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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9/09/10 01:22:29
Name happyend
Subject [일반] (이벤트와 함께하는)피지알 역사토론 첫회-고대사편 제1불판
드디어 시작입니다!!!!
어찌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고요, 다행히 정말 오랫만에 시간이 남아서 매주 한번 목요일정도에 불판을 세우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이번에 고대사 전부를 불판으로 세우려고 했는데,이게 발제문이 너무 길어져서....안되겠습니다.양해를^^

그리고, 역사토론을 한다고 동네방네 떠들어서 그런지 운영자분께서 쪽지를 주셨습니다. 이벤트를 해주시겠다네요,세상에나....
쪽지 그대로
"재미를 위해서 각회마다 한 분씩 선정해서 3만원 이하의 도서상품을 전달해 드리는 이벤트"
입니다.
(현재는 4회까지 예정입니다)

열심히 참가해주시고, 다음 주제가 고대사편 < 신라왕실 가계도,고대사 미스테리>에 대해 하나라도 발제를 해주시면 제가 넙죽 절을 올린다음 이벤트 당첨자로 처리해드리겠습니다.(이 당첨자가 제가 꼴리는대로 하면 되나 보더라고요)

어찌되었든 하면안되는 토론,역사토론을 한 번 해보겠습니다.(피지알내에 숨은 고수분 많은 거 다 압니다)
허심탄회하게, 궁금한거 질문 다하고, 수상한거 다 까발리는 자리가 되도록 해보지요.
(단, 예의를 지켜주세요.^^)

오늘의 주제는
1.삼한사회에 대한 평가
라고 썼으나, 궁금한거 마구 물어보기라고 읽으셔도 무방합니다.
2.가야 멸망이후
라고 썼으나, 하고 싶은 말 맘대로 하기라고 읽으셔도 무방합니다.

자,그럼 시작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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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발로 쓴 발제문)))))))))))))))))))))))))

개인적으로 저는 고대사 연구에 밝지도 못하고, 공부도 많이 되어있지 않습니다만, 주 관심사가 과학사이다 보니 관련 연구노트들이 있어서 (그나마 몇 년전에 만든 것들이라 기억도 가물가물한) 그것을 토대로 발제를 하겠습니다. 따라서 미흡한 점이 너무 많은데요, 고수분들의 도움을 부탁드립니다.


1. 삼한사회

우리나라에는 구석기시대부터 ‘살기 좋은 곳’이라고 여겨졌나봅니다. 적당한 숲, 적당한 강, 그리고 적당한 날씨...그래서 방문객이 끊기지 않았는데요, 신석기시대 이후로는 골짜기마다 사람이 안 사는 곳이 없지 않았나 싶을 만큼 많은 유적들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정착한, 다시 말해 우리의 조상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때가 청동기시대인데요, 이때 한반도에 들어온 사람들이 ‘집단농경문화’인 ‘청동기문화’를 가지고 들어온 것으로 여겨집니다.

아시다시피 청동기시대 첫 국가인 고조선의 건국이념이 ‘홍익인간’인데요, 이것은 말그대로 골짜기 여기저기 산개한 채로 농사짓는 방식으로는 절대로 늘어나는 식구들을 먹여 살릴 수 없고, 자연재해에 대응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줌으로써 ‘협업’의 위대한 힘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래서 청동기시대는 이상사회로서 유교의 로망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 청동기문화를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 외지인들입니다. 그들은 북쪽으로 넘어오거나, 남쪽에서 배를 타고 왔는데요, 그들이 가지고 온 토기를 보면 출신지역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만,여기서는 생략하겠습니다.(기회가 된다면 나중에...)

외지인들이 현지인들을 복종시켜내는 것은 ‘널리 세상이 이롭다’는 설교만으로는 물론 되지 않습니다. 지배와 피지배, 그리고 지배자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해 동원된 청동기문화(대부분은 제례도구이거나 사람들을 겁주기 위한 도구입니다. 중국에서는 코끼리와 전차를 타고 정복길에 나설 때 아예 소리가 요란하도록 방울을 달고 다녔다고도 합니다.)는 차츰차츰 작은 마을들을 필요에 의해 모아갔습니다.

(누군가는 그 과정을 이렇게 표현하기도했습니다.
“家>>리니지(혈통,계보,씨족)집단>>촌>>아부족>>부족>>부족간영역”)

청동기마을에 내려온 이주민들은 우수한 청동기문화를 바탕으로 지배 가문이 되었습니다만 그 지배 가문 중에서도 다시 제사장의 역할을 하던 사람이 정치적 수장의 역할도 해야 할 필요가 생겼는데요, 제 개인적으로는 창고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청동기시대가 되어서 집단노동을 하게 된 것은 골치 아픈 문제를 만들지 않을 수 없었는데, 바로 도둑입니다. 흉년이 들거나 인구팽창의 압력 때문에 식량이 모자라게 된 집단은 다른 집단을 침략해서 해결하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다보니 이들로부터 마을주민과 무엇보다 ‘창고’를 지켜야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이때부터 우리나라 촌락은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위에 자리 잡게 되었고, 주변에 해자나 목책을 만들었습니다.

대표적인 청동기마을인 부여 송국리 마을을 비롯해 여주 흔암리 유적 등을 살펴보면 이 마을의 특징이 잘 나타나는데요, 외부의 적에 맞서기 위해 군대를 모집하고 훈련하는 일, 식량을 거두고 분배하는 일, 일을 배분하는 일 등의 리더쉽을 족장에게 요구하게 됩니다.  마을의 안녕과 번영(식구수의 증가를 포함해서)을 책임져야 하는 그들에게 ‘권력’이 이양됩니다.

새롭게 부족의 수장이 된 족장은 자신의 가문을 신성화시키고, 권력을 절대화시켜나감으로써 군대,세금을 비롯한 정치적 도구들을 통해 지배자가 됩니다. 이때가 바로 부족국가가 만들어지는 때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목책국가,성읍국가라고도 합니다.엄격한 의미에서는 다릅니다만 대체로 삼한의 경우는 성읍국가, 고구려의 경우는 부족국가라고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처음엔 외부의 적에 맞서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목적의 군대가 ‘식량’을 손쉽게 탈취하기 위한 정복자로 변신하기 위해서는 선진적인 무기가 필요했고, 이때부터 한반도는 요동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앞선 무기인 철기는 자체 진화하여 이룰 수 있는 기술의 경지가 아니라 ‘전파’되고 ‘이식’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되었든 이렇게 ‘배산임수’에 자리 잡기 시작한 마을들이 스스로를 족장을 중심으로 편성하기 시작한때부터 이때까지를 삼한시대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삼한시대의 후기는 ‘원삼국시대’ 혹은 ‘삼국시대 초기’와 겹칩니다. 개인적으로는 삼한시대라는 개념자체가 매우 모호한 게 바로 이런 점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예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전 1세기까지를 삼한시대, 백제국,고구려국,사로국,가락국이 거의 동시에 만들어진 기원전 1세기부터 정복국가로 나선 3세기까지를 원삼국시대 혹은 삼국시대초기라고 부르자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러나 학술적인 토론이 아닌 한 삼한시대가 언제부터 언제까지인지는 그다지 중요한 것 같지는 않고요, 다만 마한왕을 정점으로 존재하던 그 시대를 뭉뚱그려 삼한시대라고 부르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청동기시대의 마을들은 다양한 크기로 뭉쳐서 ‘소국’을 형성했는데요, 마한은 경기·충청·전라지방에, 진한과 변한은 경상지방에 위치한다는 한백겸의 설이 가장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진한은 낙동강의 동쪽이고 변한은 낙동강의 서쪽에 자리잡았고요.
(여기서 진한의 ‘진’은 동쪽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발해를 ‘진국’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말 그대로 해동성국이었던 것이지요. 변한의 ‘변’은 이곳 사람들이 고깔을 쓰고 있어서 그 모양을 따서 불렀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중국사람 입장, 혹은 당시 중국과 외교관계를 가진 마한의 입장에서 붙인 이름입니다.)

삼한각국은 대체로 평균인구 1만여 명으로 삼한의 대표국가였던 목지국은 5~6만에 육박했습니다. 이 평균치로 보면 이미 삼한시대 마한의 인구가 60만명에 이르렀던 것이니 백제 멸망당시 인구수는 오히려 적다도 느껴집니다.
마을의 크기는 직경 10km정도이고, 직경이 약 40km에 이르는 국가는 지금 군 단위의 크기에 해당하는 성읍국가로 볼 수 있습니다.

마한은 기원전 2세기경부터 한반도 중부 및 서남부지역에 자리잡았으며, 백제가 점차 성장함에 따라 남쪽으로 밀려났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마한에는 54개의 소국들이 자리잡고 있었지만 다들 정복전쟁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마한사람들은 우마를 탈 줄 몰랐으며 우마는 모두 장례에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기마민족인 고구려-발해 유민이 한강변에 도착하여 만든 백제국이 아주 작은 소국에 불과했지만 나중에 마한땅을 전부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당연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삼한에는 그 규모에 따라 대표국에는 왕이 존재해서 마한왕으로 불렸던 것 같습니다. 마한왕은 삼한왕이란 뜻으로 ‘진왕’이라고 했는데,역시 중국과의 외교문서에 나오는 말이니만큼 중국 입장에서 동방왕이라는 뜻으로 보입니다. 마한왕이자 삼한왕인 ‘진왕’은 마한 54,진한 12,변한 12, 합쳐서 68개의 소국중에서 가장 강성했던 목지국왕이 차지했습니다.
변한의 대표는 구야국 신지(구야진지렴이라고 불렀습니다)와 안야국 신지(안야축지라고 불렸습니다)가 있었는데요, 이 두 개의 소국은 이후 구야국(가락국)과 안라국으로 발전합니다. 어찌되었든 진왕은 마한계 2국의 신지와 변한계 2국의 신지를 통해 각각 마한과 변한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니 왕이라기 보다는 피라미드구조라고 할까요? 변한지역에선 구야국과 안야국이 힘이 더 쎄지만 어쨌든 이들은 마한왕에게 조공을 바쳤습니다. 신라에서는 사로국이 마한왕에게 조공을 바쳤습니다. 조공을 바칠 수 있는 소국이야 말로 대국이 아니면 안되었던 것이기도 합니다만.
(일설에는 목지국이 백제에게 병합된 후 마한왕은 영산강 유역의 신미국왕이 차지했다라고도 합니다)

왕을 표방할 수 없는 작은 소국은 크기에 따라 대국의 족장은 ‘신지’라고 불렀고, 소국의 족장은 ‘읍차’라고 불렀습니다. 가령 ‘마한왕은 구야국의 신지가 조공하기에 선물을 들려보냈다거나 감해국(전북 익산에 있던 소국)의 읍차가 신기한 새를 잡아서 선물하였기에 검한자루를 내려보냈다....’등등...
신지나 읍차나 모두 삼국시대가 되면 토호세력으로 편입되어 이후 ‘호족’으로 발전했을 것으로 보입니다만, 소국의 백성들은 백제와 신라의 틈바구니에서 때로는 용병으로 때로는 정복민으로 시달리며 고통을 겪거나 심한 경우는 노비가 되기도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 삼한의 소국 중에서 진한은 사로국의 정복전쟁에 의해 하나하나 편입되었고, 마한은 백제에 편입되었는데요, 이 방식이 조금 달랐습니다. 사로국은 배타적 편입이었고,그래서 내전만 7차례를 겪으며 골품제라는 독특한 신분제를 만들어내기도 했으며 강력한 고대국가로 가장 늦게 출범하게 하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반면 백제는 이주해온 두 가문인 ‘부여씨 가문과 해씨가문’이 다른 가문과의 연합으로 만들어진 까닭에 대성 8족이라는 지역에 근거한 족벌간 알력을 자초, 의자왕이 패착을 두도록 하는 결정적 근거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어찌되었든 평화로웠던 삼한사회가 피비린내나는 삼국시대로 변하는 과정에는 낙랑군이 힘도 컸습니다. 낙랑군은 백제,가야,신라를 모두 자극했는데요, 이들의 행위는 염사치설화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호래와 같이 나무를 도벌하러 왔다가 잡혀서 노예가 된 1,500인의 낙랑인 중,이미 죽은 500인에 대한 변상으로 진한인 15,000인과 변한포 15,000필을 빼앗아 돌아갔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백제는 일찍부터 철기문화의 중요성에 눈을 떠 큰 기술적 발전을 이루었고, 신라는 말그대로 철기입국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제철가문을 왕위에 올리고, 경주황성동제철공업단지를 개발해냅니다.

