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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8/06/26 11:24:41 |
Name |
윤여광 |
Subject |
Fallen Road. Part 1 -1장 5화- [-an indelible stain-] |
Fallen Road.
[윤여광 作]
Part 1.
1장 5화.Goyang Muwon Elementary Schoolf
[-an indelible stain-]
#
유나는 일을 마치는 순간까지 푹 주저앉은 어깨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약속했는데. 도와줄 거라고 약속했는데. 사실 그가 도와주는 것을 기다렸다기보단 고된 일과 중에 만나고 싶다는 그것 하나가 중요했다. 상상만으로 그의 얼굴을 그리기엔 그 미소는 너무 그리워서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가 이 마을에 들어오기 1년 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이었다. 굳어진 시간. 다를 바 없는 일상. 세상과 단절된 숨 막히는 산골 마을에 그가 나타난 것은 그녀를 구원하기 위해 엘카이지께서 내린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테이블을 닦아내던 유나는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더 이상 참기가 힘들어졌다.
“엄마! 나 잠깐 나갔다 올게요.”
“얘가! 어딜가는거야!”
어머니의 호통에도 불구하고 유나는 그대로 여관에서 달려 나와 곧장 달려 시장을 지나 산기슭에 붙어있는 넥슨의 집을 향해 뛰었다. 달려가 오늘 왜 오지 않았냐고 앙탈을 부릴 셈이었다. 서운한 마음을 감출 이유는 없다. 그는 넓은 마음으로 그녀의 어리광을 있는 힘껏 앉아주겠지. 다만 너무 심하게는 하지 말자 그가 꼭 찾아와야 했을 의무는 없었으니까.
칼리스는 인케이닝의 중턱에 위치한 작은 산골마을이었다. 산이 품고 있는 풍부한 광물과 탄을 캐내어 생계를 이어가며 이따금씩 수도로 향하는 여행자들을 상대로 숙박을 제공하는 것으로 그들은 살아가고 있었다. 마을 주민들에게 산이라는 존재는 절대적이었다. 그것은 그들의 삶이며 신앙이었다. 어느 누구도 산을 모독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했고 세상의 다른 만물과 조화되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삶의 기반을 마련해주는 인케이닝만을 섬겼고 따라서 다른 사상을 가지고 들어오는 여행객들을 경계했다.
그런 칼리스에 넥슨과 위븐이라는 이방인이 나타난 것은 1년 전쯤의 일이었다. 산에 대하여 연구할 것이 있다는 명목으로 찾아온 두 남녀를 마을 사람들은 그다지 반가워하지 않았다. 그들이 신과 같이 생각하는 산을 조사를 하겠다니. 한낱 인간인 주제에 신에 대하여 조사를 하겠다는 것은 성립될 수 없는 논리였기에 그들은 거부하려 했다. 그러나 넥슨이라는 청년의 부드러운 인성에 조금씩 마음을 풀기 시작한 그들은 어느 샌가 산기슭 가까이 작은 집을 마련한 그를 마을의 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그 둘은 별 다른 문제없이 마을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1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넥슨과 함께 들어온 위븐이라는 여인에 대해선 경계를 풀고 있지 않았다.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행실과 기분 나쁜 미소덕분에 그들은 넥슨의 누이라는 말만 없었다면 당장에라도 그녀를 마을에서 내쫒을 상황이었다. 그 위븐이라는 여인이 기분 나빴던 것은 유나도 마찬가지였다. 누이라고 처음부터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묘한 경쟁심을 느꼈다. 혹시 세상이 허락하지 않는 남매의 사랑의 도피를 위해 이런 구석진 마을로 도망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전혀 쓸데없는 상상도 마다하지 않았다. 위븐쪽에서 유나에게 별 다른 언사가 없었기 때문에 그런 의심은 더더욱 깊이를 더해갔다. 몇 번은 넥슨에게 직접 묻기도 했지만 그럴 때 마다 그는 누이가 사교성이 떨어져서 그런 것뿐이라며 웃을 뿐이었다. 하여간 기분 나쁜 여자였다.
“오빠!”
