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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23/02/04 12:03:19
Name 밥과글
Subject 야간 투시경
악명 높기로 유명한 강원도 양구에서 군 생활을 했다.  전방은 후방보다 보급이 빠르기 때문에 시설만큼은 최신식일 거라는 얘기를 듣고 갔는데, 웬걸.  102 보충대와 똑같은 나무 관물대에 쥐가 돌아다니는 것 아닌가. 담배와 지폐를 갉아먹던 쥐를 생포해 '처형식' 을 치르던 선임들의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자대에 관한 내 첫 인상이다.

내가 군 생활을 한 시기는 일종의 과도기로서 GOP와 최전방 부대는 설비가 최신식으로 이미 바뀐 반면, 우리 부대는 산 밑에 남아 있는 예비부대로서 보급이 후순위로 밀린 곳이었다.  같은 양구에서도 우선 순위가 달랐던 것이다.  전투조끼 라는 것이 이미 보급되고 있을 무렵 X반도니 H반도니 하는 너덜너덜한 장비를 차고 넝마주이 떼처럼 훈련을 받곤 했다.

군 생활 내내 나는 걱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이등병 때 자대 배치를 받으며 걱정이 앞서지 않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만, 병장 때까지도 남은 훈련 갯수를 세며 스트레스를 받는 비관주의자는 많지 않다.  동기들이 까마득한 막내 시절부터 전역일을 손꼽다가 선임들에게 놀림을 받은 반면, 나는 훈련 일정표에 적혀 있는 낯선 훈련의 이름을 되뇌이며 두려움에 떨곤 했다.

두려움의 절정은 유격훈련이니 혹한기 훈련이니 하는 커다란 건더기들이 아니었다.  군 생활을 했던 많은 이들이 공감할만한 공포의 사이렌, 전투준비태세가 내 심장을 두들겼다.  강렬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화스트 페이스' 가 전달되면,  난데없이 새벽녘에 벌떡 일어나 군장을 싸고 물자를 옮겨야 하는 것이다.  시간에 쫓기는 듯한 압박감과, 조금이라도 어리버리한 모습을 취하면 쏟아지는 욕설.  

돌발적인 준비태세가 아니라,  상급부대가 넌지시 일정을 공개한 훈련일 때에도 나는 전투준비태세에 대한 걱정을 떨치지 못했다. 거의 노이로제에 걸려서 소대의 고참 자리를 꿰찼을 때는 아예 군장을 미리 다 싸매놓고 살았다.  챙겨야 하는 물자와 배치는 최대한 꼼수를 쓰고, 관물대에는 애초부터 개인물품을 두지 않았다.

욕을 할 선임도 전역하고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않는 최고참 병장의 시기.  훈련에 익숙해질대로 익숙해져서 실수 하나 없이 준비태세를 해나가는 시점에서도 그렇게 걱정을 하고 예민하게 구니, 같은 병장 라인에 올라선 후임들은 나를 보고 웃었다.

"아이고 준비태세 혼자 다 받으시겠네."

한편 나를 놀린 내 맞 후임 군번들은 부대에서 전설적인 듀오였다. 우리 소대에 배치된 첫 날, 두 사람이 나란히 내무실에서 낮잠을 자다가 걸린 것으로 자대 생활을 시작한 친구들이었다.  선임에게 혼이 나도,  힘든 훈련이 코 앞에 있다고 겁을 줘도 좀체 꿈쩍하는 법이 없는 뻔뻔한 녀석들.  상, 병장 때나 쓰는 훈련 꼼수를 이등병 때부터 쓰다가 간부에게 적발되고도 일병 때 그 짓을 다시 시작한 또라이들.

행정반에서 갓 나온 따끈따끈한 훈련일정표를 보면서 한숨을 내쉬다가도, 두 녀석을 보면 내 걱정이 다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은 뻔뻔하면서 서글서글한 그 성격 덕분에 몇 번이나 선임들에게 찍히고도 군생활을 훌륭하게 마무리했다.

걱정만 가득했던 내 군 생활에도 소소한 낙이 없지는 않았다.  고된 훈련을 마친 뒤 허락된 오침을 취하고 나른하게 일어나는 주말의 기분. 적막한 강원도 산꼭대기에서 경계 근무를 서며 바라보는 별빛들.  추운 새벽에 근무를 마치고 끓여먹었던 뽀글이 라면.  후임들과 함께 했던 외출 외박.  제법 좋은 선임이었던 사람들과 병사들을 세심하게 챙기던 소수의 간부님들.