끝으로 삼한시대에는 세금을 걷었다는 것으로 보아 분명히 문서작성을 했을 것같은데요, 초기삼국시대(혹은 원삼국시대)에는 문자기록이 남아있지만 삼한시대에는 문자사용에 대한 기록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남긴 문자를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바로 암각화가 그것인데요, 아직까지 암각화 연구는 정말이지 ‘감상용’에 머물고 있어서 안타깝습니다. 이 시대 남긴 기록이라고는 이것밖에 없는데 이마저도 차츰 여러 가지 이유로 사라져가고 있다고 합니다. 인류는 차츰 문명의 피로감에 시달리면서 문명의 여명기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고,이에 따라 이시대의 모든 문화자원은 어쩌면 소위 말하는 공해없는 자원인 녹색혁명의 보고가 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꾸 사라져가고 잊혀져가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공주 석장리 박물관에서 암각화를 보여주자 같이 갔던 일행이 외친 외마디 소리가 귀에 쟁쟁합니다.
“그럼,이것이 그시대 사람들이 만난 ‘신’의 얼굴이란 말이야?”
지독한(?) 기독교신자인 그 일행의 말은 신선한 자극이 되었는데요, 우리가 지금 지워가고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또 하나 이번 발제를 하면서 저는 오랫동안 가졌던 의문에 대한 답을 하나 얻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왜 삼국을 통일한 것이 신라냐는 것인데요, 그 해답을 간단명료하게
“이두!”
라고 한다면 조금 황당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애초에 우리나라 말은 활발한 교류로 인해서 삼국의 언어가 차별성이 거의 없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글은 어떨까요?
고구려는 초기에 자체적으로 한자를 차용해서 표기법을 개발해보기도 했지만 결국은 거의 진전이 없이 멸망을 맞았습니다. 삼국 중 가장 중국과 가까운 백제는 아예 중국식 표기법외에 다른 방법을 개발할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신라는 달랐습니다. 중국의 한자를 차용하여 우리말 구조, 우리말 발음을 한자식으로 표기하거나 무엇보다 구두법의 발전을 도모했던 것입니다.이것이 이후에 이두로 체계화되었는데요, 이것은 원효의 불교사상만큼이나 혁명적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생각과 언어가 일치할 수 있었고,무엇보다 세련된 한자구사자만이 아니라 중간급이하 관리들간의 소통도 가능해진 것입니다. 언어의 힘이라고나 할까요? 이것은 사회통합의 결정적 기여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후 제 숙제이기도 합니다만,제가 이분야는 하나도 몰라서 도움을 주신다면 정말 고맙겠습니다)

일본어인 가나를 보면서 왜 얘들은 띄어쓰기를 하지 않나,나머지는 거의 이두와 동일한 것 같은데(저는 이과생출신이라 언어학에 지지리도 약합니다.)하는 고민을 하곤 했는데요, 그런 일본도 가나로 사회를 통합하고 경제대국이 되었는데, 신라의 힘이 위대해질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더불어 이제껏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는 바람에 우리나라가 동방의 약소국으로 전락했다...이런 관점이 아니라, 변방의 약소국 신라가 어째서 삼국통일이라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일 중의 하나를 이루었는가를 분석할 때가 아닌가...이런 생각이 짙게 들었습니다.




2. 가야에 대해

가야연맹(연맹에 대해 동맹이냐 연방이냐 등등의 논쟁이 있지만, 저는 그냥 편의상 가야 연맹이라고 쓰겠습니다.)의 초기 맹주였던 김해의 가락국(가락국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표현이 있으나 저는 그냥 편하게 가락국이라고 하겠습니다. 이것이 결정적인 오류가 된다고 지적해주시면 기꺼이 바꾸겠습니다.)은 4세기에 접어들어 급속한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해상무역의 거점이었던 탓에 떵떵거렸지만 남해안의 작은 소국들인 포상팔국이 해상무역권 독점에 반발해서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정치적 경제적 타격을 입은데다 주요 수출품이던 제철산업마저 국제경쟁력을 잃고 있었습니다.
가장 많은 철의 수입국이었던 낙랑,대방군이 멸망해버린데다 신라마저 제철독립국이 되었고, 특히 엄청난 무역상대국이었던 일본마저 제철기술을 갖게 됨으로써 철값이 하락, 급기야 가락국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게 했습니다. (제철산업을 비롯 선진문물의 주요 창구였던 낙랑군의 멸망은 가락국의 외교적 입지를 좁히기도 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의 군대가 낙동강 하류지역까지 내려와 가야를 토벌하는 바람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됩니다.(반면에 고령·함양 등의 내륙산간 후진 지역은 오히려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고,세력기반을 착실히 유지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가야지역중에서 신라에 가까운 지방인 성주,양산,부산 등지의 세력은 신라의 영향권아래로 들어갔고, 가야 연맹의 세력권은 고령이남,낙동강 서쪽 지역으로 축소되며 전기 가야연맹시대가 끝났습니다.

그 뒤 지리산자락에 자리 잡은 이들에게 잠시 평화가 찾아왔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시대는 바야흐로 정복전쟁의 시대인 5세기.
(어떤 연구자는 이시대에 고구려 남하정책과 신라,백제가 느닷없이 전쟁에 열을 올리게 되며 한반도 대격돌이 일어나는 원인에 대해 매우 흥미로운 연구결과를 내놓기도 했습니다. 그는 그 이유를 ‘기후변화’에서 찾았는데요, 이시대에 특별히 기후변동에 의한 흉년이 잦았고, 그원인이 철기시대로 접어들면서 급속한 인구팽창과 이에 따른 자연파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흉년의 타개책으로 전쟁의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것입니다. 따른 연구자는 이시대는 철제 농기구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고 농사기술이 발전해서 인구팽창이 일어났고,이런 인구압을 견디지 못하고 정복전쟁에 나서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어떻든 재미있는 분석들입니다)

고구려 장수왕은 평양으로 천도를 단행한 뒤 남하정책을 추진,백제의 수도를 함락시켰습니다. 백제는 부득이 하게 웅진으로 남하하게 되었는데요,거기에다 신라마저 추풍령을 넘어 보은의 삼년산성까지 진출하는 등 한반도의 회오리는 에너지를 한데 모아 고스란히 남쪽으로 밀어닥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어쩔 수 없이 생존을 위해 소국들을 모이게 했고, 고령 지방에서 대가야 시조신화를 표방하면서 김해세력을 대신하는 맹주로 고령의 대가야가 그 중심에 서게 됩니다. 그리고 같은 문화기반안에서 성장하던 합천,삼가,거창,함양,산청,아영,하동,사천,함안,창원,김해 등지의 소국들을 포괄하는 후기가야연맹이 만들어집니다.

후기가야연맹은 국제정세에서 캐스팅보트를 쥐는 외교적 역량을 발휘하면서 존재감을 과시하기도 하였습니다. 백제,신라는 물론 그 틈바구니에 끼어있던 강원도지역의 말갈족까지 부지깽이도 아쉬운 판이라 가야연맹에 손을 벌리곤 했으니 말 그대로 상종가를 치고 있었던 셈이지요. 이런 주변정세에 힘입어 대가야는 손쉽게 세력을 넓혀 서쪽으로 진출,소백산맨 넘어 전북 남원,임실,장수까지 차지하며 명실상부한 전성기를 과시합니다.

그러나 시대는 어지러웠고,  판단미스는 멸망을 부르던 때인 이 살얼음판을 걷기에는 가야연맹의 사공이 너무 많았던 걸까요? 백제가 신라와 고구려의 팽창정책에 맞설 카드로 일본과의 연합을 구상하면서 전라남도 지방까지 세력을 넓히자 이지역의 친가야세력들이 급속도록 백제로 기울어버렸습니다. 이것은 또한 일본과의 중개무역을 경제적 기반으로 하던 가야연맹에게는 매우 크나큰 타격이었던 것이지요.

견딜 수 없게 된 대가야의 이뇌왕은 신라와 화친을 통해 후방을 안정시킨 후 훗날을 도모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신라에 혼인동맹을 제안했습니다만, 결과는 법흥왕의 잔꾀에 넘어가는 우를 범하고 말았지요.(어쨌든 이결혼은 성사되었습니다. 이뇌왕과 신라귀족과 결혼하였고 그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드라마 <선덕여왕>의 쾌남으로 나온 월야의 아버지 월광태자입니다)

결코 국제관계에 친구나 영원한 우방은 없고, 오로지 먹고 먹히는 관계만 있던 정복전쟁시대. 법흥왕은 옳다구나 하고 가야연맹에 불을 질렀습니다. (결혼과 함께 100명의 시녀들을 대가야에 보냈는데 이들이 신라의 스파이였다, 뭐 그런 내용입니다) 대가야는 급속하게 불신받았고, 급기야 밀양,영산지방에 있던 가야소국인 탁기탄국이 신라에 항복합니다.(529년 어름)

그렇지 않아도 대가야에 맞먹는 국력을 가졌으나 제대로 큰소리 한 번 못내보던 함안의 안라국은 이것을 빌미로 남부의 여러 소국들을 아울러 새로운 연맹을 결성합니다. 안라국은 백제,신라,일본에 사신을 초빙하여 국제회의를 여는 등 당당하게 세를 과시하기도 했습니다.바로 그때 기회를 엿보던 가락국 구해왕은 신라에 항복합니다. 이것은 결정적으로 가야연맹을 친신라계와 친백제계로 동서양분되며 분할잠식당하도록 만듭니다. 뭉쳐도 모자란 판에 소위 ‘각개격파’당할 위기에 처한 것이지요.

그러나 안라국은 상당한 리더쉽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정치적으로 둘로 분열되었지만 대외적으로 공동행동을 유지했으니까요. 하지만 문제는 안라국이 정세를 보는 안목이 모자랐던데 있었지요. 백제를 고립하려는 목적에서 고구려와 밀통해 548년 정월에 고구려와 백제간의 독산성 전투를 일으키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이 전투에서 고구려가 패해버립니다. 이것은 백제에 빌미를 제공, 백제의 부용국으로 전락하게 만들었습니다.  

이후 신라가 한강을 점령하며 나제동맹이 깨지고,관산성전투에 일본-백제-가야 삼국간의 동맹군으로 참가했지만, 그 유명한 패전을 기록, 멸망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신라는 가야을 회유와 강압을 병행하며 가야의 병합에 착수하는데 제일먼저 신라에 투항한 연맹국은 안라국이었습니다. (560년)

그러나 대가야를 비롯한 가야 북부 지역은 자체의 세력기반도 있는데다가, 친백제적 성향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신라에 대해 좀 더 독자적인 자세를 취했던지 신라에서는 561년 창녕 지방에 진흥왕 및 4방군주(四方軍主)가 모여 무력 시위를 하며 압박합니다. 그리고 이듬 해에는 반신라 세력의 중심인 대가야를 기습적으로 공격해 함락시켰고 이를 전후해 나머지 가야 소국들도 멸망시켰습니다. 당시 대가야의 마지막 왕은 도설지왕으로 이를 월광태자와 동일인물로 보기도 합니다.

가야의 멸망원인에 대한 또 하나의 흥미로운 분석중 하나가 순장 풍습때문이라는 것인데요, 사람을 비롯해 화려하기가 이를 데 없었던 이 장례풍습이야말로 죽은 자가 산자를 죽인 꼴이 되어버렸습니다.

또하나 가야멸망의 원인에 대한 분석중 설득력이 있어보이는 것으로는 함안의 안라국때문이라는 주장입니다.백제국, 사로국이 각각 마한과 진한을 정복하고 백제,신라를 건국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부족국가가 다른 소국과의 격차가 너무 월등했던데 있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가야에는 구야국(가락국)이 강할 때도 안라국이 대등했고, 대가야가 강할 때도 안라국이 비등한 세력으로 견제했다는 것입니다.

이걸 보면,현재 정치상황도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데요, 한나라당의 경우 분명한 부족국가와 소국이 존재합니다만, 민주당의 경우는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는 구야국,안라국,대가야 같다고나 할까요? 한나라당이 계보가 분명한 귀족국가인 백제로 두 번에 걸친 패배로 사비까지 천도한 성왕의 부흥기를 맞이하였다면, 이제 이에 대항할 견제세력은 남천할 장수왕일지, 아니면 내부정쟁에 시달리다 못해 차라리 삼국통일을 선택할 김춘추일지는 두고봐야겠지만 말입니다.

참, 김춘추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가야의 유민들의 운명에 대해 알 수 있는 자료는 많지 않습니다. 가야의 왕들은 투항하면 신분을 보장받아 토호로 살아갈 수 있지만 끝까지 저항한 경우에는 노비가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정복국가 시절의 운명이니까요. 사다함은 이렇게 받은 대가야의 노비와 토지를 자신의 부하들에게 다 나눠줬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대가야처럼 큰 나라가 아니라면 비참한 최후를 맞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신라는 차츰 전통귀족들의 도전앞에 위기에 처한 왕족들이 가야세력에게 손을 내밀었으니까요. 진지왕계의 김춘추는 가락국세력인 김유신과 손을 잡았습니다.(김유신의 후광으로 가락국,즉 김해는 후에 통일신라기의 9주 5소경중의 하나인 금관경이 됩니다. 금관은 금을 다스린다는 뜻이니 여전히 제철산업단지였는지 그냥 상징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이후 가락국은 금관가야로 불렸습니다)
위기에 빠진 선덕여왕은 창녕의 가야세력과 손을 잡았다고도 하고요. 신라의 귀족들이 몰아붙이면서 왕실이 위기에 빠지면 빠질수록 가야세력의 힘은 값이 올랐을지도 모릅니다만, 역사에 그 이름을 남긴 사람은 김유신이 거의 유일합니다.

