐이라도 마주칠 일이 없었다.  집으로 바로 가던 나와 다르게 소녀는 어울리는 무리와 함께 다니느라 골목을 지나는 시간이 서로 달랐을 것이다.  그저 먼 발치에서 '노는 무리' 사이에 끼어 있는 소녀를 종종 보고는 했다.  
나와 함께 하교 했던 하루의 시간은 드물게도 친구들 없이 집으로 가던 소녀의 우연한 날이었으리라.

서로의 일상에서 큰 변화 없이 살던 우리에게 균열이 감지된 것은 그로부터 몇 달 뒤의 일이었다. 거의 중3이 되갈 무렵. 소녀가 친구들과 담배를 피우던 그 골목에서 따귀를 맞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교복과 머리카락이 엉망이 된 채로.  드물게도 선명한 학교 폭력의 순간이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는 진작부터 서열이 나뉘어있고, 싸움이나 폭력이 일어난다고 하면 일대일로 다툼이 생기는 것이었다. 혹여 누가 누구를 폭력으로 괴롭힌다 해도 마찬가지의 양상이었다.  사람을 빙 둘러싼 채로 린치를 가하는 모습은 난생 처음 보는 것이었다.

들리는 풍문으로 여자애들이 더 무섭다 하더니.

불행 중 다행으로 폭력은 한 번의 뺨 때리기로 끝났다.  나와 소녀보다 선배로 보이는 여학생들은 겁을 주듯 소녀를 윽박지르고 으르렁거렸지만 더 이상 손을 휘두르진 않았다.  학생들이 떠나간 뒤 홀로 덩그러니 남은 소녀에게 괜찮냐는 말을 건네고 싶었다.  소녀는 나를 휙 노려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가방을 들고 떠나갔다.

마치 나에게 화를 내는 듯한 그 눈빛에 가슴이 아려왔다.  그것이 꼭 나를 책망하는  메시지였다고는 장담할 수 없다. 그저 비참하게 당하고만 있던 자기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을 수도 있고, 부끄럽거나 자존심이 상했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그저 별 의미 없이 '넌 여기 왜 있냐' 하는 표정이었을지도. 우리는 그렇게 특별한 사이가 아니었으니까.

어쨌든 나는 죄책감이 들었다. 경찰이나 어른들에게 신고를 해야 했을까? 백마탄 왕자님처럼 골목을 나서서 여학생들을 제지해야 했을까? 그런 고민들이 나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같은 학교 친구들에게 우리 동네의 노는 무리들에 관해 처음으로 물었다.  소녀의 이름을 대면서 그녀를 알고 있냐고, 얼마 전에 얻어맞고 있는 모습을 봤는데 어떻게 된건지 아냐고 수소문을 해보았다.  
정답은 싱겁게도 빨리 나왔다.  학교, 학원, 방과 후 같이 어울리는 무리들.  우리 학교의 학생들은 이웃한 여학교의 학생들과 놀랍도록 촘촘히 이어져 있었다.  이성에 늦게 눈을 뜬데다 인기라곤 없었던 나만 몰랐을 뿐.  내 친구들 중에 소녀와 노래방에 가본 이가 있을 정도였다.

일진, 노는 무리라고 하면 무조건 문란할 것 같지만 사람의 성격은 입체적이고 다양하다.  모범생이라고 해서 성에 빨리 눈을 뜨지 말라는 법이 없듯이, 싸움질을 밥먹듯이 하고 다니는 거친 남학생 중에도 순정파가 있다.  치마를 짧게 줄이고 담배를 뻑뻑 피워대도 성 적으로는 남자를 쉽게 허락하지 않는 노는 여학생도 있는 것이다.

소녀는 그런 여학생이었다.

평소 소녀가 어울리던 무리들이 선배 남학생들과 놀던 도중 그렇고 그런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소녀는 선배를 적극적으로 거부했고 그래서 평소 어울리던 언니들 눈 밖에 났다는 소문이었다.  정확한 소식은 알 수 없었다.  나의 다른 친구가 또 듣기로는,  소녀를 건드리던 남학생을 어느 언니가 좋아하고 있어서 화를 냈다고 한다.