하나 같이 지금은 느낄 수 없는 감정들이지만, 딱 하나의 추억을 남기자면 그것은 이등병 때 처음으로 보았던 야간 투시경 속의 별빛일 것이다. 군 부대가 위치한 강원도 산골짜기의 하늘에는 충분히 많은 별빛이 있었지만, 광증폭식 야간 투시경으로 바라보면 숨어 있던 별들이 플라네타리움처럼 빛났다.
소대장님의 배려로 마치 전입 기념식처럼 처음 야간 투시경을 건네 받았을 때 보았던 그 광경들은 앞으로 평생 다시 볼 수 없는 귀중한 것일지도 모른다.  야간 투시경으로 하늘을 바라본 적 없는 사람들은 까만 하늘에 별빛이 그토록 많이 숨어 있으리라 상상치 못할 것이다.

  전역을 할 때는  군 생활만큼 힘든 시기가 삶에서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다. 세상을 살면서 다시 보기 힘든 아간 투시경의 별빛 만큼이나.  
요즘은 다 철 모르는 소리였다는 생각이 든다.  사회는 군대보다, 혹은 군대만큼 힘들다. 군 생활은 확실한 끝이 있지만 사회 생활은 명확한 출구가 없다는 점에서 더욱 괴롭다.  

그 때문인지 세간에서는 어두운 소리가 온통 메아리 친다.  대한민국의 저출산 문제는 끝도 없이 바닥으로 추락하고, 지구는 환경 오염으로 기후가 망가져 간다.  국민 연금과 건강보험금의 고갈로 사회보장제도가 위협 받고,  치열해져가는 각종 갈등과 혐오가 서로를 갉아먹는다.

공무원은 나태하고 정치인은 썩었고 기업가들은 부패했으며, 배달부들은 폭주족이, 교인들은 광신도가 되어 사회를 테러하고 있다고 한다. 학교에는 왕따와 학교 폭력이 만연하고 직장에는 꼰대들이 젊은이들을 괴롭히고 있으며, 막다른 길에 내몰려 자살하는 사람들이 더 늘어났다.

신문을 보거나 인터넷을 하다보면 대한민국은 마치 인세의 지옥이 된 듯 하다.
언제 울릴 지 모르는 준비태세의 사이렌처럼 나는 곧 터질 전쟁의 울림을 기다리며 어딘가로 탈출할 군장을 항시 준비해놓아야만 할 것 같다. 훈련 준비 속에서 잠을 이루지 못했던 그 날들처럼 막연한 불안감과 쓸데없는 잡생각으로 밤을 보내는 시간들이 늘어났다.

그러나 새벽이 밝아오면 어렴풋이 빛나는 사람들의 얼굴이 비친다. 나의 나약한 두려움을 대신 물리쳐 주듯 하루하루를 힘껏 살아가는 이웃들이 있다. 학교 운동장에는 아이들의 힘찬 웃음이 메아리치고  길에는 행복한 모습을 한 가족들과 연인들이 넘친다.  무서운 추위에도 바깥에서 열심히 땀을 흘리는 일꾼들,  매사에 친절하려는 직원들, 장애나 병을 딛고 꿋꿋하게 앞으로 길을 나서는 사람들.  
인상을 쓰고 침을 뱉고 욕을 할 지언정  세상에 패배하려 하지 않는 험상 궃은 이들까지도.

자대에 배치 받자마자 늘어지게 낮잠을 자던 그 녀석들처럼, 비록 나는 사회의 뒤쳐진 이등병일지라도  앞 뒤 없는 커다란 배포를 지니고 싶다.
그리고 밤이 되면 울리지 않는 사이렌 소리를 겁내며 덧없는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나를 아껴주는 누군가와 함께 별을 보러 가야할 것이다.

찬찬히 어두운 하늘을 살피다보면 반드시 작은 별빛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리고 그 뒤에는 평범한 눈으로 보이지 않는 수 많은 별이 숨어 있진 않을까?  

모두의 손 안에 작은 야간 투시경이 있기를 바래본다.  