유나가 바쁜 걸음으로 넥슨의 집에 도착하여 그 문을 두드리며 외쳤다. 실례가 되진 않을까 했지만 이미 그 목소리는 혹여나 이른 잠자리에 들었던 사람이 있었다면 이미 큰 무례가 되고도 남았다. 하지만 별로 개의치는 않는다. 어차피 넥슨은 지금 이 시간에 잠이 들었을 리는 없었으니까. 그는 언제나 책에 매달려 새벽까지 불을 켜두고 일쑤였다.
“어?”
문을 여는 넥슨은 살짝 당황한 눈초리였다.
“오빠. 미안해. 저기…….그게…….”
“녀석. 미안해. 오늘 책에 정신이 팔려서 가게에 가볼 생각을 못했어.”
“무슨 책인데?”
“내가 보는 책이 뭐겠니.”
“나도 봐도 돼?!”
유나는 사실 책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게 알려주는 마나의 운용에는 분명 관심이 있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와 함께 대화할 수 있는 수단에 불과했다. 그녀가 진심으로 마나에 마음을 빼앗겼다면 진작 마을을 떠났으리라. 조화와 변화를 일체 거부하는 시간이 죽어있는 마을에서 마나를 배운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 어차피 내일 알려주려고 했던 게 있었는데. 잘 됐네.”
“와아. 이히히.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굳이 책이 아니었어도 넥슨은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진 않았을 것이다. 쉽게 드나들 수 있는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 집안에 발을 내딛을 때 마다 새로운 세상을 발견한 개척자가 된 느낌으로 흥분됐다.
“뭔데? 뭔데? 오늘은 뭘 알려주려고?”
그녀는 넥슨을 재촉하며 그가 알려주려고 했던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 했다.
“지난번에 내가 준 책은 다 읽었니? 거기서 응용된 운용인데.”
“아.”
유나는 순간 풀이 죽었다. 그가 건네준 그 소중한 책은 몰상식한 아버지가 신에 대한 모독이라며 어디다 어떻게 처분했는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소중하게 다루겠다고, 목숨같이 간직하겠다고 다짐했던 보물을 그처럼 쉽게 빼앗겼다는 사실에 유나는 죄책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 순간 넥슨을 혼쭐을 내주겠다던 아버지의 호언장담하던 모습이 떠올라 순간 불안한 마음으로 그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쳐다봤다. 혹시 어디 상처가 나진 않았을까. 그 무지막지한 손으로 맞았다면 분명 어딘가 상처가 났을 텐데.
“응? 왜 그러니?”
다행히 그의 얼굴엔 아무런 상처도 없다. 아버지가 아직 오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그냥 넘어가기로 마음을 바꾼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지금의 넥슨의 얼굴엔 아무런 상처가 없다.
“아냐. 오빠. 저기 근데…….”
“으응. 뭔데.”
아아. 차마 책을 아버지에게 또 빼앗겼다는 말을 할 수가 없다.
“어머. 유나 맞지?”
“아.안녕하세요.”
1년이나 지났다. 서로 만난 지 1년이나 지났는데도 그 여잔 아직 유나의 이름조차 확신하며 부르질 않았다. 유나는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호칭에 관한 태도도 그러했고 넥슨과의 둘만의 시간을 방해한 것 또한 그러했다.
“넥슨 잠깐 나 좀 볼까?”
“잠시만. 미안해. 유나. 금방 돌아올게.”
넥슨은 위븐의 뒤를 따라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유나는 투덜거리며 책상 위에 펼쳐진 그가 보고 있던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가 보고 있을 책이라면 뻔했다. 분명 또 마법과 마나에 관한 고서적이나 입문서겠지. 유나는 혹시나 자신이 또 배울 수 있는 마법이 있을까 하는 마음에 페이지에 적힌 글씨를 읽어나갔다.
-리플렉트reflect-
이것은 마법의 큰 갈래인 전투, 흑, 치유, 실용, 4가지 갈래의 모든 마법을 반사하여 목표물object를 향해 시전된 마법을 방어하고자 하는 마나의 운용이다. 반사되는 방향은 대체로 목표물의 정면을 향하며 그 정면에 금속이나 같은 리플렉트를 한 번 더 시전 했을 경우 1회에 한하여 같은 효과가 발생된다. 시전자의 능력에 구애받지 않으며 튕겨내고자 하는 마법의 위력 또한 무시된다. 무조건적인 반사효과와 쉽게 사용되는 점 때문에 널리 쓰이는 운용법이며 그 캐스팅 랭귀지는 다음과 같다.
