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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8/06/02 21:01:51 |
Name |
kikira |
Subject |
[소설] 1회 :『녀소 는리달 을간시』- 토끼 굴에 떨어지다 |
“사람은 기억을 통해 여행을 한다.”
어느 장님이, 어딘가에서 말한 내용을, 이곳에 인용한다.
첫 번째 이야기 - 토끼 굴에 떨어지다
2008년 8월 2일. 나는 점심때가 다 돼 일어났다.
일어나자마자 TV를 켠 나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점심 식사를 했다.
밥그릇들을 대충 물에 담가놓은 뒤, 난 책 한권을 들고 내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반시간 정도 지난 후엔, 난 침대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해가 질 때쯤에 잠에서 깼고 기지개도 없이 바로 일어나 거실로 나왔다.
이 곳 세계에서의 그날 나의 하루는 아마 이런 식으로 기록되지 않을까. 만일 위 기록이 진정 사실이었다면 난 이렇게 글을 쓰고 있지 않았으리라. 간단히 말하자. 난 다른 세계를 경험했다. 웃지 마라, 난 진지하니까. 그러니까 사람들이 낮잠을 자고 있었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기록할 즈음에 나는 이곳과 다른 세계에 있었던 것이다.
"야, 넌 아마 처음 듣겠지만 그건 바로 꿈이라는 거야."
내 이야기를 맨 처음 들은 나의 친형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난, 눈을 감자마자 꾸는 꿈은 여태껏 들어본 적이 없었다. 또 그러나 나도, 처음엔 눈을 감자마자 꾸는 꿈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일말의 생각이 없지 않았다.
그래서 난 그 쪽 세계에서 있었던 일들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물론 모든 것을 다 기억해내고 또 기록해낼 순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꿈에서 깨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그곳에서 내가 너무 오랜 시간을 보냈고 기억이란 으레 그렇듯 점차 바래지고 지워지는 물건이기 때문이었다.
난 그곳에서 한 모든 행위를 하나하나 되짚어 보았다. 난 내 기억을 노트에 옮겨 적기 시작했다. 내 기억에 의하면 나는 그곳에서 밥도 먹었으며, 친구들도 만났다. 나는 끈질기게 기록했다. 난 어느 날엔 놀이동산에 놀러갔다. 또 어느 날은 사람들과 술도 마시고 가끔씩은 외박도 했다. 난 부모님 결혼기념일을 맞아 부모님께 선물을 해 드렸으며, 때때로 내 방 현광등 밑에서 책도 읽었다. 난 그 방에서 사랑도 나누었으며 당연히 잠도 잤다. 새로운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계속된 내 기록은 한 달여 동안 끊어질 듯 계속됐다. 난 내 기억이 바닥날 때까지 - 그러나 그 원형이 최대한 유지되도록 유의하며 - 멈추지 않고 계속 끈질기게 나 자신을 추궁해가며 노트를 써내려갔다.
마침내 내 기억 속에 남아있던 모든 내용을 노트에 옮긴 뒤, 난 내가 그 날 꿈을 꾼 것이 아니었음을 확신했다. 날짜로는 넉 달여에 해당하는 꿈, 대학 노트로 22권을 기록할 수 있는 꿈을 꾸었다는 이야기를 난, 들어본 적이 없었다.
* * * * *
그러한 기록이 거의 다 끝나갈 무렵, 난 머리를 식히기 위해 그동안 읽지 못했던 책을 다시 폈다. 제목은『시간을 달리는 소녀』, 내가 그쪽 세계로 다녀오기 전부터 읽고 있던 책이었다. 이 책엔 총 세 개의 단편이 있었는데 난 그 중 마지막인「The other world」를 읽을 차례였다.
난 의자를 조금 뒤로 밀었다. 바퀴 없는 의자에 장판이 긁혀나가는 소리가 거슬렸다. 불현듯 엄마의 잔소리가 떠올랐지만 난 아랑곳하지 않고 충분할 만큼 의자를 밀었다. 충분해진 의자와 책상사이의 공간을 내 다리가 가로질렀다. 난 내 자세에 퍽 만족했다. 난 그제야 책을 읽기 시작했다. 허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난 책을 덮었다. 그리곤 난 지난 한 달여간의 시간이 헛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헛되지 않음을 감사했다.
그 소설에는 내가 다녀온 세계에 대한 명쾌한 설명이 있었다. 난 책의 다음 부분에 밑줄을 그었다.
"한 장의 직물을 생각해보라.
그 직물은 무수한 날실과 무수한 씨실로 짜여 있다. 그 씨실이 바로 시간이다. 그리고 날실 중 한 가닥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계이다.
그렇다면 또 다른 많은 날실들은?
그것은 또 다른 세계, 다른 공간에 있는 다른 우주. 그리고 다른 우주에도 지구가 있고 당신이 있다. 무한에 가까울 정도로 수많은 당신이.......