------------------------

아래에 다음 편 발제를 해주셨는데요, 쪽지로 보내주시면 더욱 고맙겠습니다.

그리고 참고문헌도 올려주세요.서로 볼 수 있게.
제가 발제한 내용의 참고문헌은 너무 많고 오래되어서 간략하게만 추리겠습니다.(고대사편 전체)
단행본만 소개하겠습니다.
<이야기 가야사>,김경복,이희근, 청아출판사
<우리 한국사> 김당택,푸른 역사
<한국 고대사입문>,김정배,신서원
<과학의 역사>버날,한울
<과학의 역사>메이슨, 까치
<한국사 이야기>이이화 한길사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박창범 ,김영사
<우리말의 수수께끼>박영준 등,김영사
<한국 고대의 금속공예>,이난영,서울대 출판부,
<쇠부리 특집>울산광역시 북구문화원
<부여 고구려 건국신화 연구>이복규,집문당
<한국 지석묘 사회 연구>이영문,학연문화사
<단군과 고조선사>노태돈 등,사계절
<삼국사기>김부식,이강래,한길사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하우저,창비
<한국 고고학 개설>김원룡,일지사
<과학과 기술로 본 세계사 강의>도른 외,모티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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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엉이
09/09/10 01:35
수정 아이콘
새벽2시를 바라보는시각만 아니라면...좀더참여하고싶지만..... 낙랑국에 대해 아시는분들 없나요? 제가 아는건 호동왕자관련된 설화뿐이네요. 실존했던국가인지...그것조차 잘모르겟습니다.
antoninus_
09/09/10 01:58
수정 아이콘
2.가야 멸망이후
라고 썼으나, 하고 싶은 말 맘대로 하기라고 읽으셔도 무방합니다.

라고 쓰셨으니, 자신감을 가지고 정말 쓸데없는 뻘소리 한번 해보겠습니다.

고령에 가면 지산동 고분군이 있죠.
이 고분군의 특징은 '순장'입니다.
그런데 제가 알기로는 순장할 대상을 높은 사람(이를테면..왕이라고 하겠습니다.)이 죽기 전에
직접 지명하는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자기 측근들을 순장 대상으로 지명한다면,
측근이 죽으면 자신을 지지하는 기반이 사라지는 것 아닐까요...; 어차피 왕 자신은 죽지만 말이죠..

그렇다면 정적들을 순장으로 지명한걸까요?...
작년 겨울에 지산동 고분군과 대가야박물관에 갔었는데
그때 든 의문입니다.. 사실 의문이라기보다는 쓸데없는 뻘글에 가까운것같아서 부끄럽네요;
09/09/10 02:02
수정 아이콘
사실 저는 역사를 좋아하지만 한국역사. 특히나 고대사에 엄청나게 약한터라 토론에 참여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신라가 통일한 이유가 단순히 언어때문이라곤 생각하지 않습니다.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무관들은 글을 잘 몰랐죠. 대정도, 상장군도 말이죠... 그래도 전쟁하는건 지장이 없었습니다... 글로 안 통해도 결국 전쟁은 무관들이 몸으로 하는거니까요... 중국이 언어와 문화때문에 원이나 청에게 그 넓은 땅을 내줄리 없었듯이 말입니다. 결국 신라의 통일은 외교력때문이겠죠... 당이 아니라면 신라의 통일은 쉽게 일어날리 없었을거란게 제 생각입니다.
09/09/10 02:07
수정 아이콘
역사 토론은 뭐지? 먹는건가? 하고있는 역사(특히 한국사)에 관해서는 빈깡통인 저입니다만,
그래도 올려진 본문 읽는 것 자체로 매우 흥미롭네요.
읽다보니 두 가지 다 초점이 한강 이남지역에 맞춰져 있다보니 고구려는 어디? 다른나라? 막 이렇지만 크크.
고수님들 믿으면서 질문 던져보고 싶습니다.

북쪽에서 유목민들이 말을 전투에 활용하면서 백제가 소국임에도 마한을 몰아낼 수 있었다는 내용과,
청동기 시대에서 철기시대로 넘어가는 강력한 신무기가 등장하는 시대였던만큼,
결국, 기본적으로 나라를 유지하려면 이젠 사람들 먹일 식량만 생산하면 되는게 아닌
타국과 경쟁에서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아야하는 시대로 접어들게 되는 것 같은데,

철기가 한반도에 어떤 방식으로 어디서부터 시작되거나 전해졌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용상으로는 이미 큰 규모의 연합을 이룬 마한이 너무 힘없이 백제한테 밀려버린것 같아서,
(아무리 기마민족이 말을 타고 다녔다고 해도...)
그 당시 삼한은 큰 리더쉽이 없다고 해도 무방할만큼 너무 잘게잘게 나눠져 있어서
삼한의 대표격인 진왕? 목지국왕?은 그냥 이름만 있고 사실상 아무런 힘이 없는것 아니었나하는 의문이 듭니다.

그러면서 삼한 당시의 사회 계층이나 지배 계층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고 싶기도 하네요.
삼한 내의 국가들은 어떤 방식으로 서로 대국과 소국을 평가하면서, (그저 인구와 땅크기?)
소국은 그냥 하릴없이 조공만 갖다바치는 것이었나? 삼한 내에서 서로 싸움이나 통일 전쟁은 없었던 것 같고...
백제나 신라가 서서히 규모를 키워가며 성장할때도 소국들이 연합하거나 하려는 움직임은 전혀 없었나?
아니면 정말 말그대로, 백제나 신라는 기관총을 들고 내려오는데 삼한은 그냥 활과 화살밖에 없어서
너무 큰 무기 기술력 차이로 밀렸나? 하는 궁금증이 드네요?

마한은 자리 잘 잡고 크다가 백제가 말타고 내려와서 망했다. 라는 것 같아서...
무언가 엄청 허무하게 사라진 듯해서요.
信主SUNNY
09/09/10 02:16
수정 아이콘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아는 것이 미천하여 말을 덧붙일 수는 없지만요..
김민규
09/09/10 02:41
수정 아이콘
좋은내용 잘읽었습니다....
그리고 한가지 궁금한점이 있었습니다...
국사라는 과목을 좋아하는 학생이었던지라 어렸을때 참궁금했던점인데요....
이게 한국사 부분이아니라서 여쭈기도 애매하나...
지금 이 아니면 역사적으로 뒤로 밀릴꺼같아서 한가지만 여쭙고 가보겠습니다...

국가의 발달 과정을 보면 부족에서 연맹국가의 시대를 거쳐서 고대국가로 발전한다구 알고잇고
삼국의 발달과정을 보면 대부분 그런형태의 국가를 발달하고있는데요...

개인적으로 중국의 경우에 상과 하는 원체 전설에 가까운나라(하는 어느정도 밝혀지고있지만)들이고
그렇다면 중국의 역사에서 은 과 주의 위치가 연맹국가에서 고대국가로 가는사이의 일인가 가 궁금합니다
개인적으로 주나라의 봉건제도가 어느면에서 한반도의 연맹국가형태와 비슷하지않느냐 라는 의문을 품은적이많은데요
고등학교 국사선생님이 그냥 짧게 그렇지않다 라구만 대답을 해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좀더 자세하게 어째서 주나라가 연맹국가가 아닌 고대국가여야하는지
그렇다면 중국의 국가 발전 과정은 어떠했는지 조금 알고싶습니다...단지 시대적으로 비슷한 시기여서 여쭤봅니다
괜한 질문으로 이야기가 다른데로 흐르게 되지는않을지 걱정이 되지만....
알고계신분의 지식을 살짝 맛볼수있게해주세요~
탈퇴한 회원
09/09/10 03:49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다만 불판을 올리기에는 시간대가....ㅠㅠ
09/09/10 03:50
수정 아이콘
김민규님// 시대적으로 비슷한 시기..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네요;
제 짧은 지식으로 약간 이야기해볼게요. (틀린 내용이 많을 수도 있습니다.)

연맹국가와 봉건제는 모양은 비슷할 수 있어도 그 태생이 완전히 다릅니다.

연맹이란 건 중심이 없습니다. 서로 대등한 관계죠.
예를 들면 스위스의 칸톤과 비슷하겠죠. 독립적이고 서로 교류하되 관여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힘을 합치기도 하죠.
이러한 관계가 성립하는 건 더 강력한 외적에 대한 대항의 목적이 있거나,
아니면 서로 비슷비슷해서 나머지 모두를 절대적으로 찍어누를 상황이 되지 않을 때입니다.

봉건제는 왕과 제후의 상하 관계가 존재합니다. 다만 왕의 힘이 절대적으로 강하지 않기에 일종의 계약관계가 성립됩니다.
이런 상황이 발생하는 경우는 제가 볼 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절대 왕정에서 왕의 힘이 약해지는 경우 (반대로 제후의 힘이 커지는 경우)
혹은 연맹과 연맹이 하나의 '명분'을 가지고 격돌 후에 승리한 쪽이 너무 많은 영토를 일시에 가지게 되면서 분배되는 경우.
국가의 성장 과정에서는 이제 두 번째 경우가 대다수일 겁니다.
좀 민감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헌원황제가 화하족을 규합하여 치우를 격파하고서 최초의 국가가 등장하는 것도 그러합니다.
아마도 상이나 하는 연맹국가의 형태에 가까웠을 테지요.

그리고 특정 연맹의 힘이 강해지면서 흔히 말하는 '명분'을 쥔 집단이 다른 집단에 비해 우세에 서게 됩니다.
(선덕여왕에서 나오는 '신권'의 개념도 이와 비슷할 수 있겠네요)
이런 과정에서 왕과 제후의 관계가 나타나기도 하죠.
중국사를 살펴보면 은의 역사에서 이미 제후의 역사가 보입니다.
희창은 본래 서주의 제후로 은의 폭정으로 인해 타 제후들의 지지가 떨어진 틈을 타 세력을 규합하게 되죠.
그리고 그 아들인 희발이 뒤이어 은을 격퇴하고 주를 세우게 되는데요.
이때도 보면 '논공행상'이라는 것은 재물이 아닌 영토를 주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제후의 임명이죠)
특이한 것은 은나라에 비해 주나라는 영토를 더욱 많이 세분화하여 나누었다는 겁니다.
아마도, 서주가 은을 뒤집었던 것처럼 어느 제후의 힘이 너무 세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겠지요.
게다가 하극상을 한 번 저지르게 되면 개나소나 자기도 해보겠다고 나서기 일쑤기 때문에...

어쨌든 이로 인해 주나라는 꽤 오래 갑니다.
흔히 아시는 춘추시대는 주나라가 아직 남아있던 시기로 각 나라들이 나름 예의를 갖춰 주나라에 예물을 보내기도 했지요.
다만 이미 이때 주나라는 그 힘을 잃습니다. 똑똑한 사람들을 모두 제후에 임명해서 그랬던 건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문득..


쓰고보니 뭔 말인지 모르겠네요;
개떡같이 썼지만 찰떡같이 이해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信主SUNNY
09/09/10 03:53
수정 아이콘
궁금한 걸 물어보는 자리가 된 것인가요? ^^;;

어릴적에 부족국가시대의 그림을 보면
동예와 옥저가 있었는데요. 그림만으로보면 진한 변한 마한과 비슷한 정도의 크기로요.

동일한 시기에 삼한안의 작은 목책국가가 있는가하면, 부여나 고구려처럼 큰 국가가 공존했던 것이죠? 남부지방이 좀 더 비옥한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위쪽땅에서도 기존에 살던 사람들이 집단을 이뤘을 것 같은데, 유독 백제와 신라주변에만 작은 나라들이 있는 것일까요?
09/09/10 04:00
수정 아이콘
信主SUNNY님// 그건 아마 부족적 특성과 관계가 깊을 겁니다.

일단 북방은 많은 분들이 아시다시피 수렵민족이 대다수였습니다.
수렵민족이 자주 이주하는 이유는 결국 먹고 살기 위한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서인데 이는 국가가 성립된 이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농경에는 서툴고, 따라서 수렵으로 생활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인구에 비해 많은 영토가 필요로 하고,
그에 따라 쉽게 충돌하고 힘의 불균형에 의해 한 쪽이 다른 한 쪽에 흡수되는 일이 빈번히 벌어졌었죠.