  


  

  

* 배려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4-08-27 01:50)
* 관리사유 : 야간 투시경이란 단어가 이렇게 따뜻하게 느껴지다니...
밥과글님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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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04 13:06
수정 아이콘
잘읽었습니다. 필력이 상당하시네요
밥과글
23/02/04 13:06
수정 아이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thalassemia
23/02/04 13:33
수정 아이콘
저는 밤에 성시경 노래를 두번 들으신다는줄……
고공비행
23/02/04 13:36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밥과글
23/02/04 13:39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혜정은준은찬아빠
23/02/04 14:18
수정 아이콘
따뜻한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25년 전 군대 시절이 생각나네요...
밥과글
23/02/04 14:55
수정 아이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보다 선배님 이시로군요
하종화
23/02/04 14:29
수정 아이콘
파주 Gop로 자대배치를 받아서 근무투입되던 첫날,맨 눈으로 쏟아지던 별을 본 건 제 군생활 중 가장 잊지 못하는 한 장면이 되었습니다. 그때도 새록새록 기억이 나네요.

절망이 세상을 뒤덮어도 어딘가에는 있을거라는 희망..
을 이야기해주는 어른들은 이제 거의 없다고 생각했는데..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누군가가 생각이 났어요.
밥과글
23/02/04 14:55
수정 아이콘
산골 산등성이에 올라서면 별이 참 많지요. 꼭 야투경으로 보지 않더라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살려야한다
23/02/04 14:44
수정 아이콘
밥과글님이 오래오래 PGR의 야간투시경이 되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밥과글
23/02/04 14:57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자주 글 쓰려고 마음먹고 가입했는데 슬슬 속도가 떨어지네요. 웹소설 쓰시는 분들은 어떻게 매일매일 쓰시는지 몰라요... 종종 글 남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인생은아름다워
23/02/04 14:45
수정 아이콘
각종 미디어들의 자극적인 소식들에만 절여져서 세상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았나 뒤돌아보게 되네요. 세상에는 새벽녘 같은 분들이 훨씬 많으니까 저도 힘을 내야겠습니다.
밥과글
23/02/04 14:58
수정 아이콘
화이팅입니다. 전 사실 주변 사정이 너무 불안정해서 불안장애 약도 먹고 있어요. 오늘 글은 저 자신을 다스리기 위해 쓴 글이기도 합니다. 개인사가 불안정해지니까 사회도 어둡게 느껴지더라고요? 휩쓸리지 않도록 노력 중입니다...
23/02/04 15:09
수정 아이콘
저랑 비슷한 곳에서 군생활 하셨나 봅니다. 도솔대대, 대암산, 펀치볼, 가칠봉 등 이제는 기억에서 희미해져만 가네요.
밥과글
23/02/04 15:30
수정 아이콘
저는 대암산 선점 중대 였습니다~
23/02/04 15:45
수정 아이콘
아니...밤에 성시경이 둘인줄 알았는데...뜻밖에 좋은 글 읽고 갑니다.
남한인
23/02/04 16:44
수정 아이콘
야투경에
1. 적외선 조사형
2. 자연광 증폭형
이 있는데,

후자의 영어 명칭이 "starlightscope"입니다.
-안군-
23/02/04 16:50
수정 아이콘
부정적이고 자극적인 일들만 언론에 노출되고, 긍정적이며 당연한 일들은 언론에 노출이 안되니까요.
뉴스만 보고 있다보면 이 세상에서 인류애는 이미 실종됐고, 사람들은 전부 물질의 노예가 된 것 처럼 보이죠.
세상엔 아직 좋은 사람들, 좋은 일들이 더 많긴 합니다.
울산현대
23/02/04 21:33
수정 아이콘
와 저랑 비슷한 경험을 하셨네요.
저도 이등병 때 초소에서 선임이 하늘 보라고 하면서 야투경 줬었는데 아직도 그때 장면이 기억 납니다.
고오스
23/02/05 02:03
수정 아이콘
가슴이 따뜻해지는 좋은 글이네요

보통 항해할때 나침반이나 등대를 비유로 많이 사용하는데

본인의 경험과 야간투시경이라는 아이템을 키로 삼아서 적으니 새롭고 따스하고 좋네요 :)
23/02/05 09:51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슬슬 잘 읽히는데 메세지도 마음을 울려주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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