간단한 설명을 마무리 지은 페이지의 밑 부분은 비어있었다. 룬어로 기록된 나머지 페이지는 마나를 감지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읽어야 하며 이것은 동시에 메모라이즈와 같은 효과를 갖게 된다. 유나는 망설이다가 쉽게 사용이 가능하다는 문구에 시도나 해보자 하는 마음에 손가락을 빈 페이지에 가져다댔다.
페이지가 살짝 빛나는 듯 하더니 이내 알 수 없는 문자들이 나타나며 그 약한 빛은 사라졌다. 룬어. 캐스팅 랭귀지. 그것은 하나의 언어라기보다는 마나가 시전자의 의도에 따라 하나의 힘으로 표출되는 과정을 설명하는 하나의 과정을 묘사하는 그림과 같은 것이었다. 이해하려 하기 보단 결국 실질적인 경험을 우선으로 하는 그것은 난해하기 짝이 없었고 덕분에 접근하기 어려운 학문 중 하나였다. 마법을 배워보겠다며 나서는 이들은 대부분 룬어를 이해하는 단계에서부터 떨어져 나갔고 우연치 않게 마나의 실현화를 성공하게 되는 이들은 이것을 계기로 룬어를 배워나가기 시작했다.
“흐음. 이렇게 하는 거란 말이지?”
유나는 룬어의 흐름을 모두 감지한 후 그 일련의 과정을 다시 한 번 머릿속으로 상기한 뒤 조용히 외쳤다.
“리플렉트!”
애초에 반사시키는 것을 결과로 삼는 마법이었던지라 그녀의 앞에 작은 사각형의 모양으로 공간의 일그러짐이 보이는 듯 하더니 이내 사라졌다. 하지만 그녀의 캐스팅은 분명한 성공이었고 유나는 새로운 지식을 습득했다는 사실에 위븐덕에 불쾌해졌던 기분을 모두 날려버릴 수 있었다.
“오빠 앞에서 다시 한 번 해봐야지.”
유나는 넥슨이 돌아오면 한 번 더 보여줄 요령으로 다시 메모라이즈에 들어갔다. 차분한 마음으로 페이지에 손가락을 대고 아까와 같이 마나가 움직이는 과정을 머릿속으로 그린다. 그 과정이 완성이 되는 순간 메모라이즈는 끝난다. 마나가 움직이는 과정이 복잡할수록 메모라이즈에 걸리는 시간은 늘어나게 된다.
-덜컹. 콰창창-
다시 한 번 캐스팅에 들어가려던 유나의 귓가에 무언가 요란하게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방 한 켠 으로 작은 문 너머에서 난 소리다. 일전에 넥슨에게 물었던 바로는 그것이 창고라고 했었던 기억이 있다. 유나는 창고 안에 대강 정리해둔 짚더미가 무너졌으리라 생각하고 그것을 정리할 요령으로 즐거운 마음에 문을 열었다. 창고라고 알고 있는 그 방은 불이 켜지지 않아서였는지 컴컴한 어둠만이 가득하다. 문을 열고 서 있는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빛만으로는 어디에 무엇이 무너져 있는지 알기 쉽지 않았다. 다행히 그 희미한 빛줄기를 통해 걸려있는 램프가 눈에 들어왔다. 마침 아침에 메모라이즈 해뒀던 점화술이 있었기에 유나는 그대로 캐스팅에 들어갔다.
“캐치 파이어!”
순식간에 밝아지는 작은 방. 유나는 찬찬히 둘러보며 무엇을 정리해야 하나 고민했다. 왼쪽 구석으로 보이는 넘어진 책장이 보인다. 무엇 때문에 그것이 넘어졌는지 알 수는 없으나 일단은 당장 눈에 보이는 어지럽혀진 그것을 정리하기 위해 유나는 걸음을 옮기려 했다. 기분 나쁘게 들려오는 등 뒤의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너 지금 거기서 뭐하는 거야!”