반면 남방은 농경민족이 대다수였습니다.
이는 사실 민족적 특성이 아니라 땅이 다르기 때문이죠.
일단 농경민족은 한 곳에 정착할 수 있고,
그리고 정착 이후에는 다른 곳으로 떠돌 필요없이 거기서 기반을 닦아나가면 되는 것이죠.
다만, 이렇기 때문에 이들에게 많은 영토는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농경은 뭐랄까, 생활의 안정을 쉽게 찾아주는 대가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고,
일정 지역에서 인구가 증가되면, 자연스레 소유의 불균형이 생기고, 계급이 생겨나게 되죠.
그리고, 아시다시피 계급이 생기면 어느 순간부터 농경의 수확보다 결국 주변의 정복으로 얻는 이득이 커지는 시점이 옵니다.
물론, 이는 좀 먼 훗날의 이야기이긴 하겠습니다만..
메를린
09/09/10 06:06
수정 아이콘
발제라고 하긴 좀 뭐하고... 예전에 '퇴마록'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보면 치우천황이 치수를 했고, 단군 왕검도 배달족 몇대 왕의 칭호라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그냥 단순히 듣고 넘겼는데, 햅굿교수의 '신의지문' 그리고 고대사 미스테리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세계공통적으로 홍수설화가 나타난다는 것을 알게됐습니다.

그러다보니 퇴마록에 나온 치우천황이 생각나더군요. 홍수설화에 우리민족도 관련되어있고, 또 신적존재로 추앙받는 '치수'를 한 인물이 우리민족을 이끄는 사람이였다니 더 대단하게 느껴지구요. 그래서 환단고기를 인터넷에서 찾아보고 읽고, 그러다보니 증산도까페에 가입해서 읽게 되고;;;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위서논란도 읽게되고(원래 양극단을 보길 좋아합니다.) 그러다보니 좀 더 많이아는분들과 토론을 하고 싶게 되었네요

전 사실 지금은 거의 까먹은 상태지만...
세계의 설화나 신화분석 (고대문명분석) 에는 현재까지의 역사에 대한 접근과는 다른 접근방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써,(실제로 은왕조나 트로이도 유물이 발굴되기 전까진 상상속의 왕조로 치부되었었죠.이런 접근방식과 다르게...)
그런 시각으로 우리나라 역사(고대사)를 바라보는 사람들과 반대되는 사람들의 얘기를 듣고 토론하고 싶습니다

근데 여기에 발제해도 되는건가요? 윗분들 댓글보고 흥미진진해서 읽고있긴 하지만 토론에 낄 그건 못되는것같고, 위에 발제하라해서 하긴 했는데;
Clostridiumbotulinum
09/09/10 07:03
수정 아이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게 아니죠.
당군을 등에 업고 다 쓰러져 가던 백제를 상대로 황산벌 전투에서 승리한 것 뿐이고, 고구려는 당과의 전쟁에서 패해 멸망한 것입니다.
'통일신라'라는 호칭도 잘 못 되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발해와 함께 묶어서 남북국시대라고 불러야 한다는 의견도 있구요.
신라 스스로도 '삼한을 통일했다'라고 평가했지요. 그것이 후대의 지배층과 학자들에 의해 부풀려 지면서 삼국통일로 바뀌어 버립니다.
서재영
09/09/10 08:03
수정 아이콘
밑에 있는 글에만 신나게 댓글달고 막상 여기서는 쓸 말이 하나도 없다니..부끄럽네요.......
happyend
09/09/10 08:53
수정 아이콘
antoninus_님// 순장은 살아서 영광을 죽어서도 가져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살았을 때 그대로를 무덤에 넣게 되는데요,당시 값비싼 물건들은 토기,철(철부의 형태로 화폐의 기능도 대신했습니다.), 같은 것이었고,여기에다 시녀나 시종을 함께 순장하는 것입니다.
정적을 함께 '동반자살'할 수는 없는 구조였습니다.예나 지금이나 죽음은 엄숙하니까요.

Story님// 네. 1차 방정식의 해는 하나입니다만 고차방정식의 해는 여러개이니까 저는 다른 해도 생각해보고 싶었습니다.

한아님// 삼한의 소국은 군사력이 거의 없다시피 했습니다. 당시 철제무기와 기마병이 전투력의 주력이었던 백제국에 비해 마한의 소국들의 무장수준은 어처구니 없습니다. 가끔 환호(해자)에 남겨진 돌멩이를 보면 웃음이 나오곤 하는데요, 방어용으로는 활과 돌멩이를 쓰기도 했습니다.
제가 예전에 잠깐 연구한 바에 의하면(국내 민속학자중에 저랑 같은 의견이 없어서 아직은 제 주장입니다만) '석전'의 원류는 청동기시대 물싸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년초에 물길을 결정하는 '투석전'을 벌여서 승자가 물길을 독점하는 거죠.패자는 유랑민이 되거나 다른 곳을 찾아가거나 도둑이 되거나 저축을 이용하거나...
그러니까 이시대 무기가 돌멩이였다는 증거는 많이 있습니다. 그외에 돌화살,돌로 만든 창들이 있었는데 송국리마을 중앙에는 공동작업장이 있어서 돌을 연마해 농기구나 무기를 만들었습니다.
결국 마한은 '청동검'은 상징성만 있어서 마한왕이나 신지급 정도만 손에 들고 있었고, 목에는 청동거울을 걸고 의례를 하기는 했지만 실제 무기는 돌로 만든 것들이었습니다.
삼한이 철기문명이 유입되던 시기와 겹치지만 외부 철기세력을 제외한 토착 청동기세력들은 철을 가질 능력도 사들일 재력도 없었습니다.
마한왕은 일찍 많은 마을을 점령해서 (점유라고 해야 할지도) 세력이 컸지만 그것은 질이라기 보다는 '양'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고요, 또하나 마한왕이나 서해안 마한소국들의 경우는 고조선이 진개에게 밀리면서 배를 타고 내려온 세력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고조선의 유민들이 세운 이들의 성씨를 '한'씨라고 해서 청주에서부터 강화도까지 그 유민들에 의해 고조선 신화가 다시 재유입되어 강화도 마니산 주변 전설의 주인공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초기철기문명을 본 사람들이라 지배할 수 있는 법을 알았던 것이지요.
토기의 관점에서 보면 이시기에 나타난 토기는 바로 요령지역 고조선토기가 그대로 금강부터 한강사이에 나타납니다.토기는 당시로서는 거의 문명의 바로미터라서 이동경로를 투명하게 보여주는데요, 이지역이 청동기 초기 문명권에서 그나마 마한왕으로까지 진화한 것은 고조선 유민들의 여러차례에 걸쳐 이동했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마한의 지배부족의 생활상은 청동기-초기철기 부족국가,혹은 성읍국가의 모습을 띄었는데요, 인디언들의 경우를 생각하면 쉬울 것 같습니다.왜 모히칸,아파치 등등(한번은 들어보셨을) 쟁쟁한 인디언들이 아메리카 땅을 빼앗겼을까? 이 질문에 대해 어느 인류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들은 부족과 부족간의 연맹을 결성했고, 군사는 용병을 썼지만 결코 스스로 왕이 되려하지 않았다...(지금 그 책을 누구에게 빌려줘버려서 정확한 인용을 못해드려 죄송합니다.)그래서 결국 졌다.
마찬가지로 동예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옥저는 고구려의 해안공략정책으로 군사상 열세를 극복할 길이 없어서 속국화 되어버렸고요.남남 북녀라는 말이 있듯이 옥저의 여인들이 예뻤나 봅니다. 그래서 고구려에서 굉장히 많이 여자들을 데려가버렸고,여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민며느리제도를 자구책으로 마련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 제 추측입니다.고구려 고분벽화에 부엌에서 일하는 여인네는 옥저녀^^일 가능성이 많고요.아무튼 옥저를 확보해야 고구려는 '소금,어물'과 같은 필수품을 확보하기 때문에 일찌감치 정복했던 것이고요)
삼한사회라 경기남쪽만 언급이 되었는데요, 부여나 옥저,고구려,동예는 정 안되면 나중에 제가 토기로 보는 역사라는 새 시리즈로 선을 보여드리겠습니다. )

저도 지식이 모자라고 잘 못 아는 것도 많으니 고수분들 출몰을 다시 한 번 부탁드리겠습니다.
노짱을 돌려됴
09/09/10 09:05
수정 아이콘
신라의 삼국통일에 정통성을 줄수없다에 한표합니다.
신라는 전쟁상태에 노여있던 백제조차 제압하기는 커녕 이미 그당시
백제에 의해 잠식당해가고 있는 상태였고 백제는 애초 신라에게
멸망당할 나라도 아니었고 멸망당할수도 없었습니다.
김춘추가 대야성을 백제에게 빼앗기고 나서 국망의 길이 현실로 나타나자
살아남기위해 필사적인 노력으로 대당외교에 매달리고 오직 고구려로만
눈이 쏠려있던 당나라 정확히는 당태종 이세민의 아내이고 며느리이며
당태종 이세민의 아들 당고종 이치의 아내인 측천무후의 눈을 백제로 돌리는데
성공했음은 인정합니다.
동쪽 한반도쪽으로는 오직 고구려 밖에는 없었고
세계제국을 표방해 대외원정을 사실상 기조로 일삼았던 당나라의 패권주의 진출방향을
고구려에서 백제로 돌리는데 성공한 김춘추의 외교력은 실로 눈부신 바가 있고
그힘덕에 삼한일통을 이루었다고 하지만 태생적으로 이건 삼한일통이 아니었습니다.
일단 중국쪽 역사서에는 벌써 고구려와 백제를 중국점령지로 정하고 있고 현대 중국
교과서등에는 명백히 당나라시대 최대판도로서 고구려와 백제를 당나라의 영토로 적고
있습니다.
우리사학계는 동북공정에 대해선 악을쓰듯 대항하면서도 당의 백제,고구려점령과 영토확정에
대해선 꼬리를 감출수 밖에 없고 그것이 사실입니다.
신라의 삼한일통이 일통이 아니라는 명백한 현실이라고 봅니다.
신라가 할수 있던 거라곤 고작 점령지 총사령관이자 사실상의 태수로써 부임해온 당나라이전
군웅할거시대때 두건덕군에 소속되 이세민에 투항한 소정방을 교활한 술수로 독살시킨정도
밖에는 없었다고 봅니다.
뭐 소정방 자체가 열살때부터 아버지따라 싸움터만 누비던 용맹하나 무식은 차고 넘치고
술수를 모르는 우직한 무인이었기 때문에 당했다고 보지만 고작 이런 암수외에는 할줄 아는게
없고 그걸로 겨우 점령군 당군을 돌려보낸 신라의 삼한일통전,후의 모습은
물론 지나친 현대인의 시각이지만 어쨓건 자랑스럽지도 별로 칭찬할만 하지도 않아 보입니다.
김춘추가 고구려로만 향해 있던 당나라의 시선을 백제로 돌리게 한 그 외교력
또 당시 이미 당나라를 완전히 장악 그당시 이미 최고권력자에 올라있던 측천무후를 움직이게
하는데 성공함으로써 17만 대군의 힘을 진입경로가 끝도없는 고구려에서
오직 금강하구만 막아버리면 되는 백제로 표적을 삼게한 이점만이 후한 점수를 받을까
이를 제외한 삼한일통에 대한 가치는 높게 칠수없다고 봅니다.
물론 그렇다고 신라에 의한 한바도 지배가 역사적으로 그릇됬다고만은 보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해야할 일이라고 봅니다.
다만 우리의 자주적이자 완벽한 통일은 차라리 후삼국을 일통한 고려태조 왕건이 이룩했다고
하면 모를까 적어도 신라의 삼한일통은 아니라고 봅니다.
09/09/10 10:57
수정 아이콘
토론 좋아하는 피지알에서도 이런 역사토론은 버거운 주제라고 생각이 들 정도네요.
저야 정보를 얻어가는 입장이라서 이렇게 댓글을 쓰는 것 밖에 못하지만 의미있는 시도이고
그 의미만큼 의미있는 결과물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역사라는게 그리 딱딱하지 않은 것임을 그동안 happyend님의 글을 통해서 느낄 수 있었는데
역시 역사토론이라고 정하고 들어가서 너무 딱딱해 보이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사실 "역사토론"보다는 "내가 아는 역사 이야기"정로도 정해졌으면 좀 더 쉽게 접근하지 않았을까 싶긴 하네요.
각설하고 happyend님과 이벤트 당첨자가 될 분들의 노고에 감사를 표합니다.
lafayette
09/09/10 11:07
수정 아이콘
정말 잘 읽었습니다!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두루뭉술하게만 다루는 삼한시대, 가야에 대해서 항상 궁금했는데
많은 걸 배워가네요. 그리고 토론하기엔 수준이 안되서 못하겠고.. 대신
마구 질문 하라고 하시니 간단한 질문하나만 하겠습니다.
제가 배울때는 우리의 조상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은 정착생활을 한 신석기 시대 부터 라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happyend님은 청동기시대라고 하셨네요. 제가 잘못 알고 있던 건가요?
김민규
09/09/10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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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ffany님// 시대적으로 비슷한시기라는말은 삼한의 이야기를 꺼낼때쯤 꺼내도 되는 이야기인거같아서 썼던말입니다 ^^
음 그렇다면 역시 고대왕국으로 가면서 왕권이 강화되었기 때문에 주 와 은은 고대국가의 단계로 보아야된다는 말씀이신데...
결론적으로 그 두나라역시 봉건제도를 선택했다는건 왕권이 그렇게 강하다기보다는주변 토호의 세력이 강했다고도 볼수있구
결론적으로 2나라가 망하는과정역시 제후의 선택의 의해서인데
이런걸보면 완전한 고대국가로 보기에는 약간 무리일수도있지않나요?
그냥 짧은 지식으로 인한 궁금증입니다....
김민규
09/09/10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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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fayette님// 제가 이번에 교양강의에서 들었을때 우리에 직접적인 조상은 정착생활을 한 신석기 인들보다는
청동기를 가지고 들어온 세력이라는 이야기를 얼핏들었네요....
happyend
09/09/10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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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님// 아마 고수분들은 관망중이신듯 하고, 제가 이 토론을 '갈등을 빚어보자'로 이끌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고요,
주제가 버거운것이 아니라, 이 분야가 연구자체가 굉장히 많이 진척되었는데 대중적으로 발표한 책이 거의 없어요.그래서 저같은 경우도 삼한시대의 경우는 논문을 정말 정신없이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수학을 굉장히 좋아했는데요, 추리소설은 방정식을 풀듯 해를 찾아가는 것이고, 사건과 사건 사이의 관계는 함수처럼 연관관계를 찾아가듯이 역사도 미분과 적분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시대를 표현할 상수가 중국의 고서외엔 없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나라 국토가 재개발 되면서 전국의 땅을 다 파보니, 신도시라고 찍은 곳은 다 옛날 사람들이 살던 곳이었죠.그래서 유물이 어마어마하게 쏟아져 나왔습니다.이시대의 것으로 남은 것은 청동기와 토기죠.그래서 저는 이 두가지를 상수로 삼고, 문화발전단계와 정치,경제,기후 등을 변수로 삼아 연구해야 했습니다.
그만큼 이시대 연구의 성과가 아직 대중화되지 못한 점이 꼭 제가 강의하듯 얘기하게 되어버린 것 같고,그래서 갈등이 빚어지지 않거나 고수님들이 보기엔, 아직 저건 학계 논쟁중인데 하는 것들도 있는거죠(토기 연구하다 까무라칠뻔 했습니다. 학교마다 인맥에 따라 토기명칭도 다릅니다)
어찌되었든 조금씩 시대가 이동하면 뜨거워질겁니다^^

