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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8/06/14 02:15:20 |
Name |
kikira |
Subject |
[소설] 8회 :『녀소 는리달 을간시』, 종이가 필요한 이유 |
※ 이 소설은 픽션입니다. 따라서 순환론과 관련된 인명, 서적, 논문, 학파 등에 관련된
모든 내용은 허구이며, 혹 그 관련이 의심된다면 그것은 순전한 우연임을 알려드립니다.
여덟 번째 이야기 - 종이가 필요한 이유
율리스는 본래 학자가 아니었다. 90년대 중반 이후, 가츠코월드에서 창조론이 큰 인기를 끌자 학자뿐이 아닌, 전업 작가들도「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새로운 창작에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율리스는 그 초창기 멤버이자 전업 작가 출신으로는 가장 성공을 거둔 2148호의 저자였다. 그러나 2008년의 율리스는, 작가들은 물론 학자들조차 등을 돌린 창조론을 마지막까지 고이 간직한 고집불통의 늙은이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율리스는『순환론의 기원』에서 굳이 창조론을 변호하진 않는다. 그는 창조론이 이미 진리의 빛을 잃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과거 순환론과 종결론이 그러한 것처럼, 그는 창조론이 맡아낸 일정한 소임을 인정하고, 조그마하나 정당한 창조론의 자리를 만들어주고자 한다. 따라서 순환론의 기나긴 역사를 논한 책의 대부분의 내용은 결국 이 마지막 장을 위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율리스가 보기에 순환론의 관련된 논의는 결국 작품 수용의 세속화를 위한 기나긴 여정이었다. 아나끼는 결코 ‘가츠코의 라벤더’ 문제를 발견한 것 때문에 위대한 것이 아니다. 이미 말했지만 그것은 아나끼에 앞서서 여러 번 지적된 사실이다. 그 위대함은 작품 의미가 독자에 의해서 진정으로 완성된다는 명제, 이것이 그에 의해서 비로소 실감됐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럼으로 작품 수용에서 신의 위치와 같았던 작가는 격하되고, 작품 의미의 진정한 주인은 곧 독자가 되었다. 물론 가츠코월드에서도 이런 수용 미학은 이미 밝혀져 있었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 세계적 사건으로 ‘실감’된 것은 아나끼에 의해 촉발된 순환론에 이르러서이다. 진정 이 시기에 와서와 독자들은 왕의 목을 칠 자신감을 얻은 것이고, 곧 작품에 대한 독자들의 해석 하나가 제시된 것이다. G(작품)에 대한 하나의 해석 - G(1). 그리고 여기에 또한 순환론적 해석의 고귀함을 여지없이 짓밟은 종결론적 해석이 덧붙여진다. G(1)와 G(2). 거기에 크리스틴의 노력을 더하면 G(3)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제 창조론의 차례이다. 창조론은 해석에 바탕을 둔 창작으로 3000여개의 작품을 쏟아놓는다. 이를 대충 정리하면 이 정도가 될 거다.
G - G(1), G(2), G(3), G'(1~3000?)
여기서 율리스는 창조론의 소임과 한계를 밝힌다. 창조론은 작품 해석이 순환론과 종결론, 단 두 갈래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크리스틴처럼 순진하게 양 방법론을 모두 수용한 자리에 서지도 않는다. 몇 방울의 차이로 전혀 다른 칵테일을 제조하는 바텐더처럼, 그들은 그저 서로의 해석을 펼칠 뿐이다. 이는 분명 진보적이다. 그들은 지루한 두 진영의 싸움처럼 서로의 해석이 잘못됐다고 푸닥거리지도 않는다. 그렇게 서로의 해석을 인정한 자리에서 3000여개의 빛들이 쏟아졌다.
그러나 창조론은 작품 해석에 대한 무언가 ‘올바른’ 해석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이 알 수 없는 자신감과 낙관론은 분명 반동적이다. 물론 예전의 선배들처럼 단 하나의 본질적인 해석이 존재한다고 믿진 않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해석(에 기반을 둔 창작)이 남들의 것보다 나을 것이라는 생각은 버리지 못한다. 이를 율리스는 “동물적인 우월본능”이라 부른다.