위븐이다. 넥슨을 가로채가는 것도 그렇고 등 뒤에서 소리치는 것 또한 마음에 들질 않는다. 그저 정리하려던 생각이었을 뿐. 왠지 유나는 억울함을 느꼈다. 제대로 설명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아. 저기 이건…….”
“썅!”
위븐은 미간에 잔뜩 힘을 준 채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유나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순간 멍해졌다가 곧바로 밀려오는 짜증에 함께 인상을 구겼다. 대체 예의라곤 찾아볼 수 없는 여자다. 더 이상 참는 것은 무리다.
“아니 이봐요! 말이 너무 심하잖아요.”
“제길. 릴리즈 타이밍이 너무 일러. 망할 촌년. 다 너 때문이야.”
“뭐라고요?”
위븐은 여전히 알 수 없는 욕설만 늘어둘 뿐이었다. 뭐라고 대꾸해야 할 지 고민하고 있을 때 기분 나쁜 그 여자의 어깨 너머로 역시나 잔뜩 굳은 얼굴로 서 있는 넥슨이 보였다. 빨리 이 난관에서 자신을 구해주길 바라며 그의 이름을 부르려는 찰나 그것을 막은 것은 다급하게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였다.
“도망쳐!"
도망치라는 넥슨의 말에 유나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여전히 그 자리에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알 수 없는 말만 늘어놓는 위븐 그리고 무작정 도망치라는 말과 함께 곧장 그녀들이 서 있는 방으로 달려오는 넥슨을 번갈아 쳐다보며 유나는 순간 시야가 흐려짐을 느끼고 있었다. 이해하기 힘든 상황만을 머릿속에 남겨둔 채 유나는 그대로 몸이 뒤로 넘어가는 것을 느꼈다. 지금의 이 상황이 모두 꿈일까 하는 상상을 하며 그래도 쓰러지는 그녀의 몸을 감싸 안는 넥슨의 모습을 반기며 그녀는 왠지 웃고 있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다시 눈을 뜨면 저 보기 싫은 여자를 넥슨이 나무라며 자신을 위해주기를. 마지막으로 새하얀 빛으로 가득한 시야가 깊은 밤과 같은 어둠으로 변하려 할 때 유나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자신을 끌어안은 채 조금씩 굳어가고 있는 넥슨의 얼굴이었다.
#
“그래서요!?”
유나의 침묵은 꽤 길었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하여 식사가 끝날 때 까지 내내 이어진 이야기에 그녀는 힘이 들었는지 잠시 입을 다물고 머리를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그런 모습은 아랑곳하지 않고 허겁지겁 음식을 입에 넣을 대로 넣은 아크는 이야기가 더 이상 진행이 되질 않자 그 다음이 궁금하다는 듯 식탁을 나이프로 탁탁 두들겼다.
“저어…….”
한 동안 말을 이어가지 못하는 유나의 모습에서 왠지 건드려서는 안 될 상처를 깊이 끄집어내게 만든 것 같아 미안함이 밀려왔다. 하지만 먼저 이야기를 시작한 것은 그녀 아닌가. 그 어떤 강요도 없었는데 말이다. 하긴. 시작이 그랬듯 마무리 역시 어느 부분을 기준으로 잡을지는 화자의 마음이니까. 굳이 하기 힘든 말을 이어가게 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여전히 그녀가 어째서 마녀로 불리는지 궁금하기야 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꼭 들어야만 할 이유는 없다.
“미안하군요. 이야기는 잠시 멈춰야겠습니다.”
“네? 왜요? 무슨 급한 일이라도”
아크는 뒷이야기가 무척이나 궁금했는지 눈을 크게 뜨고 마치 화를 내는 것 마냥 물었다. 그러나 여전히 유나는 별 반응 없이 살며시 웃을 뿐이었고 아크는 못마땅한 얼굴로 조금 더 세게 테이블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치면 그 자리에 구멍이라도 뚫을 기세다.
“제 이야기를 너무 재밌게 들어주셔서 시간 가는 줄 몰랐네요. 잠시 마을에 좀 다녀와야겠습니다. 미안하지만. 이야기는 다녀와서 시간이 허락한다면 이어가도록 하지요.”