lafayette님// 신석기시대에 정착민들이 우리 조상이라는 직접적 연관성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DNA분석만으로 말그대로 '적분'을 하면 우리민족은 전세계에 살았다는 답도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청동기 이주민(네,청동기는 이주민이고,신석기는 선주민입니다.)과 신석기인이 공존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토기의 경우엔 그걸 아주 정확하게 보여주기도 합니다. 제 연구입니다만 붉은색토기는 남방계 이주민들의 농경풍습이었습니다.(아직 해외에 가서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인도네시아를 비롯한 동남아도 이전통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붉은색은 잡귀를 쫓는다는 전통을 가진 사람들이 토기에 붉은 칠을 해서 '소중한 씨앗'을 보관했고,이것이 제례로까지 발전합니다.바로 청동기시대에 이르러서요.붉은 간토기가 그것인데,아직 완벽한 연구가 되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꼼꼼히 살펴본 결과 정확하게 고인돌시대와 같이 끝납니다.이 전통은.
그러니까 신석기인과의 공존의 증거가 된다는 거죠.
그러나 우리나라에 최초로 들어온 청동기인은 2008년 개정교과서부터 '덧띠새김무늬토기'를 가진 사람들이며 이들에 의해 청동기시대가 열렸다고 봅니다.이후 여러지역에 청동기문명의 이주집단이 들어오는데요, 이들의 공통점은 '집단 농경'입니다.그리고 여러가지 집단 문화를 만들기 시작했는데.이것이 우리민족 문화의 원류를 형성합니다.청동기시대부터는 '영역'개념이 분명해져서 이주해온 집단이 다른 집단을 지배하면서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했던 것이지요.그래서 우리민족의 기원을 여기에 두는 것입니다.(DNA검사를 해보면 이 이주집단의 다양성만큼 우리가 얼마나 비단일민족인지가 드러납니다)
김민규님// 주나라는 청동기시대의 말기라고 보기도 합니다. 철기는 청동기와 다른 특징이 있는데,바로 농기구부터 만들어졌습니다.철제무기가 만들어지면서 말그대로 정복전쟁의 시대로 넘어가는데, 이때가 바로 춘추시대인 주나라 말기입니다.
주나라의 봉건제후관계는 요란한 청동기로 치장(네,겁만주려는 거죠)한 집단에 의해 다른 집단의 복종의식만 거행하면 끝나는 평화로운 전쟁이었고, 그래서 이시대에는 목소리큰사람이 이기는시대였지요. 다른 집단은 조공만 바치면 제후국으로 영역을 인정받았으니까요. 물론 일부는 황제가 자신의 친척이나 신하에게 봉지를 주어 통치하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자율적 통치를 인정했습니다.
제후는 세금이랄 수 있는 조공을 바치고, 필요에 따라 군사를 징발해주어야 할 의무가 있지만 자신의 영역에선 왕이었습니다.
이 시대가 깨진 것은 말씀드렸듯이 철제농기구에 의해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거부의 출현,철제무기로 무장한 호전적인 제후국의 출현이 힘의 균형을 깨뜨렸기 때문입니다.철제농기구는 숫자의 힘을 보여줬습니다.예전에는 토지가 많아도 경작지가 늘어날 여지가 없었습니다.청동기시대의 모든 농기구는 돌과 나무였으니까요. 하지만,철제농기구는 토지만 있으면 모조리 개간이 가능해졌습니다.그래서 땅욕심이 생긴 것이고, 그 영역싸움을 위해 '용병'이나 전문군사집단을 양성하기 시작한 것이고,이 필요에 의해 철제무기가 대량으로 개발됩니다.
특히 북방민족에겐 철제농기구의 힘은 영역확장욕구를 자극했고,북쪽을 따라 무기의 빠른 동서양교류가 일어남으로써 동서양 모두 전쟁의 시대로 접어들게 했던 것입니다.

부족한 답변입니다만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lafayette
09/09/10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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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end님// '구석기 인들은 이동생활을 해서 우리 조상이 아니다' 라는 사실때문에
'그 다음인 신석기 시대 인들은 정착생활을 했으니, 우리의 조상으로 여겨진다' 라고 스스로 잘못 이해하고 있었군요.
답변 감사합니다
사실좀괜찮은
09/09/10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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껴들 자리가 아닌 듯 해서 추천만 슬며시 날리고 갑니...
루크레티아
09/09/10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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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고대사라서 그런지 말을 꺼내기 어려운 점이 있어서 고수분들은 관망하시는 듯 하군요.(happyend님께서 약한 척만 하시고 사실 말 꺼내기 힘들 정도의 내공섞인 글을 올리셔서 그런 듯도 하지만요...;;) 내공이라곤 갈라진 논바닥에서 피어나는 수증기만도 못하지만, 그래도 이야기를 하는 데에 의의를 두고 대충 말씀올리겠습니다.

삼한은 우리가 잘 알고, 열심히 수능을 위해서 배운 내용대로 부족 국가의 연합체가 맞습니다. 이 부족 국가의 연합이라 하면 지금의 행정구역 규모로 따지자면 읍對읍, 군對군으로 말을 할 수 있겠군요. 군 이상의 단위는 부족이라 하기엔 너무 커지기에 그 이상은 해당이 안됩니다. 각각 마한, 진한, 변한의 셋으로 나뉘어 구분되는 삼한은 본문에서 말씀하신대로 목지국이 리더 역할을 하면서 나름 올망졸망한 나라들로서 지내고 있었지요.
happyend님이 말씀하신대로 삼한은 후에 정립되는 삼국과 같은 군사적 체계를 갖추지 못한 나라들로만 꾸려진 공동체였습니다. 한아님께서 왜 백제라는 소국에게 그렇게 무력하게 마한이라는 국가 연합체가 멸망했느냐고 여쭈셨는데, 애시당초 군사를 부리고 군대를 키운다는 개념이 그다지 없었던 나라들의 연합이었기에 백제에게 점령당하는 수순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마한과 백제만을 놓고 1:1로 비교를 한다면, 백제는 국가의 성립 초기부터 군사력이 없으면 절대로 성립이 불가능한 나라였습니다. 바로 말갈족 때문이었죠. 실제로 온조왕이 국가를 세운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초전박살의 의미로 말갈족이 쳐들어오는 바람에 백제는 풍전등화의 상황까지 갔던 적이 있습니다. 당시 백제의 우보(재상)였던 을음(乙音)이 없었다면 백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 것 입니다.(을음은 백제 초기의 정치, 군사면을 모두 장악하고 과감하면서도 결단력있는 판단으로 백제 국가의 초석을 다진 후에 그 권력을 고스란히 온조왕에게 넘겨주고 은퇴한 것으로 알려진 가히 쿨가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입니다. 온조는 사람이 좀 무딘 편이라 토착 세력들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하고 있었죠.) 초반부터 국가의 군사력을 튼실하게 다진 백제와 '군사력? 그거 먹는거임?' 이런 반응의 마한이 붙었으니 결과야 뻔한 일이겠죠. 물론 목지국 정도의 리더격 나라라면 다른 나라를 통제할 정도의 힘은 가지고 있었겠지만, 이미 국가 체제를 확실하게 정비하고 최전성기를 향해 달려가던 백제를 마한의 힘으로만 막는다는 것은 절대불가였을 것이라고 봅니다. 백제의 입장에서도 당시 한강 유역에 머물러 있던 상황에서 남쪽의 곡창을 얻는다는 것은 고구려와 자웅을 겨루기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조건이었을테고 말이죠. 고로 전성기의 백제가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니 이미 결과는 나온 상황이었습니다.
삼한에 대한 내용은 happyend님이 너무 자세하게 말씀하셔서 드릴 말씀이 없고 이두에 대한 내용이 역시 신선하네요. 확실히 본문에서 말씀하신대로 이두가 사회 통합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흔히 이두는 설총이 창안한 것으로 대부분의 역사책이 말을 하고 있는데 이는 시기적으로 맞지가 않습니다. 이두로 표기된 서동요는 설총의 등장 이전인 6세기에 나타났고, 설총은 7~8세기를 살았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설총이 창안했다기 보다는 집대성 했다고 하는 편이 옳을 듯 싶네요. 이두가 하급 관리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말씀이 신선하긴 하지만 쉽게 납득은 가지 않는군요. 이두는 생각보다는 좀 오래된 표기법입니다. 넓게 잡아서는 유리왕, 탈해왕 시절의 글에도 그 쓰임이 보일 정도니까요. 이런 표기법이 서동요가 나타나는 진평왕대에 이르러 거지반 통일이 되고 기반이 잡힌 것이지요. 이렇게 본다면 '선덕여왕 이후에 신라의 국력이 상승하고 삼국통일을 하지 않았나?'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말하자면 차라리 진흥왕 시절의 신라가 오히려 더 국운이 융성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외통으로 몰리기 직전의 상황에서 놓은 신의 한 수가 제대로 역전을 이루어 낸 것으로 볼 수 있으니까요. 이두가 신라의 위와 아래를 연결시킨 것은 맞지만 이게 그렇게까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기엔 조금 무리수가 따를 듯 싶습니다.
happyend
09/09/10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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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크레티아님// 흑흑...꺼져가는 불씨와 저를 살리셨습니다.
이두에 관해서는 저야말로 '툭' 던져놓은 말이니,책임같은거 질 것도 없는 상황입니다만,
<우리말의 수수께끼>에서 설총에 대한 표현은 너무도 가슴에 닿았습니다.