이것이 다원우주라는 개념이다."
츠츠이 야스카타,『시간을 달리는 소녀』,「The other world」, p.239.
또 이런 말도 있었다.
" 이웃한 두 가닥의 날실에 있는 두 명의 당신은 역시 거의 비슷하다. 둘 다 모두 같은 직업일 것이고 만약 당신의 손에 상처가 있다면, 또 한 명의 당신도 똑같은 곳에 상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스무 가닥, 서른 가닥 그리고 수백 가닥 떨어진 날실에 있는 당신은? 거기에 있는 당신은 학생일 수도 있고 발명가일지도 모른다. 또는 총리대신일 수도 있다.
이것이 동시존재라는 개념이다."
같은 책, p.240.
난 이 책을 읽지 않고 행했던 수많은 고민 - 가령 ‘내가 다녀온 곳은 어디인가’ 따위의 -들과 그로인한 소화불량을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게 됨으로써 내 기록들이 비로소 가치를 얻게 되었음을 기뻐했다.
더욱이 난 내 경험이 꿈이 아님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읽지도 않은 책의 내용을 꿈꾸는 것은 불가능하고, 우연히 꾼 꿈의 내용이 누군가가 쓴 책의 내용과 동일할 확률을 계산하기 보단 난 여러 증거들과 함께 내가 다중세계를 경험했음을 믿기로 했다.
* * * * *
「The other world」의 주인공 노부코는 숫자가 1~5까지밖에 없고, 음계의 반음이 사라진 세계, 자신이 유명 연예인이 된 세계 등을 경험한다. 난 내가 다녀온 세계의 특징은 어떤 것이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다시 기억을 되뇌었다. 허나 그 무렵 내 기억은 이미 많이 망가져 있었다. 그러한 망각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는데, 일상으로 돌아온 여행객처럼 그것은 아련한 추억만 남기고 상당 부분 사라져버렸다. 따라서 부득불 난 기록에 많은 것을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글씨 쓰는 방향이었다. 우리 세계의 아랍어처럼 그곳의 글쓰기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진행되었다. 그곳 세계에서 한동안 난 그곳의 모든 활자에 어색함을 느꼈으나 일주일여가 지나자 아무런 거리낌 없이 글을 읽을 수 있었다.(라고 기록에 적혀있었다) 난 당시의 내가 왜 그렇게 무디게 반응했는지 의아했으나, 그 해답은 내가 가지고 있었고 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동화? 아니, 그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난 차라리 새로 태어났었던 것이 아닐까. 또한 난 그곳의 아랍어가 (이중의 의미에서) 반대로 왼쪽에서 시작되는지 기억해내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그것 또한 애석하게도 결코 알 수 없는 일이 돼버렸다.
하지만 그것은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이었지, 우리 세계와 가장 ‘다른’ 특징은 될 수 없었다. 점이 뺨 왼쪽에 달린 쌍둥이 형과 점이 뺨 오른쪽에 달린 쌍둥이 동생이 실상은 거의 똑같은 것처럼, 오른쪽부터 시작되는 그쪽 세계의 글쓰기는 우리 세계와 그쪽 세계를 구분하는 표식은 될 수 있었으나 결국 아무런 차이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아닌 게 아니라, 난 그쪽 세계로 경험하고 다시 돌아올 때까지 별다른 거부감을 느끼지 못했다. 난 침대에서 일어나 저녁밥을 먹었으며 자정을 넘겨 다시 잠을 잤다. 그리고 넉 달 후, 난 다시 침대에서 일어났으며 약간의 피로감과 당혹감을 느끼게 되었다.
* * * * *
양쪽의 세계가 동일하다면, 내가 다녀온 곳은 다중세계가 아닐지도 몰랐다. 그것도 아니라면 난 우리 세계와 거의 차이가 없는 바로 옆 가닥의 날실에 다녀온 것일 터였다. 조금 여유가 생겼던지, 난 이왕 다녀올 것이라면 좀 더 색다른 세계가 좋았을 터였다고 괜히 혼자 낙심했다.
그러나 기록을 다시 읽어보던 중, 난 그쪽 세계의 진정한 특징을 발견하였다. 난 이미 그쪽 세계에 대한 많은 기억을 잃어버렸으나, 그 때 까지도 이 특징은 잊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양세계간 수많은 동질성 때문에 이 거대한 특징이 그쪽 세계에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난 잠시 동안 이곳 세계의 현실감각을 찾지 못해 혼란스러워 했다. 허나 곧 나는 무엇이 그쪽에 속한 것이고, 어느 것이 이쪽에 속한 것인지 구분해낼 수 있었다. 그제야 난 점이 반대로 박힌 쌍둥이들의 진정한 차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고, 그쪽 세계를 ‘가츠코월드’라 이름 붙였다. 이름은 그다지 흡족하진 않았지만 더 할 나위 없이 맘에 들었다.
2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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