“아. 네.”
“될 수 있으면 집안의 물건을 뒤진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군요. 특히 저 보라색 책자는 말입니다.”
유나는 난로 옆 작은 테이블에 올려져 있는 책을 하나 가리키며 말했다. 당연히 집 안을 뒤질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왠지 그런 말을 들으니 살짝 기분이 묘했다. 이제 와서 경계하는 모습이라니. 뭔가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아 따져 묻고 싶었지만 말을 마치고 바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는 그녀의 등에 대고 차마 이야기를 꺼낼 순 없었다. 다만 빨리 그녀가 돌아오기를 바랄 뿐. 솔직히 말하자면. 나 역시 이야기의 끝이 너무나 궁금하다.
“어이. 배불리 먹었겠다. 식후 대련 한 판 어때.”
“먹고 바로 뛰어다니면 배 아파.”
“뭘 바로 뛰어. 한참 가만히 앉아있었잖아. 얼른 준비해!”
“으다앗. 아퍼. 아파. 아아악.”
낡은 문 너머로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내 머리를 갑자기 팔로 휘어 감으며 아크가 말했다. 어떻게든 저항해 보려고 하지만 나와는 다르게 알차게 굵은 근육으로만 뭉친 이 무식하리만치 강한 힘은 날 놓아주질 않았다. 매번 그럴 때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힘에 승복하여 그의 아침 대련의 희생양이 되곤 했다. 오늘 아침은 과연 몇 대나 맞고 끝나게 될까. 아니. 과연 얼마나 막아낼 수 있을까.
#.
[흐아아아악! 사...사…….살려주어…….악!]
[엄마. 엄마…….엄므…….어으…….]
[유…….유나으우…….무...언지을…….]
거리는 아직도 비명이 가득하다. 그 날의 악몽 같은 그 광경이 또 다시 눈앞에 그려지고 있었다. 마치 그것이 현재의 일인 것 같은 생생함에 그녀는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에 잠시 몸을 떨며 걸음을 멈춰야 했다. 화려하진 않았지만 그러나 선명한 빛을 지니고 있던 건물들은 모두 잿빛으로 변해버렸다. 거친 바람에 조금씩 그 모습을 잃어가는 힘없이 서 있는 그들은 이제 곧 그 수명이 끝나는 대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어느 누구도 그 시간을 앞당기거나 미룰 순 없다. 다만. 그것은 확실히 그리고 차분히 다가오고 있다.
“오랜만이군요.”
그녀는 거리 한 가운데 서 있는 한 사내를 바라보며 말했다. 미동도 없고 짧게나마 들이 마시는 호흡도 없는 그것은 그러나 분명 사람이었다.
“많이 거칠어졌군요. 무엇이 그렇게 힘들었나요.”
그녀는 거친 산바람에 조금씩 원래 모습을 잃어가는 그의 모습을 보며 안타까운 듯 말했다. 천천히 그 거친 표면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혹시나 그녀의 손길에 그나마 남은 형상이 깎이지는 않을까 조심스럽게 손을 움직였다. 정면에 서 있었을 누군가를 멈춰보려 손을 앞으로 내미는 모습으로 서 있는 그는 그 손길을 반기고 있는 듯 무너지지 않고 그 모습 그대로 서 있었다.
“그래도 이젠…….”
유나는 무언가 결심한 듯이 어깨를 거쳐 크게 부릅뜬 눈까지 스치며 올라온 손을 멈추고 그대로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어리지 않다고 그렇게 열심히 부정하고 마음을 다해 사랑했던 한 사내. 잃어버린 15년의 세월을 잘 버텨둔 그 모습에 고마워하며 그녀는 그의 얼굴에서 손을 뗐다.