"설총 자신은 한문으로 얼마든지 의사소통하고 문학을 향유할 수 있었는데도 (최치원,강수와 함께 소위 3대 학자였으니까요) 왜 일부 하급관리나 중인들, 혹은 승려들이 사용하는 이두 표기에 그토록 관심을 가졌을까? 설총은 한문으로 문자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우리말에 잘 맞지 않는 일이라는 점을 깊이 인식하였던 것 같다. 그래서 그때까지의 이두표기법을 정리하고 집대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기존의 이두 표기법에 더하여 우리식으로 새로이 읽고 새기는 방법을 발명하였던 것이다.이러한 일은 한문 경전을 국어화하여 인식할 수 있게 함으로써,한학 연구를 발전시키는데도 지대한 역할을 했다. 만약 당시의 인텔리 계층 중에서 설총과 같은 자주적 인식을 가진 사람이 몇 명만 더 있었더라도 우리의 문자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문자에 대한 사회학적 인식이 척박하던 시절에 설총의 안목은 분명 선구적이었음에 틀림없다."
azurespace
09/09/10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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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와 구결이 백제인들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서 가나 체계로 발전했다는 학설이 최근 한 한국인 교수와 일본인 교수의 공동연구에 의해 제기된 바 있습니다. (한국과 일본은 같은 민족이라고 봐야 할 정도로 DNA 구성이 비슷하다고 합니다. 최소한 중국인과는 확실히 구별되며, 비교적 최근에 갈라졌다고 하죠. 무덤에서 발굴한 유골들의 유전자 분석 결과도 한반도인들이 지속적으로 일본으로 건너와서 정착했음을 보여줍니다. 과학의 발달로 인해 역사적 사실에 대한 생물학적 증거를 얻을 수 있게 되었죠)


아참. 그리고 우리말을 어떻게든 표기하려고 열심히 노력한 것은 신라인들이 맞습니다만(이두, 구결, 향찰..), 그렇다고 백제나 고구려인들이 그러한 노력의 결과를 구경만 하고 있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현재 알려진 향가들 중 가장 먼저 쓰여진 서동요의 작사가가 백제 왕이라는 사실을 잊으셨나요? 백제와 고구려에서도 이두를 이미 받아들여 사용하고 있었다고 보는게 맞다고 봅니다.
초록불
09/09/10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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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토론에 참여하고 싶습니다만... 하이텔 한사동의 수준을 넘어서는 긴 글이군요... 컴퓨터로 긴글 보는 것은 참 힘드네요..
azurespace
09/09/10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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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기록이 남아있는 것은 신라의 것이 대부분이고, 백제어와 고구려어의 원형을 알 수 없다는 점이 참 아쉬운 점입니다. 다만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 각 지역의 표기법을 신라식으로 바꾸었고, 원래의 표기와 바뀐 표기를 같이 명시해 둔 자료를 만들어 두었는데 이로부터 백제 단어과 고구려 단어 백여개를 복원했고, 중세 한국어를 바탕으로 본래의 형태소를 추측한 학자들이 있는데 그 결과에 따르면 백제, 고구려, 고대 일본은 비슷한 조사를 공유하고 있다는군요.

백제야 뭐 원래부터가 고구려 왕자들이 세운 나라니 당연하지만 일본은 좀 뜻밖이죠. 전혀 다를 것 같은데.. 하지만 백제와 왜 사이의 긴밀한 관계와, 몇가지 설화들(아사달 아사녀 전설 같은)을 통해 볼 때, 당시 일본어는 현대 한국어와 현대 일본어보다 훨씬 한반도 언어와 유사했을 것임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루크레티아
09/09/10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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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end님// 확실히 설총이 이두에 대한 집대성을 새로이 하면서 우리 민족의 의사소통과 어문학 자체를 한 차원 높은 곳으로 끌어올린 것은 맞는 듯 싶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설총이 한 3명 정도만 더 있었다면 좀 더 우리나라의 언어학이 발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하지만 전 그래도 한글이 최고네요. 만약 설총이 더 있었다면 한글이 없었을 가능성도 있는지라 어찌보면 다행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쓰는 도중에 일이 생겨서 가야에 대한 이야기를 빼먹고 그냥 갔네요. 가야는 삼한보다 좀 더 발전한 부족 국가의 연합이었지요. 사실 부족 국가라고 부르기에는 좀 미안할 정도로 나름 국가 체계를 갖춘 나라들이었지만, 절대적 수치라고 볼 수 있는 국방력과 국가 자체의 시스템적인 면에서 볼 때에는 확고한 고대 국가라고 보기엔 무리가 따르는 나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연합을 했고, 할 수 밖에 없었던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역시나...강대국이었던 백제와 체제를 정비하고 외교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던 신라 사이에 낀 패티가 되어버린 가야는 이미 탄생부터 한계를 내포한 국가였습니다. 사실 가야의 최대의 비극은 금관가야와 비슷한 위치였던 백제가 너무 강대국이 되어버린 것이 비극이었습니다. 금관 가야의 건국은 대체로 1세기 전후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국가 체계를 갖추어 가야 연합의 맹주로 자리잡은 것은 대략 3세기 내외로 알려졌지요. 당시 신라는 아직도 사로국과 진한 일대를 통합하기에도 버거운 세력이었기에 백제도 만약 그런 처지였다면 가야가 좀 더 발전하거나, 백제와 신라와 함께 고만고만한 꼬꼬마 연합을 구성할 수도 있었을 것 입니다. 하지만 백제가 마한을 병합하고 고구려를 제압하는 강대국의 반열에 갑자기 올라가버리기에 가야가 곡창인 호남을 점령하지 못하였고, 중국과의 소통도 어려워지면서 내륙에 고립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소백산맥과 지리산이라는 천연 방어막을 이용하여 신라쪽으로 더 뻗어나갔어야 맞는 행동이었을텐데...사실 그래야만 했던 당시의 금관가야의 지도자는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딱히 이용을 하지 않았던 어리석음의 소유자였습니다. 당시 금관가야의 국력이나 신라의 국력이나 고만고만했고, 금관가야가 신라의 땅을 점령 했을 시의 이득을 조목조목 들어가며 다른 연합국들을 설득했다면 신라 정벌도 꿈이 아니었을테지만 그렇게 하지도 못했고 할 의지도 없었다는 점에서 이미 가야는 저무는 해였습니다. 대가야가 뒤로 가야 연방을 통합해서 위세를 떨쳤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단지 가야 내부에서의 우물 안 개구리일 뿐이고 이미 가야는 옛날의 영광만을 뒤로 하는 수비적 위치의 국가일 뿐이었습니다. 이후의 과정은 본문에서 언급하신대로 연합 국가의 정해진 수순인 분열, 멸망 테크를 타게 되죠.
순장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는데 사실 이거야말로 고대사에서 최강의 뻘짓크리라고 볼 수 있는 짓이었습니다. 사실 순장의 풍습은 세계 어느 문명에서나 보입니다. 하지만 거의 공통적인 사실은 순장을 금한 나라는 그 금하는 순간부터 대부분 국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하게 됩니다.(당연하죠.) 삼국 역시 순장을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고구려는 248년 중천왕 시절부터 순장을 금하였고, 백제는 고이왕 시절로 추측됩니다. 이는 국가의 발전 정도와 거의 궤를 같이하죠.(백제와 고구려의 전성기 시기가 비슷한 이유도 이로 볼 수 있습니다. 근초고왕이 전성기를 이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광개토대왕 역시 전성기를 이룩하죠.) 신라는 삼국 중에서 가장 늦은 지증왕 시기에 순장을 금하고, 뒤를 이은 법흥왕과 진흥왕 시기에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가야는...멸망 직전까지 순장이라는 막장테크를 탐으로써 더 이상 부활의 싹도 찾아볼 수 없는 국가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합니다.
가야계 인물로서 정복 국가인 신라의 역사에서 가장 거대한 족적을 남긴 김유신이라는 인물은 실로 대단한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즘에는 김춘추의 별 수 없는 선택으로써 간택된 거나 다름없다고 까이긴 하지만 그가 진정 인물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명성을 누리진 못했겠죠? 문무왕이 괜히 '태대각간'이라는 직함을 만들어 내릴 정도로 존경해 마지 않았던 것이 아닙니다.(당시 신라의 최고 벼슬은 상대등이긴 했지만 실질적 실무는 대각간이 모든 것을 맡아 하고 있었습니다. 상대등이 본격적인 실권을 쥐게 되는 것은 진골의 시대가 시작된 이후이고, 실질적으로 재상의 역할을 하던 대각간에 太를 붙였다는 것만으로도 김유신이 신라에서 차지하는 당시의 비중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의 '역사에 그 이름을 남긴 사람은 김유신이 거의 유일합니다.' 라는 문장은 곧 '정복민들도 감탄할만한 능력의 소유자였습니다.' 라고 말할 수가 있겠네요.
신라의 삼국 통일은 저도 빛보다는 어둠이 6:4 정도로 많았던 통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신라 역시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기에 역사적으로 아쉬움이 큰 것은 어쩔 수가 없지만,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멸망으로 갈 수 밖에 없었던 신라를 생각하면 무조건 잘못했다고 까기엔 무리가 있겠네요.

개인적으로 happyend님과 같이 출처까지 대기에는 제가 그렇게까지 전문적으로 공부한 적도 없고 이것 역시도 얕은 지식의 나불거림이기에 힘들듯 싶습니다...;;
당신의조각들
09/09/10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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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end님의 글은 참 명쾌한 것 같습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고 있었네요, 하하;
에.. 전, 아직 제대로 국사나 역사는 배우지도 않는 중학교 때에 해외에 나오는 바람에,
더 많은 자료를 접해보지 못하고, 더 배우지 못한 게 너무 아쉽네요.
참 좋아하는 과목이었는데 말이죠, 국사랑 사회.

아래 제시된 문제들을 어떤 시각으로 보고 계시는지,
그리고 이 문제들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시는가도 매우 궁금하기에,
부족함을 무릅쓰고 이렇게 댓글을 달게 되었네요.
(토론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면 다시 눈팅족으로 돌아가게 될 1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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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단어가 있습니다. ‘원삼국시대’ 라는 단어인데요.
정확히 무슨 뜻인지 몰라서, 읽은 책에서, 그리고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은 자료에서 참고를 해봅니다.
(틀렸다면, 지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고고학계에서 원초(原初) 삼국시대와 원사시대(原史:Protohistory, 선사와 역사시대의 중간)을 합해 규정지은 용어.
즉, 삼국은 삼국이되, 완전한 왕국은 못 되었던 초기 발전단계를 뜻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원전 300여년부터 서기 300년까지 우리 역사에는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논리를 명사화한 것이 ‘원삼국시대’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원전 1세기경에 신라와 백제가 건국되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부정하는 것이죠.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펼치는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이론의 연장선에 서 있다는 점에서,
조금은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낙랑군과 낙랑국 이라는, 두 개의 낙랑의 존재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낙랑군은 아시다시피 한나라가 고조선의 왕검성을 함락시킨 후에 설치한 한사군(낙랑군,진번군,임둔군,현도군의 사군) 중 하나입니다.
이후, 한나라는 진번군과 임둔군의 절반을 낙랑군과 현도군에 통합시켰고, 이 중에서 현도군이 고구려의 공격 등으로 쫓겨 감에 따라서, 옛 고조선 지역에는 낙랑군만 남게 되었다고 하네요. 신나라를 세운 왕망의 지배 아래에도 있었고, 중국의 위나라,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서진의 지배를 받기도 했었네요. 그러다가, 고구려와 선비족 모용씨 사이에서 각축전을 벌이다 결국 313년 고구려 미천왕에게 멸망당하게 됩니다. 무려 420년간이나 존속했던, 결코 적지 않은 영향력을 끼친 정치 집단이지요.

그런데, 낙랑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정치세력이 ‘낙랑군’ 외에 하나가 더 있었습니다.
너무나 유명한, 낙랑공주와 고구려 호동왕자의 로맨스, 그 낙랑공주의 나라가 바로 낙랑국입니다. 최리가 왕으로 있던, 엄연한 국가이지요. 이 낙랑국은 대무신왕 15년 서기 32년)에 멸망합니다.
갑자기 낙랑국과 낙랑군이 왜 나오지? 이게 뭐가 중요한거지? 이것과 관련된 책, 글, 그리고 문서들을 읽으면서 제가 했던 질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왠지 사소해 보이는 이 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그저 두 정치세력의 위치 확인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고조선의 위치 문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우선,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몇 가지 기록들을 살펴보겠습니다.
1) 낙랑군(軍)이 신라를 공격하려고 국경까지 왔다가 그냥 돌아감 - 혁거세 거서간 30년 (기원전 28년)
2) 낙랑군(軍)이 서라벌을 여러 겹으로 에워싸자, 왕은 “지금 이웃나라가 침범하니 이는 내가 덕이 없어 외롭기 때문이다. 어쩌면 좋은가” 라고 말하는 기록이 존재 - 남해차차웅 원년 (기원전 4년)
3) 낙랑이 북쪽 변경을 침략해 타산성(朶山城)을 함락시켰다 - 유리이사금 13년 (서기 36년)

‘낙랑’이라는 정치집단이 계속적으로 신라를 공격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 그럼 이 ‘낙랑’이 낙랑국인지 낙랑군인지 알아봐야겠죠?
일제시대 이래 낙랑군의 위치는 대동강 유역이라고 보는 의견이 대다수였고, 지금까지도 그것이 통설입니다.
대동강 유역에서 중국 측 유물이 많이 발굴이 되었기 때문이죠. 물증도 있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후한서』동이열전 부여 조에서, 111년에 “부여왕이 보기(步騎)7,8천인을 거느리고 낙랑을 공격하고 이민(吏民)을 살상한 후에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엥? 고구려보다도 북쪽에 있는 부여가 뭐 하러 대동강 근처에 있는 낙랑을 공격했을까요? 그것도 고구려 영토를 가로질러서? 이래저래 명분도 없고, 이해관계도 없었을 테고, 지정학적 위치를 봐서라도, 불가능한 출정 같아 보입니다.
낙랑군이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면요.
이것은, 낙랑군이 대동강 유역이 아닌, 부여와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만주 지역에 있었다는 사실을 시사하는게 아닐까요?

