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을 쓰면서 한 가지 흥미로운 시도를 했다. 나는 지금 키보드를 통해 글을 쓰고 있는데, 당연히 9회 동안의 연재에서도 키보드는 필수적인 도구였다(기계, 아니 신체라는 말이 더욱 어울릴까?). 어찌되었듯, 그러한 키보드님께서 연재를 막 시작하려고 할 즈음에 사망하시고 말았다. 돈은 없고 시간은 많은 난, 어쩔 수 없이 일단 손으로 원고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1회를 썼고, 난 재밌는 생각이 하나 들었다.
며칠 뒤, 다행히 키보드님께서 부활하셨고, 난 키보드로 ‘1회’를 다시 썼으나, 전에 손 글씨로 써두었던 원고는 일절 참고하지 않았다. 물론 전체 컨셉과 플롯, 시놉시스 등등은 이미 정해져 있었으므로 그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같은 문장도 부지기수로 등장했다. 그러나 그들은 미세하게 달랐다.『녀소 는리달 을간시』1회의 또 다른 판본이 써진 것이다. 2회를 쓸 때 - 키보드님는 무병장수하셨지만 - 난 불경하게도 손 글씨로 된 원고를 먼저 작성했다. 물론 손으로 쓰는 2회는 키보드로 친 1회에 이어지도록 썼다. 그렇게 9회까지 총 18개의 원고가 작성되었다.
당연히 손 글씨 version들은 서로 이어지지 않는다. 각각의 손 글씨본들은 바로 앞 회의 키보드본들에 이어지도록 작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손 글씨본들을 한꺼번에 읽어보면, 그 독립성(뒤에 이어지는 원고의 부재)과 종속성(앞 회의 키보드본 원고에 이어져야 하는)이 묘하게 섞어지며 새로운 느낌을 냈다. 손 글씨본들은 일종의 초고였기 때문에 약간 거칠지만, 번뜩이는(내가 보기에 말이다) 문장들은 더욱 많았다. 난 괜찮은 문장을 손으로 쓰고 나서, 내가 키보드를 두들길 때에도 이 문장이 생각나길 바랐지만 적지 않은 경우는 실패했다. 손 글씨본 원고를 다시 읽어보면, 아까운 문장들도 많았지만 난 나만의 재미를 위해 다시 키보드를 치진 않았다.
글을 다 쓰고 난 뒤, 난 키보드본 원고들을 전부 프린트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난 내 맘대로 소설을 다시 읽고 있다. 손 글씨본과 키보드본이 이뤄내는 경우의 수는 - 내 짧은 수학 실력을 믿자면 - 2의 9승, 512가지일 것이다. 이와 달리, 난 아예 무작위로 18개의 원고를 다시 읽어보고도 싶었었다. 잠시 나쁜 머리로 계산을 한 뒤, 난 그 엄청난 경우의 수에 쉽사리 그 시도를 포기했다.
다시 돌아가서, 지금까지 내가 가장 재미있게 읽은『녀소 는리달 을간시』는 1, 2, 5, 7회의 키보드본에, 3, 4, 6, 8, 9회의 손 글씨본을 조합한 것이었다. 손 글씨본들은 특히 뒷부분으로 갈수록 느낌이 좋았다. 날마다 같은 자리에서 빛나지만, 조금씩 그 모양을 달리하는 밤하늘의 별자리처럼. 같은 듯 다른 원고들을 보며 난 요즘 내가 빠져있는 주제가 무엇인지 확연히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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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내가 무엇을 써 놓았는지 다시 한 번 읽었다(소설을 쓸 때의 '나'는 정말 지금의 나와 같은가?). 소설을 읽다가 재미있는 문장을 하나 발견했다. 그렇다. 문장이 완성되는 순간의 찰나를 제외하면 결국 작가라는 것은 글의 독자에 불과한 것이다. 문장들도 너무 낯선 것이 전혀 내가 쓴 것 같지 않다. 글을 읽으며 여러 고유 명사가 연상됐지만 굳이 여기에 그 이름들을 쓰진 않겠다. 너무 많기도 하고 너무 애매하기도 했지만, 결국 그 위계를 따라간다는 것이 부질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허나 그 장님에 대한 언급은 꼭 해야겠다. 그 장님의 fucking한 소설을 읽고 난 세상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기발한 이야기를 지어야겠다는 생각을 포기했다. 그의 글이 너무도 그러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의 글을 포함해서 그런 글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알곤 있었었지만) 실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온 글이 이 글일까. 완벽하게 종속되어 있는 이 글을 보며 난 내 차를 놔두고 렌트카를 타고 있는 찜찜함을 느낀다. 허나 지금 내가 ‘소유’하고 있는 고물 자동차가 진정 내 것인가? 내 고물 자동차를 타인하게 양도하고 약간의 돈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내 소유를 증명케 하는가? 다시 생각해보면 원래부터 내 자동차는 없었고, 또한 그것은 자동차에 국한되는 이야기도 아니다.
작가는 이 글에서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하다. 기억/망각, 기록/해석을 두 축으로 삼아 의미의 확산성을 문제 삼고, 가짜 사실주의의 기법을 사용한 부분도 눈에 띈다. 글의 전체 구조는 그 세부 내용인 순환론과 동형을 이뤄 내용과 형식을 일치시켰고, 군데군데 흔히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부르는 아이디어들이 삽입되어 있다. 문제적 개인의 세계사적 체험을 묘사하는 근대소설과는 정반대로, 이 글엔 우연적 개인의 우연적 세계에 대한 관찰자적 서술만이 가득하다. 또한 인문학 서적과 같은 수많은 출전 표기과 인용은 텍스트의 단일한 작가라는 개념을 부정하고 있다.......
이 글에 대한 해석은 이런 식으로 무한히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읽은『녀소 는리달 간시』에 대한 느낌은 정녕코 자동차는 내 것이 아니라는 것.
즉, 텍스트 이면의 속성을 표면의 형식으로 구현한 텍스트라는 것이다.
과연?
글쎄. 자세한 것은 '작가'에게 문의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