“감추고 숨기면 모든 것이 다 잊힐 거라 생각했어요. 그 지옥 같았던 날을 매일 밤 꿈에서 만나며. 매일 어김없이 당신을 이렇게 만들면서…….나는 마녀가 됐습니다. 지금도 선명히 들리는 그 날의 비명이 아직도 날 괴롭히고 있어요. 그래서 더더욱 깊게 숨기려고 했는지도 몰라요. 그렇게 이 마을을 싫어했으면서. 나도 어쩔 수 없는 시간의 죄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왜 일까요. 이대로 평생을 이 마을을 숨기고. 그 날을 깊숙이 파묻고 사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그토록 미워했던 이 차가운 산에게도 거부당한 것 같네요. 이대로는 아무 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그래요. 정확히는 할 마음이 없었지요. 무서웠습니다. 내가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 마녀로서의 지난날이 드러나게 될 날 들이 너무 무서웠어요. 그래도. 이젠 앞으로 나가려고 합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 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해야겠지요.”
그의 얼굴에 다시 올려둔 유나의 손은 조금씩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이제 그 수명을 다해가는 표면의 조각들이 조금씩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너무 날 원망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사실은 나도 이젠 지쳤어요. 나 자신을 마녀로 과장하여 소문을 내고 지나가는 여행객들을 일부러 이 마을로부터 멀리 돌아가게 만드는 일이나 잘못된 지도를 만들어서 산을 헤매다 지쳐 돌아가게 만드는 것도. 결계를 쳐서 같은 길을 계속 돌게 만드는 것도 이젠 한계입니다. 어제…….제가 쳐둔 모둔 결계를 풀었어요. 마침 지나가는 청년 둘을 만나 당신과의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지요. 처음입니다. 당신과 나와…….그리고 이 마을의 관한 이야기를 외부인에게 전하는 것은. 그래서인지 힘들더군요. 결국은 그만두고 말았지만 그러길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오는 거리에 서 있는 유나의 볼에 뜨겁게 흘러내려 금새 식어버린 눈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투명한 그 작은 물방울은 이내 바람에 날려 오는 먼지와 모래가 뭉쳐 그 빛을 잃어버렸다. 마치 유나가 어루만지고 있는 그의 얼굴에 남은 그것처럼.
“일을 끝마치게 되면. 나도 내 나름대로 죗값을 치러야겠지요. 이 모든 일은…….결국은 모두 내가 저지른 일이니까요.”
작별 인사는 간단했으나 돌아서는 발걸음은 그리 편하지 못하다.
“돌아올게요. 그 때는…….그 날엔…….”
입 안 가득 차오른 슬픔을 다시 삼키느라 유나는 잠시 말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다시 이어가는 그녀의 목소리는 메마른 바람과 같이 가늘고 힘이 없었다.
“그 땐…….내가 지은 이 죄의 흔적들을…….모두…….”
결국은 끝까지 말을 하지 못하고 등을 돌려 다시 쓸쓸한 대로를 걷기 시작했다. 꽤 오랫동안 찾지 않았던 시간이 멈춰버린 그 마을은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마음의 평정을 모두 날려버렸다. 천천히 걸어 나가는 그녀의 어깨는 차츰 들썩이기 시작했고 이내 그 자리에 멈춰서 메마를 대로 말라버린 땅에 작은 흔적을 남기기 시작했다.
“안녕. 당신을 만나 사랑하고 꿈꿨던 그 날들이…….내 인생의 가장 행복했던 날들이자 가장 큰 오점이었습니다.”
유나는 다시 걸었다. 점점 멀어지는 앞으로 뻗은 그의 손이 혹시나 어깨를 붙잡지는 않을까 괜히 걸음이 급해졌다. 서두를 것 없다며 이내 마음을 다잡아도 결국 이별을 고하는 돌아오는 그 길은 그런 여유를 허락해주지 않았다. 시간과 빛을 잃어버린 마을. 쓸쓸히 떠나는 그녀의 등을 바라보는 모든 것이 잿빛의 돌로 변해버린 그 마을은 차가운 바람만이 가득하다. 그 날의 비명이 가득한 거리에 서 있는 넥슨의 뺨에 그녀가 어루만지고 간 자국이 희미하게 남았다. 그리고 흔적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깊이를 더해가 결국은 앙상히 남은 그 흔적마저 무너트리고 말 것이다. 유나는 그래도 그 날이 오기 전까지는 돌아오겠다며 확신할 수 없는 약속을 핏기가 사라진 잿빛의 결정에 새겼다.
* 박진호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8-08-12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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