나에게는 별세계 같은 이야기들 이었다.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소녀를 어떻게 도와야할까. 답은 뜻 밖에도 엉뚱한 곳에 있었다. 엄마.  엄마의 교회 친구 분은 나보다 2살 많은 형을 아들로 두고 있었다.  그 형은 싸움도 잘하지만 교회도 열심히 다니는 특이한 캐릭터였다. 싸움 측면에서는 동네에서 전설로 남고 경찰서도 들락거린 그런 인물이었지만,  엄마와 엄마 친구 분의 소개를 받아 나를 마주할 때에는 서글서글하기 그지 없는 착한 형이었다.

"학교 다니다가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말해"

엄마가 교회 모임을 가질 때 친구 분과 함께 두 어번 얼굴을 본 것이 전부인 사람이라, 정말로 그 형을 찾게 될 날이 있을 줄 몰랐다. 나는 엄마에게 '괴롭힘 받는 친구가 있다'며 사실을 털어놓았다,  엄마는 친구 분에게 전화를 걸었고, 우리 동네의 전설은 정말로 나를 위해 나서주었다.

혹시 일이 커지진 않을까. 소녀에게 도움이 되기는 커녕 벌집을 건드린 게 아닐까 조마조마 했던 기분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쪽 노는 물을 잘 모르는 내 입장에서  엄마친구 아들이 그 정도의 위력이 있는지 의구심이 들었던 것이다.  

그 형의 입지는 생각보다 더 대단했고,  내 걱정이 황당해질 정도로 일은 쉽게 끝났다.  

소녀는 더 이상 패거리에게 시달리지 않았다.

다행스러운 소식을 듣고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 우리는 하교길 어귀에서 다시 얼굴을 마주쳤다.  아마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했다. 소녀는 데면데면하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고, 나는 데면데면하게 그 인사를 받았다.  소녀는  이제 혼자인 것처럼 보였다. 괴롭힘은 없어졌지만 같이 놀던 패거리도 함께 떨어져 나간 모양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한동안 함께 하교를 했다.  소녀의 아파트와, 내가 살던 다세대 주택이 갈라지는 곳까지.  노을 지는 길을 걷자니 소녀의 동생을 업고 집까지 걸어가던 어릴적 기분이 떠올랐다.  나는 의지할만한 친구였을까.

문득 소녀가 물었다.

"너 담배 피는 여자 싫어하지?"

중3으로 학년이 올라갔을 때 소녀는 호주로 이민을 갔다. 한국에 남아 있던 몇 개월의 시간 동안 우리 사이에 별 다른 일은 없었다.  학교에서 다른 친구를 사귄 것인지 함께 하교를 하는 것도 흐지부지 되었다.  조금 달라진 것은 얼굴을 마주치는 일이 잦아졌다는 것과, 그 때마다 우리는 반갑게 인사했다는 것이다.

네가 담배를 끊은 것은 나 때문일까?  소녀 A.  
  