그럼 또 다시 드는 의문. 실제로 대동강 유역에서 출토된 중국 유물들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삼국사기』고구려본기 대무신왕 27년 (서기 44년) 조의 “가을 9월에 한의 광무제가 군사를 보내 바다를 건너 ‘낙랑’을 치고 그 지역을 탈취해 군현을 만드니 살수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는 기록을 살펴봐야 합니다.
여기서, 광무제가 친 ‘낙랑’은 당연히 낙랑국입니다. 한나라의 군현인 낙랑군을 치는 것은, 쉽게 말하면 팀킬을 하는 것이니까요.
출토되는 유물들은 이 때의 유물들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 봅니다.
[출처 : 살아있는 한국사 - 이덕일(2003) 외 인터넷 자료 다수]

본문과는 별로 상관없는 내용들을 써버린 것 같군요... ㅠㅠ
그냥 아는대로 막 우겨넣다 볼려니까, 내용도 좀 산만한 것 같기도 하구요..
사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지도 잘 모르겠네요. 죄송합니다 (__) 그래도 댓글은 남겨놓겠습니다.
아, 마지막으로, 삼국통일에 관한 제 개인적인 견해를 적고 가겠습니다.
가장 국력이 약했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한국 지배층에서는 드물게 보이던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이룩한 게 아닐까 합니다. 지배층의 헌신과 희생, 먼저 솔선수범 하는 모습 등등…….
참 부럽네요. 위기에 닥칠 때마다 지도층이 먼저 솔선수범하는 나라가 되는 나라인 것 같습니다.
루크레티아
09/09/10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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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조각들님// 아무거나라도 써놓는 것이 happyend님이 진정 바라시는 것일테니 너무 걱정 안하셔도 될 듯 싶습니다.

사실 우리나라 역사가 일제 강점기라는 정말 빌어먹을 시기를 거치면서 아주 이보다 더 망가질 순 없을 정도로 망가졌습니다. 한 4군의 설치와 그 위치 역시도 영원히 피터지는 싸움이 이어질 떡밥 중의 하나이지요. 요즘은 한 4군의 위치 뿐만이 아니라 '진정 한 4군이 존재하긴 했나'라는 문제까지 제기되는 형편이니 어느 하나도 확실한 것은 없겠네요. 하지만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고조선이 한나라에 멸망한 것은 사실이기에, 한 4군이 설치된 것은 맞다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물론 한나라의 힘에 굴복했다기 보다는 내분이 더 크리티컬이긴 했죠.) 하지만 무던히도 논쟁거리가 되고 있는 고조선의 강역 범위에서도 가장 확실하게 인정받는 것이 요동과 요서 지역은 모두 고조선이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 입니다. 고로 한 4군이 설치가 되려면 요충지 중에서도 요충지였던 요동과 요서 지역에 설치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죠. 게다가 낙랑군은 고구려 미천왕에 의해서 멸망당했습니다. 고구려가 과연 한반도 내부의 낙랑을 제거하기 위해서 그렇게 용을 썼을까요? 당시 고구려의 국가 최대 숙원 과제는 요동의 정벌이었습니다. 요동은 당시 철이 풍부한 최대의 전략적 요충지였기에 고구려는 대대로 요동 정벌을 위해서 국력을 올인하고 있었습니다.(덕분에 위나라의 급습을 받아서 동천왕 시절에는 국가의 존립이 위태로웠던 적도 있습니다. 유명한 밀우의 일화가 이때 나오죠.)일제가 열심히 '반도 내부 한 4군 존재'를 선전하려고 노력했지만, 설득력이라고는 저질스러운 이론인지라 코웃음 한 번 쳐주면 그만인 겁니다.
당신의조각들
09/09/10 23:40
수정 아이콘
루크레티아님// 그렇군요, 음, 이 별로 큰 의미도 없는 댓글 하나 쓸려고 나름 고생했습니다마는.. 역시 아는게 없으면 OTL

역시 일제 강점기, 그리고 황국식민사관을 우리나라에 심어놓고 간게 가장 큰 문제인건가요.
일제 식민 사학의 병폐를 그대로 이어받은 식민사학자들이 주류가 되는 사회인 것 같아서요.
위에도 적었지만,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이 이의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이 참 안타깝습니다.
물론,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들이 다 사실이라는 근거도 없지만,
최소한 의문은 제기해 보고, 정확한 물증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은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고조선에 관한 부분에서는 저도 루크레티아님의 의견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대동강 중심설과 요동 중심설이 있던데, 사실 문헌자료를 조금만 뒤적거려보면,
대동강 중심설 보다는 요동 중심설이 훨씬 설득력있게 다가오는 것 같더군요.
사실 고조선은 너무 허망하게 무너진 감이 없잖아 있는 것 같습니다.
전쟁 초반부에는, 한나라의 수군과 육군을 모두 패퇴시킬 정도로 강력한 군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계속되는 전쟁으로 지치는 바람에 결국 내부붕괴......
한나라가 승리를 했다고는 하지만, 장수로써 후(侯)에 봉해진 자가 없을 정도였다면 이미 말 다 한거죠 뭐.
그러고보니, 수당대전을 겪었던 고구려도, 한나라와 맞섰던 고조선도, 원나라의 침략을 받았던 고려도,
대부분의 (소규모든 중규모든 대규모든) 전투에서는 이겼지만, 결국 넓은 의미의 전쟁에서는 우리나라가 항상 패배했었군요.

그런데, 사료를 찾다 보니까 흥미로운 문장이 하나 나옵니다.
『삼국유사』마한 조에 보니까, '최치원이 말하기를 "마한은 고구려요, 진한은 신라이다"' 라는 문장이 나오는군요.
당대의 석학이라고도 볼수 있는 최치원의 말이라서, 가볍게 넘길 문장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확실히, 삼한에 대해서, 그리고 가야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탓도 있지만, 관심을 많이 가지질 않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음, 일제라는 말이 나와서 든 다른 생각인데, 임나일본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계속 궁금한게 생기네요 ㅠㅠ 정확하게 아는 게 없어서 이번에 조금 정확하게 알아놔야 겠습니다.

그나저나, 계속 찾으면서 들었던 생각인데,
이렇게 우리나라 역사도 제대로 모르면서, 세계 역사를 논하는게 말이 되는가,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습니다.
한동안 다른 일에 바쁘다는 핑계로 좋아하던 역사책도 안 읽고 있었는데, 이렇게 동기부여 해 주신 happyend님께 다시 감사드립니다.
Clostridiumbotulinum
09/09/11 00:09
수정 아이콘
당신의조각들님// 최치원의 그 말이 바로 신라 삼국통일론 입니다.

우리가 삼한 통일을 했어.
그런데 사실 마한이 고구려거든?
그러니까 우린 삼국통일을 한거야.

이렇게 되는 거죠. 마한은 고구려가 아닙니다.
happyend
09/09/11 00:30
수정 아이콘
azurespace님// 서동요가 백제어인가요?

루크레티아님// 그래서 고구려의 '남천'의 이유를 '기후'로 보는 설도 있다고 발제문에 썼는데요, 정확하게 '남천'의 이유를 설명한다면 낙랑군의 멸망원인도 밝혀질 듯 합니다.이부분은 다음편 <고대사의 미스테리들>로 넘겨서 일괄정리해보겠습니다.
어찌되었든 순장에 관한 정리는 명쾌합니다.
다만 금관가야의 멸망에 관해서는 제가 다음번에 신라편을 발제하면서 조금 첨가해보겠으니 그때 논의를 해보도록 하지요.

당신의조각들님// 부여가 낙랑과 충돌한 것은 부여가 동부여로 나뉘어진 후에 두만강유역에 자리를 잡았으니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당시는 국경의 개념이 지금처럼 철책선이 그어져 있지 않으니까요.어떻든 이것도 다음편 <고대사의 미스테리>로 넘겨보겠습니다.

노짱을 돌려됴님//역시 신라중심의 통일논에 대해서도 다음번 <신라편>에서 제가 '갈등을 빚어보겠습니다.' 그때 이번에 쓰신 글을 발제문으로 정리하겠습니다.

계속해서 많은 토론 부탁드립니다.(이불판은 당분간 계속 되다가....고대사 제2불판으로 넘어갈 예정입니다.아마 다음주 목요일정도에)
Siriuslee
09/09/11 05:40
수정 아이콘
뻘글 투척합니다. (미국이라 한국과 시간대가 다르네요 ^^;)

보통 중국대륙에 있었던 국가들의 북동쪽 경계에 중요한 지역으로 '산해관' 이 등장합니다.
중국 장성의 동쪽끝으로 보통 알려져있지요. 몇몇 드라마등에서 우리 외교사절이 중국에 도착하는 관문으로 산해관이 꼽히기도 할정도로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지역입니다.

그런데 이 '산해관' 이라는 명칭이 중국내에도 여러군데 존재한다는 글을 보았습니다.
(그중 한곳은 무려 중국 대륙 한가운데 산악지대에 있다는 것이지요.)

각설하고,

여러 역사관련 글들에서 지금의 중국 북동쪽 지역들이 고대에는 지금보다 서쪽에 있었다는 주장 의견이 조금 있는데요.
이런 의견 관련해서는 혹시 관심이 없으신지요 ^^

즉 지금의 요하로 알려진 강은 요하가 아니고 이보다 서쪽에 있는 강이 고대사의 요하, 즉 요동, 요서 로 구분하는 지역이 보다 서쪽으로 이동해서 요서 지역이 요동이다. 지금의 베이징의 위치가 한나래때의 북평 지역이 아니다. 뭐 이런 의견이지요.

보통 이런 글에 고지도 정도가 첨부가 되어있긴 한데, 뭐 사실여부와 그런것은.. 전 까막눈이라 -_-;




또 하나, 우리 역사의 두리뭉실한 역사인지 신화인지 모를 시기, 즉 신석기 말기 -> 청동기 -> 철기로 넘어오는 시기에

지금과 해수면의 높이가 다르지 않았을까 하는 궁금증입니다.
(마지막 빙하기가 신석기 말기즈임이었다고 하지요)

+ 해서 전세계적으로 '대홍수'와 관련한 신화, 설화 들이 공통적으로 존재하는데요.(대표적으로 성서)

빙하기가 끝나면서 해수면이 상승하여 기존에 평지였던 곳이 바다로 변하여 막 정착생활을 하던 인구들이 이동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겪으면서 이러한 신화들이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저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그렇다고 본다면 지금 우리지역에서 해수면의 높이를 낮춘다면?

황해안의 여러 지역은 바다가 아닌 육지였을 가능성도 있는것 같은데요.(강화도 마니산에있는 참성단을 생각해 보아도 ^^;)

그리고 보통 알려진 고조선의 영역표시를 보면, 지금의 해안선을 따라서 황해지역과 발해만 지역 그리고 중국 산둥반도의 해안지역 정도로 보통 표시하는데요, 그냥 생각해 봐도 참 이상한 모습이지요.

그런데, 해안선을 변경한다고 본다면 매우 설득력이 있을거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한반도는 반도가 아니라 그냥 대륙과 거의 붙어있는 지역이지요.)



제가 쓰고도 정리가 안되는 뻘글이군요. 흠..
happyend
09/09/11 08:46
수정 아이콘
Siriuslee님//
1)고대 지명에 관한 다양한 의견들에 대해서는 다음 <고대사편 2번째 불판>의 <고대사 미스테리>에서 본격적으로 토론하면 좋을 듯 하고요.
2)해수면의 높이에 관해서는 '조개무지'의 존재를 기준으로 해안선을 추측한 어떤 논문은 철기시대에 김해가 지금은 내륙입니다만,당시는 좀 더 바다에 있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사실은 해안선이 현재 후퇴해 있는 것이긴 합니다만)
역사적으로 소빙기와 간빙기는 교차해왔는데요, 우리나라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가 소빙기입니다만 해안선의 변화는 눈에 띄지 않는 것으로 보아 얼마만큼이 육지화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고기상학 자료를 좀 더 찾아보면 좋지 않을까 싶네요)
그런데, 제가 아는 한은 우리나라의 경우 고기상학에 관심있는 분이 거의 없습니다.고천문학의 경우는 제법 많은 교수진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비해....
azurespace
09/09/11 12:47
수정 아이콘
happyend님// 삼국의 언어가 큰 차이 없이 상당히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설은 요즘엔 대세 아닌가요? 국어 교과서에도 실려 있을 정도로요. 위서 동이전이었는지 삼국지였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그 사실을 시사하는 문장도 몇 군데 있다고 그러고. 아마 "백제의 통역을 거치지 않고는 신라와 말이 통하지 않는다" 등등의 문장이었던 것 같습니다.
다만 여기서 문제는 백제 무왕이 향찰로 직접 그 노래를 표기했는가 하는 점인데,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는 것이 맞겠지만..
루크레티아
09/09/11 13:03
수정 아이콘
happyend님// 낙랑군의 멸망과 고구려의 남천이 직접적으로 상관이 있었을까요? 시기적으로 보면 낙랑군은 미천왕 시기인 대략 4세기 초에 멸망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전에 고구려의 천도는 산상왕 시기인 3세기 초에 환도성으로 했던 것으로 되어 있고요. 환도성은 대략 지금의 지린현 부근이니 남천으로 보기엔 좀 무리가 있죠.(오히려 국내성이 조금이나마 더 남쪽에 있죠.) 말씀하신대로 남천과 낙랑군의 멸망이 연관성이 있으려면 미천왕이나 그 이전인 서천왕~봉상왕으로 이어지는 라인에서 남천이 있었어야 했는데 고구려의 수도는 당시에는 환도성으로 그냥 머물러 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낙랑의 멸망은 그냥 미천왕 시기에 더욱 더 정복전쟁을 잘 수행한 결과라고 할 수 밖에 없을 듯 싶습니다. 물론 당시의 국제 정세도 한 몫 했겠죠.(이미 4세기 초는 화북지방이 난장판이었으니 말이죠.)
고구려의 남천은 뭐랄까...기후 변화론도 끌리지만 그냥 장수왕의 내정과 왕권을 위한 선택이었다고 보여집니다.