다시 말해서, 모든 해석에는 모두 진리가 구현돼 있다. 창조론에선 이 다양한 해석에 대해 ‘꼴 보기 싫지만 인정’하는 태도를 보였다. 아마 선대의 기나긴 그리고 쓸모없는 싸움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나 율리스는 이를 도리어 ‘축복’으로 받아들인다. 즉, 작품의 진정한 의미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하는 것은 읽는 사람에 따라, 그리고 읽을 때마다 달라지는 섬광과 같은 의미의 파편들이다. 곧 무어라 정의할 수 없는 G(X)가 있을 따름이다. 이 웅숭깊은 텍스트의 의미를 단 한 번에 건져 올리려 했던 다카시는 분명 미련했다. 여기서 창조론은 다시 한 번 빛난다. 비록 창조론자들은 이러한 ‘축복’의 의미를 온전히 깨닫지는 못했으나, 동서고금의 어느 텍스트와도 비교할 수 없는 다양한 해석을 펼쳐냈다. 즉, 창조론은 의도에서가 아닌 ‘현상’에서 진리를 구현해 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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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3000여개라는 방대한 해석들도 60억의 숫자를 생각하면 턱없이 부족하다. 거기에 그 해석들의 거만한 자세 또한 눈에 거슬린다. 따라서 율리스는 새로운 ‘완성본’을 창작한다. 츠츠이 야스타카의「시간을 달리는 소녀」와 한 글자도 다르지 않고, 한 글자도 더하지 않은 율리스의「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이런 맥락에서 ‘창작’된 것이다. 난 이 완성본을 읽고 야스타카의 소설과는 다른 종류의 감동을 받았다. 앞서 츠츠이 야스타카의 작품을 읽었을 땐, 단순한 SF 소설을 읽는 느낌이었으나, 순환론의 접한 뒤의 율리스의 작품은 더 이상 순환론도 아니었고 완성본도 아니었다. 더욱이 소설이란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나는 율리스의 글을 읽은 뒤, 일부러 야스타카의 것을 다시 찾아 읽었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SF 소설일 뿐이었다.
율리스는 자신의「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부록에 쓰고 싶었지만, 작품의 창작 의도 때문에 그러지 못한 말들을『순환론의 기원』마지막 장에 넣은 듯하다(이 또한 나의 해석이다). 같은 곳에서 그가 말하는 파시스트 판별법. 좋은 작품을 읽고 그에 대한 느낌을 혼자 꿍하고 가지고 있는 사람 - 고로이스트(이는 가츠코월드의 말인데, 고로는 역시「시간을 달리는 소녀」등장 인물 중 하나다. 대략 우리 세계 말로 옮기면, 소심하고 성질 있는 사람이란 뜻이다). 자신의 느낌과 해석을 표현해 적극적으로 권하는 사람 - 나르시스트. 자신의 감상을 사랑하면서 작품에 대한 상대방의 생각도 순수하게 즐기는 사람, 그리고 자신과 다른 해석을 참지 못하고 상대방의 해석을 무너뜨릴 방법을 고민하는 사람. 굳이 답을 말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가 무엇인지도 물어보지 마라. 나도 잘 생각이 안 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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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율리스는 이 마지막 장에서 오랜 동안 지워졌던 인물, 츠츠이 야스탸카를 다시 복권시킨다. 그간 야스타카는 작가 의도를 벗어난, 독자의 적극적 수용을 통한 창조적 의미창출을 인정하지 않는 고루한 작가주의자라는 꼬리말이 달려있었다. 허나, 율리스는 두 가지 점에서 이를 반박한다. 먼저 작품의 의미 창출이란, 곧 작가와 독자의 부딪힘이기 때문에 그간 무시되었던 작가의 공은 분명히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 비록「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의미가 수용자의 적극적 해석으로 수백, 수천 배 확대되었을지라도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당시 야스타카가 순환론을 거부한 이유가 그가 작가주의자여서가 아닌, 단지 그것이 '독자로서' 자신의 ‘성’에 차지 않아서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작품이 탈고한 이상, 저는 더 이상 작가가 아니라 일개 독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 - 엄밀히 말하면 나의 - 의 선입견과는 달리, 1979년에 나온 이 말은 온전히 야스타카의 것이다. 이 말과 같은 자리에서, 야스타카는 순환론에 대해 “획기적”이기는 하지만 “독자”로서 자신이 느끼기에 “무언가 부족한 아이디어”라고 평한다. 70년대에는 이 언급이 순환론을 거부하는 작가주의자의 일갈로 들렸다. 그러나 다음 세기의 율리스에 이르면 이 말은 지난 모든 것을 예견한 선지자의 전언으로 들린다.
과연, 그리고 정말, 야스타카는 이 모든 것을 알았던 것일까?
9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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