****************

이 이야기는 제 이야기가 아니고 친구의 이야기를 재구성한 것입니다.  제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은 교류가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 배려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4-08-27 01:49)
* 관리사유 : 다양한 감성을 자극하는 글이네요.
밥과글님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파르티타
23/02/03 10:21
수정 아이콘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앞으로도 종종 계속 많이 글 좀 올려주세요
이따가 퇴근하고 라디오헤드 Kid A 들으면서 다시 읽어봐야겠습니다 흐흐
밥과글
23/02/03 10:24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제가 제목을 지으면서 떠올린 노래는 나카모리 아키나의 소녀A 입니다. 곡 자체는 제 글이랑 어울리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저는 현재 백수이기 때문에 글을 자주 쓸 예정입니다. 재미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23/02/03 10:38
수정 아이콘
글 너무 좋네요! 자주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밥과글
23/02/03 10:44
수정 아이콘
계속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소재가 떨어지는게 걱정인데 가능한한 자주 써보겠습니다
살려야한다
23/02/03 10:40
수정 아이콘
글솜씨가 정말 좋습니다. 순식간에 세 글 다 읽고 왔네요. 앞으로도 종종 써주세요. 흐흐
밥과글
23/02/03 10:44
수정 아이콘
자주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버지
23/02/03 11:19
수정 아이콘
좋습니다. 뭔가 아련하네요.
밥과글
23/02/03 12:10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안군-
23/02/03 11:41
수정 아이콘
오랫만에 학창시절로 돌아간 기분을 느꼈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밥과글
23/02/03 12:10
수정 아이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orschach
23/02/03 11:49
수정 아이콘
자유게시판에서 이틀 연속으로 술술 읽히는 좋은 글을 읽어서 기분도 좋아졌는데 다시 보니 두 글을 쓴 분이 같은 분이셨군요 흐흐
좋은 글 감사합니다.
밥과글
23/02/03 12:11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기술적트레이더
23/02/03 12:22
수정 아이콘
추억+소녀 조합은 언제 읽어도 가슴뛰네요
*alchemist*
23/02/03 12:42
수정 아이콘
이야아... 좋아요 술술 읽히면서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궁금하고 @_@
콩탕망탕
23/02/03 13:42
수정 아이콘
나에게도 이런 소년시절이 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다음 글도 기대할께요
23/02/03 15:00
수정 아이콘
저도 생각해보니 학창시절 6년넘게 옆집에 살던,이름도 모르고 대면대면 인사만 하던 얼굴만 알던 동갑내기 여학생 있었는데,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네요.
17년도 더 지난 일지만요 크크
23/02/03 18:04
수정 아이콘
소년시절 어리숙함이 감수성을 건드리네요. 맺어지지 못해서 더 아름다운 걸지도 모르겠어요. 잘 보았습니다. 친구 이야기라는 건 조금 뻔하지만 속아드리겠습니다.
23/02/03 19:27
수정 아이콘
소녀 A하니 나카모리 아키나 떠오르는 아저씨(…)
에이치블루
23/02/05 15:33
수정 아이콘
이야 단편 재밌게 읽었습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3671 『당신은 사업가입니까』이런데도 정말 사업을 하려고? [28] 라울리스타14212 23/02/05 14212
3670 나는 왜 호텔에서 요리사 생활을 계속하고 있는가? [120] 육식매니아14535 23/02/05 14535
3669 야간 투시경 [21] 밥과글13585 23/02/04 13585
3668 소녀 A [19] 밥과글13515 23/02/03 13515
3666 전세보증금 반환 소송 후기 [41] Honestly14076 23/02/03 14076
3665 C의 죽음에 대한 것 [6] 범이12970 23/02/02 12970
3664 버거 예찬 [66] 밥과글13136 23/02/02 13136
3661 웹소설의 신 [19] 꿀행성12891 23/02/01 12891
3660 60년대생이 보는 MCU 페이즈 1 감상기 [110] 이르13399 23/01/31 13399
3659 도사 할아버지 [34] 밥과글13766 23/01/31 13766
3658 전직자가 생각하는 한국 게임 업계 [83] 굄성14511 23/01/30 14511
3657 엄마와 키오스크. [56] v.Serum13213 23/01/29 13213
3656 워킹맘의 주저리 주저리... [17] 로즈마리13027 23/01/28 13027
3655 육아가 보람차셨나요? [299] sm5cap13603 23/01/28 13603
3654 라오스 호스텔 알바 해보기 [26] reefer madness14793 23/01/12 14793
3653 나에게도 큰 꿈은 있었다네 – MS의 ARM 윈도우 개발 잔혹사 [20] NSpire CX II13759 23/01/03 13759
3652 첫 회사를 퇴사한 지 5년이 지났다. [20] 시라노 번스타인14133 23/01/04 14133
3651 더 퍼스트 슬램덩크 조금 아쉽게 본 감상 (슬램덩크, H2, 러프 스포유) [31] Daniel Plainview13291 23/01/08 13291
3650 지속불가능한 우리나라 의료비 재원 - 지금부터 시작이다. [145] 여왕의심복13544 23/01/04 13544
3649 Always Learning: 박사과정 5학기 차를 마무리하며 [56] Bread.R.Cake15143 22/12/30 15143
3648 개같은 남편 [63] 마스터충달16146 22/12/24 16146
3647 Ditto 사태. [45] stereo15504 22/12/24 15504
3646 여성향 장르물에서 재벌과 왕족이 늘상 등장하는 이유 [73] Gottfried15358 22/12/23 15358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