당신의조각들님// 임나 일본부는 그저.....이젠 일본 사학계에서도 '우리가 대체 왜 이런 소리를 했을까...'란 말이 나오게 만드는 설이죠. 애시당초 임나 일본부설이 성립한다는 것 자체가 일본 역사를 요상하게 꼬아놓는 것입니다. 임나 일본부설의 요지는 '4세기경 일본의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 남쪽(지금의 경상남도 지역이 대부분입니다. 주로 가야 지방이죠.)을 점령하였고 6세기까지 일본부라는 관청을 두어 직접 통치하였다.'가 주된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게 도통 말이 안되는 내용이 한두가지가 아닌게...일단 이 설을 뒷받침하는 가장 주된 근거로 활용되는 자료가 바로 그 유명한 대하역사로망판타지물인 '일본서기'입니다.(나올건 다 나오죠. 신, 역사 이야기, 대충 로맨스 쪼끔) 그리고 또 하나로는 이젠 본인들 스스로도 부끄러워서 입 닫고 사는 '조작된 광개토대왕 비문'이고요. 일본 학계에서도 일본 역사에 영향을 끼친 백제와 신라의 문물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걸 인정 안하면 일본의 야마토 시대인 3~6세기가 소위 말하는 '흑역사'가 되니까요. 특히 백제는 답이 없을 정도로 일본에 깊숙히 관여한 나라라서 일제 강점기의 일본은 이런 컴플렉스가 엄청났습니다. 내가 지배하는 나라의 주민들이 사실은 예전에는 나의 스승이었다니...쪽팔려서 얼굴들기가 힘들었던 일본이 궁여지책으로 생각해낸 것이 임나 일본부설인데...시기적으로 4세기 초중반에 전성기를 맞았던 백제를 이제야 낑낑거리면서 국가틀을 갖추려고 했던 야마토 정권이, 그것도 가야와 신라와 연합한 백제를 격파하고 임나 일본부를 설치했다는 것은 마치 지금 상황으로 놓고 보자면 북한이 중국과 연합한 미국을 격파했다는 수준의 이야기로밖에 들리지 않는 상황이죠. 이런 말도 안되는 판타지를 역사라고 내놓은 것이 부끄러웠던 일본 사학계가 이젠 좀 잠잠하지만, 그래도 끝까지 저항하는 사학계의 근성가이들은 요즘에는 '혹시 규슈 지방의 호족들이 그냥 교류를 위해서 설치하고, 대규모 이주한 것이 아니었을까?' 라고 우기고 있답니다. 물론...그저 웃지요.
happyend
09/09/11 13:29
수정 아이콘
azurespace님// 아,그러니까 문자로서 백제어를 질문드린 것입니다. 백제의 문자가 남아있는 것을 볼 때, 초기에 '한자'와 '한자'사이에 의미를 연결하기 위해 간단한 조사를 사용하는 정도에 그치고 나머지는 특히,이부분이 중요한데,어순의 경우 중국어 문법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이두의 경우나 향찰의 경우는 일부 단어는 고유어를 한자어의 음가만 가져다 쓰기도 하였지만 어순이 우리나라 문법을 따랐다는데 의의가 있거든요. 그래서 '서동요'가 백제의 문자세계를 엿볼 수 있는 것인가 여쭤봤던 것입니다.

루크레티아님// 아! 낙랑군이 장수왕의 남천과 상관이 없는걸 제가 묶어 놔버렸습니다.
낙랑군 멸망원인은 위의 관구검에게 비참한 꼴을 당한 고구려가 '심기일전'해서 힘을 기르며 때를 노리던 차에,마침 중국이 혼란기로 접어들자 대동강유역의 비옥한 토지를 바탕으로 국력을 기를 속셈으로 낙랑,대방의 일망타진에 나선 것이 분명해서 논란의 여지도 없어 보입니다.
루크레티아
09/09/11 13:47
수정 아이콘
happyend님//흠...낙랑군의 위치를 대동강 유역으로 보고 계셨군요. 저는 요동 지역으로 보고 있는데, 과연 어떻게 밝혀질지..전 고조선의 중심지와 강역이 결코 한반도가 중심이 아니었다고 믿고 있거든요.(굳이 따지자면 지금의 평안북도 정도는 되야지, 황해도와 평남까지 내려올 리가 없다고 봅니다.) 한 4군이 한반도 내에 있었다는 걸 도통 믿을 수가 없네요.
귀염둥이
09/09/11 14:05
수정 아이콘
루크레티아님// 일단 임나일본부설이 헛소리인건 당연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의 출저가 일본서기이게 때문에 못믿는다는 논리는 맞지 않습니다. 일본서기가 역사로망판타지물이 아니라, 이것저것 다적어 놓은 좀 특이한 역사서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이기록, 저기록, 이문헌, 저문헌, 뜬소문 하여튼 다 적어놓은 그런 역사서죠.

우리나라 역사서라면 보통 하나의 사건에 대해서 여러가지 기록이 남아있다면 가장 확실하다고 생각되는 하나의 기록만을 역사서에 적는것이 보통인데, 일본서기는 기록이 10개면 그걸 하나하나 다 적어놨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떤인물의 태어났다가 죽고 다음에 또 태어나고 그런식이죠. 거기다 각종 신변잡기적인 기록도 다 적어놨으니 더 이상해지는거고요.

일본서기는 거기서 진짜배기를 건져내기가 아주 어려운 것이지, 기록자체가 다 허구는 아닙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일본서기를 제대로 공부하신 분은 몇분 안됩니다. 그렇게 깔만큼 알고있는 사람도 몇명없습니다.
귀염둥이
09/09/11 14:07
수정 아이콘
Siriuslee님// 그 반대일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헤피앤드님 말씀처럼 지금은 김해가 내륙입니다만, 당시엔 바다였죠. 오히려 그 당시해안선을 그려본다면 지금 바다인곳이 당시엔 육지라기보다, 지금 육지인곳이 당시엔 바다인 곳이 더 많을겁니다.
귀염둥이
09/09/11 14:09
수정 아이콘
그리고 주제로 제시한것이 2개인데 그중 하나가 가야인데, 지금 가야에 대해서 남은 기록이라곤 국내기록은 삼국유사에 가락국기 약간 있는거 뿐입니다. 가야에 대해서 가장 많이 기록된 문서가 일본서기입니다. 일본서기는 허구니까 다 무시하자는 논리라면 가야사에 대해서 논할 것은 고고학적 자료말곤 거의 남는게 없습니다.
Siriuslee
09/09/11 16:20
수정 아이콘
귀염둥이님// 반대일 가능성도 있죠. 그렇지만 지금 우리가 확인 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그냥 상상력을 확장한다는 생각으로 가능성을 열어두자는 것이죠.

학계야 뭐 그놈의 '고증' 때문에 지금의 '국사' 와 다른 이야기가 나와도 아무런 '물증'이 없기 때문에 인정하거나 연구하거나 하지 않을테니까요.

김부식 역시, 삼국사기를 편찬할때 자신이 모르는 지명이 많다고 했는데, 그때보다 무려 100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으로선 ^^
귀염둥이
09/09/11 16:25
수정 아이콘
Siriuslee님// 확인 가능하죠. 땅파서 지층조사만 해버리면 끝나는 문제입니다. 무슨 역사왜곡을 위해서 유적을 어떻게 한다던가 이건 가능할지 몰라도 그지역의 모든 지층과 지질조사를 다 조작할 수 도 없는 노릇이고요. 전혀 가능성이 없는 가설입니다.신석기와 청동기 시절은 분명 지금보다 해수면이 많이 낮았던것 맞습니다. 서해가 육지던 시절이 있었죠.
근데 그이후는 아닙니다.

그리고 그놈의 고증이 아니라, 증명되지 않으면 당연히 역사가 될 수 없는 노릇이죠. 극단적으로 어떤 문명의 증거자료를 특정집단이 모두 없애버려서 하나도 안남았다면, 역사가 아닌 겁니다. 할 수 없는 노릇이죠.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을 도대체 뭘로 연구를 하실겁니까? 문헌자료든 고고학적 자료든 뭐든 하나가 있어야 가설을 세우고 그 가설을 발달시키는데, 아무것도 없는데
뭘로 하실겁니까? 전설이나 신화만큼의 가치도 없습니다.
당신의조각들
09/09/11 23:01
수정 아이콘
Clostridiumbotulinum님// 아! 그렇군요. 신라의 삼국통일의 정당성을 논하려고 한 말이었군요. 뭔가 명분이 필요했던건가..
그 당시 나라가 조금 어지러워서 그런 말이 나온걸까요? 위정자들의 향락과 방탕한 생활로 인해서 나라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었던 시기라..

루크레티아님// 그렇군요. 음.. 임나 일본부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관계로 일단 패스 하겠습니다.
천천히 다시 정독하고 자료를 찾아봐야겠네요. 과제 때문에 시간이 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그런데, 저도 귀염둥이님의 말씀에 조금 공감이 가는 것이, 『일본서기』를 마냥 허구로만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일부 과장된 부분이나 왜곡된 부분은 있어도, 연구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happyend님// 부여가 동부여로 나누어진 후라면.. 이미 국력이 많이 기운 이후 아닌가요?
그런 상태에서 낙랑군과 대치할 만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기에는.. 흐음, 전 잘 모르겠습니다.
역시 이것도 더 찾아보고 관련자료를 읽어보고 해야 할 것 같네요.

답변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질문할 내용을 다듬고 정리해서 한번 더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밤 되세요~
루크레티아
09/09/11 23:10
수정 아이콘
일본서기는 제가 잘 아는 교수님이 말씀하신 것이라(그분도 항상 '일본서기는 판타지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줄 알았는데 확실히 귀염둥이님 말씀처럼 가야사가 그처럼 상세히 적혀있다면 다시 볼 만한 책이로군요. 그래도...전 일본서기의 허구가 더 많다고 생각하는지라 딱히 일본서기를 신빙성이 강한 자료로 해석하긴 좀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귀염둥이
09/09/14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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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크레티아님// 당시 모든 사서는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 태반입니다. 일본서기가 다른사서보다 더 심한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정도로 심한것은 또 아닙니다. 아마도 허구가 더 많지 않은 사서를 찾기가 더 어려울 것이고, 또한 뭐가 허구이고 뭐가 사실인지 판가름하기도 매우 어렵습니다. 일본서기뿐만아니라 당시에 서술된 다른 역사서들 까지도 말이죠. 일본서기가 가야사에 대해서 아주 상세하다기 보다(어느정도는 맞는 말입니다. 특정시기만 기록만 보면 일본서기에 일본에 관련된내용보다 가야에 관련된 부분이 훨씬 더 많이 적힌 부분도 많습니다.) 그거말고 남은 기록이 거의 없습니다. 삼국유사에 아주 조금, 중국 삼국지에 또 조금... 그리고 일본서기 이게 사실상 현재 남아있는 가야에 대한 모든 기록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현재 남아있는 역사서 중에서 가야사에 대해서 가장 많이 서술되 있는 역사서가 일본서기임은 부인할 수 없죠.

일본서기는 판타자라기 보다 이것 저것 다 섞인 잡스러운 역사책이라고 보면 될것입니다. 일본역사가들 조차 여기서 뭘 건지고, 뭘 빼야할지 쉽게 결정을 못하죠. 사실 일본서기는 판타지다. 여기나와있는건 다 거짓이다. 라는 인식자체가 편견이고 잘못된 선입견이죠. 가야사를 비롯해서 고대사를 연구하시는 분들 중에서 일본서기를 그렇게 바라보시는 분들은 제가 알기론 안게십니다. 제야사학계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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